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background
1.1. Birth and family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1489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타가키 노부야스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은 1543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의 정확한 출생지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그는 일찍부터 무장으로서의 길을 걸었다.
1.2. Early service under Takeda Nobutora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케다 노부토라 시대부터 다케다 가문의 숙장(宿将)으로서 활약했다. 그는 노부토라의 가로(家老)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관직명은 스루가노카미(駿河守)였다. 1540년(덴분 9년) 4월, 노부토라의 명령을 받아 시나노국 사쿠군 침공에 참전하여 오이 사다타카가 지배하던 우스다성과 이리사와성을 비롯한 10여 개의 적성(敵城)을 함락시키는 큰 전공을 세웠고, 이후 마에야마성에 주둔했다. 이 기록은 그의 초기 군사 활동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출현으로 남아 있다.
2. Military career
2.1. Service under Takeda Shingen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1541년 6월 14일, 다케다 신겐이 부친 다케다 노부토라를 스루가국으로 추방하고 가독(家督)을 잇자, 신겐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그의 핵심적인 가신(家臣)으로 자리매김했다. 『고료 군칸』(甲陽軍鑑)에 따르면, 신겐은 노부토라를 추방하는 과정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 두 사람에게 크게 의지했다고 한다. 『가이코쿠시』(甲斐国志)에서는 신겐이 가독을 계승한 후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가 다케다 가문 내 최고 직책인 '료시키'(両職)에 임명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신뢰할 만한 사료에서는 이 사실이 직접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케다 가문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부여받으며 신겐을 대신하여 자주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전하는 등, 신겐의 주요 군사 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또한 그는 신겐의 후견인이자 교육자로서 젊은 신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2.2. Conquest of Shinano Province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케다 신겐의 주요 전역에서 선봉에 서며 시나노국 정복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542년 7월, 신겐이 스와군을 침공하여 스와 요리시게를 멸망시키자,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카토 요리쓰구 공격의 중심에서 활약했다. 같은 해 9월, 스와 가문 종가직을 노리던 다카토 요리쓰구가 후지사와 요리치카와 결탁하여 스와군을 침공하고 우에하라성을 함락시켰다. 이에 신겐은 즉시 노부카타를 선봉으로 한 구원군을 파견했고, 노부카타는 안코쿠지 전투에서 요리쓰구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러한 공적으로 1543년 4월, 신겐은 노부카타를 스와 군다이(郡代, 또는 郡司)에 임명하여, 스와 지역의 실질적인 통치를 맡겼으며, 이듬해 5월에는 우에하라성을 정비하고 그곳에 입성하게 했다. 노부카타는 스와와 사쿠 두 군에 걸쳐 판물(判物)에 의한 소령(所領) 할양을 미리 행하기도 했으나, 이는 나중에 재안도(再安堵)된 점으로 보아 임시적인 약속으로 여겨진다.
1545년, 신겐이 다카토성을 공략하여 다카토 요리쓰구가 몰락했다. 이어서 신겐은 다시 반기를 든 후지사와 요리치카의 후쿠요성을 공격했으나, 요리치카는 시나노의 수호(守護) 오가사와라 나가토키와 연합하여 저항했다. 이때 노부카타는 후지사와 씨와 오가사와라 씨에게 가담한 류가사키성을 공략하여 함락시켰고, 고립된 요리치카는 결국 항복했다. 『고료 군칸』에 따르면, 노부카타는 승리 후 오가사와라 세력을 추격하다가 불의의 기습을 받아 패배하기도 했으나, 신겐은 그가 후속 부대에 피해를 주지 않고 버텨낸 것을 칭찬했다고 한다.
