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유영(劉永Liu Yong중국어, ?년 ~ 27년)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에 걸쳐 활동한 중국의 군웅이자 정치가이다. 그는 전한의 양효왕 유무(劉武Liu Mu중국어)의 8세손이자 양왕 유립(劉立Liu Lip중국어)의 아들로, 양군 수양현(현 허난성 상추시 수양구) 출신이다.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경시제(更始帝Gyeongsi Je중국어)의 현한 정권이 혼란에 빠지자, 유영은 경시제로부터 양왕에 봉해진 후 독립적인 세력을 구축하며 동방 지역의 주요 군웅으로 부상했다.
유영은 자신의 형제들과 측근들을 주요 직책에 임명하고, 주변 군현을 공격하여 28개 성을 점령하는 등 군사적 확장을 꾀했다. 또한 교강(佼彊Gyo Gang중국어), 동헌(董憲Dong Heon중국어), 장보(張步Jang Bo중국어)와 같은 동방의 다른 군웅들을 포섭하여 광범위한 지역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25년 경시제가 적미군에게 패망하자 유영은 스스로 천자(天子Cheonja중국어)를 칭하며 황제에 오르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이는 곧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Hu-Han Gwangmuje중국어) 유수(劉秀Liu Su중국어)와의 치열한 대립으로 이어졌다.
유영은 광무제가 보낸 개연(蓋延Gae Yeon중국어), 오한(吳漢O Han중국어) 등의 장수들과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하며 세력이 약화되었다. 전쟁 중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을 잃는 개인적인 비극을 겪었으며, 결국 27년 도주 중에 자신의 부하인 경오(慶吾Gyeong O중국어)에게 살해당하는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다. 그의 사후 아들 유우(劉紆Liu Yu중국어)가 양왕으로 옹립되어 항전을 이어갔으나, 29년 유우마저 부하에게 살해당하며 유영의 양왕 정권은 완전히 종말을 고했다. 유영의 활동은 신나라 말기부터 후한 초기에 걸친 혼란기를 더욱 심화시켰으며, 광무제의 천하 통일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주요 군웅 중 하나로 평가된다.
2. 가계 및 초기 생애
유영의 가계는 전한의 황실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으며, 그의 초기 생애는 왕망 정권의 정치적 숙청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으나, 경시제 정권 하에서 양왕으로 봉해지며 독자적인 통치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2.1. 가계 및 혈통
유영은 전한의 양효왕 유무(劉武Liu Mu중국어)의 8세손으로, 한나라 황실의 후예였다. 그의 아버지인 유립(劉立Liu Lip중국어)은 양왕을 계승한 인물이었다. 유영의 가계는 유무에서 시작하여 유매(劉買Liu Mae중국어), 유상(劉相Liu Sang중국어), 유무상(劉無傷Liu Musang중국어), 유정국(劉定國Liu Jeongguk중국어), 유수(劉遂Liu Su중국어), 유가(劉嘉Liu Ga중국어)를 거쳐 유립으로 이어졌고, 그 다음이 유영이었다. 유영에게는 형제들로 유방(劉防Liu Bang중국어)과 유소공(劉少公Liu Sogong중국어)이 있었으며, 아들로는 유우(劉紆Liu Yu중국어)가 있었다.
2.2. 어린 시절과 왕으로서의 기반
유영의 아버지 유립은 한 평제(漢平帝Han Pyeongje중국어)의 외척인 위씨 가문과 교류가 있었는데, 이로 인해 왕망(王莽Wang Mang중국어)의 숙청 대상이 되었다. 3년(원시 3년)에 유립은 왕망에 의해 처형되었고, 이로 인해 유영은 아버지의 왕작을 계승하지 못했다.
23년, 경시제(更始帝Gyeongsi Je중국어) 유현(劉玄Liu Hyeon중국어)이 즉위하고 낙양(洛陽Nakyang중국어)에 입성하자, 유영은 경시제를 찾아가 알현했다. 경시제는 그를 양왕(梁王Yang Wang중국어)에 봉했으며, 전한 시대 양나라의 도읍이었던 수양(睢陽Suyang중국어)에 그대로 도읍을 두게 했다. 그러나 경시제 정권의 통치가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문란해지자, 유영은 경시제에게서 독립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는 그가 이후 군웅으로서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3. 양왕으로서의 활동과 세력 확장
경시제 정권의 혼란을 틈타 양왕 유영은 독립적인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주변 지역으로 군사적 영향력을 확대하며 동방의 주요 군웅들을 규합하는 데 주력했다.
