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육항(陸抗육항중국어)은 중국 삼국 시대 동오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자는 유절(幼節)이다. 그는 동오의 명재상 육손의 둘째 아들이자 손책의 외손자로, 226년에 태어나 274년에 사망했다. 육항은 아버지 육손의 뒤를 이어 오나라의 군사적 중책을 맡았으며, 특히 손호 황제 치세에 이르러 크게 활약하며 오나라의 마지막 기둥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72년 서릉 전투에서 부찬의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진나라의 침공군을 격퇴하며 뛰어난 군사적 역량을 입증했다. 또한, 적국의 장수 양호와 국경에서 평화적인 교류를 이어가며 외교적 지혜를 보여주었다. 육항은 폭정으로 기울던 손호에게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간언했으나, 그의 충언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육항의 사후 약 6년 뒤인 280년, 진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오나라는 멸망하게 되며, 이는 육항이 생전에 서쪽 국경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과 대조된다. 그는 당대와 후대에 걸쳐 충성심, 능력, 도덕성을 겸비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육항은 226년에 태어났으며, 동오의 명장이자 재상이었던 육손의 둘째 아들이다. 그의 어머니는 손책의 딸로, 육항은 손권의 외조카이기도 하다.
2.1. 출생과 가족
육항의 본관은 양주 오군 오현이다. 육항에게는 형인 육연(陸延육연중국어)이 있었으나 일찍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육손이며, 외할아버지는 손책이다. 육항의 아내는 장승의 딸이자 제갈각의 조카였으나, 253년 제갈각이 주살되면서 장씨 가문이 연좌되어 육항은 아내와 이혼해야 했다. 육항에게는 여섯 명의 아들 육안(陸晏육안중국어), 육경(陸景육경중국어), 육현(陸玄육현중국어), 육기(陸機육기중국어), 육운(陸雲육운중국어), 육담(陸耽육담중국어)과 세 명의 딸이 있었다. 이 중 딸 한 명은 일찍 사망했으며, 다른 두 딸은 각각 고겸과 고영에게 시집갔다.

2.2. 어린 시절과 교육
245년, 육항이 19세(혹은 20세)일 때 아버지 육손이 사망했다. 육항은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어 아버지의 휘하에 있던 병사 5천 명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의 관을 무창(武昌, 현 어저우)에서 고향인 오군(吳郡, 현 쑤저우)으로 옮겨 장례를 치른 뒤, 오나라의 수도 건업(建業, 현 난징)으로 가서 손권에게 감사를 표했다. 당시 손권은 육손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풀지 못하고 있었는데, 육항에게 양축(楊竺양축중국어)이 육손을 모함했던 20가지 혐의에 대해 추궁했다. 손권은 육항이 다른 사람과 만나지 못하게 하고 환관을 보내 심문하게 했으나, 육항은 침착하게 모든 질문에 조리 있게 답변하여 손권의 의심을 점차 풀리게 했다.
246년, 육항은 입절중랑장(立節中郎將)으로 승진하여 제갈각과 주둔지를 교환하게 되었다. 육항은 자신이 주둔하던 무창을 떠나 시상(柴桑, 현 주장)으로 이동하고, 제갈각은 시상에서 무창으로 이동했다. 육항은 떠나기 전에 무창의 성벽을 보수하고 거주지를 깨끗하게 정비했으며, 과수원도 손상되지 않도록 했다. 제갈각이 무창에 도착했을 때, 육항이 떠난 주둔지가 마치 새것처럼 잘 관리되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으며, 자신이 시상에서 떠날 때 주둔지를 엉망으로 남겨둔 것을 부끄러워했다.
251년, 육항은 병으로 인해 건업으로 가서 치료를 받았다. 병이 나아 임지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배웅했다. 손권은 육항에게 "이전에 내가 간언을 듣고 너의 아버지와 의리가 돈독하지 못했다. 이 일로 너에게 죄를 지었다. 이전에 너의 아버지에 대한 모든 문서를 불태워 아무도 볼 수 없게 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육손에 대한 자신의 후회를 드러냈다.
