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이사의 생애는 초나라에서의 어린 시절부터 진나라에서 권력을 얻기까지의 과정, 그리고 이후의 정치 활동으로 나뉜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이사는 초나라 상채(上蔡, 현재의 허난성 주마뎬시 상차이현)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는 초나라 지방 행정에서 하급 관리(서기)로 일했다. 당시 그는 관청의 변소에 사는 쥐들이 더럽고 두려움에 떨며 살지만, 곳간에 사는 쥐들은 곡식을 배불리 먹고 사람이나 개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고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이사는 이를 통해 "사람의 능력이나 재능은 쥐와 같아서, 처해진 환경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사람의 가치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며, 쥐처럼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종종 주변의 무작위적인 사건에 의해 좌우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도덕률에 얽매이지 않고 당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정치를 직업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이는 전국 시대에 귀족 가문 출신이 아닌 학자들이 흔히 선택하던 길이었다.
이사는 초나라에서는 자신의 재능을 펼칠 기회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죽는 것은 자신뿐만 아니라 모든 학자에게 수치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이후 그는 유명한 순자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순자는 공자의 제자인 자궁의 문인이었으며, 이사의 동문으로는 한비가 있었다. 순자에게서 육경을 배운 이사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이루기 위해 당시 가장 강력했던 진나라로 향했다.
1.2. 진나라에서의 경력 시작
진나라에 도착한 이사는 당시 승상이었던 여불위의 식객이 되었다. 여불위의 추천을 통해 그는 훗날 중국을 통일하고 진시황이 되는 진왕 정을 만날 기회를 얻었다. 이사는 진나라가 매우 강력하지만, 만약 다른 여섯 나라들이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한다면 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자신의 견해를 진왕에게 피력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중국 통일 방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사의 제안을 받아들인 진왕은 많은 비용을 들여 지식인들을 진나라로 유인하고, 다른 나라의 중요한 학자들을 암살하기 위해 자객을 보냈다. 이사는 진왕 정의 명령으로 타국에 잠입하여 각국의 왕족과 장군들 사이를 이간질하는 계책을 사용하여 공적을 세웠고, 객경(客卿, 타국 출신 대신)으로 임명되며 순조롭게 출세했다.

기원전 237년, 진나라 조정 내 일부 세력이 첩보 활동을 막기 위해 모든 외국인을 추방할 것을 진왕 정에게 촉구했다. 초나라 출신인 이사 또한 이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었기에, 그는 진왕에게 외국인들이 진나라에 기여한 수많은 이점들을 설명하는 상소문인 『간축객서』를 올렸다. 이 상소문은 간결하고도 명문이었으며, 후대에 『문선』에도 수록될 정도로 높이 평가받았다. 진왕 정은 이사의 수려한 문장에 감동하여 추방령을 철회하고 이사를 승진시켰다. 같은 해, 이사는 진왕 정에게 인접한 한나라를 병합하여 다른 다섯 국가들을 위협하도록 촉구했다고 전해진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이사는 진나라의 통일과 중앙 집권 체제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정치적, 제도적, 사상적 측면에서 중대한 업적과 논란을 남겼다.
2.1. 중국 통일 과정에서의 역할
권력자 여불위가 자결한 후, 진왕 정의 이사에 대한 신뢰는 더욱 두터워졌다. 그러나 이사의 지위는 순자 밑에서 함께 배운 동문인 한비에 의해 위협받게 된다. 진왕 정은 과거 한비의 저작인 『한비자』를 읽고 "이 사람과 가까이 지낼 수 있다면 죽어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감탄하며 그의 사상에 심취했다. 만약 한비가 등용된다면 자신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라 생각한 이사는, 진왕에게 한비를 모략하여 투옥시켰고, 옥중에 있는 한비에게 독약을 주어 자살하게 만들었다(기원전 233년). 이처럼 경쟁 상대를 제거한 이사는 진나라의 부국강병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마침내 기원전 221년에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진왕 정은 진시황이 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한나라는 기원전 230년에 진나라에 의해 정복되었다.
