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이기택은 1937년 7월 25일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 (현 포항시 북구)에서 한학자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하여 이주했다. 부산상고 (현 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상과대학에서 상학 학사 학위와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재학 중 총학생회장을 지냈으며, 1960년 3월 이승만 대통령과 그의 자유당의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학생 시위를 주도하여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고, 이는 이승만 정부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 경험은 그의 정치 입문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졸업 후 그는 자형인 이임용과 큰누이 이선애가 경영하던 태광산업에 입사하여 창립 멤버가 되기도 했다. 1961년에는 민주청년위원회 경상남도 지부장을 맡았다.
2. 정치 경력
이기택은 한국 정치사의 주요 시기를 거치며 다양한 정당에서 활동하며 광범위한 정치 여정을 보냈다.
2.1. 제3공화국부터 유신 시대까지의 초기 정치 활동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대학 은사 유진오에 의해 정계에 영입되었다. 그는 신민당 전국구 14번으로 출마하여 30세의 나이로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국회 입성 후 당내에 범청년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을 맡아, 박정희 대통령과 그의 민주공화당이 기존 2선 제한을 철폐하고 대통령 3선 허용을 골자로 제안한 개헌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1969년 4월 19일에는 4·19 10주년 기념 강연을 마친 뒤 침묵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부산 동래구 을 선거구 (부산 제3선거구)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되었다. 이후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와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동래구에서 연이어 당선되며 4선 의원이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당내에서 자신의 계보를 조직할 정도로 성장하여 김영삼, 김대중, 이철승 등 거물급 정치인들 사이에서 중진의 반열에 올랐다. 1974년 신민당 총재로 선출된 김영삼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다.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에서는 이철승을 지지하여 그가 김영삼을 꺾고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는 데 기여했다. 이철승 총재에 의해 최연소인 39세의 나이로 당의 요직인 사무총장에 임명되었으나,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소원해졌다.
1979년 5월 신민당 총재 경선에 출마했다. 1차 투표에서 이철승이 292표, 김영삼이 267표, 이기택이 92표, 신도환이 87표를 받았다. 당시 정치 활동이 금지되어 있던 김대중 계열이 김영삼 지지를 호소했고, 이기택은 이를 받아들여 2차 투표에서 김영삼 지지를 선언했다.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378표를 얻어 이철승(367표)을 근소한 차이로 꺾고 신민당 총재에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이기택을 부총재로 임명했으며, 이는 대한민국 역사상 최연소 부총재 직책이었다.
2.2. 정치 활동 금지 및 망명 (1980년대)
1979년 10.26 사건 이후,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숙군 쿠데타와 광주 사건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면서 이기택은 1980년 신군부의 하나회에 의해 정치 활동 규제 대상이 되었다. 이로 인해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수 없었으며, 그의 지역구는 비서였던 박관용과 김진재에게 넘어갔다. 그는 이후 미국으로 건너가 1982년부터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의 객원교수로 활동하며 망명 생활을 했다.
1983년 5월 18일, 신민당의 전 총재 김영삼이 정치 활동의 자유를 요구하며 단식투쟁에 돌입하자, 이기택은 이튿날인 5월 19일 귀국했다.
2.3. 정치 복귀와 야당 지도력 (1980년대)
1984년 정치 활동 금지가 해제된 후, 이기택은 김영삼과 김대중과 함께 신한민주당에 합류했다. 원래 그가 국회의원이었던 동래구에 출마할 예정이었으나, 1981년 민주한국당 소속으로 당선된 뒤 1984년 신한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긴 박관용이 해당 지역구를 맡고 있어 그는 해운대구와 남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국회에 재입성했다. 그는 이민우가 총재로 선출된 1985년 신한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부총재를 역임했다.
