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이노우에 닛쇼의 생애는 그의 극단주의적 사상과 행동의 배경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요소들을 포함한다.
1.1. 출생과 어린 시절
이노우에 닛쇼는 1886년 4월 12일 군마현 가와바에서 시골 의사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둘째 형은 해군 중좌 이노우에 후미오였으며, 이노우에 후미오는 1919년 항공기 사고로 순직했다.
1.2. 교육
그는 구제 마에바시 중학교 도네 분교를 수료한 후 본교를 졸업했다. 이후 와세다대학교와 타쿠쇼쿠대학의 전신인 동양협회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두 학교 모두 중퇴했다.
1.3. 만주 경험과 귀국
학업을 중단한 후, 이노우에 닛쇼는 만주로 건너가 1909년부터 1920년까지 남만주철도에서 근무하며 첩보 활동을 포함한 다양한 경험을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방랑 생활을 하기도 했다. 1920년 일본으로 귀국했다.
2. 사상 및 철학
이노우에 닛쇼의 사상과 철학은 그의 극단적인 행동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이는 당시 일본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사상 형성 배경
일본 귀국 후, 이노우에 닛쇼는 처음에는 선불교 승려가 되기 위해 공부했으나, 이후 일련종 불교에 귀의했다. 이러한 전환은 그가 시즈오카현 미호노마쓰바라로 이주하여 일련종 학자이자 국가주의 설교가인 다나카 지카쿠가 운영하는 고쿠추카이 학원에서 수학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아이키도의 창시자인 모리헤이 우에시바를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이노우에 닛쇼는 곧 다나카의 가르침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고, 1924년에는 언론인 아사히나 지센과의 대화를 계기로 '이노우에 닛쇼'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 그는 병을 앓던 중 신비로운 체험을 통해 회복되었고, 이를 계기로 병을 치유하는 가시기도(加持祈禱)를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25년에는 다나카 미쓰아키의 비서였던 다카이 도쿠지로와 함께 호국성사를 설립하고 도장을 만들려 했으나 실패했다.
2.2. 입정호국당과 활동
1928년, 이노우에 닛쇼는 이바라키현 오아라이정으로 거처를 옮겼고, 다나카 미쓰아키의 도움으로 자신의 사찰인 立正護国堂입정호국당일본어을 설립했다. 이곳은 단순한 사찰을 넘어 청년 수련 센터의 역할도 겸했으며, 이노우에 닛쇼는 이곳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적 혁명을 주장했다. 그는 입정호국당에서 가시기도를 행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해군 내의 과격파인 후지이 히토시 중위와 5·15 사건의 주모자 중 한 명인 애향숙 숙장 다치바나 고자부로 등과 교류하며, 일본 정부를 개조하기 위해서는 폭력적인 행동 외에는 길이 없다는 설득에 동조하여 테러 활동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오카와 슈메이, 기타 잇키 등 다른 우익 인사들과도 교류했다.
2.3. 혈맹단 사상
1930년, 이노우에 닛쇼는 도쿄로 이주하여 대학생 급진주의자들을 중심으로 혈맹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1932년에 공식적으로 창설된 혈맹단은 당시의 정치 및 경제 엘리트를 전복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들의 사상적 구호는 "一人一殺일인일살일본어"로, 이는 한 사람이 한 명의 요인을 암살함으로써 국가 개조를 이루겠다는 극단적인 폭력주의를 상징했다.
3. 주요 활동 및 사건
이노우에 닛쇼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활동은 그가 주도한 극단주의적 테러 사건들이다.
3.1. 혈맹단 결성
이노우에 닛쇼는 1932년 쇼 오누마, 히시누마 고로를 포함한 13명의 젊은 장교들과 함께 극단주의적 우익 테러 조직인 혈맹단을 공식적으로 결성했다. 당초 이들은 1932년 2월 기원절에 대규모 집단 테러를 계획했으나, 실행 가능성이 불투명해지자 개별적인 암살로 방향을 전환했다.
3.2. 혈맹단 사건
혈맹단은 1932년 초부터 암살 활동을 시작했다. 2월 9일에는 전 재무대신 이노우에 준노스케가 총격을 받아 암살되었고, 3월 5일에는 미쓰이 자이바쓰의 총수인 단 다쿠마 남작이 암살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통칭 혈맹단 사건으로 알려져 있다. 이노우에 닛쇼는 단 다쿠마 암살 직후 체포되었으며, 이후 그의 신뢰받는 부하였던 고가 기요시가 혈맹단의 지휘를 이어받았다.
3.3. 5·15 사건과의 연관성
이노우에 닛쇼가 체포된 후, 고가 기요시가 주도한 혈맹단은 두 번째 암살 계획을 조직했다. 이 계획은 5월 15일 이누카이 쓰요시 당시 일본 총리가 암살당하는 사건으로 절정에 달했는데, 이 사건은 5·15 사건으로 불린다. 비록 이노우에 닛쇼가 직접 5·15 사건에 가담하지는 않았으나, 혈맹단 사건은 5·15 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으며, 일본 정치에 극단적인 폭력주의가 만연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4. 재판, 수감 및 석방
혈맹단 사건으로 체포된 이노우에 닛쇼는 재판을 받게 되었다. 재판 과정에서 린자이슈의 승려인 야마모토 겐포는 이노우에 닛쇼를 옹호하며 그의 폭력 행위를 선불교와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정당화하는 증언을 했다. 1934년 11월, 검찰이 사형을 구형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노우에 닛쇼와 혈맹단 소속의 총격범 세 명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나머지 체포된 단원들은 더 가벼운 형을 선고받았다. 이노우에 닛쇼는 사건 이후 곤도 세이쿄와 혼마 겐이치로의 도움으로 도야마 미쓰루의 저택에 숨어 지내다 자수했다. 그는 1940년 특사로 풀려나 감옥에서 석방되었다.