1547년 윤(閏) 7월, 신겐은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이끄는 스와 군사들과 함께 대군을 이끌고 사쿠군을 침공하여 가사하라 기요시게의 시가성을 포위했다.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는 가나이 히데카게에게 서(西)우에노 군사들을 이끌고 구원군을 파견했다. 신겐은 노부카타와 아마리 도라야스에게 별동대를 편성하여 이를 요격하게 했다. 8월 6일, 노부카타는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간토 간레이의 군대를 격파하여, 적장 14~15명과 병사 3,000명을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구원의 희망을 잃은 시가성은 함락되었고, 신겐은 이로써 사쿠군 평정을 완료했다. 이 시기에 그는 스루가국의 이마가와 요시모토와 사가미국의 호조 우지야스와의 동맹 협상에도 중신으로서 참여하는 등, 다케다 가문 내에서 그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보여주었다.
2.3. Later years and arrogance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수많은 전공을 세우며 승승장구했지만, 그 과정에서 점차 오만해지고 독단적인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전투에서 완전히 승리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으로 승전식(勝鬨式)이나 수급 검시(首実検)를 거행하는 등 안이한 모습을 보였고, 이러한 그의 행동은 다케다 신겐의 눈에 띄게 되었다. 다케다 가신들 중 최고 연장자이자 신겐의 교육자였던 노부카타를 공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신겐은 노부카타의 이러한 태도를 간접적으로 훈계하고자 했다. 1547년 시가성 포위 작전 중 무라카미 씨와의 전투에서 노부카타의 부대가 거의 전멸할 위기에 처했으나, 하라 도라타네의 적시 구원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사건이 있었다. 신겐은 이 사건을 계기로 노부카타에게 다음과 같은 와카(和歌)를 보내 그의 행위를 넌지시 꾸짖고 스스로를 바로잡도록 격려했다.
:誰もみよ、満つればやがて欠く月の 十六夜ふ空や、人の世の中아무도 보라, 차오르면 이내 기울기 시작하는 달을, 이지러진 보름달이여, 이 세상 사람의 삶도 이와 같으니.일본어
이는 "모두가 보듯이 아름다운 보름달도 시간이 지나면 이내 이지러지기 시작하고 작아진다. 우리 인간의 삶 또한 마찬가지이다"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노부카타의 마인지(馬印)가 '초승달'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신겐은 이 와카에서 노부카타를 달에 비유하며 그의 교만함을 훈계했음을 알 수 있다.
2.4. Death at Battle of Uedahara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오만함은 결국 그의 최후를 재촉했다. 1548년 2월, 다케다 신겐은 무라카미 요시키요를 토벌하기 위해 고가타군(小県郡)으로 출진했고, 2월 14일 우에다하라 전투가 발발했다. 이 전투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선봉을 맡아 초전(初戦)에는 무라카미씨 군대를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승리에 도취되어 긴장이 풀린 나머지, 전열에서 이탈하여 독단적으로 승전식과 수급 검시를 시작하는 실책을 범했다. 이때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군대는 전열을 재정비하여 맹렬하게 반격에 나섰고, 방심한 노부카타는 말에 오르려던 순간 적병의 창에 찔려 전사했다. 이 전투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 외에도 아마리 도라야스, 사이가와치노카미(才間河内守), 하츠시카 덴에몬(初鹿伝右衛門) 등 다케다 가문의 주요 장수들이 함께 전사하며 다케다 군은 큰 패배를 겪었다.

일설에는 후퇴하던 무라카미 군을 노부카타의 부대가 너무 깊이 추격하다 고립되었고, 반격에 나선 무라카미 군의 장수 가미조 오리베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이설도 전해진다. 노부카타는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은 사세구(辞世)를 남겼다고 전해진다.
:飽かなくも、なほ木のもとの夕映えに、月影宿せ花も色そふ아직도 아쉬운가, 나무 아래 석양에, 달빛이 머물러 꽃도 색을 더하는구나.일본어
노부카타의 법명(法名)은 노부카타 소쿤(信方宗薰일본어)이다.