2.2. 제도 및 문화 통일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승상 왕관과 어사대부 풍겁을 비롯한 중신들은 진시황에게 주나라의 제도인 봉건제를 채택하여 황제의 아들들을 각지의 왕으로 봉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사는 이에 맹렬히 반대하며 주나라가 멸망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대신 더욱 강력한 중앙 집권형 통치 제도인 군현제의 시행을 주장했다. 그는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고 통제하며, 지방관의 근무 태도나 비위 행위를 수시로 감찰하는 관리들을 파견할 것을 건의했다. 또한 왕의 형제나 친척에게는 명목상의 작위만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진시황은 이사의 주장을 받아들여 군현제를 시행했고, 이는 중국 통일 국가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사는 또한 국가 전반의 표준화 작업을 주도하여 진나라와 정복된 지역의 통합에 기여했다. 그는 법률, 정부 조례, 도량형, 화폐를 통일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더 나아가 그는 수레와 문자 사용을 표준화했다. 특히 진나라에서 이미 사용되던 소전체를 제국의 표준 서체로 공포하고, 진나라 서체 내의 변형된 글자들과 정복된 각 지역의 다양한 서체들을 금지했다. 이러한 문자 통일은 수천 년 동안 중국 문화에 지대한 통일 효과를 가져왔다. 그는 또한 봉건 국가들의 금속 무기들을 녹여 음악용 종과 대형 인물 동상으로 주조하게 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그는 세금을 낮추고 상앙의 사상에서 비롯된 가혹한 형벌을 완화하는 데도 기여했다고 한다.
2.3. 사상 통제와 분서갱유
진시황이 황제로 즉위한 후, 이사는 황제에게 지식인들의 반대 의견을 억압할 것을 설득했다. 이사는 의학, 농업, 예언에 관한 서적들은 무시할 수 있지만, 정치 관련 서적들은 일반 대중에게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는 수많은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학자들의 반대 없이는 국가의 진보와 변화가 어렵다고 믿었다. 그 결과, 오직 국가만이 정치 서적을 소유해야 하며, 오직 국가 운영 학교만이 정치 학자들을 교육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213년, 이사는 역사 기록과 문학 작품, 특히 국가 복지에 해롭다고 여긴 주요 유교 경전의 파괴를 명령하는 조서 초안을 직접 작성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과거의 일을 인용하여 현재의 황제를 비판하고 혼란을 야기하는 학자들의 행위를 막기 위함이었다. 이에 따라 실용적인 목적의 서적(의학, 점술, 농업 관련 서적)을 제외한 모든 사상 서적들을 불태우는 분서가 이루어졌다. 또한 기원전 212년, 진시황의 노여움을 산 방사들의 도주 사건을 계기로 죄를 지은 학자 수백 명을 체포하여 생매장하는 갱유가 자행되었다. 이 사건은 "분서갱유"로 불리며, 이 과정에서 460명의 유학자가 생매장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사는 이러한 사상 통제에 깊이 관여하여 많은 귀중한 역사 자료가 소실되고 지식인들이 희생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에서 후대 유학자들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다.
3. 사상과 철학
이사의 사상은 법가 사상을 핵심으로 하며, 그의 정치 철학은 진나라의 정책에 직접적으로 반영되었다.
3.1. 법가 사상
이사는 법가 사상, 즉 법치주의, 중앙 집권, 실용주의를 지지했다. 그는 법이 국가 통치의 유일한 기준으로 기능해야 한다고 믿었으며, 강력한 중앙 정부가 질서와 안정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보았다. 그의 사상적 기반은 법치주의였으며, 그는 생전에 스스로를 유학자로 자처했지만 사후에는 법가로 분류되었다.
이사는 행정 방식에 있어서 신불해와 한비의 사상을 존경하고 활용했다고 전해진다. 특히, 그는 상앙의 법률 사상을 따랐으며, 이를 통해 진나라의 엄격한 법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 이사는 법가 이론의 완성자로 불리는 한비와 달리, 법가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고 완성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지식인 계층의 반발을 억누르고 강력한 황제 중심의 전제적 통치를 확립하기 위해 사상 통제를 옹호했다.
