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출생 및 가계
윤관은 1040년 음력 6월 1일(양력 7월 12일) 파평현에서 검교소부소감(檢校少府少監)을 지낸 윤집형(윤집형尹執衡한국어)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계는 파평 윤씨의 시조이자 삼한공신(三韓功臣)인 윤신달(윤신달尹莘達한국어)의 4대손이며, 윤신달 이전의 가계는 윤관의 공신 지위와 명성으로 인해 상세히 기록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윤관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그의 부인은 상장군 이성간(이성간李成幹한국어)의 딸인 인천 이씨(인천 이씨仁川 李氏한국어) 또는 경원 이씨였다. 이성간은 소성군개국백 이허겸의 손자이자 이자연의 당질녀였다. 윤관 부부는 슬하에 윤언인(윤언인尹彦仁한국어), 윤언순(윤언순尹彦純한국어), 윤언식(윤언식尹彦植한국어), 윤언이(윤언이尹彦頤한국어), 윤언민(윤언민尹彦旼한국어) 다섯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이 중 두 아들은 승려가 되었다. 윤언이는 『고려사』에 열전이 수록될 정도로 명성을 얻었고, 윤언순은 예종 때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남원부사(南原府使)에 이르렀다. 윤언식은 고상하고 우아한 자질로 빈객을 좋아했으며, 벼슬은 수사공 좌복야(守司空 左僕射)에 이르렀다. 윤언민은 총명하고 서화(書晝)에 능했으며, 인종 때 상식봉어(尙食奉御)가 되었다. 이처럼 윤관의 가문은 크게 번성하여 이후 왕실과 혼인을 맺는 등 당대의 명문가로 자리매김했다.
2. 초기 관직 생활
윤관은 문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며 관직에 진출했다. 그는 습유(拾遺)와 보궐(補闕) 등의 직책을 거쳤다. 1087년(선종 4년)에는 합문지후(閤門祗候)가 되어 출추사(出推使)로서 광주(廣州), 충주, 청주 지역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095년(숙종 즉위년)에는 좌사낭중(佐司郞中)이 되었고, 같은 해 `숙종`이 즉위하자 형부시랑 임의(任懿)와 함께 국신사(國信使)로 `요나라`에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렸다. 1098년(숙종 3년)에는 중서사인(中書舍인)을 거쳐 동궁시학사(東宮侍學士)가 되었으며, 이 재직 중 조규(趙珪)와 함께 `송나라`에 다시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숙종의 즉위를 알리고 귀국했다.
1099년에는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겸 한림시강학사(翰林侍講學士)가 되었으나, 당시 좌간의대부였던 임의와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간원(諫院)인 어사대(御史臺)에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중서성(中書省)의 건의를 받아 스스로 물러났다. 1101년에는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가 되었고, 같은 해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자 평장사(平章事) 최사추(崔思諏) 등과 함께 양주(楊州)에 파견되어 궁궐터를 물색하는 등 `남경` 건설 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 사업을 통해 1104년 5월 지금의 서울 지역에 남경궁(南京宮)이 건설되었다.
1102년에는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이굉(李宏) 등과 함께 진사시험을 주관했으며, 이어서 어사대부(御史大夫)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지냈다. 1103년에는 이부상서(吏部尙書) 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 겸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3. 개혁 정책
윤관은 `숙종` 재위 기간 동안 동궁시강, `어사대부`, 이부상서, 한림학사 승지 등 여러 고위직을 역임하며 `대각국사` `의천`과 함께 숙종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는 의천과 더불어 시정개혁을 담당하며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들을 추진했다.
