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요코이 쇼난은 구마모토 번의 사무라이 가문에서 태어나 번교에서 학문에 정진했다. 젊은 시절부터 번정 개혁에 참여하고 사숙을 열어 후학을 양성했으며, 후쿠이번의 정치 고문으로서 막부 개혁에 깊이 관여했다.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으나, 보수 세력에 의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요코이 쇼난은 문화 6년분카 6년일본어(1809년) 8월 13일, 히고국(현 구마모토현) 구마모토성 아래 우치쓰보이마치(内坪井町)에서 150석의 가록을 가진 구마모토 번사 요코이 도키나오(横井時直요코이 도키나오일본어)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본래 성은 헤이시이며, 호조 다카토키의 후손을 자처했다. 이름은 時存도키히로일본어 또는 時存도키아리일본어이며, 조정에 공식적으로 올린 이름은 平 時存다이라노 도키히로일본어였다.
문화 13년분카 13년일본어(1816년), 8세의 나이로 번교인 시습관(時習館시습관일본어)에 입학했다. 덴포 4년(1833년)에는 기숙생(居寮生쿄료세이일본어)이 되었고, 덴포 7년(1836년)에는 강당世話役(강당 세와야쿠), 덴포 8년(1837년)에는 시습관 기숙사 학생 대표(居寮長쿄료초일본어)가 되었다. 그는 시모즈 큐야(下津久馬시모즈 큐야일본어)와 함께 기숙사 신제도 도입을 건의하여 채택되었으나, 실제 시행 과정에서 좌절을 겪었다. 이때 가로인 나가오카 코레요시(長岡是容나가오카 코레요시일본어)의 후원을 받았다. 덴포 10년(1839년), 번의 명령으로 에도에 유학하여 하야시 테이우(林檉宇하야시 테이우일본어)의 문하생이 되었고, 사토 잇세이(佐藤一誠사토 잇세이일본어), 마쓰자키 고도(松崎慊堂마쓰자키 고도일본어) 등을 만났다. 에도 체류 중에는 막부 신료인 카와지 토시아키라(川路聖謨카와지 토시아키라일본어)와 미토번의 후지타 도코(藤田東湖후지타 도코일본어) 등 전국의 유능한 인재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1.2. 초기 활동과 학문 형성
덴포 10년(1839년) 12월 25일, 후지타 도코가 주최한 망년회에 참석한 후 만취 상태에서 다른 번 사람들과 싸움을 벌인 것이 문제가 되어, 이듬해 덴포 11년(1840년) 2월 9일, 번의 에도 주재 관리로부터 귀향 명령을 받았다. 구마모토로 돌아온 그는 70일간의 근신(逼塞힛소쿠일본어) 처분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 쇼난은 주자학 연구에 몰두했다. 이듬해 덴포 12년(1841년)경부터 나가오카 코레요시, 시모즈 큐야, 모토다 나가자네(元田永孚모토다 나가자네일본어), 하기 마사쿠니(萩昌国하기 마사쿠니일본어) 등과 함께 연구회를 열었다. 이 연구회는 훗날 '실학당'(実学党지쓰가쿠토일본어)으로 발전하여 필두 가로인 마쓰이 아키스케(松井章之마쓰이 아키스케일본어)를 우두머리로 하는 '학교당'(学校党갓코토일본어)과 대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번정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나가오카가 가로직을 사임하면서 연구회 활동도 중단되었다. 이때 그는 『시무책』(時務策지무사쿠일본어)을 초안했다.
덴포 14년(1843년), 자택의 한 방에 사숙을 열었고, 훗날 홍화 4년고카 4년일본어(1847년)에 '쇼난도'(小楠堂쇼난도일본어)라고 이름 붙였다. 쇼난도의 첫 제자는 도쿠토미 카즈타카(徳富一敬도쿠토미 카즈타카일본어)였는데, 그는 훗날 도쿠토미 소호와 도쿠토미 로카의 아버지이다. 두 번째 제자는 야지마 겐스케(矢嶋源助야지마 겐스케일본어)였으며, 이후 카에츠 우지후사(嘉悦氏房카에츠 우지후사일본어), 나가노 슌페이(長野濬平나가노 슌페이일본어), 카와세 노리쓰구(河瀬典次카와세 노리쓰구일본어), 야스바 야스카즈(安場保和야스바 야스카즈일본어), 다케자키 리쓰지로(竹崎律次郎다케자키 리쓰지로일본어) 등 수많은 문하생을 배출했다.
