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응우옌반비는 1916년 1월 16일 하노이의 중상류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하노이의 알베르 사로 고등학교에서 프랑스 교육 과정을 이수하여 1937년 고등 교육 자격 시험을 통과했다. 이후 1937년부터 1939년까지 하노이 대학교에서 법학을 전공했다.
2. 프랑스 식민 시대 군 경력
응우옌반비는 1939년 말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군 경력을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식민 정부의 군사 교육 기관에서 훈련을 받았으며, 특히 디엔비엔푸 전투에 참전하는 등 프랑스 식민 지배를 위한 군사 작전에 깊이 관여했다.
2.1. 프랑스 육군 복무
1939년 말, 응우옌반비는 프랑스군에 입대하여 선떠이에 있는 사관학교의 첫 번째 과정에 입학했다. 1년 후 졸업과 함께 소위 계급으로 임관했다. 1942년에는 중위로 진급하여 통킹 제4 보병연대 소대장을 맡았다. 1945년에는 대위로 진급하여 식민지 원정군 제19 보병연대 소대장으로 보직을 변경했다. 1945년 3월 9일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무장 해제시키자, 그는 바다를 건너 중국으로 탈출하여 프랑스군 마르셀 알레상드리 장군의 망명군에 합류했다. 1946년에는 남중국에 주둔한 베트남-프랑스 연합 특공대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947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재점령한 후 베트남으로 돌아온 그는 대위로 진급하여 베트남 북부 지역에 주둔한 인도차이나 기동대대 소속 제4 특공대대 대대장을 맡았다. 이후 대대원 전체가 공수 훈련을 이수하고 북베트남 공수대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1949년 초에는 제3 공수 특공대대 소속 제3 인도차이나 공수대대 대대장으로 전보되어 북베트남에서 여러 작전에 참여했다.
2.2. 한국 전쟁 지원
1952년 이후 응우옌반비는 한국 전쟁에 프랑스군 소속으로 참전하여 유엔군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그의 계급은 대령이었다.
3. 베트남국 군 경력
응우옌반비의 베트남국 군대에서의 복무는 프랑스 유학과 고위 직책 임명, 그리고 응오딘지엠과의 갈등으로 인한 망명으로 이어지는 격동의 시기를 포함한다.
3.1. 베트남국 군 복무
1950년 말, 응우옌반비는 소령으로 진급하여 프랑스 파리에서 고등 참모 과정을 유학했다. 6개월 후 과정을 마치고 귀국하여 중령으로 진급했다. 1952년 초, 그는 프랑스 국방부에 의해 베트남국 군대로 전입되었다.
1952년 2월, 응우옌반비는 대령으로 진급하여 응우옌반힌 소장을 대신해 바오다이 국정원장의 무관실 실장으로 임명되었다. 1954년 3월 초에는 해안 지역 사령관 겸 중부 베트남 총리 군사 보좌관으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 7월 20일 제네바 협정 체결 이후, 그는 소장으로 진급하여 바오다이 국정원장 무관실 참모총장으로 재임명되었다.
1954년 11월 19일, 바오다이 국정원장은 응우옌반힌 중장을 프랑스로 소환하고 응우옌반비를 임시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같은 해 12월 1일, 응오딘지엠 총리는 바오다이 국정원장의 동의 없이 레반띠 신임 소장을 참모총장으로 임명하는 법령에 서명했다. 응우옌반비는 응오딘지엠 총리를 지지하는 고위 장교들의 압력으로 인해 레반띠 장군에게 참모총장직을 인계할 수밖에 없었다. 응오딘지엠 총리는 그를 달래기 위해 군 총감 겸 바오다이 국정원장 무관실 참모총장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1955년 4월 28일, 바오다이 국정원장은 칸에서 응오딘지엠 총리에게 응우옌반비를 참모총장으로 추천한다는 전보를 보냈다. 1955년 4월 30일, 그는 응우옌뚜옌 대령과 함께 달랏에서 사이공으로 와서 레반띠 장군에게 참모총장직을 인계할 것을 요구했다. 같은 날 오후 독립궁에서 열린 회의에서 그는 작가 니랑에게 총으로 위협을 받기도 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재빨리 달랏으로 돌아갔고, 그곳에서 캄보디아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1955년 5월 12일, 사이공에서 응오딘지엠 총리는 그의 군 총감직을 해임하고 국정원장 무관실의 근위대를 베트남국 군대에 통합시켰다. 1955년 5월 21일, 그와 응우옌뚜옌 대령은 국가 안보 파괴 및 국가 반역죄로 군사 재판에 회부되었으나, 이미 두 사람은 프랑스로 망명한 상태였다.