주요 개혁 정책으로는 `남경` 건설, 금속 화폐 유통책 실시, 그리고 `신법` 제정 및 실시 등이 있었다. 또한 기존의 `호족` 세력을 억압하고 `과거 제도`와 추천제를 통해 새로운 관료들을 선발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당시 고려의 동북면과 연결된 갈라전(曷懶甸) 일대에는 여진 부족들이 거주하며 고려의 국경 지대를 왕래하며 부족한 생필품을 교역하고 있었다. 이들 부락의 추장 중 일부는 고려를 종주국으로 삼고 입조하기도 했으며, 고려는 이들에게 무산계(武散階)나 향직(鄕職)을 주어 회유하거나, 투항하는 여진족에게는 투화전(投化田)을 주어 정착시키기도 했다. 숙종 즉위 초, 윤관은 왕의 대리인으로서 여진족 추장들을 만나 관직을 하사하고 면담하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1106년을 전후하여 `우야소`(우야소烏雅束한국어)를 중심으로 여진 부족들이 통일 부락을 건설하며 고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1103년(숙종 8년)에는 우야소의 세력이 `함흥` 부근까지 진출하여 주둔함으로써 고려군과 여진군 간의 충돌이 임박했다. 이듬해에는 완안부 기병이 정주관(定州關) 밖에 침입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103년경부터 여진족 정벌에 대한 여론이 고조되었고, 윤관은 여진족 토벌의 필요성을 강력히 주장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숙종대 후반에 제기된 여진 정벌론은 여진족의 흥기와 고려 동북면 침입이라는 객관적 정세 변화뿐만 아니라, 국내의 정치 상황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1104년 여진족이 고려를 침공하자 윤관은 동북면병마행영사(東北面兵馬行營使)로서 첫 여진 정벌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일시적으로 강화(講和)를 맺고 돌아왔다.
4. 여진족 정벌 및 북진 정책
4.1. 별무반 조직과 3차 여진족 토벌 전쟁

1107년(예종 2년), 여진족의 심상치 않은 동태에 대한 변장(邊將)의 긴급 보고를 접한 윤관은 `예종`에게 여진족 토벌을 강력히 주청했다. 윤관은 이전 1104년의 여진 정벌 실패를 통해 고려군이 기병 전력에서 취약하다는 점을 깨닫고, `숙종`에게 기병 중심의 정예 군대 창설을 건의하여 `별무반`(별무반別武班한국어)을 조직했다. 별무반은 전국에서 말을 가진 자를 편입시킨 `신기군`(神騎, 기병), 20세 이상 남성 중 과거에 응시하지 않은 자를 편입시킨 `신보군`(神步, 보병), 그리고 승려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편성되었으며, 정규군과 마찬가지로 사계절 내내 훈련을 받았다.
예종의 명으로 윤관은 여진 정벌군의 원수(元帥)가 되었고, 지추밀원사 `오연총`(오연총吳延寵한국어)이 부원수(副元帥)로 임명되었다. 윤관은 별무반을 포함한 17만 대군을 이끌고 여진족 정벌에 나섰다. 초기 전술로, 윤관은 여진족을 공격하는 척하다가 후퇴한 뒤, 고려가 앞서 잡아둔 여진족 허정(許貞)과 나불(羅弗) 등을 돌려보내겠다는 거짓 통보를 보냈다. 이에 여진족 추장이 400여 명의 호송 병력을 보내오자, 윤관과 오연총은 이들을 유인하여 거의 섬멸하고 사로잡았다.
이후 윤관은 별도로 5만 3천 명의 병력을 편성하여 정주(定州)에 도착했다. 중군(中軍)은 `김한충`(金漢忠), 좌군(左軍)은 문관(文冠), 우군(右軍)은 김덕진(金德珍)이 지휘하게 했으며, 수군(水軍)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梁惟) 등이 2,600명의 병력으로 도린포(都鱗浦)의 바다로부터 공격했다. 윤관군의 기습 공격에 밀린 여진족이 동음성(冬音城)으로 숨자, 윤관은 정예 부대를 편성하여 추격하여 여진족이 재기할 틈을 주지 않고 격파했다. 다른 여진군이 숨어있는 석성(石城)은 `척준경`(척준경拓俊京한국어)에게 공격을 지시하여 패주시키고 섬멸했다.
