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윌리스 해빌랜드 캐리어는 1876년 11월 26일 미국 뉴욕주 앵골라에서 듀언 윌리엄스 캐리어(1836년~1908년)와 엘리자베스 R. 해빌랜드(1845년~1888년)의 아들로 태어났다.
1.1. 어린 시절과 성장 과정
캐리어는 어린 시절부터 오래된 시계, 재봉틀 등 다양한 기계 장치를 수리하는 것을 즐기며 기계 다루는 재능을 보였다. 특히 수학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학을 공부했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R. 해빌랜드는 그가 11세이던 1888년에 사망했다. 윌리스라는 이름은 그의 어머니의 삼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캐리어 가문은 1663년에 토마스 캐리어라는 인물이 웨일스에서 아메리카 대륙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토마스는 정치적 망명으로 미국에 정착했으며, 이때 '캐리어'라는 성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의 초기 이주민 딸인 마사와 결혼했는데, 마사는 앤도버 시청과의 토지 경계 분쟁으로 인해 마녀로 고발당했다. 마사는 결국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1692년 8월 19일 세일럼 마녀 재판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녀의 두 아들(10세와 13세) 역시 어머니가 마녀임을 인정할 때까지 교수형에 처해질 위협을 받았다.
캐리어 가문은 1799년까지 뉴잉글랜드에 거주하다가 윌리스의 증조부모 대에 뉴욕주 매디슨군으로 이주했다. 1836년에는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여 이리군에 정착했으며, 윌리스는 이곳의 한 농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듀언은 원주민에게 음악을 가르치고, 잡화점을 운영했으며, 한때는 우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어머니 엘리자베스의 조상은 17세기에 뉴잉글랜드로 이주한 퀘이커교도였으나, 엘리자베스 자신은 퀘이커교도가 아닌 듀언과 결혼했다.
1.2. 교육
캐리어는 1894년 앵골라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897년 버팔로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1897년에 코넬 대학교에 입학했으며, 1901년 기계공학 석사 학위를 취득하며 졸업했다.
2. 경력 및 에어컨 발명
캐리어는 대학 졸업 후 버팔로에 위치한 버팔로 포지 컴퍼니에 연구 엔지니어로 입사했다. 이곳에서 그는 히터, 송풍기, 환기 시스템 등을 다루는 부서에서 목재와 커피콩을 건조하는 난방 시스템 설계 업무에 참여했다.
2.1. 최초의 에어컨 시스템 발명
1902년 7월 17일, 캐리어는 버팔로 포지 컴퍼니의 고객이었던 뉴욕주 브루클린의 새킷-빌헬름 석판출판사(Sackett-Wilhelms Lithographing & Publishing Company)로부터 의뢰를 받았다. 이 인쇄 회사는 여름철 높은 온도와 습도 때문에 용지가 변형되어 인쇄 품질이 저하되는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특히 여러 색상을 인쇄할 때 같은 용지를 최대 네 번까지 통과시켜야 했기 때문에 용지의 수축과 팽창은 심각한 문제였다. 캐리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기기의 설계도를 제출했으며, 이 설계도가 세계 최초의 현대식 공기 조화 시스템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1902년에 설치된 이 시스템은 단순히 온도를 낮추는 것을 넘어 습도 조절 기능을 추가했다는 점에서 현대 에어컨의 탄생으로 평가된다. 당시 공기 조화 분야의 전문가들은 에어컨이 다음 네 가지 기본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 온도 조절
- 습도 조절
- 공기 순환 및 환기 제어
- 공기 정화
2.2. 에어컨 기술의 발전과 특허
수년간의 개선과 현장 시험을 거쳐, 캐리어는 1906년 1월 2일 '공기 취급 장비'(Apparatus for Treating Air영어)라는 이름으로 미국 특허 808897을 획득했다. 이 장비는 세계 최초의 분무형 공기 조화 장치로, 물을 가열하거나 냉각하여 공기의 습도를 조절하도록 설계되었다. 이 장치의 첫 번째 모델은 1906년 말 라크로스 내셔널 은행에 납품되었다.