3. 경력 및 봉직
육항은 손권 시대에 군사적 재능을 인정받기 시작하여, 이후 손량, 손휴, 손호의 치세에 걸쳐 오나라의 핵심 군사 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가 방위에 크게 기여했다.
3.1. 손권 시대
육항은 245년 아버지 육손의 사망 후 건무교위에 임명되어 5천 명의 병사를 통솔하며 군사 경력을 시작했다. 246년에는 입절중랑장으로 승진하여 시상에 주둔했다. 251년에는 병 치료를 위해 수도 건업에 방문했으며, 이때 손권으로부터 육손에 대한 자신의 잘못을 사과받았다.
3.2. 손량 및 손휴 시대
252년 손권이 사망하고 그의 막내아들 손량이 즉위하자, 육항은 분위장군(奮威將軍)으로 승진했다. 257년, 위나라의 장수 제갈탄이 수춘(壽春, 현 서우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원군을 요청했을 때, 육항은 시상독(柴桑督)으로 임명되어 수춘으로 파견되었다. 그는 위나라의 편장군과 아문장을 격파하는 공을 세웠고, 이 공로로 정북장군(征北將軍)으로 승진했다. 이 시기에 주이가 위나라 대군에 연패한 후 총대장 손침에게 소환되었을 때, 육항은 주이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했으나 주이는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259년, 손량의 뒤를 이은 손휴 황제 치세에 육항은 진군장군(鎮軍將軍)으로 임명되었고, 서릉(西陵, 현 이창) 지역의 군사를 총괄하는 도독이 되었다. 그의 관할 구역은 관우의 여울(關羽瀨)부터 백제성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했다. 260년에는 가절(假節)의 권한을 부여받아 황제의 대리인으로서 군사적 권한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264년, 촉한이 위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자, 오나라는 촉한의 옛 영토인 영안성(永安城, 백제성)을 공격하기 위해 보협, 유평, 성만 등과 함께 육항을 3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견했다. 육항은 영안성 태수 나헌을 6개월간 포위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위나라의 형주자사 호열이 원군으로 도착하자 육항은 영안성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
3.3. 손호 시대 초기
264년 손휴가 사망하고 그의 조카 손호가 즉위하자, 육항은 진군대장군(鎮軍大장군)으로 승진하고, 명목상 익주목(益州牧)을 겸하게 되었다. 익주는 당시 오나라의 영토가 아니었다. 270년 대사마 시적이 사망하자, 육항은 신릉(信陵신릉중국어), 서릉, 이도(夷道이도중국어), 악향(樂鄉악향중국어), 공안(公安공안중국어) 등 여러 군사 지역의 도독을 맡게 되었고, 악향(현 쑹쯔 동쪽)에 주둔하며 이 지역의 군사 업무를 총괄했다.
이 시기 육항의 족형 육개는 손호에게 육항을 비롯한 유능한 인재들을 중용해야 한다고 간언했다. 육개가 269년에 사망한 후, 그를 미워했던 손호는 육개의 가족을 박해하려 했으나, 육항의 힘을 두려워하여 육항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4. 주요 군사 활동
육항의 군사 경력에서 가장 두드러진 부분은 형주 방어와 서릉 전투에서의 활약이다. 그는 뛰어난 전략적 통찰력과 지휘 능력으로 오나라의 서쪽 국경을 굳건히 지켜냈다.
4.1. 형주 방어 및 통솔
육항은 형주 지역의 핵심 방어 거점인 서릉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군사 업무를 총괄하며 오나라 서부 국경 방어의 중책을 맡았다. 그는 이 지역의 지형과 방어 시설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효율적인 방어 전략을 수립하고 실행했다. 특히 서릉은 오나라의 서쪽 관문으로, 이곳의 방어는 국가의 안위에 직결되는 중요한 임무였다. 육항은 이러한 전략적 중요성을 일찍이 간파하고 방어력 강화에 힘썼다.