4.2. 승전과 동북 9성 수축

이 3차 여진족 토벌 전쟁에서 고려군은 여진족의 전략적 거점 135개소를 무찌르고, 적군 4,940명을 사살했으며, 130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윤관은 전쟁 승리 보고를 조정에 올린 후, 오연총과 함께 탈환한 각지에 장수들을 파견하여 국토를 획정하고 `동북 9성`(동북 9성東北 九城한국어)의 축조를 감독했다. 현재 9성의 정확한 위치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으나, 일반적으로 함주(咸州)·영주(英州)·웅주(雄州)·길주(吉州)·복주(福州)·공험진(公鎭)·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으로 추정된다. 일부 학자들은 진양진과 숭녕진 대신 의주(宜州)와 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윤관은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이곳으로 이주시켜 살게 했다. 『고려사』 윤관전에 기록된 영주청벽기(英州廳壁記)에 따르면, 당시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공험진으로 이주한 가구 수는 총 6,466호에 달했다. 특히 `함흥` 평야의 함주에는 대도독부(大都督府)를 두어 9성 중 가장 중요한 요충지로 삼았다. 9성을 완공한 후에도 재침하는 여진족을 평정하며 국경을 튼튼히 방비했다.
1108년(예종 3년),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9개의 성벽을 쌓아 국경을 강화하고 개선하자, 예종은 그와 오연총에게 공신호를 내렸다. 윤관은 여진족을 북방으로 몰아내고 `북진 정책`을 완수한 공으로 영평(파평)백에 봉해졌으며, 이후 그의 후손들이 본관을 파평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나 고려가 9성을 개척하자, 그곳을 근거지로 삼았던 완안부의 `우야소`는 이에 반발하여 1108년 초 군사를 이끌고 `함경북도` 지역을 재침략하며 정면 대결을 시도했다.
4.3. 4차 여진족 토벌 전쟁
여진족은 다시 고려 변경을 침범했고, 1108년(예종 3년) 1월 윤관은 오연총, 척준경, `왕자지` 등과 함께 별무반을 이끌고 다시 출정했다. 가한촌(加漢村) 전투 중 험곡에서 윤관은 오연총과 함께 여진족에게 포위당하는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척준경이 후발대를 이끌고 급습하여 이들을 구출했다.
영주성(英州城) 공략에서는 왕자지가 이끄는 군대가 패퇴했으나, 역시 척준경의 용맹과 기지로 왕자지를 구출하고 여진군을 겨우 물리쳤다. 윤관은 숙종대 왕권 강화 시책의 주요 인물이었으며, 예종 즉위 초에도 정책 수행과 여진 정벌 추진의 중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우야소`는 다시 수만 명의 여진군을 이끌고 웅주성(雄州城)을 포위했다. 이 또한 척준경의 지략과 용기로 적을 패주시켰다.
1108년 3월 30일, 윤관은 346명의 포로, 96필의 말, 300두의 소를 노획하여 포로와 전리품을 가지고 개경으로 개선했다. 그는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에 책록되었고, `문하시중`(門下侍中) 겸 판상서이부사 지군국중사(判尙書吏部事 知軍國重事)에 임명되었다. 이어서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해졌으며, `식읍` 2,000호와 식실봉(食實封) 300호를 받았다.
5. 정치적 갈등과 만년
5.1. 여진족과의 화전과 동북 9성 반환

한편, 윤관이 `예종`에게 신임을 받는 것을 부정적으로 보던 일부 관리들은 윤관을 비방했으나, 예종은 이를 듣지 않았다. 고려의 정벌과 9성 설치로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여진족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무력 항쟁을 계속했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 9성을 돌려주고 생업을 편안히 해주면 자손 대대로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고 애걸하며 9성 반환을 간청했다.