4. 베트남 공화국 시기 군 및 정치 활동
응우옌반비는 1963년 응오딘지엠 대통령을 전복시킨 쿠데타 이후 프랑스에 망명 중이던 다른 장교들과 함께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4.1. 쿠데타 참여 및 망명/복귀
1963년 응우옌반비는 즈엉반민이 주도한 쿠데타에 참여하여 응오딘지엠 암살에 관여했다. 그러나 1년 후 응우옌카인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응우옌반비는 즈엉반민의 군사위원회 지휘부 일원이었다는 이유로 1964년 1월 쿠데타 당시 체포되었다. 응우옌카인 내각에 의해 체포되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되었다.
4.2. 육군 참모총장 임명
1964년 10월, 응우옌반비는 응우옌카인 중장이 총사령관으로 재직할 당시 총사령관실 사무총장(구 총참모부 사무총장 직책에 해당)으로 재임명되었다. 1965년 2월 중순, 응우옌카인 장군이 젊은 장군들의 압력으로 망명한 후, 총사령부는 총참모부로 다시 전환되었고, 그는 부응옥뚜언 중령을 대신하여 꽝쭝 국립 훈련 센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6월, 그는 똔텃딘 중장을 대신하여 군사 훈련 총국장으로 전보되었고, 꽝쭝 훈련 센터를 레응옥찌엔 대령에게 인계했다. 같은 해 11월, 군사 훈련 총국을 르몽란 소장에게 인계한 후, 부이흐우년 소장을 대신하여 총참모부 참모총장으로 임명되었다. 1967년 10월, 그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4.3. 국방부 장관 재임
1967년 2월, 당시 총리였던 응우옌까오끼는 응우옌반비와 까오반비엔 국방부 장관을 고위 군인들의 부패를 척결하기 위한 위원회에 임명했다. 1967년 11월 24일, 그는 쩐탄퐁 소장에게 참모총장직을 인계했다. 같은 날, 그는 응우옌반록 (1967년), 쩐반흐엉 (1968년), 쩐티엔키엠 (1969년) 등 역대 총리 내각에서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에 의해 1968년 5월 25일 까오반비엔을 대신하여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국방부 장관으로서 그는 남베트남 군인들을 위한 정부 운영 연금 기금인 군인 상호 원조 및 저축 기금(SMASF)을 관리하는 책임을 맡았다.
5. 논란과 몰락
응우옌반비는 국방부 장관 재임 중 군인 연금 기금 횡령 의혹에 휩싸이며 논란의 중심에 섰다. 이 의혹은 그의 해임과 가택 연금으로 이어졌다.
5.1. 연금 기금 횡령 의혹
1971년, 응우옌반비는 군인 연금 기금에서 NaN 경 USD를 횡령하여 개인 사업에 투자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그는 이 자금을 산업상업은행, 도로 및 교량 건설 회사인 비코(Vicco), 운송 회사인 비나바트코(Vi-navatco), 보험 회사인 이시코(Icico), 식품 가공 회사인 포프로코(Foproco) 등을 설립하거나 인수하는 데 사용했다고 알려졌다.
5.2. 해임 및 가택 연금
1972년 3월 22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군인 연금 기금 스캔들과 관련하여 응우옌반비의 고위 보좌관 5명을 해임했다. 결국 1972년 8월 6일,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횡령 및 부패 혐의로 그를 국방부 장관직에서 해임하고 가택 연금 조치를 내렸다. 1973년 3월, 그는 20년 이상 군 복무를 했다는 이유로 응우옌반라, 쩐응옥땀, 응오주, 린꽝비엔 등 다른 장군들과 함께 전역 조치되었다. 1974년 3월에는 해고되었다.
6. 사망
1975년 4월 30일 사이공 함락 이후, 응우옌반비는 새로운 정부에 의해 재교육 수용소로 소환되었다. 그러나 당시 중병을 앓고 있던 그는 민망 대학교 기숙사로 옮겨져 1975년 말까지 그곳에 구금되었다. 이후 생폴 병원으로 옮겨져 감시 하에 치료를 받았다. 1979년, 프랑스 국방부 차관인 비가르 장군의 하노이 방문 중 그의 개입으로 응우옌반비는 난치병 치료를 위해 프랑스로 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었고, 1981년 프랑스 생망데에 있는 베긴 군사 교육 병원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 훈장 및 포상
응우옌반비는 군 복무 중 여러 훈장과 포상을 수여받았다.
- 베트남 공화국 훈장
베트남 국가 훈장 (2등급) 베트남 육군 공로 훈장 (1급) 베트남 공군 공로 훈장 (1급)
- 외국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 (프랑스)
- 해외 원정 전쟁 십자 훈장 (프랑스 정부 수여)
- 전상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