이후 신한민주당은 이민우가 내각제 개헌을 지지하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발표하면서 내분 위기에 처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은 현행 대통령제 유지를 주장하며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고, 이에 강력히 반대했다. 결국 김영삼, 김대중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1987년 4월 21일 통일민주당을 창당했다. 이기택 또한 이들과 함께 신한민주당을 탈당했으나, 즉시 통일민주당에 합류하지는 않았다. 전두환 대통령이 4월 13일 4·13 호헌 조치를 발표하자 이에 항의하며 15일간 단식 투쟁을 벌였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여당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수용하면서 이기택은 비로소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여 부총재를 역임했다. 이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해운대구에 출마하여 다시 당선되었다. 그해 9월과 10월, 통일민주당의 대선 후보를 놓고 김영삼과 대립하던 김대중이 경선 불참을 선언하고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을 창당했으나, 이기택은 평화민주당에 가담하지 않았다. 1988년 통일민주당 부총재에 재선되었고, 1989년에는 서석재의 뒤를 이어 통일민주당 원내총무를 겸임했다. 그는 또한 당시 여당인 민주정의당과 관련된 비리를 조사하기 위해 설립된 5공 비리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2.4. 정당 지도부 및 통합 (1990년대)
1990년 1월 22일, 통일민주당 총재 김영삼은 민주정의당 및 신민주공화당과의 합당을 선언하며 민주자유당을 창당하겠다고 밝혔다. 이기택은 당내 반대파를 이끌고 합당에 참여하기를 거부했으며, 꼬마민주당으로 불리는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 당에는 노무현, 김정길, 무소속 의원이었던 홍사덕, 이철 등이 합류했다. 그는 민주당의 초대 총재로 선출되었고, 이후 평화민주당과의 야권 통합 협상을 벌였다. 한편 그는 국군보안사령부의 사찰 대상 중 한 명이었으며, 이는 1990년 10월 4일 탈영병 윤석양 이병의 폭로로 세상에 알려졌다.
1991년 기초지방선거에서 민주당이 참패한 후, 1991년 9월 10일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에 합의했다. 9월 16일,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은 통합하여 새로운 민주당으로 재창당되었고, 김대중과 이기택은 공동대표로 선출되었다. 199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지역구인 해운대를 떠나 전국구 2번으로 당선되었다.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5월 26일,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으나 김대중 공동대표에게 큰 격차로 패배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농촌 유권자들을 "민자당 지지" 또는 "노태우 지지"라고 비판하는 논란의 발언으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았다. 김대중은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했고, 이기택은 민주당의 단독 총재가 되었다. 그는 1993년에 총재로 재선출되었다.
민주당은 1995년 초 이종찬의 새한국당을 흡수하며 세력을 확장했고, 1995년 지방선거에서 승리하며 서울특별시장을 포함한 여러 광역단체장을 배출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직후 김대중이 공식적으로 정계에 복귀하면서 당내 갈등이 촉발되었다. 김대중을 비롯한 친김대중계 인사들은 민주당을 탈당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이기택은 총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당은 12월 21일 통합민주당으로 재창당되었다.
1996년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당시 여당이었던 신한국당의 김운환에게 패배하여 약 30년간의 국회의원 생활을 마감했다. 선거 패배 직후 그는 통합민주당의 총재로 선출되었다. 그는 국회 복귀를 계속 시도했으며, 1997년 재보궐선거에서는 고향인 포항시 북구에 출마했으나 박태준에게 패배했다. 그는 9월 11일 총재직에서 사임했으며, 조순 전 서울시장이 그의 뒤를 이었다.
조순 총재의 지도 아래 통합민주당은 소수 야당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한국당과의 합당을 결정했다. 두 당은 한나라당으로 통합되었고, 이기택을 포함한 대부분의 통합민주당 의원들은 새 당에 합류했다 (노무현 등 일부는 불참). 조순은 새로 창당된 한나라당의 총재가 되었다. 사실상 여당에 합류한 이기택은 이로써 처음으로 여권 정치인이 되었다. 그러나 한나라당의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이 새정치국민회의의 김대중에게 패배하면서 이기택은 다시 야당 정치인이 되었다. 한나라당이 1998년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자 조순은 총재직에서 사임했고, 이기택은 이회창이 새로 총재로 선출될 때까지 총재 권한대행을 맡았다.
2.5. 후기 정치 활동 (2000년대 이후)
2000년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한나라당은 공천을 둘러싼 내분을 겪었다. 이회창은 당에 대한 중진들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해 많은 중진들을 공천에서 탈락시켰고, 이기택 또한 이에 포함되었다. 그는 공천에서 탈락한 김윤환, 김광일, 그리고 재야 인사 장기표 등과 함께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는 부산 연제구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의 권태망에게 패배했다. 그해 민주국민당 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산상고 후배이자 과거 민주당 동지였던 새천년민주당의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며 유세에 나서기도 했다. 그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이 되었다. 노무현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이기택은 이후 참여정부의 노선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피력하며 정치적인 참여를 거부했다. 2004년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출마하지 않았다.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한나라당의 후보였던 이명박을 지지한다고 선언했다. 그는 이명박 선거대책위원회 상임고문을 맡았다. 이후 한나라당에 재입당했으며, 2008년 9월 1일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수석부의장에 임명되었다. 이는 이명박 지지에 대한 '보은성 인사'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후에도 여러 사회단체 활동에 참여했다.