4.2. 서릉 전투
서릉 전투는 272년에 발생한 육항의 가장 중요한 군사적 업적 중 하나이다. 이 전투는 오나라에 대한 부찬의 반란과 진나라의 개입으로 시작되었으며, 육항의 뛰어난 지휘로 오나라의 승리로 끝났다.
4.2.1. 반란 진압과 공성전
272년 가을 8월, 서릉독 부찬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고 진나라에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육항은 이 소식을 듣자마자 장수 좌혁(左奕), 오언(吾彥오언중국어), 채공(蔡貢) 등에게 즉시 서릉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또한 적계(赤谿적계중국어)부터 고시(故市고시중국어)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견고한 이중 포위망을 구축하도록 지시했다. 육항은 부하들에게 밤낮으로 쉬지 않고 마치 적이 당장이라도 도착할 것처럼 서둘러 방어 시설을 완성하라고 독려하여 병사들의 고통이 심했다.
육항의 부하 장수들은 "지금 우리 군의 예기로 부찬을 공격하면 진나라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반드시 함락시킬 수 있습니다. 왜 굳이 방어 시설을 구축하여 병사들의 힘을 소모합니까?"라고 간언했다. 그러나 육항은 "서릉성은 지세가 견고하고 식량이 충분하며, 내가 직접 방어 시설을 감독했기 때문에 그 견고함을 잘 알고 있다. 지금 당장 공격해서는 쉽게 함락시킬 수 없을 뿐더러, 북쪽의 진나라 원군이 반드시 올 것이다. 만약 원군이 왔을 때 방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안팎으로 적을 맞아 어려움에 처할 것이니, 어떻게 막아낼 수 있겠는가?"라고 설명하며 반대했다. 장수들이 거듭 공격을 주장하자, 육항은 자신의 판단이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한 차례 공격을 허락했다. 예상대로 공격은 실패했고, 그제야 장수들은 공격을 포기하고 육항의 명령에 따라 방어 시설 구축에 전념했다.
4.2.2. 진군과의 대치와 전략
진나라의 거기장군 양호가 군대를 이끌고 강릉으로 진격하자, 오나라 장수들은 육항에게 강릉 방어를 위해 서릉 공격을 중단하고 강릉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육항은 "강릉성은 방비가 견고하고 병력이 충분하여 걱정할 필요가 없다. 설령 적에게 강릉을 빼앗긴다 해도 그들이 오래 지킬 수 없을 것이며, 손실도 미미할 것이다. 하지만 서릉이 적에게 넘어가면 남쪽 산지의 이민족들이 모두 동요할 것이고, 그때의 우려는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강릉을 포기하더라도 서릉을 되찾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며, 더욱이 강릉은 원래부터 매우 견고하게 방어되어 있다"고 말하며 서릉 공략을 고수했다.
강릉은 평탄한 지대에 위치하여 도로가 통하기 쉬운 곳이었다. 그러나 육항은 일찍이 강릉독 장함(張咸)에게 명령하여 거대한 둑을 쌓아 강의 흐름을 막고, 그 물을 평탄한 지대로 유입시켜 도시 주변에 넓은 수역을 만들어 적의 침입을 막는 방어벽으로 활용하게 했다. 양호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 수역을 이용하여 배로 군량을 운송할 계획을 세우고, 둑을 파괴하여 육상 병력이 통과할 것이라는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육항은 이 소문을 듣고 양호의 계략을 간파하여 장함에게 즉시 둑을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육항의 장수들은 깜짝 놀라 적에게 이로운 일을 하는 것이라며 만류했지만, 육항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양호가 당양(當陽당양중국어, 현 징먼 남서쪽)에 이르렀을 때, 둑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낙담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배 대신 수레로 군량을 운송해야 했고, 이로 인해 시간과 노력을 크게 낭비했다.
