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and Amateur Career
이리키 사토시는 어린 시절부터 야구에 대한 열정을 키웠으며, 프로 입문 전까지 꾸준히 실력을 다져왔다.
1.1. Childhood and Education
이리키 사토시는 1967년 6월 3일 미야자키현 미야코노조시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야구를 시작했으며, 학창 시절 내내 야구에 전념했다. 가고시마 실업고등학교에 진학하여 야구 선수로서 기량을 발전시켰다. 1985년 여름, 전국 고등학교 야구 선수권 가고시마 대회 준결승에 3번째 투수로 등판했으나 쇼난 고등학교에 패배하며 고교 야구 경력을 마무리했다.
1.2. Amateur Baseball Career
고등학교 졸업 후, 이리키 사토시는 미쓰비시 자동차 미즈시마 야구팀에 입단하여 실업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1989년 일본 프로 야구 드래프트에서 긴테쓰 버펄로스로부터 6순위 지명을 받아 프로 무대에 입성했다. 당시 드래프트 동기 중에는 후에 팀 동료가 되는 노모 히데오와 이시이 히로오 등이 있었다.
2. Professional Baseball Career
이리키 사토시는 일본 프로 야구 (NPB)를 시작으로 한국 프로 야구 (KBO), 대만 프로 야구 (CPBL)까지 다양한 리그에서 투수로 활약하며 그의 프로 경력을 쌓아나갔다.
2.1. Japan Professional Baseball (NPB)
이리키 사토시는 일본 프로 야구 리그에서 긴테쓰 버펄로스, 히로시마 도요 카프, 요미우리 자이언츠,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 등 여러 팀을 거치며 선수 생활을 했다. 그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모든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다재다능한 투수로 평가받았다.
2.1.1. Kintetsu Buffaloes (1990-1995, 1997-1998)
이리키 사토시는 1990년 긴테쓰 버펄로스에 입단하여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1990년부터 1995년까지 6년간 긴테쓰에서 125경기에 등판하며 선발과 불펜을 오가는 활약을 펼쳤다. 1997년에는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서의 짧은 기간을 마치고 긴테쓰로 복귀하여 다시 팀에 기여했다. 1997년 8월 30일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와의 경기에서 복귀 후 선발 승리를 거두며 "(그해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한) 동생에게 질 수 없다"고 언급하며 재기 발판을 마련했다. 1997년 8월 24일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는 10점 차를 뒤집는 역전승 과정에서 대주자로 출루하여 결승 득점을 기록하는 진기한 경험을 했다. 당시 퍼시픽 리그는 인터리그가 없어 투수가 타석에 서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에, 그의 타석수 0에도 불구하고 1득점이 기록된 것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2.1.2. Hiroshima Toyo Carp (1996)
1996년 6월, 이리키 사토시는 요시모토 료와의 트레이드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이적했으나, 짧은 기간 동안만 활동했다. 같은 해 오프시즌에 다시 요시모토 료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긴테쓰 버펄로스로 돌아왔다.
2.1.3. Yomiuri Giants (1999-2000)
1998년 오프시즌, 이리키 사토시는 사토 히로유키와의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이로써 그의 동생 이리키 유사쿠와 함께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뛰게 되었는데, 이는 구단 역사상 최초의 현역 형제 선수 기록이었다. 1999년에는 22경기에 등판했으나, 이듬해인 2000년에는 1군에 등판하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2.1.4. Tokyo Yakult Swallows (2001-2002)
2000년 요미우리에서 전력외 통보를 받은 후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다. 당시 감독이었던 와카마쓰 쓰토무는 이리키를 "테스트에서 끝까지 기세와 근성을 느껴 영입했다"고 회상했다. 2001년은 그의 프로 경력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시기로, 개인 최다인 10승을 기록했으며 특히 전반기에만 9승 2패를 기록했다. 그해 올스타전에도 감독 추천으로 처음 출전했으며, 선발 등판한 동생 이리키 유사쿠에 이어 형인 이리키 사토시가 마운드를 넘겨받는 NPB 올스타전 사상 최초의 '이리키 형제 계투'를 선보였다.