1906년 캐리어는 "일정한 이슬점 강하가 실질적으로 일정한 상대 습도를 제공한다"는 원리를 발견했으며, 이는 나중에 공기 조화 엔지니어들 사이에서 "일정 이슬점 강하 법칙"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 이 발견을 바탕으로 자동 제어 시스템을 설계했고, 1907년 5월 17일에 관련 특허를 출원하여 1914년 2월 3일에 미국 특허 1085971을 최종 승인받았다. 이로 인해 캐리어는 "이슬점 제어"의 발명가로도 불린다.
1911년 12월 3일, 캐리어는 미국기계공학협회 연례 회의에서 공기 조화에 관한 가장 중요한 문서 중 하나로 평가받는 논문인 〈합리적 건습 공식〉(Rational Psychrometric Formulae영어)을 발표했다. 이 문서는 상대 습도, 절대 습도, 이슬점 온도의 개념을 서로 연결하여, 주어진 환경에 정확히 맞는 공기 조화 시스템을 설계할 수 있도록 하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 논문은 공기 조화 시스템 설계의 가장 기초적인 자료가 되었으며, "건습계의 대헌장"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2.3.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 설립
1914년 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캐리어가 12년간 근무했던 버팔로 포지 컴퍼니는 사업 활동을 제조에 전념하기로 결정하고 새로운 개발을 중단했다. 이에 캐리어는 공기 조화 기술의 잠재력을 확신하고 자신만의 회사를 설립하기로 결심했다. 1915년 6월 26일, 캐리어를 포함한 일곱 명의 젊은 엔지니어들은 자신들의 평생 저축인 3.26 만 USD를 모아 뉴욕주에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Carrier Engineering Corporation영어)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곧 뉴저지주 뉴어크의 프렐링하이젠 애비뉴에 자리를 잡았다.
2.4. 캐리어 코퍼레이션의 성장과 영향력
1920년대에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은 원심형 냉장기를 개발하고 상업용 건물 냉방을 위한 공기 조화 시스템 시장에서 급격한 성장을 이루었다. 초기에는 주로 산업 현장에서 사용되던 에어컨은 점차 민간 부문으로도 확산되기 시작했다. 1924년 디트로이트의 허드슨 백화점, 1925년 뉴욕의 리볼리 극장에 캐리어 사의 에어컨이 설치되었으며, 1928년에는 미국 의회, 1929년에는 백악관에도 진출하며 그 영향력을 넓혔다.
그러나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대폭락으로 인한 대공황의 여파로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은 다른 많은 기업들과 마찬가지로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결국 1930년, 캐리어 엔지니어링 코퍼레이션은 브런즈윅-크뢰셸 컴퍼니(Brunswick-Kroeschell Company영어)와 요크 난방환기 회사(York Heating & Ventilating Corporation영어)와 합병하여 캐리어 코퍼레이션(Carrier Corporation영어)을 설립했으며, 윌리스 캐리어는 이사회 의장으로 취임했다.
대공황은 주거용 및 상업용 에어컨의 보급 속도를 늦추었다.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한때 뉴저지주와 펜실베이니아주의 네 개 도시에 분산되어 운영되었으나, 1937년 캐리어는 회사를 통합하여 뉴욕주 시라큐스로 본사를 이전했다. 이후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뉴욕주 중부 지역에서 가장 큰 고용주 중 하나가 되었다.
