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이비차 라찬의 생애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의 어려운 출생부터 크로아티아의 민주화와 유럽 연합 통합 과정을 이끈 정치적 리더십, 그리고 말년의 투병 생활에 이르기까지 격동적인 시대를 관통한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이비차 라찬은 1944년 2월 24일 나치 독일의 작센주 에버스바흐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마리야 드라제노비치(Marija Draženović마리야 드라제노비치크로아티아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그곳의 노동 수용소에 억류되어 있었다. 라찬과 그의 어머니는 드레스덴 폭격에서 살아남았는데,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의 지하에 며칠 동안 갇혀 있다가 구조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라찬은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슬라본스키 브로드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이후 자그레브로 이주하여 자그레브 대학교에 입학했고, 1970년 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부를 졸업했다.
1.2. 초기 정치 경력 (크로아티아 공산주의동맹 시대)
라찬은 1961년 크로아티아에서 크로아티아 공산주의동맹(SKH)의 일원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SKH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동맹(SKJ)의 크로아티아 지부였다. 그는 슬라본스키 브로드 김나지움에서 공산주의 청년 조직의 회장을 역임했다. 1963년부터 1974년까지 유고슬라비아 사회 연구소에서 노동자 자주 관리 주제를 연구했다.
1972년, 크로아티아의 봄 사건에 연루된 6명의 고위 관료들이 해임되면서 SKH 중앙위원회에 진입하게 되었고, 이를 계기로 그의 전문적인 정치 경력이 시작되었다. 그는 SKH 문화위원회 위원과 이데올로기 수석 위원장을 지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쿰로베츠에 있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정치 학교의 교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베오그라드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동맹 지도부에서 SKH를 대표하는 인물로 선출되었다.
1980년대 후반 반관료제 혁명 시기에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지지파와 반대파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1989년 가을 크로아티아 공산주의자들은 라찬을 SKH 대표로 선출했다. 이는 그가 밀로셰비치 체제가 폐지하려던 공화국 자치권을 옹호했기 때문이다.
라찬은 1990년 1월 말에 열린 제14차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동맹 당대회에서 크로아티아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 대회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지지파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대표단이 연방의 분권화를 목표로 하는 다양한 정치 개혁 및 헌법 개정 제안을 시도했으나, 이들은 지속적으로 부결되었다. 결국 슬로베니아 대표단이 대회 탈퇴를 선언했고, 밀로셰비치는 라찬에게 잔류를 설득하려 했으나, 라찬은 슬로베니아인 없는 공산당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변하며 크로아티아 대표단도 함께 이탈했다. 크로아티아 대표단마저 이탈하자 대회는 재개될 수 없었다.
1.3. 민주화 전환 및 야당 지도자 시절
라찬의 지도 아래 SKH는 1990년 2월 민주개혁당(Stranka demokratskih promjena스트란카 데모크라츠키흐 프로미예나크로아티아어, SDP)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후 1990년 총선에 SKH-SDP라는 이름으로 출마하여 26%의 득표율을 얻으며 우파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1990년 선거 운동 중 라찬은 HDZ를 "위험한 의도를 가진 정당"이라고 언급하여 일부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비록 그의 당이 선거에서 패배했지만, 사보르에서 두 번째로 큰 정당으로 남았고, 라찬은 현대 크로아티아 역사상 첫 야당 지도자로서 정치 경력을 이어갔다. 그는 1990년 5월 첫 다당제 선거 이후 1991년 7월 프라뇨 그레구리치가 국민통합정부를 구성할 때까지 야당 지도자 직책을 맡았다.
그러나 SKH-SDP는 빠르게 이전의 위상을 잃어갔다. 고위 관료를 포함한 당원 대다수가 HDZ로 이탈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체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의 반란, 그리고 1991년 발발한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크로아티아 대중을 더욱 급진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찬은 프라뇨 투지만의 통치에 도전하기보다는 자신의 당의 생존에 더 집중했으며, 이는 노동자 소유 기업의 국유화와 민영화 같은 투지만의 논란이 많은 정책들을 용인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찬은 야당 지도자 직함을 크로아티아 사회자유당(HSLS)의 드라젠 부디샤에게 넘겨주었다. 이후 SDP는 1992년 총선에서 간신히 의석 확보 기준을 통과했지만, 가장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성공했다. 1994년, SDP는 소수 정당인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SDH)을 흡수하며 HSLS와 함께 투지만에 대한 두 주요 대안 중 하나가 되었다. 같은 해, 크로아티아 사회민주행동(SDAH)의 의장이었던 미코 트리팔로가 모든 좌파 정당의 연합을 시도했으나, 라찬과 SDP 지도부는 이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SDP는 유일한 주요 좌파 정당으로 남게 되었다.
