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이밴절린 애덤스는 뉴저지주 저지시티에서 보수적인 가정에 태어났다. 그녀는 태어난 지 15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애덤스는 1868년 2월 8일에 뉴저지주 저지시티에서 태어났지만, 공공 기록에 따르면 1859년에 태어났다는 상충되는 정보도 존재한다. 1923년 체포 당시 그녀는 자신의 나이를 50세로 신고하여 1873년생임을 암시했는데, 이는 당시 여성들 사이에서 나이를 조정하는 것이 용인된 관행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녀는 보수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아버지는 그녀가 15개월이 되었을 때 사망했다.
q=Jersey City, New Jersey|position=left
1.2. 초기 활동
애덤스는 전업 점성가로 활동하기 전에, 그녀의 고용주였던 것으로 알려진 로드 씨와 약혼했다. 그녀는 처음에 그를 사랑했다고 밝혔으나, 이후 그에 대한 감정이 사라져 파혼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반까지 그녀는 교육자이자 기자, 극작가, 그리고 여성 참정권론자였던 에마 바이올라 셰리든 프라이와 친구로 지냈다.
2. 점성술 활동
이밴절린 애덤스는 점성술을 통해 높은 명성을 얻었으며, 이 분야에서 독자적인 사업 모델을 구축하고 여러 저서를 출판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2.1. 점성술 사업의 발전
애덤스는 대부분의 경력을 대면 상담이나 우편을 통한 점성술 컨설팅 사업을 운영하며 보냈다. 그녀의 사업은 크게 번창하여 여러 명의 조수와 속기사를 고용할 정도로 확장되었다. 그녀의 고객 중에는 존 모건, 메리 픽퍼드, 오페라 가수 엔리코 카루소, 그리고 영국의 에드워드 7세와 같은 유명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2.2. 저술 활동
애덤스는 경력 말기에 서적 출판과 대중 매체 노출에 주력했다. 그녀는 점성술에 대한 여러 권의 인기 서적과 자서전을 저술했다. 주요 저서로는 『점성술: 태양 아래 당신의 자리』(1927), 『점성술: 별들 속 당신의 자리』(1930) 등이 있으며, 자서전으로는 『하늘의 그릇』(1926)이 있다. 이 책들은 대중에게 점성술을 널리 알리고 이해를 돕는 데 기여했다.
2.3. 알레이스터 크로울리와의 협업 및 저작권 논란
애덤스는 때때로 프로젝트를 돕기 위해 작가를 고용했는데, 그 중에는 영국의 신비주의자이자 마법사인 알레이스터 크로울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애덤스는 1, 2년 동안 크로울리를 대필 작가로 고용했다. 그들의 업무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험악해졌고, 크로울리의 저서 『점성술의 일반 원리』(The General Principles of Astrology더 제너럴 프린서플스 오브 애스트롤로지영어)를 둘러싸고 "누가 어떤 내용을 실제로 썼는가"에 대한 저작권 분쟁이 발생했다. 애덤스는 이 책에 자신의 기여가 있었다고 주장했으며, 최종적으로는 책의 저작권이 크로울리에게 귀속되는 동시에 애덤스의 기여 또한 인정되는 방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3. 법적 문제 및 재판
애덤스는 점성술 활동으로 인해 여러 차례 법적 문제에 직면했지만, 이를 성공적으로 극복하여 점성술의 합법성을 옹호하는 데 기여했다.
3.1. 체포와 무죄 판결
애덤스는 1911년, 1914년, 그리고 1923년에 뉴욕시에서 운세 예언 혐의로 세 차례 체포되었다. 당시 점성술 활동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제기된 모든 기소는 성공하지 못했다. 특히 1914년 5월의 재판은 큰 주목을 받았다. 애덤스는 단순히 벌금을 내고 석방되는 대신, 자신의 체포에 이의를 제기하여 언론의 큰 관심을 받았다. 법정에서 그녀는 예언을 하는 대신, 점성술이 천문학에 기반을 둔 복잡한 계산 방식이라는 점을 설명하고, 자신의 예측이 "가능성으로 일어날 수 있는 일"에 불과하다고 진술했다.