이에 조정 내에서는 일부 주화파(主和派)들이 9성 반환을 주장했다. 윤관과 `오연총`은 9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당시 고려는 여진족의 공세 앞에 9성을 지키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또한 9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방어가 어려웠고, 무리한 군사 동원으로 백성들의 원망이 커지면서 조정 내에서는 화평론이 대세를 이루게 되었다. 서쪽에 강력한 `요나라`와 접경하고 있던 여진족은 고려와의 평화 회복이 절실했지만, 윤관의 9성 축조와 농업 이주민으로 인해 농경지를 빼앗긴 토착 여진족들은 강력히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여진족은 적극적인 강화 교섭을 개시했고, 7월 3일 `예종`은 육부(六部)를 소집하여 9성을 동여진 `우야소`에게 되돌려주는 것을 논의했다. 평장사 `최홍사`(崔弘嗣) 등 28명은 찬성했고, 윤관과 오연총, 예부낭중(禮部郎中) 한상(韓相)은 반대했으나, 당시 조정은 화평으로 기울어 있었다. 결국 9성을 여진족에게 돌려주기로 결정했고, 7월 18일부터 9성에서 철수가 시작되었다. 후대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아골타阿骨打한국어)가 강대한 국가를 세운 기반에는 그들이 9성을 다시 되찾은 것이 원인이 되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5.2. 공신호 삭탈과 생애 말년
1109년 5월, 길주성(吉주城)이 여진족에게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동계병마부원수(東界兵馬副元帥) `오연총`과 함께 다시 출정했다. 그러나 길주성을 포위한 여진족을 다시 공격하려다가 공험진(公險鎭)에서 기습 공격을 당해 공략에 실패했고, 화친을 맺고 돌아왔다. 같은 해 11월, 여진족의 계속된 침범을 막지 못한 책임을 물어 재상 최홍사 등의 탄핵을 받아 한때 관직과 공신의 자격을 박탈당하고 파면되었다. 명분 없는 전쟁으로 국력을 탕진했다는 비판과 함께 처벌하자는 주장도 대두되었다. 그는 회군 후 왕을 만나지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윤관은 숙종대에 이어 예종대에도 왕권 강화를 위한 정책을 충실히 수행한 정치 세력이었으므로, 패군한 장수가 영구히 관직을 삭탈당하는 일반적인 경우와 달리 예종의 특별한 배려로 다시 복직했다. 1110년(예종 5년) 복관되었고, 오히려 예종은 윤관에게 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郎 平章事)를 주고 가까이 두도록 명했다. 그러나 윤관은 나이가 많아 제대로 일을 할 수 없으므로 독서에 집중하고 싶다며 사직을 청했으나, 예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같은 해 수태보 `문하시중`(守太保門下侍中) 겸 판병부사 상주국 감수국사(判兵部事上柱國監修國史)에 임명되자 윤관은 표문을 올려 다시 사직을 청했으나, 예종은 역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관은 1111년 6월 15일(음력 5월 8일) 향년 72세로 사망했다.
6. 사후 평가 및 영향
윤관의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처음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나, `인종` 때 문경왕태후(文敬王太后)로 추존된 `예종`의 비의 `피휘`를 위해 문숙으로 고쳐졌다. 1130년(인종 8년)에는 예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었다. 사후에는 `무속` 신앙에서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 그의 묘는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있으며, 사적 제323호로 지정되어 있다.
윤관은 `여진족`을 토벌하고 `동북 9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력을 높인 점을 높이 평가받는다. 또한 만년에 공신호를 삭탈당하고 불우한 최후를 맞이한 것에 대한 동정 여론도 있다. 그는 숙종대 왕권 강화 시책의 한 주역이었으며, 예종 즉위 초기의 정책 수행과 여진 정벌 추진에서도 중심 세력으로 활약했다.
동북 9성의 정확한 위치는 수세기 동안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전통적으로는 현재의 `함흥` 일대에 축조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부 역사 자료들은 윤관이 `만주`의 일부를 고려 영토로 편입하여 `고구려`의 옛 땅을 일시적으로 수복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동북 9성 반환은 후대에 `금나라`가 강대한 국가로 성장하는 기반이 되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7. 개인 생활 및 가계
윤관의 직계 가족 외에 그의 가문은 고려와 조선 시대에 걸쳐 크게 번성했다. 그의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가 갈라졌고, 넷째 아들 윤언이의 혈통에서는 조선의 여러 왕비들을 배출하며 명문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윤언이의 후손 중에는 `희비 윤씨`(고려 충혜왕의 후궁), `정희왕후`(조선 세조비), `정현왕후`(조선 성종 3비), `장경왕후`(조선 중종 계비), `문정왕후`(조선 중종 3비), `숙빈 윤씨`(조선 인종의 후궁) 등이 있다.