3.2. 주요 사상가들과의 관계
이사는 순자의 문인으로, 동문으로는 한비가 있었다. 순자는 유학의 한 분파로 현실주의와 법치주의를 강조했는데, 이러한 순자의 사상은 이사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사는 순자에게서 배운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진나라의 부국강병을 위한 실용적인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이사와 한비의 관계는 비극적이었다. 한비는 이사와 함께 순자의 문하생이었으나, 그의 뛰어난 재능과 사상은 이사에게 위협으로 다가왔다. 이사는 한비를 시기하여 진시황에게 중상모략했고, 결국 한비를 옥중에서 자살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은 이사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동문까지 살해하는 비윤리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았음을 보여주며, 그의 실용주의가 때로는 잔혹한 수단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드러낸다. 이사의 사상적 기여는 그의 정책들이 진나라를 통일 국가로 만드는 데 필수적이었다는 점에 있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사상 탄압과 비인도적인 행위는 그의 철학적 유산을 복합적으로 만들었다.
4. 몰락과 죽음
이사는 진시황 사후 권력 투쟁의 중심에 서서 조고에게 배신당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4.1. 권력 투쟁과 몰락
기원전 210년 가을 7월, 진시황이 순행 도중 사구(沙丘)에서 병사하자, 이사는 최고 환관 조고와 함께 황제의 죽음을 은폐했다. 진시황의 유언은 태자 부소에게 후위를 잇게 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부소는 장군 몽염과 가까웠기 때문에, 부소가 즉위하면 이사가 몽염에게 승상 자리를 빼앗길 가능성이 높았다. 권력 상실을 두려워한 이사는 조고와 공모하여 진시황의 유언을 위조했다. 이사와 조고는 부소에게 자살을 강요했고, 진시황의 막내아들이자 어리석었던 호해를 후계자로 옹립했다.
혼란스러운 시기 동안, 조고는 새로운 황제인 호해를 설득하여 자신의 추종자들을 관직에 임명하며 권력 기반을 다졌다. 조고의 권력이 충분히 확고해지자, 그는 이사를 배신하고 반역죄로 고발했다. 조고를 스승으로 여겼던 호해는 그의 결정을 의심하지 않았다. 조고는 이사를 고문하여 죄를 인정하게 만들었고, 심지어 이사가 황제에게 보낸 탄원서까지 가로챘다. 이 시기 진승·오광의 난을 비롯한 반란이 잇따라 발생하여 국내는 대혼란에 빠졌으나, 어리석은 이세 황제는 사치와 유흥에 빠져 궁궐 밖 상황을 알지 못했다. 이에 이사는 우승상 풍겁과 함께 아방궁 건설 등 대규모 정책을 중단하도록 간언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풍겁은 결국 자살했다. 이사는 계속해서 간언했으나 오히려 황제의 노여움을 샀고, 조고의 간계로 더욱 궁지에 몰렸다. 이사의 장남이자 삼천군수였던 이유가 초나라 장군 항량의 군대와 내통했다는 죄목이 날조되어 이사에게 덮씌워졌다.
4.2. 처형
기원전 208년, 마침내 이사는 체포되었다. 잔혹한 고문에 견디지 못한 이사는 조고가 날조한 죄목(장남 이유가 초군과 내통했다는 죄)을 인정했다. 그는 옥에서 함께 잡힌 둘째 아들을 보며 "나는 너와 함께 다시 한번 누런 개를 끌고 상채 동쪽 문으로 나아가 토끼를 사냥하고 싶었건만, 이제는 그럴 수 없겠구나!"라고 말하며 비통해했다고 전해진다. 이 말을 마친 후 이사와 그의 둘째 아들은 소리 내어 울었다.
같은 해 7월, 이사는 함양의 시장 바닥에서 오형을 받고 요참형에 처해졌으며, 그의 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오형은 코를 베고, 귀를 자르고, 혀를 자르고, 발을 자르고, 채찍으로 때리는 형벌을 포함하며, 요참형은 수감자의 허리를 잘라 즉사시키지 않고 고통 속에서 죽게 하는 잔혹한 형벌이었다. 이사는 자신이 제정한 법에 따라 처형당하는 아이러니한 운명을 맞았다. 이사가 죽은 지 1년 후, 조고는 이세 황제에게 자살을 강요했으며, 진자영이 즉위했지만 결국 유방에게 항복하고 진나라는 멸망했다.