3. 사상 및 정치적 입장
이기택은 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에서 일관되게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한 '평생 야당인'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 4·19 혁명 당시 학생운동을 주도한 경험은 그의 정치적 신념의 기반이 되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3선 개헌 시도에 맞서고, 전두환 신군부의 정치 규제에 반대하여 망명길에 오르기도 했다.
그의 정치 활동은 직선제 개헌을 주장하며 민주화를 추진하고, 김영삼과 김대중이라는 거물급 야당 지도자들과의 협력과 때로는 경쟁을 통해 야당의 통합과 분열의 중심에 있었다. 특히 1990년 3당 합당에 반대하며 독자적인 야당의 길을 걸었던 것은 그의 강직한 소신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그는 권력에 타협하지 않고 민주적 가치를 옹호하는 데 중점을 두었으며, 이는 그가 대한민국 민주화 과정에 기여한 핵심적인 부분이다.
3.1. 사생활
이기택은 이경의와 결혼하여 아들 이성호와 세 딸 이우인, 이지인, 이세인을 두었다. 그의 가족들은 태광그룹의 핵심 관계자들이기도 하다. 태광그룹의 창업자이자 초대 회장인 이임용은 이기택의 매형이며, 제2대 회장 이기화는 이기택의 친형이고, 제3대 회장 이호진은 그의 조카이다.
영화 '기생충'의 주인공 송강호가 연기한 김기택의 이름은 이기택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사망 및 유산
이기택은 2016년 2월 20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지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였다. 사망 전날, 그는 자신의 회고록인 우행우행한국어 (牛行, 소의 걸음)을 탈고했다. 이 회고록은 2017년 9월 15일에 출간되었다.
그의 사망 후 여러 정치인들이 그에 대한 추모의 메시지를 남겼다.
- 정세균 전 국회의장은 "이기택 전 총재님은 평생 불굴의 신념과 거침없는 행동으로 큰 울림을 주셨다"고 평했다.
-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이기택 전 총재님의 리더십은 온화함으로 대표된다"며 "고집을 꺾으면서도 뜻을 이루셨던 '경청의 리더십'은 절대적으로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 박원순 전 서울시장은 "4·19 혁명을 이끈 학생운동을 주도했던 분"이라며 "저는 후배로서 그분의 회고록을 통해 한국 정치의 역사를 더 깊이 배우게 될 것"이라고 언급했다.
5. 선거 결과
연도 | 선거구 | 소속 정당 | 득표수 (%) | 비고 |
---|---|---|---|---|
1967 | 전국구 (14번) | 신민당 | 3,554,224 (32.70%) | 당선 |
1971 | 부산 동래구 을 | 신민당 | 34,471 (65.89%) | 당선 |
1973 | 부산 동래구 | 신민당 | 57,757 (39.23%) | 당선 |
1978 | 부산 동래구 | 신민당 | 117,216 (40.14%) | 당선 |
1985 | 부산 남구·해운대구 | 신한민주당 | 159,127 (43.00%) | 당선 |
1988 | 부산 해운대구 | 통일민주당 | 54,223 (58.30%) | 당선 |
1992 | 전국구 (2번) | 민주당 | 6,004,578 (29.20%) | 당선 |
1996 | 부산 해운대구·기장군 갑 | 통합민주당 | 55,163 (47.65%) | 낙선 |
1997 | 경북 포항시 북구 | 통합민주당 | 35,137 (28.33%) | 낙선 |
2000 | 부산 연제구 | 민주국민당 | 26,060 (26.53%) | 낙선 |
6. 관련 항목
- 4·19 혁명
- 유진오
- 김영삼
- 김대중
- 이철승
- 전두환
- 노무현
- 이명박
- 신민당 (1967년)
- 신한민주당
- 통일민주당
- 민주당 (1990년 대한민국)
- 민주당 (1991년 대한민국)
- 통합민주당
- 한나라당
- 민주국민당 (2000년)
-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 태광그룹
- 3당 합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