재판 당시, 범죄자의 두상이나 인상을 통해 성격을 파악하던 골상학이나 범죄인류학 같은 연구가 과학으로 여겨지던 시기였는데, 판사는 이러한 연구 또한 과거에는 점술로 여겨졌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점성술과 손금점도 신흥 과학인 심리학의 발전과 함께 언젠가 재평가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애덤스는 점성술이 단순한 점술이 아니라 언젠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분야임을 판사에게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았다. 이 판결로 그녀는 상당한 명성을 얻었으며, 이 사건을 점성술이 과학의 지위로 격상된 계기라고 과장하여 홍보하기도 했다.
q=New York City|position=right
4. 예측과 논란
애덤스의 예측은 대중의 이목을 끌었지만, 그 정확성과 경제적 영향력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었다.
4.1. 주요 예측과 적중 사례
애덤스는 자신의 예측 중 일부가 적중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대중의 신뢰를 얻기도 했다.
- 맨해튼 5번가에 위치했던 윈저 호텔의 화재(1899년 3월 17일)를 전날 예측했다고 전해진다.
- 1931년에는 미국이 1942년에 전시 상황에 놓일 것이라고 예측했다.
- 1932년에는 자신의 사망을 예측하고 예정되었던 강연 여행을 취소했다고 한다.
4.2. 비판과 실패한 예측
애덤스는 예측에 대해 고객들로부터 상당한 고액의 보수를 받았다. 그녀는 주식시장의 동향을 성공적으로 예측한다고 명성을 얻었지만, 이러한 주장은 여러 비판에 직면했다. 저술가 캐롤 크리스만(Carol Krismann캐롤 크리스만영어)은 "회의론자들은 애덤스가 경제에 대한 지식이 없었으며, 그녀의 예측은 항상 모호했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재난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했지만 구체적인 재난은 아니었고, 실제로 미국이 놀라운 주식 시장 성장을 겪던 시기에 시장이 상승할 것이라고만 예언했다"고 덧붙였다. 그녀를 믿었던 사람들은 종종 틀린 예측은 잊고, 우연히 맞아떨어진 예측만을 가지고 그녀의 정확성을 "증명"하려 했다.
특히, 1929년 월스트리트 대폭락 몇 주 전에 "주식은 하늘까지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애덤스의 가장 악명 높은 실패한 예측으로 남아있다. 수천 명의 그녀의 점성술 뉴스레터 구독자들은 그녀의 조언에 따라 주식에 투자했다가 비극적인 결과를 맞이했다. 증권분석가 케네스 피셔는 애덤스의 소수의 성공적인 예측은 잘 알려졌지만, 실패한 예측은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 의해 무시되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애덤스를 "진정한 투자 지식이 없는 명백한 돌팔이"라고 단언했다.
5. 평가와 유산
이밴절린 애덤스는 점성술의 대중화에 기여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녀의 활동 방식과 예측의 정확성에 대해서는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
5.1. 긍정적 평가
애덤스는 "미국 최초의 슈퍼스타 점성가"로 불리며, 그녀의 점성술 상담 사업은 매우 번성했다. 특히 그녀가 법정에서 운세 예언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재판에서 성공적으로 변호하여 무죄 판결을 받은 것은 점성술의 사회적 인식과 합법성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1914년 재판에서의 승리는 대중에게 점성술이 단순한 미신이 아닌, 나름의 논리와 체계를 갖춘 분야로 비칠 수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는 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점성술을 대중문화의 주류로 끌어들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5.2. 비판적 시각
애덤스의 점성술 실천 방식, 특히 금융 예측과 관련하여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녀는 경제에 대한 전문 지식이 부족했고, 자신의 예측이 모호하며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었다는 지적을 받았다. 1929년 주가 대폭락 직전의 잘못된 낙관적인 예측은 그녀의 명성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많은 구독자들이 그녀의 조언을 따랐다가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입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점성술사가 금전적인 조언을 제공하는 것의 윤리적 문제와 책임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비판자들은 그녀의 성공적인 예측이 우연의 일치였거나, 대중이 실패한 예측은 무시하고 성공한 예측만을 기억하려는 경향 때문이라고 보았다.
6. 죽음
이밴절린 애덤스는 1932년 11월 10일에 사망했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녀의 사망일을 11월 12일로 명시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