진나라의 바동감군(巴東監軍바동감군중국어) 서윤(徐胤)은 수군을 이끌고 건평(建平, 현 쯔구이현)으로 향했고, 형주자사 양조(楊肇양조중국어)는 서릉으로 육상 병력을 이끌고 진격했다. 육항은 장함에게 강릉의 방어를 강화하도록 하고, 공안독(公安督공안독중국어) 손준(孫遵)에게는 남쪽 강변을 순찰하며 양호를 막도록, 그리고 수군독(水軍督수군독중국어) 유려(留慮)와 진서장군(鎮西將軍진서장군중국어) 주완(朱琬)에게는 서윤의 공격을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육항은 직접 세 군을 이끌고 이전에 구축했던 방어 시설에 의지하여 양조에 맞섰다. 그러나 장군 주교(朱喬)와 영도독(營都督영도독중국어) 유찬(俞贊)이 양조에게 투항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육항은 "유찬은 오랫동안 내 밑에서 일했기에 나의 허실을 잘 알고 있다. 그는 나의 군대에 이민족 병사들이 훈련되지 않아 명령을 잘 따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알므로, 분명 적에게 이 약점을 이용하라고 제안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에 육항은 그날 밤 즉시 군대의 이민족 병사들을 자신이 더 신뢰하는 노련한 병사들로 교체했다. 다음 날, 육항의 예상대로 양조는 교체된 사실을 모른 채 이전의 이민족 병사들이 주둔했던 부대에 공격을 집중했다. 육항은 궁병들에게 반격하라고 명령했고, 화살과 돌이 비 오듯 쏟아져 적에게 막대한 사상자를 입혔다.
한 달여가 지나자 양조는 육항을 뚫지 못하고 계책이 고갈되어 어느 날 밤 군대를 철수시켰다. 육항은 적을 추격하고 싶었으나, 서릉성 안에 남아있던 부찬이 그 틈을 타 뒤에서 공격할 것을 우려했고, 병력도 충분하지 않았다. 이에 육항은 북을 울리고 군사들에게 양조의 퇴각하는 병력을 추격할 준비를 하는 척 가장하게 했다. 양조의 병사들은 이를 보고 너무나 두려워 갑옷과 장비를 모두 버리고 도망쳤다. 육항은 소수의 경무장 병력을 보내 양조를 추격하여 적에게 궤멸적인 타격을 입혔다. 양호와 다른 진나라 장수들은 양조의 패배 소식을 듣고 군대를 철수했다. 육항은 마침내 서릉성을 함락시키고, 부찬과 그의 가족, 고위 장수들을 반역죄로 처형했다. 그러나 그 외의 병사들과 백성 수만 명은 육항의 요청으로 오나라 조정으로부터 사면을 받았다. 육항은 서릉성의 방어 시설을 수리한 후 악향으로 돌아갔다. 서릉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교만한 기색 없이 평소처럼 겸손하게 행동했으며, 이는 장병들의 더욱 큰 존경과 사랑을 받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 외교 및 대외 관계
육항은 적국의 장수와도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며 국경의 안정을 도모하는 등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다.
5.1. 양호와의 교류와 평화 정책
육항은 적국의 장수 양호와 적대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우정은 춘추 시대의 자산과 계찰의 교류에 비유되기도 했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냈을 때, 양호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술을 마셨다. 훗날 육항이 병에 걸리자 양호는 그에게 약을 보냈고, 육항 또한 아무런 의심 없이 그 약을 복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육항과 양호의 관계를 춘추 시대의 화원과 자반의 관계에 비유하며 높이 평가했다.
