1. Early life and education
이하라 마사미는 1967년 9월 18일 시가현 고카시의 옛 고카군 미나쿠치정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형이 뛰던 기오가와 축구 소년단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갑서시립 미나쿠치 중학교를 거쳐 시가현립 모리야마 고등학교에 진학했으며, 고등학교 시절인 1984년에는 전국 고등학교 축구 선수권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쓰쿠바 대학에 입학하여 축구부에서 활동했다.
대학 진학 전 월드 유스 선발팀 셀렉션에 발탁되었는데, 당시 포워드였던 그는 디펜더 포지션에 빈자리가 있다는 권유를 받아 디펜더로 전향하게 되었다. 쓰쿠바 대학 재학 중인 1986년과 1987년에는 간토 리그와 총리대신배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했다. 특히 대학 2학년 때 일본 국가대표팀에 선발되기도 했다. 쓰쿠바 대학 시절, 그는 나중에 일본 국가대표팀의 상징적인 공격수가 되는 나카야마 마사시와 함께 센터백 콤비를 이뤘으며, 두 선수는 유스 대표팀에서도 센터백을 맡는 등 공사 양면으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2. Playing career
이하라 마사미는 1990년대 J리그의 대표적인 선수로, 대부분의 선수 경력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서 보냈다. 그는 수비의 핵심이자 상징으로 자리매김했으며, 은퇴 후 지도자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2.1. Club career
이하라 마사미는 1990년 쓰쿠바 대학을 졸업한 후 닛산 자동차 축구부(현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 입단하여 선수 경력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보란치로도 뛰었으나 주로 디펜더로 활약했다. 1991-92 시즌과 1992-93 시즌에는 천황배와 AFC 컵위너스컵에서 연이어 우승하며 팀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1993년 5월 15일 J리그 개막전인 베르디 가와사키와의 경기에서 J리그에 데뷔했으며, 같은 해 5월 29일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전에서는 J리그 1호 자책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같은 해 J리그 올스타 축구 팬 투표에서는 미우라 가즈요시와 지코 등을 제치고 최다 득표를 얻으며 압도적인 인기를 증명했다. 1994년 5월 4일 베르디 가와사키와의 경기에서 J리그 첫 득점을 기록했다. 1995년에는 J리그 1st 스테이지 우승을 차지한 뒤, J리그 챔피언십 2차전에서 베르디 가와사키를 상대로 다이빙 헤딩골을 터뜨려 요코하마 F. 마리노스의 첫 J리그 연간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 닛산 자동차 시절부터 10시즌 동안 마리노스에서 활약하며 많은 일본 팬들에게 "미스터 마리노스"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며, 팀의 수비 핵심으로서 가와구치 요시카쓰와 나카무라 슌스케와 같은 젊은 선수들의 성장을 돕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1999년 시즌을 끝으로 마리노스와의 재계약이 불발되자, 코치직 제안을 거절하고 현역 생활을 이어가기 위해 2000년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다. 이와타에서 한 시즌을 보낸 후 2001년부터는 옛 국가대표팀 동료인 후쿠다 마사히로가 소속된 우라와 레즈로 이적했다. 2001년 5월 19일 감바 오사카와의 경기에서 이적 후 첫 골이자 현역 마지막 골을 기록했다. 2002년에는 2002년 FIFA 월드컵 조별 리그 조 추첨식에서 아시아 대표 추첨자로 참여하기도 했다. 2002년 J리그 마지막 경기인 친정팀 요코하마 F. 마리노스전에서 선발 풀타임 출전한 것을 끝으로 팀 동료인 후쿠다 마사히로와 함께 현역에서 은퇴했다. 이하라 마사미는 J리그 통산 297경기 5골을 기록했으며, JSL(일본 사커 리그) 기록까지 합치면 총 341경기 7골을 기록했다. 2004년 1월 4일에는 국립경기장에서 은퇴 경기가 열렸고, 이 경기에서 득점하기도 했다.
2.2. International career
이하라 마사미는 1990년대 일본 국가대표팀의 주장이자 일본 축구를 대표하는 수비수였다. 그의 통산 122회 A매치 출전 기록은 엔도 야스히토가 2012년 10월 16일 경신하기 전까지 일본 남자 축구 국가대표팀 역대 최다 기록이었다.