1995년 독립 전쟁이 끝난 후, 크로아티아 유권자들은 사회 문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SDP는 점진적으로 다른 야당, 특히 사회자유주의 성향의 HSLS를 희생시키면서 지지를 통합해 나갔다. 이는 1995년 총선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SDP는 1997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주요 야당의 지위를 확고히 했다.
2. 총리 재임 (2000-2003)
이비차 라찬은 2000년 총선 승리 후 크로아티아 총리로 취임하여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그러나 연정 내 갈등, 국제형사재판소(ICTY) 관련 문제, 슬로베니아와의 국경 분쟁 등 여러 난관에 직면하기도 했다.

2.1. 정부 구성 및 연정
1998년 8월, 라찬은 크로아티아 사회자유당(HSLS)의 드라젠 부디샤와 연정 합의를 체결했고, 이 연합은 2000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0년간 집권했던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선거 승리 후 라찬은 크로아티아 총리로 취임하여 사회민주당(SDP), HSLS, 크로아티아 농민당(HSS), 자유당(LS), 크로아티아 인민당(HNS), 이스트라 민주 의회(IDS) 등 6개 정당으로 구성된 중도좌파 연립 정부를 출범시켰다. 이는 현대 크로아티아 역사상 최초의 연립 정부였다.
라찬은 새로 선출된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과 함께 처음에는 크로아티아의 권위주의적 민족주의적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새로운 개혁주의 지도자로 환영받았다. 그러나 그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정을 운영하는 데 비효율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때때로 "결단력 있는 아마도"(Odlučno možda오들루치노 모주다크로아티아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그의 정부를 파벌 투쟁으로 고통받게 했다. 라찬은 타협적인 태도를 취해야 했고, 이는 정부가 해야 할 일에 완전히 전념하는 능력을 제한했다.
라찬은 주요 연정 파트너였던 부디샤가 2000년 크로아티아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면서 문제에 직면했다. 이로 인해 부디샤는 정부 내에서 중요한 역할을 상실하게 되었고, 불만을 표출하며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특히 국제형사재판소(ICTY)의 크로아티아군 장군 기소 문제 처리에서 부디샤가 더욱 민족주의적인 접근 방식을 취하면서 균열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균열은 라찬 정부의 다른 문제에도 영향을 미쳤고, 이스트라 민주 의회(IDS)는 2001년 6월 연정에서 가장 먼저 탈퇴했다.
라찬은 2002년 7월 5일 공식적으로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연정 파트너인 HSLS가 공동 소유하고 있던 크르슈코 원자력 발전소의 지위에 관한 슬로베니아와의 핵심 협정 비준을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HSLS는 분당되었고, 주류 파벌은 연정에서 탈퇴했지만, 반대 파벌은 LIBRA라는 새 정당을 결성하여 정부에 잔류하기로 결정했다. 이 덕분에 라찬은 약간 수정된 정부를 구성하여 2003년 다음 선거까지 집권할 수 있었다.
2.2. 국내 정책 및 개혁
라찬 정부는 국내적으로 중요한 개혁과 건설 사업을 추진했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헌법이 개정되어 크로아티아는 반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전환되었고,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
라찬은 또한 정부 운영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데 힘썼다. 그는 정부에서 "오픈 도어 데이"를 실시하고 정기적인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이는 대부분 언론의 관심을 피했던 이전 정부들과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경제적으로도 크로아티아는 라찬 정부 시기에 변화를 겪었다. 서방과의 개방은 새로운 자본 유입을 가져왔고, 이는 크로아티아의 GDP 성장을 촉진하여 라찬 정부 재임 기간 동안 연간 약 5%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했다. 정부는 또한 공공 및 정부 부문에서 일련의 개혁을 단행하고, 저렴 주택 프로그램과 관광에 중요한 A1 고속도로 (자그레브와 스플리트를 연결) 건설과 같은 대규모 건설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3. 외교 정책 및 유럽 연합 통합
라찬의 가장 큰 외교적 성과는 크로아티아를 투지만 시대의 반고립 상태에서 성공적으로 벗어나게 하고 유럽 연합 가입을 향한 길을 설정한 것이었다. 그는 재임 기간 동안 세르비아 및 다른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시작했다.