그는 야쿠르트 이적 당시 "저는 요미우리에 복수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니 다른 네 구단 투수분들은 저에게 요미우리 공략법을 물어보러 오세요"라고 발언하며 '반 요미우리'를 선언했는데, 이러한 반발심이 오히려 2001년 야쿠르트의 센트럴 리그 우승에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된다. 2001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친정팀인 오사카 긴테쓰 버펄로스를 상대로 10월 23일 열린 3차전에서 후루타 아쓰야와 배터리를 이뤄 5이닝 1실점으로 승리 투수가 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 이 승리로 그는 일본 시리즈를 포함한 모든 구단을 상대로 승리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웠다.
야쿠르트 이적 전까지 힘으로만 던지는 투구 스타일이었던 이리키는 야쿠르트에서 후루타 아쓰야와 배터리를 이루며 슬로 커브 등을 섞어 완급 조절을 하는 투구를 배웠고, 이것이 이적 첫해 활약으로 이어졌다. 그는 후루타를 "저에게 있어 진정 운명적인 사람"이라고 언급했다. 이리키는 포수의 사인에 고개를 끄덕여도 자신의 감으로 다른 구종을 던지는 경우가 잦았는데, 이로 인해 포수가 포구 실수를 하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러나 후루타는 적도 아군도 사인 미스를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공을 받았다고 한다. 후루타의 캐칭이 너무나 자연스러웠기에 동생 유사쿠가 올스타전에서 후루타에게 "형은 후루타 씨 사인대로 던지나요?"라고 묻자 후루타는 "안 던져"라고 태연하게 대답했다고 한다.
2002년에는 발목 부상과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1승밖에 거두지 못했고, 시즌 종료 후 두 번째 전력외 통보를 받았다. 야쿠르트 시절 2년간 동생 유사쿠와의 형제 맞대결은 성사되지 않았다.
2.2. Korea Baseball Organization (KBO)
2003년, 이리키 사토시는 한국 프로 야구 (KBO)의 두산 베어스에 입단했다. 이는 KBO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선수 자격으로 등록된 일본인 투수였다. KBO는 1982년 발족 이후 "외국인 선수를 도입하면 한국 프로 야구가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재일 한국인을 제외한 외국인 선수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한일 프로야구 슈퍼게임 등을 통해 실력이 향상되자 1998년부터 외국인 선수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이리키는 그 첫 번째 일본인 선수가 되었다.
2.3. Chinese Professional Baseball League (CPBL)
2004년, 이리키 사토시는 대만의 CPBL 라뉴 베어스 (현 라쿠텐 몽키스)로 이적했다. 그는 라뉴에서 4승을 기록했으나, 시즌 도중 해고되었고, 그해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3. Playing Style and Personal Characteristics
이리키 사토시는 선발, 중간 계투, 마무리 등 모든 투수 역할을 소화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진 투수였다. 그는 최고 140|km/h}} 후반대의 직구를 주 무기로 삼아 몸쪽으로 과감하게 승부하는 투구를 즐겼으며, 이러한 공격적인 투구 스타일은 '켄카 토호(ケンカ投法싸움 투구일본어)'라고 불렸다.
경기 중 그의 투혼과 관련된 여러 일화가 있다. 1994년 오릭스 블루웨이브와의 경기에서 타자 오가와 히로후미의 타구에 측두부를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팀 동료들이 달려와 걱정하는 가운데 전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투구를 계속 이어갔다. 이 장면은 후지 TV의 인기 프로그램인 '프로야구 진플레이 호플레이 대상'에 자주 방영되었다. 1995년 지바 롯데 마린스와의 경기에서는 타자 피트 인카빌리아의 머리에 사구를 던져 난투극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인카빌리아에게 마운드 위에서 떠밀려 넘어지기도 했다.
4. Post-Retirement Life
프로 야구 은퇴 후, 이리키 사토시는 고향인 미야코노조시로 돌아와 아내의 오빠가 운영하는 도시락 전문점 '카카시테이'에서 일했다. 2008년 4월에는 그의 성실한 근무 태도가 인정받아 미야자키시에 개점 예정이던 2호점의 운영을 맡기도 했으나, 후에 퇴직했다. 은퇴 후 그는 확인된 것만 해도 무려 10번의 직업을 바꿨으며, 사망 당시에는 요양 보호사로 일하고 있었다.
5. Death
이리키 사토시는 2023년 2월 10일 교통사고로 갑작스럽게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사망은 야구계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안겼다.