습착치의 저서 한진춘추에 따르면, 양호는 진나라 영토로 돌아간 후에도 도덕과 예의를 증진시켜 많은 오나라 백성들이 그에게 감명을 받았다. 육항은 오나라와 진나라 국경에 주둔한 오나라 군사들에게 "그들이 덕으로 다스리고 우리가 폭정으로 다스린다면, 싸우지 않고도 스스로 항복하게 될 것이다. 각자 맡은 구역을 잘 지키고 사소한 이익을 탐하여 문제를 일으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오나라와 진나라 국경은 평화와 안정을 유지했다. 양측은 적극적으로 긴장 완화 정책을 펼치며 조화롭게 지냈다. 한쪽의 소나 말이 실수로 국경을 넘어갔을 경우, 상대편은 소유자가 국경을 넘어와 소나 말을 찾아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국경에서의 사냥 중 어느 쪽 백성이 부상을 입으면, 상대편은 그들을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냈다. 육항이 병에 걸려 양호에게 약을 요청했을 때, 양호는 흔쾌히 응하며 "이 약은 품질이 뛰어납니다. 제가 직접 만들었는데, 아직 복용하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병이 위급하다고 하여 보내드립니다"라고 말했다. 육항의 부하들은 양호가 해를 끼칠까 염려하여 약을 복용하지 말라고 만류했지만, 육항은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약을 복용했다.
오나라 황제 손호가 오나라와 진나라 국경의 평화로운 관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육항을 질책하자, 육항은 "시골의 작은 마을이나 향리도 신의와 의리를 지키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대국이겠습니까? 신이 이와 같이 행동하지 않는다면, 오히려 양호의 덕을 더욱 드러낼 뿐이며, 양호에게 아무런 해가 되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일부 사람들은 육항과 양호의 이러한 행동이 각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저버린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습착치는 그의 저서 한진춘추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자는 천하의 보호를 받고, 신의를 지키는 자는 만인의 존경을 받는다. 비록 도덕이 붕괴하고 의로운 명성이 사라진 시대라 할지라도, 간사함과 권모술수가 판치는 세상에서 노예나 목동의 지혜를 가진 자라도 자신의 힘을 바탕으로 위대한 공적을 세울 수 있었다. 옛날 진 문공이 퇴각하여 원성이 항복을 청했고, 묵자가 고를 포위하고 힘으로 굴복시키려 했으며, 야부(冶夫야부중국어)가 비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스스로 귀순하게 했고, 악의가 난민들을 잘 대우하여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이들의 성공을 보면, 어찌 단순히 군사력과 전략으로 적을 물리친 것에 불과하겠는가?"
"천하가 삼분된 지 40여 년이 지났다. 오나라 사람들은 회수와 한수를 넘어 중원을 공격할 수 없었고, 중원 사람들도 장강을 넘어 오나라를 침공할 수 없었다. 이는 양측의 군사력과 지력이 대등하여 서로를 무너뜨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서로를 해쳐 개인적인 이득을 취하려 하기보다는, 자신을 성찰하고 서로를 해치지 않는 것이 어떠한가? 군사력으로 서로를 위협하기보다는, 덕행으로 상대방을 감화시키는 것이 어떠한가? 한 명의 필부조차도 무력으로 굴복시킬 수 없는데, 하물며 한 국가이겠는가? 무력으로 위협하기보다는 덕과 예의로 그들을 얻는다면, 어찌 그들이 굴복하지 않겠는가?"