2002년에는 오스트리아 블라이부르크를 방문하여 블라이부르크 송환 연례 추모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2.4. 주요 과제 및 논란
라찬 정부는 여러 국내외적 과제와 논란에 직면했다. 특히 국제형사재판소(ICTY) 관련 조사에 대한 비판을 많이 받았다. 우파 정치권에서는 그가 비애국적이며 국익을 배신했다고 공격받았고, 자유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우익 극단주의와의 싸움에 충분히 나서지 않고 탈투지만화를 거의 이루지 못했다고 비난받았다.
2001년 2월, ICTY로부터 당시 도피 중이던 미르코 노라츠에 대한 기소장이 도착하자 라찬은 대규모 대중의 분노에 직면했다. 이 사건은 스플리트 리바에서 10만 명이 시위에 참여하는 정점에 달했으며, 쿠데타에 대한 우려까지 제기되었다. 이 사건은 라찬이 카를라 델 폰테와 노라츠를 크로아티아에서 기소하기로 합의하면서 진정되었다.

2001년 7월에는 안테 고토비나에 대한 기소장이 도착했으나, 라찬은 기소 내용 중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에 대한 일부 부정적인 서술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여 수용을 지연했다. 고토비나는 당시 체포되거나 감시받지 않았기 때문에 도피할 수 있었고, 이는 2005년 체포될 때까지 이어졌다. 이 사건은 크로아티아의 EU 협상 과정에 큰 타격을 주었다. 마지막 주요 ICTY 스캔들은 2002년 9월 얀코 보베트코에 대한 기소장이 도착했을 때 발생했다. 보베트코는 당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자택을 떠나기를 거부하고 무장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라찬은 보베트코가 헤이그로 이송 중 사망할 경우 우익 인구의 국가적 폭동을 초래할 것을 우려했다. 라찬은 기소를 거부했고, 이로 인해 크로아티아는 국제적 고립의 위험에 직면했다. 라찬은 보베트코를 설득하여 집을 떠나 병원으로 가도록 했다. 상황은 2003년 4월 보베트코가 사망할 때까지 긴장 상태를 유지했다. 그의 사망 후 기소는 취하되었고, 크로아티아는 협상을 계속할 수 있었다.
라찬은 2001년 슬로베니아와의 피란만 관련 비준 협정으로도 비판을 받았다. 라찬은 EU 협상을 위해 슬로베니아와의 관계 개선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피란만 영토의 80%를 슬로베니아에 양보하고 국제 수역으로의 출구를 부여하되 크로아티아는 여전히 이탈리아와 국경을 유지하는 합의를 추진했다. 이 합의는 대중과 당시 의회 의장 즐라트코 톰치치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다. 톰치치는 신문에 새로운 만 지도가 나올 때까지 슬로베니아에 얼마나 많은 영토가 주어졌는지 몰랐다고 주장했다. 이 합의는 이후 거부되었고 총리가 서명하지 않아 실제로는 이행되지 않았다.
3. 총리 퇴임 후 및 당 대표직
라찬의 중도좌파 연정은 2003년 11월 총선에서 의회 과반수를 상실했다. 사회민주당(SDP)은 이전 선거처럼 대규모 연합을 형성하지 않아 표를 잃었다. 크로아티아 농민당(HSS)은 단독 출마를 결정한 후 선거에서 승리한 당에 합류하기로 했다. 이러한 전술은 그들에게 치명적이었다. 크로아티아 인민당(HNS)과의 연합 또한 라찬에 의해 알 수 없는 이유로 거부되었는데, 이 역시 실수로 판명되었다.
라찬은 선거 결과가 발표된 직후 패배를 인정했다. 그의 전 연정 파트너들은 그가 너무 일찍 승리를 인정했다고 비판하며, 다른 대연합을 시도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라찬은 그럴 가능성이 낮고, 설령 성공하더라도 그러한 대규모 연합에서는 안정성이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003년 12월 23일 크로아티아 의회가 후임자인 HDZ의 이보 사나데르를 승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총리직을 종료했다.