그는 쓰쿠바 대학 재학 중이던 1988년 1월 27일 아랍에미리트와의 친선 경기에서 A매치에 데뷔했다. 데뷔 이후 그는 1990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과 1990년 아시안 게임에서 주전 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밀려 1차 예선에서 탈락했다.
1992년에는 AFC 아시안컵에서 일본의 첫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조별리그 최종전인 이란전에서 경기 막판 미우라 가즈요시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의 토너먼트 진출을 도왔고, 결승전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94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에서는 1993년 5월 5일 1차 예선 스리랑카전에서 국가대표팀 첫 골을 넣는 등, 1차 및 2차 예선 모든 경기에 선발 풀타임 출전했으나, 아쉽게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이른바 "도하의 비극"을 경험했다. 1994년 아시안 게임 8강전인 대한민국전에서는 경기 막판 한때 동점을 만드는 인상적인 장거리 슈팅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1995년부터는 가모 슈 감독에 의해 국가대표팀 주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하차할 때까지 주장을 맡았다. 그는 1995년 킹 파흐드컵과 1996년 AFC 아시안컵에도 참가했다.
1998년 FIFA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에서는 고전 끝에 우즈베키스탄 원정에서 경기 종료 직전 로페스 와그너의 동점골을 어시스트하며 팀을 구했다. 최종전인 카자흐스탄전에서 국가대표 마지막 골을 기록하며 제3대표 결정전 진출에 기여했고, 이란과의 플레이오프에서 승리하여 일본의 사상 첫 월드컵 본선 진출을 이끌었다.
1998년 FIFA 월드컵 본선에서는 대회 직전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주장으로서 3경기 모두 선발 풀타임 출전했다. 그는 아키타 유타카, 나카니시 에이스케 또는 오무라 노리오와 함께 견고한 스위퍼 기반의 스리백 수비를 구축했다. 당시 가와구치 요시카쓰는 일본의 주전 골키퍼였다. 1998년 월드컵 이후, 그는 1999년 코파 아메리카에 참가했으며, 이 대회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였다. 이하라 마사미는 1999년까지 총 122경기에서 5골을 기록했다. 1999년 볼리비아와의 코파 아메리카 경기에서 후반 83분 두 번째 경고를 받아 퇴장당했고, 다음 경기 출장 정지 이후 필리프 트루시에 감독은 그를 다시 소집하지 않았다.
2.3. Playing style and evaluation
이하라 마사미는 "아시아의 벽"으로 불릴 정도로 견고한 수비를 자랑했다.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예리한 예측 능력, 그리고 상대 선수로부터 볼을 빼앗는 뛰어난 기술을 겸비하고 있었다. 또한 몸싸움에서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신체 능력을 바탕으로 격렬한 육탄전을 마다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경고를 받는 일이 드물었다.
나가시마 아키히로는 그를 J리그 역사상 최고의 디펜더로 평가했으며, 루이스 카를로스 페레이라 또한 당시 J리그 선수 중 최고의 디펜더로 이하라를 꼽았다. 일본과 한국 언론에서는 그와 홍명보 중 누가 아시아 최고의 리베로(수비형 미드필더)인지에 대한 비교가 활발히 이루어졌다.
그는 J리그 베스트 11에 1993년부터 1997년까지 5년 연속으로 선정되었으며, 1995년에는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1998년에는 마스터카드 20세기 아시아/오세아니아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또한 J리그 20주년 기념팀과 J리그 30주년 기념팀에도 선정되어 그의 위상을 다시 한번 확인시켰다. 2003년에는 J리그 공로 선수상을 수상했다. 아베 유키는 어린 시절 가장 좋아했던 선수로 이하라 마사미를 꼽기도 했다. 특히 그는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골을 기록한 유일한 일본 국가대표팀 선수라는 독특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3. Coaching career
이하라 마사미는 선수 은퇴 후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다가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지도자 경력은 일본 U-23 국가대표팀 코치로 시작하여 J리그 구단 감독직까지 이어졌다.