"양호는 큰 뜻을 품고 적을 자기 백성처럼 대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인자함과 친절함으로 오나라의 폭정과 잔인함을 극복하고, 오나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며, 그들의 투지를 약화시켰다. 이로써 그는 적에게도 친절하고 관대한 명성을 얻었다. 오나라 사람들은 아마도 그와 같은 적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육항은 자신의 주군 손호가 폭군이며, 국가의 기반이 약해지고, 백성들이 진나라의 어진 정책을 흠모하여 심지어 자신들의 국가에 등을 돌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심사숙고 끝에 그는 오나라 내부와 국경의 평화를 유지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돕고, 폭정과 부패에 반대하는 유사한 정책들을 오나라에도 적용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경쟁국에 대해 우위를 점하고, 자신 스스로 덕을 실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며, 이러한 삶의 방식을 국가 전역과 그 너머로 확산시키려는 희망에서 비롯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무력 없이 적을 물리치고, 성벽과 방어 시설에 의존하지 않고 국가를 방어하며, 덕으로 적을 굴복시킬 수 있었다. 따라서 그는 개인적인 명성을 높이기 위해 간교한 수단으로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국경을 지키고 강토를 보존하는 것은 한 명의 병사도 할 수 있는 일이며, 숫자의 우위로 남을 위협하는 것은 소인의 일이다. 속임수를 쌓아 남을 방어하는 것은 노예의 하찮은 생각이며, 위력으로 평화를 구하는 것은 현명한 자가 경멸하는 바이다. 현인 군자가 세상을 구하고 후세에 모범이 된 것은, 개인적인 이익을 희생하여 더 큰 선을 이루고 도덕적 우위에 섰기 때문이다."
6. 정치적 조언 및 정책 제안
육항은 군사적 역량뿐만 아니라 뛰어난 정치적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손호의 폭정과 부패에 맞서 백성의 안녕과 국가의 효율적인 통치를 위한 정책 제안과 간언을 아끼지 않았다.
6.1. 손호에게 올린 상소
육항은 수도의 정령(政令정령중국어)에 많은 결함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이 우려하며 손호에게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는 17가지 정책 개혁안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다.
또한 당시 환관들과 하정(何定하정중국어) 같은 인물들이 권세를 농락하고 국정에 개입하는 것을 보고, 육항은 손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신이 듣건대, 국가를 세우고 선대의 업적을 계승하려면 비루한 인물을 등용해서는 안 됩니다. 요전에서는 행동과 말이 일치하지 않는 자들을 믿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옛 현인들은 그러한 행위를 혐오했으며, 공자 또한 이를 언급하며 탄식했습니다. 춘추 시대부터 진한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소인배들이 존재했고, 그들은 제국의 몰락을 초래했습니다. 그들은 중요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에 대한 근시안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비록 그들이 당신에게 친절하고 매우 성실해 보일지라도, 결코 중요한 책임을 맡겨서는 안 됩니다. 게다가 그들은 경멸스러운 본성을 바꿀 수 없으며, 충성심을 매우 빠르게 바꿉니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것을 잃을까 끊임없이 두려워하기 때문에, 개인적인 이익을 지키기 위해 종종 부도덕한 수단을 동원할 것입니다. 만약 그들에게 중요한 직책과 많은 권한을 부여하고, 그들이 모범이 되어 도덕을 지킬 것이라고 기대한다면, 이는 분명 불가능한 일입니다. 현재 조정의 관리들 중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들이 많지 않지만, 일부는 부유한 배경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았고, 또 다른 일부는 미천한 출신이지만 근면하고 끊임없이 자기 계발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그들의 능력을 활용해야 합니다. 무능한 관리들은 해고하여 정부를 재편하고 부패를 척결해야 합니다."
오나라와 진나라 사이에 끊임없이 전쟁이 벌어져 백성들이 피폐해지자, 육항은 손호에게 또 다른 상소를 올렸다.