3. Character and cultural activities
3.1. Personality and Shingen's admonition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탁월한 무공과 리더십을 지녔으나, 만년에는 점차 오만하고 독단적인 성향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전투에서 승리한 후 다케다 신겐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승전식(勝鬨式)이나 수급 검시(首実検)를 거행하는 등 안이한 행동을 자주 보였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 대해 신겐은 직접적인 질책 대신, 부드럽게 훈계하는 방식을 택했다.
1547년 시가성 포위전 당시 무라카미 씨와의 전투에서 노부카타의 부대가 전멸 위기에 처했다가 하라 도라타네의 구원으로 겨우 목숨을 건진 사건 이후, 신겐은 그에게 다음과 같은 와카(和歌)를 보내 자신의 행위를 되돌아보도록 촉구했다.
:誰もみよ、満つればやがて欠く月の 十六夜ふ空や、인의世の中아무도 보라, 차오르면 이내 기울기 시작하는 달을, 이지러진 보름달이여, 이 세상 사람의 삶도 이와 같으니.일본어
이 와카는 보름달이 차오르면 이내 기울어지듯이,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로 교만에 차면 쇠퇴할 수 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노부카타의 마인지(馬印)가 '초승달'이었던 점을 고려할 때, 신겐은 이 와카를 통해 노부카타의 교만함을 은유적으로 경고한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고료 군칸』(甲陽軍鑑)과 『명장언행록』(名将言行録)에는 노부카타의 충성심과 인품을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젊은 신겐(당시 하루노부)이 시회(詩會)나 유흥에 빠져 방종한 생활을 할 때, 노부카타는 병을 핑계로 30일간 휴가를 얻어 집으로 돌아갔다. 다시 출사한 노부카타는 신겐의 시회에 참석하여 다섯 번이나 훌륭한 시를 써서 보였다. 신겐이 어디서 배웠느냐고 묻자, 노부카타는 "주군이 즐기는 것을 신하가 하지 않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여 휴가 기간 동안 승려에게 배웠습니다"라고 답했다. 신겐이 기뻐하자, 노부카타는 곧바로 "부친께서는 비도가 지나쳐 추방당하셨는데, 겨우 3년도 지나지 않아 이러한 모습이시라면 노부토라님 이상의 악대장입니다. 화가 나시면 저를 처벌하십시오. 저는 언제든지 말 앞에서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라고 강하게 간언했다. 신겐은 이 말에 감격하여 눈물을 흘렸고, 이후로는 훌륭한 대장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3.2. Cultural sophistication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뛰어난 무인인 동시에 문인으로서도 상당한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그는 와카(和歌) 창작에 능했고, 다양한 문학적 활동에 참여했다.
특히 1547년, 와카의 대가인 레이제이 다메카즈가 가이국을 방문했을 때, 노부카타는 가카이(歌会, 와카를 짓고 발표하는 모임)를 주최하고 그 모임을 이끄는 주장(主張)이 되기도 했다. 또한 같은 해 7월, 교토의 귀족인 요쓰쓰지 스에토오가 가이국과 스와군을 차례로 방문했을 때도, 노부카타는 우에하라성에서 그를 맞아 접대하고 스와타이샤를 안내했으며, 이후에도 가카이를 개최하는 등 문학적 교류를 이어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활동은 그의 깊이 있는 문화적 소양을 잘 보여준다.
4. Personal life and descendants
4.1. Family relations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가문은 이타가키 가네노부를 시조로 하며, 가이 겐지이자 다케다씨 당주인 다케다 노부요시를 뿌리로 한다. 그의 부친은 이타가키 노부야스이며, 모친은 1543년 8월 23일에 사망했다.
노부카타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남은 이타가키 노부노리(板垣弥次郎信憲)로, 노부카타 사후 가독(家督)을 이었으나, 행실이 좋지 못해 다케다 신겐에 의해 다케다 가문에서 추방당하고 나중에 처형되었다. 둘째 아들인 사카요리 마사미쓰(酒依昌光)는 사카요리(酒依) 씨를 계승하여 후일 도쿠가와 가문을 섬겼다. 셋째 아들인 이타가키 노부히로(板垣信廣)는 노부카타 사후 고즈케국으로 옮겨가 정착했으며, 그의 후손들은 대대로 명주(名主)로서 번성했다.