3.1. 독립적 통치와 측근 임명
경시제 정권의 통치가 어지러워지자 유영은 경시제로부터 독립하여 독자적인 통치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형제들과 신뢰하는 측근들을 주요 관직에 임명하여 자신의 정권을 강화했다. 유영은 그의 형인 유방(劉防Liu Bang중국어)을 보국대장군(輔國大將軍Bogukdaejanggun중국어)으로 삼았고, 그 다음 아우인 유소공(劉少公Liu Sogong중국어)은 어사대부(御史大夫Eosadaebu중국어)에 임명하는 동시에 노왕(魯王No Wang중국어)으로 봉했다. 또한 주건(周建Ju Geon중국어)을 비롯한 지역의 호걸들을 초빙하여 장수로 삼는 등 군사적 역량을 강화했다.
3.2. 군사적 확장과 동방 세력 규합
유영의 군대는 주건의 지휘 아래 주변 군현에 대한 공격을 감행했다. 그들은 제음군(濟陰郡Jeeum-gun중국어), 산양군(山陽郡Sanyang-gun중국어), 패군(沛郡Paegun중국어), 초군(楚郡Chogun중국어), 회양군(淮陽郡Hoeyang-gun중국어), 여남군(汝南郡Yeonam-gun중국어) 등을 공격하여 총 28개 성을 획득하며 세력을 크게 확장했다.
유영은 군사적 확장과 더불어 동방 지역의 다른 강력한 군웅들을 자신의 영향력 아래로 끌어들이는 데 힘썼다. 그는 산양군(山陽郡Sanyang-gun중국어)의 서방(西防)에 근거지를 둔 교강(佼彊Gyo Gang중국어)을 횡행장군(橫行將軍Hoenghaengjanggun중국어)으로 임명했다. 또한 동해군(東海郡Donghaegun중국어)을 점거하고 있던 동헌(董憲Dong Heon중국어)을 익한대장군(翼漢大將軍Ikhan Daejanggun중국어)으로, 낭야군(琅邪郡Nangyagun중국어)을 평정한 장보(張步Jang Bo중국어)를 보한대장군(輔漢大將軍Bohan Daejanggun중국어)으로 삼았다. 이들 군웅들과의 연합 및 관직 부여를 통해 유영은 예주(豫州Yeju중국어), 연주(兗州Yeonju중국어), 청주(青州Cheongju중국어), 서주(徐州Seoju중국어)에 걸쳐 광범위한 지역을 자신의 통치 아래에 두는 데 성공하며 동방의 패자로 부상했다.
4. 황제 자칭 및 동한과의 충돌
경시제 정권의 몰락 이후 유영은 스스로 황제를 칭하며 동한의 광무제와 정면으로 대립하게 되었고, 이는 그의 군사적 패배와 비극적인 최후로 이어졌다.
4.1. 황제 선포
25년, 경시제(更始帝Gyeongsi Je중국어)가 적미군(赤眉軍Jeokmi-gun중국어)에게 패배하여 정권이 붕괴하자, 유영은 이 혼란을 틈타 스스로 천자(天子Cheonja중국어)를 칭하며 황제에 올랐다. 이로써 그는 명실상부한 독립 세력의 수장이자, 새로운 통일 왕조를 지향하는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Hu-Han Gwangmuje중국어)의 주요 경쟁자가 되었다.
4.2. 광무제와의 전쟁 및 패배
26년(건무 2년) 여름,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Hu-Han Gwangmuje중국어)는 호아대장군(虎牙大將군Hoadaejanggun중국어) 개연(蓋延Gae Yeon중국어) 등을 보내 유영을 토벌하게 했다. 광무제 군 내부에 내분이 발생하여 개연과 불화를 겪던 소무(蘇茂So Mu중국어)가 유영에게 귀순하자, 유영은 그를 대사마(大司馬Daesama중국어)이자 회양왕(淮陽王Hoeyang Wang중국어)으로 삼으며 환영했다.
그러나 개연의 공세는 멈추지 않았고, 유영의 수도인 수양은 몇 달 만에 포위되어 함락되었다. 유영은 가족들을 이끌고 양군(梁郡Yanggun중국어) 우현(虞縣U-hyeon중국어)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우현의 백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유영은 다시 패군(沛郡Paegun중국어) 초(譙Cho중국어)로 도주해야 했다. 소무(蘇茂So Mu중국어), 교강(佼彊Gyo Gang중국어), 주건(周建Ju Geon중국어)이 연합하여 유영을 구원하러 왔으나, 이들 역시 개연에게 패배했다. 유영은 교강과 주건의 호위 아래 산양군(山陽郡Sanyang-gun중국어) 호릉(湖陵Horeung중국어)으로 퇴각했다.