"신이 듣건대, 주역은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고 타인의 결점을 알아차리는 것이 훌륭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상 탕은 부패한 하나라에 맞서 일어섰고, 주 무왕은 폭군 주왕을 타도했습니다. 만약 그들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면, 주왕은 옥대에서 흥청망청 놀 때도 불안했을 것이고, 주 무왕의 군대는 맹진에서 퇴각했을 것입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군사력을 강화하고, 국가를 부유하게 하며, 농업을 장려하는 데 집중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관리들은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공무원 시스템은 혼란에 빠져 있으며, 백성들은 평화롭지 못합니다. 폐하께서는 상벌을 더욱 명확히 하고, 관리들 사이에 도덕적 가치를 증진시키며, 인자함으로 국가를 다스린 후에야 하늘의 뜻을 따르고 천하를 통일할 수 있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관리들이 무법적으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거나, 진나라에 적극적으로 전쟁을 벌이거나, 황실의 재정 비축분을 개인적인 쾌락을 위해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병사들은 지쳐 있고, 적은 약해지지 않았으며, 신은 중병에 걸려 있습니다. 폐하께서는 사소한 이득을 위해 비루한 관리들이 제안하는 정책을 추구해서는 안 됩니다. 옛날 제나라와 노나라가 세 번 싸워 노나라가 두 번 이겼지만, 결국 제나라에 정복당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노나라가 전쟁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정확히 평가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 군대는 일부 승리를 거두었을지 모르지만, 그 이득은 우리가 잃은 것을 보상하기에 충분하지 않습니다. 역사서에는 백성들이 전쟁을 싫어한다는 것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은 폐하께서 옛 현인들의 조언을 따르고, 전쟁을 멈추고, 휴식과 회복에 집중하며, 적의 약점을 살피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폐하께서는 나중에 후회하실 것입니다."
273년, 육항은 대사마(大司馬)와 형주목(荊州牧)에 임명되었다. 274년 여름, 병이 위중해졌을 때, 그는 손호에게 마지막 상소를 올렸다.
서릉과 건평은 우리 국가의 변방 장벽이며, 하류에 위치하여 양쪽에서 적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배를 띄워 물의 흐름을 타고 빠르게 내려온다면, 순식간에 우리 문 앞에 도달할 것이며, 그때는 다른 지역의 원군을 불러도 너무 늦을 것입니다. 이는 국가의 생존에 매우 중요한 문제이며, 국경의 작은 땅을 잃는 것보다 훨씬 심각합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서쪽 국경에 주둔하며 서릉이 우리 국가의 서쪽 관문이며, 지키기는 쉽지만 잃기도 쉽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서릉의 방어를 강화하지 않는다면, 한 군을 잃는 것뿐만 아니라 형주 전체를 잃게 될 것입니다. 서릉이 공격받을 경우, 폐하께서는 국가의 모든 가용 병력을 동원하여 서릉을 지원해야 합니다. 제가 수년간 서릉에서 근무하면서 선친의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았습니다. 이전에 제가 정예 병력 3만 명을 요청했지만, 담당 관리들은 제 요청에 응하지 않았습니다. 부찬의 반란으로 서릉은 상당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지금 신이 통솔하는 지역은 수천 리에 달하며, 외부로는 강력한 적(진나라)에 둘러싸여 있고, 내부로는 다양한 이민족들이 있어 병력이 겨우 수만 명에 불과합니다. 이들은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으며, 갑작스러운 상황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신의 미천한 생각으로는, 모든 왕자들이 아직 어리고 국정에 관여하지 않았으니, 폐하께서 고문관을 임명하여 그들을 가르치고 지도하게 하시고, 그들의 개인 경호병 일부를 예비 병력으로 재배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많은 환관들이 비밀리에 개인 병력을 모집하고 있으며, 많은 남자들이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이 병력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폐하께서 철저한 조사를 명령하여 이러한 징집 회피자들을 모두 잡아내어 인력이 부족한 지역으로 보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이렇게 하면 신은 8만 명의 병력을 모을 수 있고, 현재 병사들은 휴식을 취할 수 있으며, 상벌에 있어 더욱 공정해질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설령 한신과 백기가 죽음에서 돌아온다 해도 이 위기를 해결할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신의 지휘 아래 병력이 충분하지 않다면, 신은 제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다는 확신이 없습니다. 신이 죽은 후에는 폐하께서 서쪽 국경에 더욱 주의를 기울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폐하께서 신의 조언을 받아들이고 고려해 주시기를 진심으로 바라며, 그렇게 된다면 신은 헛되이 죽지 않을 것입니다.