5. 유산과 평가
이사의 사후 그의 역사적 위상과 업적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5.1. 역사적 공과
이사는 중앙 집권적 관료 체제를 강력히 신봉했으며, 이는 진나라의 효율성과 군사적 통일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통일된 중국에서 도량형, 화폐, 그리고 소전체를 통한 문자 체계를 표준화하는 데 핵심적인 기여를 했다. 이러한 표준화는 수천 년 동안 중국 문화에 통일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사가 법가 이론의 완성자인 한비에 비해 법가 정치의 완성자로 평가받는 것은 이러한 실질적인 제도적 기여 때문이다.
그러나 이사는 한비를 모략하여 살해했고, 진시황의 유언을 위조하여 태자 부소를 죽이고 어리석은 호해를 옹립하는 권력 투쟁에 가담했다는 점에서 비판받는다. 특히 분서갱유를 주도하여 유학자들을 탄압하고 서적을 불태움으로써, 사상 통제와 지식 탄압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수많은 귀중한 역사적 자료를 소실시켰다는 점에서 후대에 크게 비난받는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사가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높은 관직과 녹봉을 지키기 위해 아첨하고, 황제의 권위를 높이고 형벌을 가혹하게 만들었으며, 간교한 조고의 말에 넘어가 장자를 버리고 차자를 세웠다고 비판했다. 또한, 사마천은 "이사가 만약 잘못된 길로 가지 않았다면 그 공적은 주공단과 소공석에 비견되었을 것"이라고 언급하며, 이사가 지닌 잠재적 위상과 실제 행적 사이의 비극적 괴리를 지적했다. 이사는 권력에 대한 욕망과 개인적 이득을 위해 비윤리적인 수단을 동원했고, 결국 이는 진나라의 급작스러운 멸망과 자신의 비극적인 최후를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5.2. 문학적 업적
이사는 뛰어난 문장력으로도 평가받는다. 그의 대표작인 『간축객서』는 문학적 가치가 매우 높은 명문으로, 후대에 『문선』에도 수록될 정도였다. 루쉰은 "진나라 시대의 문학 작품은 오직 이사의 작품만이 있을 뿐이다"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그는 진시황의 치세를 기리는 비문들을 남겼는데, 이는 당시의 문화적 경향과 이사의 문학적 역량을 보여준다.
6. 저작
이사가 남긴 주요 저작물과 비문들은 다음과 같다.
- 『간축객서』 (諫逐客書): 진시황에게 외국인 추방령 철회를 간언하기 위해 올린 상소문으로, 이사의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 『태산각석』 (泰山刻石): 진시황의 동쪽 순행을 기념하여 태산에 새긴 비문이다.
- 『낭야각석』 (琅邪刻石): 낭야대(琅邪臺)에 세워진 비문으로, 진시황의 업적을 기린다.
- 『역산각석』 (嶧山刻石): 역산에 세워진 비문이다.
- 『회계각석』 (會稽刻石): 회계산에 세워진 비문이다.
- 『진량』 (秦量): 도량형 통일에 사용된 표준 기구에 새겨진 명문이다.
- 『창힐편』 (蒼頡篇): 중국 최초의 언어 입문서(어린이용 교재)로 알려져 있으며, 단편적으로만 현존한다. 후대의 『창힐편』의 원형이 되었다.
- 『주사』 (奏事): 진나라 신하들의 문서를 모은 책으로, 이사의 글도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
이사의 저작들은 대부분 진시황의 업적을 기리고 그의 정책을 옹호하는 내용이지만, 동시에 당시 통일 진나라의 정치적, 문화적 상황을 이해하는 중요한 사료로도 평가받는다. 『간축객서』는 그의 문학적 가치를, 각석들은 통일된 문자의 형태를 보여주는 유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