총리 퇴임 후에도 SDP는 여론 조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야당으로 남았으며, 이비차 라찬은 크로아티아 야당의 지도자로 여겨졌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15년 이상 SDP 당 지도부를 유지하는 데는 매우 능숙함을 입증했다. 2006년, 라찬은 당 대표 재선에 출마할 의사가 없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4. 질병 및 사망
이비차 라찬은 말년에 심각한 건강 문제에 직면했으며, 이는 그의 공직 사임과 사망으로 이어졌다.
2007년 1월 31일, 라찬은 건강상의 이유로 일시적으로 공직 생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SDP 부대표인 젤리카 안투노비치가 당 대표직을 대행했다. 그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고, 어깨에 암 진단을 받았다. 2월에는 신장, 요로, 어깨의 암을 제거하기 위한 두 차례의 수술을 받았다. 4월 4일에는 암이 뇌로 전이되었다는 검사 결과가 발표되었다.
2007년 4월 11일, 그는 SDP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사임 성명은 다음과 같다.
"동료, 친구, 동지 여러분! 어려운 병에 직면하여 저는 삶을 위한 싸움을 계속하고 있지만, 우리의 공동 작업과 저의 정치 경력에 대한 여러분의 지지에 감사할 때입니다. 우리는 함께 사회민주당을 건설했으며, 저는 우리가 이룬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도덕, 노동, 정직, 관용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들을 우리나라의 정치 생활에 영원히 새겨 넣은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 그리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했습니다. 이로써 저는 당 대표직에서 사임하며, 여러분은 저 없이 계속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SDP에 분명히 존재한다고 확신하는 새로운 힘을 선거 대회에서 찾으십시오."
2007년 4월 12일 오전, 그의 상태는 오른쪽 어깨의 암 제거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으로 인해 "위독"하다고 묘사되었다. 같은 날, 자그레브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101은 "당내 두 소식통의 비공식 정보"를 근거로 그의 사망을 오보했으나, SDP 관계자들은 이를 부인했다. 이후 그는 의사소통이 불가능하고 중증 진정 상태에 있는 위독한 상태로 보고되었다.

2007년 4월 29일 오전 3시 5분, 이비차 라찬은 자그레브 임상 병원 센터에서 사망했다. 보고된 사망 원인은 뇌로 전이된 신장암이었다. 그는 5월 2일 미로고이 묘지 화장터에 안장되었다. 그의 요청에 따라, 가장 가까운 친구 12명과 가족 구성원(아내와 두 아들 포함)만이 참석했다. SDP는 바트로슬라프 리신스키 콘서트 홀에서 별도의 추모식을 조직했으며, 이 행사에는 대통령, 총리, 수많은 다른 고위 인사들과 많은 당원들이 참석했다.
라찬의 3개월간의 투병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언론은 대중의 큰 관심으로 인해 그의 상태를 정기적으로 보도했다. 라찬 자신은 병을 발표한 날 이후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았지만, SDP 대변인을 통해 언론에 정기적으로 정보가 제공되었다. 이는 투지만 전 대통령의 사망 당시 그의 병세에 대한 세부 정보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던 것과 비교할 때 크로아티아에서는 전례 없는 상황이었다.
라찬은 당 대표직에서 사임할 때 후임자에 대한 선호를 밝히지 않고, 당원들이 새로운 지도자를 선출할 선거 대회를 개최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다가오는 2007년 11월 총선 때문에 이는 당의 여론 조사 결과에 중요하게 작용할 것으로 널리 예상되었다.
5. 개인사
이비차 라찬은 세 번 결혼했으며, 첫 번째 결혼에서 두 아들 이반(Ivan이반크로아티아어)과 조란(Zoran조란크로아티아어)을 두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 아가타 슈피시치(Agata Špišić아가타 슈피시치크로아티아어)는 크로아티아 헌법재판소 판사였다. 두 번째 부인 옐레나 네나디치(Jelena Nenadić옐레나 네나디치크로아티아어)는 1980년대 쿰로베츠 정치 학교의 사서였다. 세 번째 부인 디야나 플레슈티나(Dijana Pleština디야나 플레슈티나크로아티아어)는 오하이오주 우스터 대학의 정치학 교수였다. 그는 스스로를 불가지론자라고 밝혔다.