노부카타에게는 딸도 있었으며, 그녀의 남편인 이타가키 노부야스(板垣信安, 사쿄노스케)는 오소(於曾) 씨 출신으로, 노부노리의 실각으로 단절될 위기에 처했던 이타가키 가문의 적류(嫡流)를 1558년 다케다 신겐의 명에 따라 재흥시켰다. 이로써 갑斐 이타가키 씨의 적류가 이어지게 되었다.
4.2. Descendants, including Itagaki Taisuke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직계 후손 중에는 메이지 시대의 저명한 정치인이자 자유민권 운동의 주역인 이타가키 다이스케가 있다. 그는 노부카타로부터 12대손에 해당한다.
노부카타의 장남인 이타가키 노부노리가 가독을 이었으나, 좋지 못한 행실로 인해 다케다 신겐에 의해 추방되고 결국 처형당하면서 이타가키 가문의 적류(嫡流)는 한때 단절되었다. 하지만 그의 손자인 이타가키 마사노부(板垣正信)가 1590년(덴쇼 18년), 엔슈 가케가와에서 야마우치 가즈토요에게 등용되면서 이누이 가즈미(乾和三)의 성(姓)을 하사받아 '이누이(乾)' 성을 사용하게 되었다. 이후 이누이 가문은 대대로 도사 번의 야마우치 가문을 섬겼다.
이타가키 다이스케는 이 이누이 가문의 후손으로, 노부카타의 장남 노부노리의 계보를 이은 10대손에 해당한다. 그는 보신 전쟁 중이던 1868년(게이오 4년) 2월, 미노국 오가키에서 자신의 조상이 이타가키 노부카타의 자손임을 밝히며 본래의 성인 '이누이'에서 '이타가키'로 복성(復姓)했다. 이로써 이타가키 가문의 이름은 역사에 다시금 크게 각인되었다. 한편, 노부카타의 딸과 혼인한 이타가키 노부야스는 1558년 신겐의 명으로 이타가키 가문을 재흥시켜, 이후 갑斐 이타가키 씨의 적류가 되어 다케다 씨 멸망 후에는 사나다 마사유키를 섬기다가 가가번의 번사(藩士)가 되었다.
5. Legacy and reception
5.1. Historical evaluation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케다 가문의 주요 숙장(宿将)이자 다케다 24장, 그리고 다케다 사천왕 중 한 명으로 센고쿠 시대에 걸출한 무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다케다 노부토라를 섬기며 군사적 기반을 다졌고, 다케다 신겐의 가독 계승 이후에는 가신단(家臣団)의 필두(筆頭)로 부상하여 다케다 가문의 최고위 직책인 '료시키'(両職)에 임명되기도 했다.
특히 시나노국 정복 과정에서 보여준 그의 군사적 역량은 탁월했다. 그는 스와 군다이로서 스와 지역의 통치를 담당하며 스와군(諏訪衆)을 이끌고 수많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다케다 가문이 시나노 국을 장악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숙련된 전술가이자 전략가로서 그의 능력은 당대에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만년에는 오만함과 독단적인 행동으로 신겐의 훈계를 받았으며,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선봉에 서서 무라카미 군을 격파했음에도 불구하고, 방심하여 무모하게 승전 의식을 거행하다가 역습을 받아 전사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이러한 최후는 그의 교만함이 부른 결과로, 그의 군사적 재능만큼이나 그의 인품적 결함이 함께 역사에 기록되었다. 그의 죽음은 다케다 가문의 큰 손실이었으며, 이후 다케다 신겐이 더욱 신중한 태도를 취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5.2. Depiction in fiction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그의 드라마틱한 생애와 다케다 신겐과의 관계 덕분에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매력적인 인물로 묘사되어 왔다.