2006년 8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일본 U-23 국가대표팀의 보조 코치로 재직했다. 2009년에는 가시와 레이솔의 수석 코치로 부임했다. 같은 해 7월, 다카하시 신이치로 감독이 경질되자 후임 감독이 결정될 때까지 감독 대행을 맡았으며, 2013년에도 넬시뉴 감독이 사임 의사를 표명한 후 철회하기 전까지 천황배 한 경기를 지휘하는 등 총 두 차례 감독 대행을 수행했다. 2014년을 끝으로 가시와 레이솔과의 계약이 만료되어 팀을 떠났다.
2015년에는 아비스파 후쿠오카의 감독으로 취임하며 정식 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는 아비스파 후쿠오카를 이끌고 2015년 J2리그에서 24승 10무 8패를 기록, 82점을 얻어 3위를 차지하며 J1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플레이오프 결승전에서 세레소 오사카와 1-1로 비겼으나, 정규 시즌 순위가 더 높았던 아비스파 후쿠오카는 5년 만에 J1으로 승격했다.
2016년 시즌, 그는 5년 만에 J1 무대에서 팀을 지휘했으나, 1st 스테이지 2승 5무 10패, 2nd 스테이지 2승 2무 13패라는 부진한 성적으로 인해 1년 만에 다시 J2리그로 강등되었다. 2017년 시즌에는 J2리그에서 21승 11무 10패로 4위를 기록하여 다시 J1 승격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으나, 결승전에서 나고야 그램퍼스와 0-0으로 비겨 규정에 따라 J2리그에 잔류하게 되었다. 2018년 11월 17일, J2리그 마지막 라운드 FC 기후전 종료 후 기자회견에서 J1 승격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을 표명했으며, 11월 19일 아비스파 후쿠오카 공식 웹사이트를 통해 그의 퇴임이 발표되었다.
2018년 12월 13일, 이하라 마사미는 가시와 레이솔의 수석 코치로 복귀했다. 2022년 4월에는 아킬레스건 파열로 수술을 받은 넬시뉴 감독이 복귀하기 전까지 다시 감독 대행을 맡으며, 가시와 레이솔에서의 세 번째 감독 대행을 기록했다. 2023년 5월 17일, 팀의 성적 부진으로 넬시뉴 감독이 사임함에 따라, 이하라 마사미는 가시와 레이솔의 정식 감독으로 취임했다. 2023년 시즌 남은 기간 동안 7승 8무 2패의 성적을 기록하며 팀을 J1리그 17위로 이끌어 강등을 피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천황배에서는 결승에 진출했으나 가와사키 프론탈레에 승부차기 끝에 아쉽게 패했다. 2024년 시즌에도 감독직을 이어받아 팀의 J1 잔류를 이끌었으나, 시즌 종료 후 감독직에서 물러났다.
4. Post-retirement activities
선수 은퇴 후 이하라 마사미는 축구계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그는 NHK 축구 해설가로 활동하며 축구 팬들에게 경기를 분석하고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TBS 라디오 프로그램 "스포츠 밤버!(Sports BOMBER!)"의 진행자(2003년 하반기 목요일 담당)로도 활약했다. 일본 축구 협회의 JFA 앰배서더로서 일본 축구의 발전을 위한 홍보 활동에 참여했으며, 비와코 세이케이 스포츠 대학교의 객원 교수로도 재직했다.
공공광고기구(현 AC 재팬)의 골수은행 도너 등록 캠페인(2005년)에 참여하여 직접 골수은행에 등록하는 등 사회 공헌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2005년에는 대한민국의 홍명보와 함께 한일 축구 친선 대사로 선정되어 양국 간의 축구 교류와 우호 증진에 기여했다. 2006년 4월에는 JFA 공인 S급 코치 라이선스를 취득하며 지도자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그는 일본 각지에서 소년 축구 교실에 참여하는 등 축구 보급에도 힘썼다.
2025년부터는 다시 NHK의 축구 해설가로 복귀하여 "J리그 타임"에도 출연할 예정이다.
5. Statistics
이 섹션에는 이하라 마사미의 클럽, 국가대표팀, 감독 경력에 대한 자세한 통계가 포함되어 있다.