6. 평가 및 유산
이비차 라찬의 정치적 생애와 업적은 크로아티아의 민주화와 국제 사회 통합 과정에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6.1. 긍정적 평가
라찬은 새로 선출된 스테판 메시치 대통령과 함께 크로아티아의 권위주의적이고 민족주의적인 과거와의 단절을 상징하는 새로운 개혁주의 지도자로 처음에는 환영받았다. 그는 프라뇨 투지만 시대의 반고립 상태에서 크로아티아를 성공적으로 벗어나게 하고, 국가를 유럽 연합 가입을 향한 길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헌법이 개정되어 크로아티아는 반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전환되었고, 의회와 총리에게 더 많은 권한이 부여되었다.
또한 라찬은 정부 운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정부의 문을 대중에게 개방하는 "오픈 도어 데이"를 실시하고 정기적인 기자 회견을 가졌는데, 이는 대부분 언론의 관심을 피했던 이전 정부들과는 대조적이었다. 그의 정부는 연간 약 5%에 달하는 높은 GDP 성장률을 기록하며 경제적 변화를 이끌었고, 공공 및 정부 부문 개혁, 저렴 주택 프로그램 및 A1 고속도로 건설과 같은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그는 세르비아를 비롯한 다른 구 유고슬라비아 공화국들과의 관계 개선을 시작하며 지역 화합에도 기여했다. 총리 재임 시절에는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도 있었지만, 15년 이상 사회민주당의 당 지도부를 유지하는 데는 매우 능숙함을 보여주었다.
6.2. 비판 및 논란
라찬은 6개 정당으로 구성된 연립 정부를 운영하는 데 비효율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의 통치 스타일은 "결단력 있는 아마도"(Odlučno možda오들루치노 모주다크로아티아어)라는 표현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정부가 파벌 투쟁에 시달리고 정책 실행 능력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국제형사재판소(ICTY) 관련 조사에 대한 대처로 양쪽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우파 정치권에서는 그가 비애국적이며 국익을 배신했다고 공격받았고, 특히 미르코 노라츠, 안테 고토비나, 얀코 보베트코 등 크로아티아군 장군들의 기소 문제 처리에서 비난을 받았다. 반면 자유주의 좌파 진영에서는 우익 극단주의와의 싸움에 충분히 나서지 않고 탈투지만화를 거의 이루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고토비나의 기소 수용 지연과 보베트코의 기소 거부는 국제적으로 크로아티아의 고립을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를 낳았다.
또한 2001년 슬로베니아와의 피란만 국경 협정은 대중과 의회로부터 영토 양보에 대한 강한 비판을 받았다. 이 협정은 결국 비준되지 않아 무효화되었다. 2003년 총선에서 연정 파트너들과의 협력 실패로 인해 패배한 것 또한 그의 리더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강화하는 요인이 되었다.
7. 영향력
이비차 라찬은 크로아티아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크로아티아 공산주의동맹을 현대적인 사회민주당으로 성공적으로 전환시키며, 크로아티아의 다당제 민주주의 체제에서 강력한 중도좌파 세력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2000년 총선에서 승리하여 10년 동안 집권했던 HDZ의 독점적 지배를 끝내고, 프라뇨 투지만 시대 이후 첫 비(非)HDZ 총리가 되었다는 점에서 크로아티아 정치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상징한다. 그의 정부는 크로아티아를 국제 사회에 재통합시키고 유럽 연합 가입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크로아티아 헌법을 반대통령제에서 의원내각제로 개정한 것은 크로아티아의 민주주의 제도를 더욱 공고히 하는 중요한 제도적 변화였다.
그의 리더십은 때로는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복잡한 연정 관계 속에서도 정부를 유지하고 국가를 발전시키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ICTY 관련 문제와 국경 분쟁 등 어려운 외교적 난관 속에서도 크로아티아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고 이웃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시도는 그의 외교적 유산으로 남았다. 라찬은 크로아티아가 독립 이후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사회민주주의적 가치를 정치 생활에 확고히 새긴 인물로 기억된다.
8. 관련 항목
- 크로아티아의 총리
-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
- 크로아티아 공산주의동맹
- 프라뇨 투지만
- 스테판 메시치
- 이보 사나데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