27년(건무 3년) 봄, 유영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장보(張步Jang Bo중국어)를 제왕(齊王Je Wang중국어)으로, 동헌(董憲Dong Heon중국어)을 해서왕(海西王Haeseo Wang중국어)으로 봉하며 이들을 자신의 진영에 묶어두려 했다. 특히 장보는 한나라에 항복했던 인물이었음에도 유영이 다시 봉작하며 자신의 수하로 끌어들이려 한 것은 그의 세력이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나라 군은 대사마(大司馬Daesama중국어) 오한(吳漢O Han중국어)이 합류하며 더욱 강력해졌다. 소무는 양군(梁郡Yanggun중국어) 우현(虞縣U-hyeon중국어) 광락성(廣樂城Gwangnakseong중국어)에서 패배하여 호릉으로 달아나는 등 유영군은 계속해서 열세에 놓였다. 한때 옛 본거지인 수양현의 백성들이 한나라 군을 몰아내고 유영을 다시 맞이하기도 했으나, 오한과 개연의 군대가 다시 수양을 포위하자 성내 식량이 고갈되었다. 결국 유영은 소무, 주건과 함께 성에서 탈출을 시도했다.
4.3. 개인적 비극과 죽음
유영은 우현에서 백성들의 공격을 받았을 때, 그의 어머니와 아내, 자식들이 살해당하는 참혹한 개인적 비극을 겪었다. 그는 겨우 수십 명의 수하들과 함께 도주할 수 있었다.
수양성 탈출 후 도주하던 중, 유영은 자신의 부하 장군인 경오(慶吾Gyeong O중국어)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경오는 유영의 수급을 가지고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Hu-Han Gwangmuje중국어)에게 투항했고, 광무제는 그에게 열후(列侯Yeolhu중국어)의 작위를 내렸다. 이로써 유영의 황제 자칭과 광무제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은 막을 내렸다.
5. 사후와 유산
유영이 살해된 후에도 그의 세력은 완전히 소멸하지 않았다. 그의 충성스러운 장수들인 소무(蘇茂So Mu중국어)와 주건(周建Ju Geon중국어)은 유영의 아들인 유우(劉紆Liu Yu중국어)를 새로운 양왕(梁王Yang Wang중국어)으로 옹립하며 후한에 대한 항전을 이어갔다.
그러나 유우를 중심으로 한 양왕 정권의 저항은 오래가지 못했다. 29년(건무 5년) 8월, 유우의 거점이었던 동해군(東海郡Donghaegun중국어)의 담성(郯城Tamseong중국어)이 한나라 군에게 함락되었다. 더 이상 도주할 곳이 없게 된 유우는 결국 자신의 부하인 고호(高扈Go Ho중국어)에게 배신당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을 끝으로 유영이 세웠던 양왕 정권은 완전히 붕괴되었고, 그들의 영토는 새롭게 일어선 후한 왕조에 통합되었다.
6. 역사적 평가
유영은 신나라 말기와 후한 초기의 극심한 혼란기에 등장한 주요 군웅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그는 왕망 정권의 붕괴와 경시제 정권의 무능을 틈타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심지어 황제를 자칭하는 등 강력한 야심을 드러냈다. 그의 행동은 당시 중국이 겪던 광범위한 권력 분열과 군웅할거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준다.
유영의 군사적 확장과 교강(佼彊Gyo Gang중국어), 동헌(董憲Dong Heon중국어), 장보(張步Jang Bo중국어) 등 동방 군웅들과의 연합 시도는 그가 상당한 전략적 역량과 정치적 수완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그의 야심은 결국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Hu-Han Gwangmuje중국어)의 통일 대업에 맞서게 되었고, 이는 그의 비극적인 패배와 죽음으로 이어졌다. 광무제의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 능력에 비견될 수 없었던 유영의 세력은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역사적으로 유영은 중국 통일을 방해하고 혼란을 가중시킨 군웅으로 인식된다. 그의 죽음과 양왕 정권의 멸망은 광무제가 동방 지역을 평정하고 후한 왕조의 안정을 확립하는 데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유영의 유산은 새로운 통일 왕조의 탄생을 위한 과도기적 혼란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안정적인 중앙집권적 제국이 재건되기까지의 격동적인 시대를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