- 조부:** 윤금강(윤금강尹金剛한국어) - 상서 좌복야
- 조모:** 나주 정씨 또는 개성 왕씨 (아버지의 생모는 나주 정씨로 추정)
- 부친:** 윤집형(윤집형尹執衡한국어)
- 모친:** 미확인
- 처:** 인천 이씨(인천 이씨仁川李氏한국어), 상장군 이성간의 딸 (이자연의 당질녀)
- 아들:** 윤언인(윤언인尹彦仁한국어) - 합문지후
- 손자:** 윤덕첨(윤덕첨尹德瞻한국어) - 전중시 내급사
- 아들:** 윤언순(윤언순尹彦純한국어) - 시어사
- 손자:** 윤중첨(윤중첨尹仲瞻한국어)
- 아들:** 윤언식(윤언식尹彦植한국어, ? ~ 1149년 5월) - 상서좌복야
- 며느리:** 하원군군 류씨(河源郡君 柳氏, `명의태후`의 동생)
- 아들:** 윤언이(윤언이尹彦頤한국어, ? ~ 1149) - 정당문학, 시호 문강
- 손자:** 윤인첨(윤인첨尹鱗瞻한국어) - 수태사, 시호 문정
- 손자:** 윤자고(윤자고尹子固한국어) - 국자감 박사
- 손자:** 윤돈신(윤돈신尹敦信한국어) - 이부시랑
- 손자:** 윤자양(윤자양尹子讓한국어)
- 손자:** 윤돈의(윤돈의尹敦義한국어)
- 손자:** 윤돈효(윤돈효尹敦孝한국어)
- 손녀:** 4명
- 아들:** 윤언민(윤언민尹彦旼한국어, 1095년 ~ 1154년 4월 23일) - 상식봉어
- 딸:** 황원도(황원도黃元度한국어)에게 출가
- 딸:** `임원후`(임원후任元厚한국어, 1089년 ~ 1156년)에게 출가
윤관의 8대손인 영평군(鈴平君) 윤보(윤보尹珤한국어, ? ~ 1329년)의 딸이 고려 충혜왕의 후궁 `희비 윤씨`이며, `충정왕`의 외조부가 된다. 윤보의 넷째 아들이자 윤계종의 동생인 양간공 윤안숙(尹安淑)의 아들 윤척(尹陟)에게서 윤승휴, 윤승도, 문하평리 윤승순(윤승순尹承順한국어), 윤승경, 판도판서 윤승례(윤승례尹承禮한국어) 형제가 태어났다. 윤승순의 아들 `윤곤`(윤곤尹坤한국어)은 윤삼산(尹三山)의 아버지이자 `윤호`(윤호尹壕한국어)의 증조부로, 윤호는 `정현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판도판서 윤승례의 아들 정정공(貞靖公) 윤번(윤번尹璠한국어)은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윤번의 아들이자 정희왕후의 오라비인 윤사윤(윤사윤尹士昀한국어), 윤사흔(윤사흔尹士昕한국어), 윤사분(尹士분) 형제 중 윤사윤의 후손인 윤여필(尹汝弼)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친정아버지이자 `윤임`(윤임尹任한국어)의 아버지이다. 윤번의 셋째 아들 윤사흔의 증손녀가 `문정왕후`이고, 고손녀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이다.
