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이석신은 20세기 초 한국의 학술적, 사회적 변화 속에서 성장하며 의학과 과학 분야에서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그의 생애는 국내외에서의 깊이 있는 학문 탐구와 한국 사회에 대한 봉사로 특징지어진다.
1.1. 유년기와 교육
이석신은 1897년 10월 6일 평안남도에서 이명세와 곡산 강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21년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를 졸업하고 같은 해 8월에 의사 면허를 취득하며 의료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뎠다. 졸업 후 그는 일본 도쿄제국대학에서 몇 달간 병리학을 공부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2. 해외 유학 및 초기 연구
도쿄에서의 연구를 마친 후, 이석신은 1922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베를린에 위치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대학교(현 훔볼트 대학교)에서 어학 교육과 화학 및 생리 화학 과정을 이수하며 심화 학습에 매진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학문적 역량을 크게 향상시켰고, 1926년에는 이 대학에서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의 박사 학위 논문인 Ueber Glykolyse위버 글리콜리제독일어는 혈액 글리콜리시스 과정 중 무기 인산염에 대한 연구를 다루었으며, 당시 베를린 대학교 병리학 연구소 화학과의 오토 루바르쉬(Otto Lubarsch)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다. 졸업을 앞둔 시점부터 1927년까지 이석신은 베를린 국립병원에서 연구 조교로 활동하며 활발한 연구 활동을 이어갔다. 이 시기에 그는 감광성 물질이 포도당 대사와 세포 호흡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며 국제 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1.3. 국내 학술 활동
1928년 2월, 이석신은 고국인 한국으로 돌아와 경성의학전문학교 연구 조교로 부임했다. 그는 한국인의 주요 식단이 신진대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며 한국인의 건강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후 그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과의 생리학 강사로 임명되었고, 동시에 이화여자대학교 의과대학의 영양학 겸임 강사로 활동하며 교육자로서의 역할도 수행했다. 특히 1932년, 이석신은 교토제국대학(현 교토대학교)에 제출한 논문 朝鮮人ノ習慣食ニ就テノ研究조선인노 슈칸쇼쿠니 쓰이테노 켄큐일본어를 통해 한국인 최초로 생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논문은 한국 죄수들의 영양 및 신진대사에 대한 연구를 담고 있었으며, 당시 경성제국대학의 사토 교수가 그의 지도교수 중 한 명이었다. 1933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의 생화학과 정교수로 임명되어 한국인 최초로 해당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는 세브란스에서 생화학과를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학생 담당 학장으로도 재직하며 교육 행정에도 기여했다.
2. 주요 연구 및 업적
이석신은 그의 짧은 생애 동안 한국 생화학 분야의 기틀을 다지고, 한국인의 건강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중요한 연구들을 수행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국제 학계의 최신 흐름과 맞닿아 있었으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성과를 발표했다.
2.1. 한국 생화학의 개척자
이석신은 한국인 최초로 생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정식 교수가 되면서, 한국에서 생화학을 새로운 학문 분야로 정립하고 그 기반을 다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존재는 한국 의학계에 생화학이라는 최신 학문의 중요성을 알리고, 후학들이 이 분야를 연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2.2. 주요 연구 분야
이석신의 연구는 크게 포도당 대사와 한국인의 식단 및 영양학 두 가지 핵심 주제로 나눌 수 있다.
2.2.1. 포도당 및 탄수화물 대사 연구
이석신의 학문적 여정은 독일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글리콜리시스에 대한 깊은 연구로 시작되었다. 1920년대 후반은 글리콜리시스 과정에서 인산화 화합물의 역할이 완전히 규명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의 연구는 중간 탄수화물 대사의 초기 측면을 다루었으며, 이는 훗날 오토 프리츠 마이어호프, 오토 하인리히 바르부르크, 한스 아돌프 크렙스와 같은 노벨상 수상자들의 연구 주제와도 밀접하게 연결되는 중요한 학문적 흐름의 일부였다.
2.2.2. 한국 식단 및 영양학 연구
한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이석신은 포도당 대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에 대한 관심을 지속하며 연구를 이어갔다. 그는 1928년부터 한국인의 주식과 그것이 신진대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연구를 발표하기 시작했다. 이 연구는 한국인의 주식에 포함된 영양 요소를 식별하고 정량화하는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으며, 일제강점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한국 어린이와 성인의 건강한 성장을 위한 영양학적 근거를 제공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열악했던 공중 보건 환경에서 한국인의 영양 상태 개선에 실질적인 도움을 주었다.
2.3. 학술 활동 및 저술
교수로서 이석신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육 활동 외에도 활발한 학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1935년부터 1937년까지 발행된 세브란스 연합 의학전문학교 학술지(The Journal of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의 편집에 참여했다. 짧은 학문적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러 언어로 최소 10편 이상의 과학 논문과 학술 기고를 단독 또는 공동으로 저술했다. 특히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의 광범위한 배급 제도로 인해 연구 환경이 매우 열악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굴하지 않고 꾸준히 연구에 매진하여 학술적 성과를 발표했다.
3. 사망
이석신은 1944년 12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향년 약 47세였다. 그의 죽음은 한창 연구에 매진해야 할 나이에 찾아온 안타까운 비극이었다.
4. 유산 및 평가
이석신은 한국 생화학의 태동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업적은 한국 과학사에 중요한 유산으로 남아있다.
4.1. 학술적 기여 및 기념
이석신의 학문적 업적은 사후에도 꾸준히 재조명되고 기려지고 있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생화학·분자생물학과는 2014년과 2016년에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기념하는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하여 그가 한국 생화학 발전에 기여한 바를 되새겼다. 또한 2015년에는 서울에 위치한 동은의학박물관에서 이석신 박사가 남긴 논문들을 포함한 특별 추모 전시회가 열려 그의 연구 자료와 학문적 유산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기회가 마련되었다.
4.2. 역사적 의의
이석신은 한국 과학사, 특히 생화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차지한다. 그는 단순히 지식을 전수하는 것을 넘어, 한국에 생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분야를 도입하고 정착시키는 데 결정적인 선구자 역할을 했다. 그의 포도당 및 탄수화물 대사 연구, 그리고 한국인의 식단과 영양학에 대한 연구는 당시 한국 사회의 건강 문제를 해결하고 공중 보건 향상에 기여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와 전시라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꾸준히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남긴 그의 발자취는 한국 과학 발전의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그의 업적은 오늘날까지도 한국 의학 및 생화학 연구의 초석으로 평가받으며, 그의 정신은 한국 과학자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5. 같이 보기
- 연세대학교
- 서울대학교
- 경성의학전문학교
- 생화학
- 영양학
- 포도당 대사
- 글리콜리시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