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배경 및 초기 활동
위만은 원래 중국 춘추전국시대 연나라의 군사 지도자였다. 기원전 196년, 한나라의 고조가 연왕(燕王) 장도의 반란을 진압한 후, 노관을 새로운 연왕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195년, 고조는 노관이 모반을 꾀한다고 의심하여 공격을 명령했고, 노관은 흉노로 망명하였다. 이 정치적 혼란 속에서 위만은 천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하여 고조선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위만이 처음 정착한 곳은 패수(浿水, 현재의 압록강으로 추정)를 건너 진(秦)의 옛 공지(空地)였던 상장(上鄣)과 하장(下鄣) 일대였다. '상장과 하장'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선주민이 없는 황무지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계곡이나 바다 바깥의 평평한 지역, 즉 평야나 하중도를 가리키며, 과거 중국 세력이 이 지역에 진출하여 무인 공터에 군사 요새를 건설하고 인근 선주민을 지배했던 곳을 의미한다. 진나라 멸망 이후 중국이 혼란에 빠지자, 제나라, 조나라, 연나라 백성들이 연이어 고조선으로 망명하거나 피난하였다. 위만은 이러한 망명자들을 규합하며 세력을 키웠다.
1.1. 연나라에서의 활동
위만은 연왕 노관의 휘하에서 군사 지도자로 활동하였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따르면 위만이 연나라의 대재상(大相国)이었다는 기록도 있어, 그가 노관의 핵심 측근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노관은 한 고조의 어린 시절 친구였으나, 모반 혐의로 한나라 군대의 토벌을 받게 되면서 기원전 195년에 흉노로 망명하였다. 위만은 이 시기에 동쪽으로 피신하게 된다.
2. 고조선 망명 및 왕위 찬탈
연나라에서의 정치적 혼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망명한 위만은 초기에는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수비하는 역할을 맡았으나, 점차 세력을 키워 기존의 준왕을 축출하고 위만조선을 건국하게 된다.
2.1. 고조선으로의 망명
노관의 반란과 망명으로 연나라가 혼란에 빠지자, 위만은 1,000여 명의 무리를 이끌고 고조선으로 망명하였다. 이들은 고조선식 복장을 하고 위만 자신도 상투를 틀고 다른 깃털을 꽂은 독특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위만은 고조선의 준왕에게 서쪽 변방의 번병(藩屛), 즉 울타리 역할을 하겠다고 청하였다. 준왕은 위만을 박사(博士)로 삼아 100리(약 40 km)의 땅을 주고 서쪽 변방을 지키게 하였다. 위만은 이 지역에서 연나라 출신 망명자들을 규합하여 자신의 세력을 강화하였다.
2.2. 준왕 축출 및 위만조선 건국
세력을 키운 위만은 기원전 194년경, 준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위만은 한나라가 공격해 온다고 거짓 보고하며 준왕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수도인 왕검성에 진입하였다. 준왕은 위만에 맞서 싸웠으나, 위략에 따르면 "준은 만과 싸웠으나 승부가 되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위만의 군사적 우위가 확연했음을 보여준다. 위만은 군사적 우위를 활용하여 준왕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스스로 '왕'이 되어 위만조선을 건국하였다. 준왕은 남쪽의 진국으로 망명하여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사기에는 위만이 준왕을 멸망시켰다는 직접적인 서술이 없기 때문에, 일부 학자들은 기자조선이 허구는 아닐지라도 토착 호족들의 느슨한 연합체였으며, 그 왕은 제사 동맹의 우두머리인 '제사왕'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따라서 사기에서는 위만과 기자조선의 교체를 왕조의 교체로 보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3. 위만조선 통치
위만은 왕위에 오른 후 왕검성을 수도로 삼아 위만조선의 통치 체제를 구축하고, 주변 지역을 복속시키며 영토를 확장하였다. 또한 한나라와의 관계를 설정하여 국가의 안정과 번영을 도모하였다.
3.1. 수도와 통치 체제
위만조선의 수도는 왕검성(王儉城 또는 王險城)으로, 일반적으로 현재의 평양으로 비정된다. 그러나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논쟁과 함께, 위만의 지배 영역이 한반도 서북부가 아닌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소수 의견도 존재한다. '마자수'(馬訾水)를 압록강으로, '패수'(浿水)를 압록강, 청천강, 또는 대릉하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며, 위만조선의 영토가 북쪽으로 한나라와 접경하고 있었다는 점은 공통된 인식이다. 평양이 왕검성의 가장 유력한 후보지로 꼽히지만, 아직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위만은 형식적으로 한나라의 외신(外臣)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병력과 재물을 얻었다. 위만조선은 위만을 중심으로 한 재지 한인 호족들과의 연합 정권적 성격을 띠었으며, 한나라로부터 국경을 수호하는 역할을 수행했기에 군사적 성격이 매우 강했다. 위만조선의 정권은 위만의 고조선 침공에 따른 연나라 사람들, 진번과 고조선의 토착 '만족', 그리고 위만조선 건국 이후 하북, 산동, 요동에서 이주해 온 한인들로 구성된 연합체였다.