7. 사후 평가 및 영향
육항은 사후에도 오나라의 충신이자 명장으로 높이 평가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7.1. 역사적 평가
진수는 그의 저서 삼국지에서 육항의 전기를 쓰면서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육항은 충성스럽고 진실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니, 모두 아버지의 풍모를 지녔다. 대대로 아름다운 명성을 이어받았으며, 모든 면에서 아버지와 같지는 않으나 그와 비슷하여 가업을 잘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동진의 시중 하충은 "육항은 '살아있으면 오나라가 존재하고, 죽으면 오나라가 멸망한다'고 말해야 할 존재였다"고 평가하며, 그가 오나라의 존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인물이었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부 현명한 인사들은 육항이 부찬의 반란을 진압할 때 영아들까지 모두 죽인 것을 비판하며, 그의 자손들이 반드시 이 일에 대한 응보를 받을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실제로 육항의 아들인 육기, 육운, 육담은 팔왕의 난에 휘말려 일족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게 된다. 손혜는 주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원이 조정에 나아갈 때 섬길 주군을 잘 선택해야 한다고 한 것은 누구나 아는 바이다. 그러나 육씨 삼 형제(육기, 육운, 육담)는 모두 폭정이 횡행하는 조정에 출사하여 몸이 죽고 명예가 손상될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이는 참으로 비통한 일이 아닌가"라고 탄식하기도 했다.
육항은 당나라 사관이 선정한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 중 한 명으로, 그의 아버지 육손과 함께 무묘육십사장에 이름을 올렸다.
7.2. 후손 및 가문
육항은 274년 가을, 8월 20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사망했다. 그의 장남 육안(陸晏육안중국어)이 작위를 계승했다. 육안과 그의 동생들인 육경(陸景육경중국어), 육현(陸玄육현중국어), 육기(陸機육기중국어), 육운(陸雲육운중국어), 육담(陸耽육담중국어)은 아버지의 병력을 나누어 통솔하며 오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육안은 비장군(裨將軍비장군중국어)으로 임명되어 이도(夷道이도중국어)의 사령관을 맡았다. 280년, 진나라가 동오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캠페인을 시작했다. 진나라 장군 왕준은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진격하며 모든 오나라 영토를 점령했는데, 이는 육항이 손호에게 오나라 서쪽 국경 방어를 강화하라고 촉구했을 때 예견했던 바와 같았다. 육안은 280년 3월 22일 왕준의 군대와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육경 또한 오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으며, 진나라의 오나라 정복 전쟁 중에 전사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육기, 육운, 육담은 오나라가 멸망한 후 모두 진나라에 등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팔왕의 난에 휘말려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으며, 이로 인해 육항의 직계 가문은 단절되었다. 육항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는데, 한 명은 일찍 사망하여 육기가 애도문을 남겼고, 다른 두 딸은 각각 고겸과 고영에게 시집갔다.
7.3. 문학적 묘사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육항이 양호와의 우정을 이어가는 모습이 묘사된다. 소설에서는 손호가 이러한 우정을 의심하여 육항을 관직에서 해임하고, 육항은 실의에 빠져 병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실제 역사에서는 손호가 육항의 행동에 대해 질책한 기록은 있지만, 그를 해임하지 않았으며 육항은 관직에 있는 동안 병으로 사망했다.
육항과 양호의 관계에서 유래한 '양륙지교(羊陸之交양륙지교중국어)'라는 성어는 정치적 대립을 초월한 사적인 우정을 의미한다.
8. 관련 항목
- 삼국지 인물 목록
- 진수 (서진)
- 배송지
- 양호 (서진)
- 손호
- 삼국 시대 (중국)
- 동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