5.1. Club statistics
클럽 | 시즌 | 리그 | JSL컵 / J리그컵 | 천황배 | 기타 공식전 | 총합 | ||||||||
---|---|---|---|---|---|---|---|---|---|---|---|---|---|---|
디비전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경기 | 득점 | ||||
닛산 자동차 / 요코하마 마리노스 | 1990-91 | JSL 1부 | 22 | 2 | 4 | 0 | 6 | 0 | 32 | 2 | ||||
1991-92 | 22 | 0 | 3 | 0 | 7 | 0 | 32 | 0 | ||||||
1992 | J1리그 | - | 8 | 0 | 5 | 0 | 1 | 0 | 14 | 0 | ||||
1993 | 32 | 0 | 0 | 0 | 1 | 0 | 0 | 0 | 33 | 0 | ||||
1994 | 41 | 1 | 2 | 0 | 4 | 0 | 4 | 0 | 47 | 1 | ||||
1995 | 47 | 1 | - | 2 | 0 | 3 | 1 | 52 | 2 | |||||
1996 | 29 | 1 | 13 | 0 | 1 | 0 | 2 | 0 | 45 | 1 | ||||
1997 | 22 | 0 | 0 | 0 | 2 | 0 | 0 | 0 | 24 | 0 | ||||
1998 | 27 | 0 | 0 | 0 | 1 | 0 | 0 | 0 | 28 | 0 | ||||
1999 | J1리그 | 25 | 0 | 6 | 0 | 3 | 0 | 0 | 0 | 34 | 0 | |||
총합 | 267 | 5 | 36 | 0 | 19 | 0 | 23 | 1 | 345 | 6 | ||||
주빌로 이와타 | 2000 | J1리그 | 20 | 1 | 3 | 0 | 0 | 0 | 1 | 0 | 24 | 1 | ||
우라와 레즈 | 2001 | J1리그 | 26 | 1 | 6 | 0 | 4 | 0 | 0 | 0 | 36 | 1 | ||
2002 | 28 | 0 | 9 | 1 | 0 | 0 | 0 | 0 | 37 | 1 | ||||
총합 | 54 | 1 | 15 | 1 | 4 | 0 | 0 | 0 | 73 | 2 | ||||
커리어 통산 | 341 | 7 | 54 | 1 | 23 | 0 | 24 | 1 | 442 | 9 |
5.2. International statistics
국가대표팀 | 연도 | 경기 | 득점 |
---|---|---|---|
일본 | 1988 | 5 | 0 |
1989 | 11 | 0 | |
1990 | 6 | 0 | |
1991 | 2 | 0 | |
1992 | 11 | 0 | |
1993 | 15 | 2 | |
1994 | 9 | 1 | |
1995 | 16 | 1 | |
1996 | 13 | 0 | |
1997 | 21 | 1 | |
1998 | 10 | 0 | |
1999 | 3 | 0 | |
총합 | 122 | 5 |
국가대표팀 득점 기록
득점 기록은 일본의 득점을 먼저 나열하며, 점수 열은 이하라의 각 득점 후의 점수를 나타낸다.
5.3. Managerial statistics
팀 | 부임 | 해임 | 기록 | 컵대회 | |||||
---|---|---|---|---|---|---|---|---|---|
G | W | D | L | 승률% | J리그컵 | 천황배 | |||
가시와 레이솔 | 2009 | 2009 | 2 | 0 | 1 | 1 | 0.0% | - | - |
아비스파 후쿠오카 | 2015 | 2018 | 181 | 77 | 47 | 57 | 42.54% | - | - |
가시와 레이솔 | 2023 | 2024 | 78 | 21 | 25 | 32 | 26.92% | - | - |
총합 | 261 | 98 | 73 | 90 | 37.55% | - | - |
6. Honours and achievements
이하라 마사미는 선수와 감독으로서 수많은 개인 및 팀 타이틀을 획득하며 일본 축구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선수
- 천황배: 1991, 1992
- J1리그: 1995
- AFC 컵위너스컵: 1991-92, 1992-93
- 일본 슈퍼컵: 2000
- AFC 아시안컵: 1992
개인
- 아시아 올해의 축구 선수: 1995
- J리그 베스트 11: 1993, 1994, 1995, 1996, 1997
- 일본 사커 리그 신인상: 1990-91
- 마스터카드 20세기 아시아/오세아니아 팀: 1998
- J리그 공로 선수상: 2003
- J리그 20주년 기념팀
- J리그 30주년 기념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