3.2. 영토 확장 및 대외 관계
위만은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의 작은 나라들을 침략하여 복속시켰다. 이 과정에서 진번(眞番)과 임둔(臨屯) 등 여러 지역을 병합하여 수천 리에 달하는 영토를 가지게 되었다.
한나라와의 관계에 있어서, 한나라가 아직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던 시기인 기원전 191년 또는 기원전 192년경, 요동 태수는 위만을 외신으로 임명하였다. 이는 위만이 한나라로 향하는 토착민들의 이동을 막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이루어졌으며, 한나라가 동방으로부터의 이민족 침입에 대비하고 위만의 조선 방면 지배권 확대를 지지하는 의미를 가졌다. 위만은 이러한 관계를 통해 군사력과 경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4. 한나라와의 관계 및 멸망
위만조선은 위만 통치 시기부터 한나라와 외교적 관계를 맺었으며,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 대에 이르러 한나라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였다. 위만은 한나라의 외신으로서 동방의 이민족 침입을 방비하는 역할을 맡았고, 한나라와의 중계 무역을 통해 경제적 이득을 취했다. 그러나 이는 한나라의 간섭을 초래하는 요인이 되기도 했다.
위만조선은 위만의 손자인 우거왕이 즉위한 후에도 강력한 국력을 유지하며 주변 소국들을 복속시키고 중계 무역의 이점을 독점하였다. 그러나 이로 인해 한나라의 견제가 심화되었고, 결국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대규모 침공을 받아 멸망에 이르게 된다.

5. 가족 관계
위만은 위만조선의 초대 왕으로서, 그의 직계 가족은 다음과 같다.
- 아들: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으며, 위만조선의 2대 왕이 되었다.
- 손자: 우거왕(右渠), 위만조선의 3대이자 마지막 왕이다.
- 증손자: 위장(衛長) 또는 위장강(衛長降)이다.
위만조선 역대 왕 | |
---|---|
위만 | 기원전 194년경 ~ 기원전 161년경 |
(이름 불명) | 기원전 161년경 ~ ? |
우거왕 | ? ~ 기원전 108년 |
6. 역사적 평가 및 논쟁
위만의 국적 문제, 통치 방식, 그리고 위만조선의 성격에 대해서는 역사학계에서 다양한 해석과 논쟁이 존재한다. 이러한 논쟁은 위만조선의 정체성과 한반도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상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는 데 기여한다.
6.1. 국적 및 기원 논쟁
위만이 연나라 출신인지, 아니면 고조선계 유민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다. 사기와 한서 등 현존하는 사료들은 위만을 '옛 연나라 사람'(故燕人)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이러한 기록을 바탕으로 위만이 연나라 사람으로서 고조선을 식민 통치했다고 주장하는 식민사학의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신채호는 위만이 찬탈한 지역은 고조선의 일부에 불과하다고 반박하기도 했다.
이병도는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할 때 상투를 틀고 조선인 옷을 입었다는 기록을 근거로 위만이 사실은 고조선계 유민 출신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 이는 연나라 장수 진개의 침공으로 요동반도를 빼앗겼을 때, 다른 지역으로 도망가지 않고 그 지역에 남아 연나라 사람으로 흡수된 조선인이라고 보는 시각이다. 연나라가 원래 베이징을 포함하는 허베이성 일대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요동 출신이 아니더라도 연나라 사람일 수 있으며, 물론 요동 출신도 연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위만이 상투를 틀고 오랑캐 옷을 입은 채 망명한 것만으로 고조선계라고 보는 것은 근거가 부족하다는 비판도 있다. 망명 시 옷차림을 바꾸었다는 것 자체가 그전까지는 그러한 머리 모양과 옷차림을 하지 않았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또한 망명이라는 정치적 행위와 함께 머리와 복장을 바꾼 것은 망명지인 고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수용하여 호감을 사기 위한 행위였을 수도 있다. 실제로 남월의 조타처럼 외지인이 현지식 복색을 하는 사례는 고고학적으로도 확인된다.
6.2. 위만조선의 성격
위만조선이 기존 고조선의 정체성을 계승했는지, 아니면 새로운 왕조인지에 대한 학계의 견해도 다양하다. 일제시대 학자들은 위만이 연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위만조선이 중국의 식민 정권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최근에는 위만이 조선을 통치하면서도 국호나 정치체제, 수도 등을 옮기지 않고 기존 고조선의 정체성을 어느 정도 유지하였으므로, 지배층이 중원 출신이라고 해도 국가의 정체성은 고조선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즉, 연나라의 지배층과 고조선의 토착 지배층이 연합한 정권적 성격을 가졌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7. 영향 및 유산
위만과 위만조선은 한반도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위만조선은 철기 문화를 본격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켜 한반도 북부 지역의 생산력과 군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또한, 한나라와 남방의 여러 소국들 사이에서 중계 무역을 독점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중계 무역은 고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는 동시에, 한반도 남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위만조선의 등장은 고조선 사회의 지배층 구성과 통치 방식에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이후 한반도 국가들의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한반도 북부 지역은 한나라의 직접적인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이는 동시에 한반도에 선진 문물이 유입되는 통로가 되기도 하였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録)에 따르면 일본의 필씨(筆氏)라는 귀화인 계통의 씨족이 위만의 후손을 자처하였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