그의 가장 잘 알려진 묘사 중 하나는 NHK의 2007년 대하드라마 『풍림화산』이다. 이 드라마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배우 치바 신이치가 연기했으며, 원작 소설과 마찬가지로 보다 영웅적으로 그려졌다. 그는 젊은 다케다 하루노부(신겐)의 오만함을 제어하려 노력하고,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하루노부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자신을 희생하는 선택을 하는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 외에도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다음 작품들에서 등장했다.
- 영화
- 『풍림화산』 (1969년, 도호, 나카무라 간에몬 3세 연기)
- TV 드라마
- 『하늘과 땅과』 (1969년, NHK 대하드라마, 오토모 류타로 연기)
- 『다케다 신겐』 (1988년, NHK 대하드라마, 스가와라 분타 연기)
- 『다케다 신겐』 (1991년, TBS, 와카바야시 고 연기)
- 『풍림화산』 (1992년, 니혼TV, 나츠야기 이사오 연기)
- 『풍림화산』 (2006년, TV 아사히, 나츠야기 이사오 연기)
- 『풍림화산』 (2007년, NHK 대하드라마, 치바 신이치 연기)
- 무대
- 『풍림화산』 (2008년, 치바 신이치 연기)
- 『세모가 찾아오고, 메이지자 대합전제』 (2018년, 나카무라 류스케 연기)
6. Related places
- 우에하라성: 나가노현 스와시에 위치한 이 성은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스와 군다이로서 머물렀던 곳이다. 성주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역은 그의 이름을 따 '이타가키 다이라'(板垣平)라고 불린다.
- 이타가키 노부카타 저택지: 야마나시현 고후시 야카타(屋形) 3초메 5번지 부근에 그의 저택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우에다하라 고전장: 나가노현 우에다시 우에다하라 지역은 그가 1548년 전사한 우에다하라 전투의 격전지이다.
- 이타가키 신사: 나가노현 우에다시 시모노조에는 이타가키 노부카타를 모시는 신사가 있다.
q=Yamanashi Prefecture|position=right
7. Genealogy
순번 | 인물 | 비고 |
---|---|---|
1 | 이타가키 가네노부 | 이타가키 가문의 시조 |
2 | 이타가키 요리시게 | |
3 | 이타가키 요리카네 | |
4 | 이타가키 유키요리 | |
5 | 이타가키 나가요리 | |
6 | 이타가키 사부로자에몬 | |
7 | 이타가키 시로 | |
8 | 이타가키 사부로 | |
9 | 이타가키 쇼케이 | |
10 | 이타가키 가네미쓰 | |
11 | 이타가키 젠만보 | |
12 | 이타가키 비슈 | |
13 | 이타가키 노부야스 | |
14 | 이타가키 노부카타 | |
15(①) | 이타가키 노부노리 | 노부카타의 장남 |
16 | 이타가키 노부야스 | 노부카타의 사위 (오소 씨 출신, 이타가키 가문 재흥) |
② | 이타가키 마사노부 | |
17 | 이타가키 스리노스케 | |
③ | 이누이 마사유키 | |
④ | 이누이 마사스케 | |
18 | 이타가키 한에몬 | |
⑤ | 이누이 마사카타 | |
19 | 이타가키 헤이에몬 | |
⑥ | 이누이 마사키요 | |
20 | 이타가키 도모사다 | |
⑦ | 이누이 나오타케 | |
⑧ | 이누이 마사아키라 | |
⑨ | 이누이 노부타케 | |
⑩ | 이누이 마사시게 | |
21 | 이타가키 노부키요 | |
⑪ | 이타가키 다이스케 | 이누이 마사시게의 아들 |
⑫ | 이타가키 모리마사 | |
⑬ | 이타가키 마사쓰라 | |
⑭ | 이타가키 다이타로 | |
이타가키 아키히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