7.1. 사돈의 유래
`예종` 때 `여진`을 함께 정벌한 도원수 윤관과 부원수 `오연총`은 아들과 딸의 혼인으로 맺어진 사돈 관계이기도 했다. 어느 봄날, 잘 빚어진 술을 본 윤관이 하인에게 술동이를 지게 하고 오연총의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전날 밤 내린 소낙비로 개울물이 불어나 건널 수 없었다. 안타까움에 발을 구르고 있는데 개울 건너편을 보니 오연총도 술통을 옆에 두고 발을 구르고 있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개울을 사이에 두고 등걸나무 조각을 구해 걸터앉았다. 먼저 윤관이 술잔을 비운 뒤 개울 건너 오연총에게 잔 권하는 시늉을 했다. 오연총도 머리를 숙여 술잔을 받는 예를 표시한 뒤 스스로 채운 술잔을 비웠다. 이렇게 둘은 등걸나무(査)에 걸터앉아 서로 머리를 숙이며(頓首) 술잔을 주고받는 흉내를 내며 거나하게 마셨다. 이때부터 자식 사이의 혼인을 제안할 때 '사돈 하자'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고 한다. '사돈'의 뜻은 등걸나무(査)에 머리를 숙이다는 뜻의 돈수(頓首)의 합성어로, 등걸나무에 앉아 머리를 조아린다는 뜻이다.
- 아들:** 윤언인(윤언인尹彦仁한국어) - 합문지후
8. 묘지 분쟁 및 전승
윤관 장군 묘역(사적 제323호)은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에 위치해 있으며, `조선시대`부터 400여 년 동안 계속된 `산송`(묘지 다툼)으로도 유명하다.
1614년 `영의정`을 지낸 `심지원`(심지원沈之源한국어)이 윤관 장군 묘를 파헤치고 부친 등 일가의 묘를 잇따라 조성하자, 이에 반발한 파평 윤씨 가문은 1763년에 심지원의 묘 일부를 파헤치고 청송 심씨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다. 다툼이 발생한 고양 지역의 군수는 명문가의 다툼에 개입하기를 꺼려 이 문제를 조정에 넘겼다. 결국 당시 임금이었던 `영조`는 윤관의 묘와 심지원의 묘를 그대로 두고 양 가문이 합의하도록 종용했다.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는 조선시대에 각각 왕비를 4명, 3명씩 배출한 외척 가문이었기 때문에 영조도 섣불리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평 윤씨 가문에서 이에 불복하여 심지원의 묘를 이장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오히려 `곤장`을 맞고 `귀양`가다 병사(病死)하는 등, 두 가문의 불화는 더욱 깊어졌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노력이 있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2006년 음력 4월 10일, 파평 윤씨 대종회와 청송 심씨 대종회는 파평 윤씨 측이 이장에 필요한 부지를 제공하고 청송 심씨 측이 윤관 장군 묘역에 조성된 청송 심씨 조상 묘 19기를 이장하기로 합의하면서 조선시대부터 392년 동안 이어진 묘지 다툼을 끝내기로 하였다.
8.1. 전승
전승에 따르면, 윤관이 `함흥` 선덕진 광포(廣浦)에서 `거란족`에게 쫓길 때 `잉어`가 도와서 강을 건넜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전승 때문에 지금도 `파평 윤씨` 가문에서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한다.
8.2. 김부식과 윤언이
윤관은 글씨를 잘 써서 여러 글과 묘비명, 작품 등을 남겼으나 상당수가 실전되었다. 그가 쓴 `대각국사` `의천`의 묘갈명(墓碣銘)을 `김부식`이 임의로 수정하고 내용을 바꾸어버리자, 이를 불쾌하게 여긴 그의 아들 `윤언이`는 김부식과 앙숙이 되었다.
9. 관련 항목
- `파평 윤씨`
- `고려 문종`
- `고려 숙종`
- `고려 예종`
- `별무반`
- `척준경`
- `왕자지`
- `동북면`
- `동북 9성`
- `오연총`
- `윤언이`
- `여진족`
- `윤신달`
- `김부식`
- `거란족`
- `요나라`
- `남경`
- `의천`
- `우야소`
- `금나라`
- `금 태조`
- `심지원`
- `영조`
- `조선`
- `잉어`
- `과거 제도`
- `식읍`
- `본관`
- `피휘`
- `묘정`
- `무속`
- `산송`
- `희비 윤씨`
- `정희왕후`
- `정현왕후`
- `장경왕후`
- `문정왕후`
- `숙빈 윤씨`
- `윤계종`
- `윤곤`
- `윤호`
- `윤필상`
- `윤임`
- `문하시중`
- `시정개혁`
- `호족`
- `신법`
- `만주`
- `고구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