1939년 뉴욕 만국박람회에서 캐리어는 이글루 모양의 전시관을 통해 방문객들에게 미래의 공기 조화 기술을 선보였으나, 에어컨이 대중화되기 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캐리어가 사망한 후인 1950년대의 전후 경제 호황기에 접어들면서 에어컨은 비로소 엄청난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955년에는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 기본 사양 중 하나로 에어컨을 채택하면서 급속히 확산되었고, 같은 해 캐리어 사의 매출은 51.00 억 USD를 기록했다.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넓은 공간을 냉각하는 냉장 기계의 설계 및 제조를 개척했다. 여름철 산업 생산성을 크게 향상시킴으로써 공기 조화 기술은 미국인의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1920년대부터 주거용 에어컨이 도입되면서 선벨트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이 촉진되기도 했다. 1930년에는 일본에 도요 캐리어(Toyo Carrier영어)를 설립했으며, 한반도에도 공장을 세웠다.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1980년 유나이티드 테크놀로지스 코퍼레이션의 자회사가 되었으나, 2020년 다시 독립적인 상장 회사로 분사되었다. 캐리어 코퍼레이션은 현재까지도 상업 및 주거용 HVAC 및 냉장 분야의 세계적인 선두 기업으로 남아있다. 2007년에는 150.00 억 USD 이상의 매출을 기록하고 약 45,000명의 직원을 고용했으며, 2018년에는 매출 186.00 억 USD에 53,000명의 직원을 두었다.
3. 개인사
윌리스 캐리어는 평생 세 번 결혼했다.
3.1. 가족 및 결혼
캐리어는 코넬 대학교에서 에디스 클레어 시모어(Edith Claire Seymour영어)를 만나 1902년 8월 29일에 결혼했다. 에디스는 1912년에 사망했다. 그는 1913년 4월 16일 제니 티프트 마틴(Jennie Tifft Martin영어)과 재혼했으며, 제니는 1939년에 사망했다. 세 번째 결혼은 1941년 2월 7일 인디애나주 테레호트 출신의 엘리자베스 마시 와이즈(Elizabeth Marsh Wise영어)와 했다. 캐리어와 그의 세 아내는 모두 뉴욕주 버팔로에 있는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장로교 신자였으며, 시라큐스에 거주했다.
3.2. 자녀
캐리어는 하워드 카터 윌리스(Howard Carter Willis영어)라는 한 명의 친자녀를 두었다. 또한 그는 두 번째 아내 제니 마틴의 자녀인 버논 가드너 캐리어(1903년~1985년)와 얼 가드너 캐리어(1905년~1983년)를 입양했다.
4. 사망
윌리스 캐리어는 1950년 10월 7일 코넬 의학 센터에서 73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사망 당시 코넬 대학교의 이사였다. 그의 시신은 뉴욕주 버팔로의 포레스트 론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5. 유산 및 평가
윌리스 캐리어의 발명은 현대 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는 다양한 수상과 영예를 통해 그 업적을 인정받았다.
5.1. 사회 및 산업에 미친 영향
에어컨의 발명은 특히 여름철 산업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증가시켜 미국 산업에 혁명을 가져왔다. 이는 더운 기후에서도 효율적인 작업 환경을 가능하게 하여 공장의 생산량 증대와 새로운 산업의 발전을 촉진했다. 또한, 에어컨은 사람들의 생활 방식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특히 1920년대부터 주거용 에어컨이 보급되면서, 과거에는 거주하기 어려웠던 더운 기후의 선벨트 지역으로의 인구 이동을 촉진하여 미국의 인구 분포와 경제 지도를 변화시키는 데 기여했다. 1955년 건설업자 윌리엄 레빗이 주택의 기본 사양으로 에어컨을 채택하면서 에어컨은 미국 가정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5.2. 수상 및 영예
윌리스 캐리어는 과학과 산업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여러 명예 학위와 상을 받았다. 1935년 르하이 대학교에서 공학 학위를, 1942년 알프레드 대학교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또한 1942년에는 프랭크 P. 브라운 메달을 수상했다. 사후에는 1985년 미국 발명가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2008년에는 버팔로 과학 박물관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5.3. 기념 사업
윌리스 캐리어의 이름을 딴 시설로는 시라큐스 대학교의 환경 및 에너지 시스템 우수 센터에 위치한 윌리스 H. 캐리어 총체적 실내 환경 품질 연구실(Willis H. Carrier Total Indoor Environmental Quality Lab영어)이 있다. 이 연구실은 2010년 캐리어 코퍼레이션의 기부로 설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