5.1. Traffic Collision
이리키 사토시는 2023년 2월 10일 오후 9시 50분경, 미야코노조시 내에서 경승용차를 운전하던 중 일반 승용차와 충돌했다. 그가 탑승했던 경승용차는 앞부분이 크게 파손된 채 밭으로 추락했다. 의식을 잃은 채 시내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약 2시간 후인 같은 날 오후 11시 45분, 중증 두부 외상으로 인해 5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고 현장은 미야코노조시 노노미야마치에 위치한 신호등 없는 시도 교차로였으며, 상대편 운전자 (33세 남성)는 다치지 않았다. 사고가 발생한 지점은 상대편 운전자가 통행하던 도로에 교차로 진입 전 일시정지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었다.
5.2. Funeral and Aftermath
이리키 사토시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의 동생이자 당시 오릭스 버펄로스 투수 코치였던 이리키 유사쿠는 캠프지인 미야자키시를 떠나 약 50 km 떨어진 미야코노조시로 급히 달려갔다. 2월 12일에는 빈소가 마련되었고, 유사쿠 외에도 캠프로 미야자키에 머물고 있던 오릭스의 후쿠라 준이치 제너럴 매니저와 요미우리의 쿠보 야스오 순회 투수 코치 등이 조문했다. 키요하라 카즈히로 등 야구계 인사들도 조화를 보냈다. 이튿날인 2월 13일에는 영결식이 엄수되었으며, 유품으로는 현역 시절 뛰었던 구단의 모자와 요미우리, 야쿠르트 유니폼이 관에 담겼다. 그의 법명은 '자은원법지신사'였다.
6. Awards and Records
이리키 사토시는 프로 선수 생활 동안 여러 주목할 만한 기록과 수상을 달성했다.
6.1. Awards
- 월간 MVP**: 1회 (투수 부문: 2001년 6월)
6.2. First Records (NPB)
- 첫 등판**: 1990년 4월 18일, 대 오릭스 브레이브스 2차전 (닛폰 생명 구장), 8회 초 2사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1/3이닝 4실점.
- 첫 탈삼진**: 1990년 4월 19일, 대 오릭스 브레이브스 3차전 (닛폰 생명 구장), 9회 초 유미오카 게이지로로부터 기록.
- 첫 선발**: 1990년 8월 12일, 대 롯데 오리온스 17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1이닝 4실점.
- 첫 승리·첫 완투 승리·첫 완봉 승리**: 1991년 6월 20일, 대 닛폰햄 파이터스 10차전 (도쿄 돔).
- 첫 세이브**: 1992년 10월 6일, 대 세이부 라이온스 26차전 (후지이데라 구장), 6회 초 2번째 투수로 구원 등판 및 마무리, 4이닝 무실점.
6.3. Other Records (NPB)
- 올스타전 출장**: 1회 (2001년)
7. Career Statistics
이리키 사토시의 일본, 한국, 대만 프로 야구 통산 투구 성적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소속 | 등판 | 선발 | 완투 | 완봉 | 무4구 | 승리 | 패전 | 세이브 | 홀드 | 승률 | 타자 | 이닝 | 피안타 | 피홈런 | 볼넷 | 고의4구 | 몸맞 | 탈삼진 | 폭투 | 보크 | 실점 | 자책점 | 평균 자책점 | WHIP |
---|---|---|---|---|---|---|---|---|---|---|---|---|---|---|---|---|---|---|---|---|---|---|---|---|---|
1990 | 긴테쓰 | 7 | 1 | 0 | 0 | 0 | 0 | 0 | 0 | -- | .000 | 39 | 7.2 | 14 | 2 | 4 | 0 | 1 | 6 | 0 | 0 | 10 | 9 | 10.57 | 2.35 |
1991 | 10 | 4 | 4 | 2 | 0 | 4 | 0 | 0 | -- | 1.000 | 205 | 51.2 | 35 | 3 | 17 | 0 | 3 | 23 | 0 | 0 | 16 | 14 | 2.44 | 1.01 | |