5. 전후 활동 및 은퇴
이노우에 닛쇼는 제2차 세계 대전 패전 이후에도 일본 사회에 영향을 미치려 했으나, 연합군 점령 당국의 조치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
5.1. 공직 추방과 복권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이 패전한 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이노우에 닛쇼를 파시스트로 분류하고 1947년에 그를 공직 추방 조치하여 공적인 활동을 금지시켰다. 이 시기 그는 농촌 청년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하며 지냈다. 일본 점령이 끝난 후 그는 복권되었으며, 전후 일본의 우익 단체 활동에서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남아 있었다.
5.2. 전후 우익 활동 및 은퇴
이노우에 닛쇼는 1953년 우익 단체인 유신운동 간토협의회의 참여로 취임했다. 이듬해인 1954년에는 사고야 요시아키, 고지마 겐지 등과 함께 호국단을 결성하고 초대 단장을 맡았다. 그러나 1956년, 호국단 단원들이 금전 갈취, 감금, 폭력 행위 등으로 반복적으로 체포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노우에 닛쇼는 처음에는 이러한 사건들을 부인했으나, 결국 책임을 지고 단장직에서 사임했다. 이로 인해 이노우에 닛쇼의 후임으로 사고야 요시아키가 단장으로 승격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후 이노우에 닛쇼는 우익 활동에서 완전히 은퇴했으며, 당시 '흑막'으로 불리던 미우라 기이치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으며 노년을 보냈다.
6. 사생활 및 가족 관계
이노우에 닛쇼는 간호사 출신의 아내와 결혼하여 딸 한 명을 두었다. 초기 우익 활동 시절에는 가난하여 집안 살림에서 50전을 꺼내 쓰는 생활을 했다고 전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는 점차 집에 잘 들어오지 않았고, 그의 아내는 척추결핵을 앓아 병약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계를 위해 일해야 했다. 그러나 아내가 돈을 벌면 닛쇼가 다시 나타나는 식이었다고 한다.
혈맹단 사건으로 1심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을 때, 그는 변호사에게 딸에 대해 "부모가 있더라도 대오(大悟)한 부모이기에, 부모 자식의 정에 이끌려 괴로워할 일은 없다"고 말했다. 당시 면회가 허용되어 아내가 딸을 데리고 왔을 때, 그는 딸에게 "아버지는 죽지 않을 것이니", "어머니 말씀 잘 듣거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1940년 특사로 출소한 후에도 그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우익 단체를 설립했다. 전후에는 가구라자카의 게이샤를 첩으로 삼아 지내다가, 결국 가마쿠라에 집을 짓고 첩과 함께 살면서 가족을 돌보지 않았다. 그의 딸은 한때 우익 단체의 사무직원으로 일하기도 했으나, 가족들의 궁핍한 생활은 계속되었다. 많은 제자들이 이노우에 닛쇼의 눈치를 보며 첩의 편에 섰고, 오직 혈맹단의 오누마 쇼만이 그의 가족들을 돌봐주었다고 한다.
7. 저술 활동
이노우에 닛쇼는 자신의 경험과 사상을 담은 자서전을 저술했다. 그의 주요 저서로는 1953년 일본 주보사에서 출판된 『一人一殺 - 井上日召自伝일인일살 - 이노우에 닛쇼 자전일본어』이 있다.
8. 평가 및 비판
이노우에 닛쇼는 그의 사상과 행동으로 인해 역사적으로 다양한 평가와 비판을 받아왔다.
8.1. 주류 불교계의 비판
이노우에 닛쇼는 정식으로 일련종 승려로 서품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승려라 칭하며 활동했다. 그의 극단주의적 교리는 당시 일본의 주류 일련종 불교계로부터 광범위하게 비난받았다. 불교의 근본 정신인 자비와 평화를 위배하고 폭력을 정당화하는 그의 사상은 전통적인 불교 교리와 양립할 수 없다는 비판이 주를 이루었다.
8.2. 역사적 평가 및 논란
이노우에 닛쇼는 전간기 일본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테러리즘을 통해 국가 개조를 시도한 대표적인 극우 인물로 평가된다. 그의 "일인일살" 사상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혈맹단 사건은 일본 사회에 폭력적 수단이 용인될 수 있다는 위험한 선례를 남겼다. 이는 이후 5·15 사건과 같은 군부의 정치 개입 및 암살 사건으로 이어지며 일본의 민주주의 발전을 저해하고 군국주의로 나아가는 길을 열었다는 비판을 받는다. 특히 그의 행동은 사회적 불안정을 심화시키고,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을 통한 문제 해결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9. 영향
이노우에 닛쇼의 사상과 행동은 전후 일본 사회에도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9.1. 일본 극우 운동에 미친 영향
이노우에 닛쇼의 사상과 행동은 일본의 극우 운동 및 정치적 극단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일인일살"이라는 직접 행동주의는 이후의 많은 극우 단체들에게 영감을 주었으며, 폭력을 통한 사회 변혁이라는 위험한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했다. 그는 전후에도 우익 활동에 참여하며 극우 세력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고, 이는 일본 사회 내에서 극단주의적 사상이 명맥을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10. 사망
이노우에 닛쇼는 1967년 3월 4일 뇌연화증으로 사망했다.
11. 외부 링크
- [https://dl.ndl.go.jp/search/searchResult?featureCode=all&searchWord=%E4%BA%95%E4%B8%8A%E6%97%A5%E5%8F%AC&viewRestricted=0 井上日召] 국립국회도서관 디지털 컬렉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