1992 | 15 | 7 | 1 | 0 | 1 | 4 | 3 | 1 | -- | .571 | 245 | 53.1 | 66 | 8 | 19 | 0 | 3 | 38 | 3 | 0 | 41 | 40 | 6.75 | 1.59 | |
1993 | 26 | 9 | 1 | 1 | 0 | 5 | 5 | 0 | -- | .500 | 340 | 80.2 | 68 | 5 | 33 | 2 | 6 | 70 | 0 | 0 | 36 | 30 | 3.35 | 1.25 | |
1994 | 44 | 4 | 0 | 0 | 0 | 4 | 6 | 1 | -- | .400 | 468 | 107.0 | 128 | 12 | 34 | 1 | 2 | 67 | 0 | 0 | 56 | 50 | 4.21 | 1.51 | |
1995 | 23 | 4 | 0 | 0 | 0 | 0 | 3 | 0 | -- | .000 | 225 | 50.2 | 61 | 7 | 14 | 0 | 3 | 43 | 0 | 0 | 30 | 30 | 5.33 | 1.48 | |
1996 | 히로시마 | 6 | 2 | 0 | 0 | 0 | 0 | 3 | 0 | -- | .000 | 80 | 17.0 | 20 | 2 | 8 | 0 | 2 | 14 | 1 | 0 | 17 | 10 | 5.29 | 1.65 |
1997 | 긴테쓰 | 6 | 1 | 0 | 0 | 0 | 1 | 0 | 0 | -- | 1.000 | 50 | 13.1 | 14 | 1 | 1 | 0 | 0 | 10 | 0 | 0 | 4 | 4 | 2.70 | 1.13 |
1998 | 25 | 1 | 0 | 0 | 0 | 4 | 3 | 0 | -- | .571 | 208 | 47.2 | 46 | 2 | 26 | 2 | 2 | 37 | 1 | 2 | 30 | 29 | 5.48 | 1.51 | |
1999 | 요미우리 | 22 | 0 | 0 | 0 | 0 | 2 | 1 | 0 | -- | .667 | 104 | 21.2 | 24 | 3 | 17 | 1 | 1 | 23 | 1 | 0 | 10 | 10 | 4.15 | 1.89 |
2001 | 야쿠르트 | 24 | 20 | 1 | 0 | 1 | 10 | 3 | 0 | -- | .769 | 528 | 129.1 | 117 | 16 | 32 | 2 | 4 | 80 | 1 | 0 | 42 | 41 | 2.85 | 1.15 |
2002 | 6 | 5 | 0 | 0 | 0 | 1 | 3 | 0 | -- | .250 | 117 | 25.2 | 33 | 6 | 6 | 0 | 1 | 11 | 1 | 0 | 19 | 19 | 6.66 | 1.52 | |
2003 | 두산 | 39 | 20 | 5 | 1 | -- | 7 | 11 | 5 | 0 | .389 | 676 | 159.0 | 155 | 17 | 53 | 3 | 9 | 87 | 2 | 0 | 68 | 66 | 3.74 | 1.31 |
2004 | 라뉴 | 11 | 11 | 3 | 0 | 0 | 4 | 6 | 0 | 0 | .400 | 331 | 77.0 | 81 | 6 | 19 | 0 | 7 | 59 | 3 | 0 | 39 | 29 | 3.39 | 1.30 |
NPB 통산: 12년 | 214 | 58 | 7 | 3 | 2 | 35 | 30 | 2 | -- | .538 | 2609 | 605.2 | 626 | 67 | 211 | 8 | 28 | 422 | 8 | 2 | 311 | 286 | 4.25 | 1.38 | |
KBO 통산: 1년 | 39 | 20 | 5 | 1 | -- | 7 | 11 | 5 | 0 | .389 | 676 | 159.0 | 155 | 17 | 53 | 3 | 9 | 87 | 2 | 0 | 68 | 66 | 3.74 | 1.31 | |
CPBL 통산: 1년 | 11 | 11 | 3 | 0 | 0 | 4 | 6 | 0 | 0 | .400 | 331 | 77.0 | 81 | 6 | 19 | 0 | 7 | 59 | 3 | 0 | 39 | 29 | 3.39 | 1.30 |
8. Uniform Numbers
이리키 사토시가 각 프로팀에서 사용했던 등번호는 다음과 같다.
- 41** (1990년 ~ 1995년)
- 40** (1996년)
- 42** (1997년 ~ 1998년)
- 44** (1999년 ~ 2000년)
- 28** (2001년 ~ 2002년)
- 29** (2003년 ~ 200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