가에이 2년(1849년), 후쿠이번의 번사 미데라 산사쿠(三寺三作미데라 산사쿠일본어)가 쇼난도에서 공부한 후 후쿠이번으로 돌아가 쇼난의 이름을 알리면서, 훗날 그가 후쿠이번에 출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가에이 5년(1852년)에는 후쿠이번의 요청으로 『학교문답서』(学校問答書갓코몬도쇼일본어)를 저술했으며, 이듬해 가에이 6년(1853년)에는 『문무일도의 설』(文武一途の説분부잇토노세쓰일본어)을 작성하여 보냈다. 같은 해 10월, 러시아 제국 군함을 타고 나가사키시로 가려던 요시다 쇼인이 쇼난도에 들러 쇼난과 3일간 대화를 나누었다. 11월에는 러시아 사절 응접 담당인 카와지 토시아키라에게 『이려응접대의』(夷虜応接大意이료오세쓰타이이일본어)를 보내, 유도와 무도를 가리지 않고 일체의 외국 요구를 거절하는 것은 천지 공공의 실리에 어긋난다고 역설했다.
안세이 원년(1854년) 7월, 형인 요코이 도키아키(横井時明요코이 도키아키라일본어)가 48세로 병사했다. 형의 장남 사헤이타(左平太사헤이타일본어)가 10세로 아직 어렸기 때문에, 쇼난이 형의 임종 직전 양자(末期養子마쓰고 요시일본어)가 되어 가독을 이었다. 이 무렵, 생각의 대립으로 나가오카 코레요시와 절교하게 되었다.
안세이 2년(1855년) 5월, 농촌 지역인 누마야마즈(沼山津누마야마즈일본어, 현 구마모토시 히가시구 누마야마즈)로 이주하여 자택을 '시지켄'(四時軒시지켄일본어)이라 이름 붙이고, 자신의 호도 지명에서 따 '쇼잔'(沼山쇼잔일본어)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훗날 메이지 유신의 주역이 되거나 메이지 신정부의 핵심 인물이 되는 사카모토 료마, 이노우에 코와시(井上毅이노우에 코와시일본어), 유리 키미마사(由利公正유리 키미마사일본어), 모토다 나가자네 등 수많은 인물들이 이곳을 방문하여 세상을 논했다.
1.3. 후쿠이번 출사와 막부 개혁 참여
안세이 4년(1857년) 3월, 후쿠이번주 마쓰다이라 슌가쿠의 사자 무라타 우지히사(村田氏寿무라타 우지히사일본어)가 쇼난을 찾아와 후쿠이번으로 초빙했다. 쇼난이 이를 내락하자 슌가쿠는 8월에 구마모토번주 호소카와 나리모리(細川斉護호소카와 나리모리일본어)에게 서한을 보내 쇼난의 후쿠이행을 요청했다. 나리모리는 실학당의 번교 학풍 비판 등으로 인해 일단 거절했지만, 슌가쿠 등이 여러 차례 요청한 끝에 마침내 승낙되었다. 쇼난은 이듬해 안세이 5년(1858년) 3월 후쿠이로 가서 빈사(賓師히시일본어)로서 50인 부치의 대우를 받으며 번교인 메이도칸(明道館메이도칸일본어)에서 강의를 했다. 같은 해 12월, 동생의 죽음으로 구마모토에 귀향했다. 이듬해 안세이 6년(1859년)에 다시 후쿠이번의 초청을 받아 후쿠이에 체류했다. 같은 해 12월, 어머니의 위독 소식을 듣고 다시 구마모토로 귀향했다.
만엔 원년(1860년) 2월, 후쿠이번의 세 번째 초청으로 다시 후쿠이로 향했다. 이 무렵 후쿠이번 내에서는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고 있었기에, 이를 본 쇼난은 『국시삼론』(国是三論코쿠제산론일본어)을 저술하여 번 전체의 일치를 호소했다. 이 저술에서 그는 일본에 서양 국가들처럼 진정한 국교가 없으며, 이것이 일본 국체의 약점이라고 지적했고, 이는 훗날 메이지 시대에 국가신도가 형성되는 근거 중 하나가 되었다. 또한 그는 국방을 위해 강력한 해군의 중요성도 강조했다.
분큐 원년(1861년) 4월, 에도로 가서 슌가쿠와 처음으로 대면했다. 에도 체류 중 가쓰 가이슈와 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오쿠보 이치오일본어)와 교류했다. 같은 해 10월, 7명의 후쿠이 학생들을 이끌고 구마모토 누마야마즈로 돌아왔다. 그러나 11월 26일 사냥을 나갔을 때, 번주 전용 매사냥터인 누마야마즈의 습지에서 남은 탄환을 발사한 것이 문제가 되어 근신 처분을 받았다 (이를 '榜示犯禁事件'이라 한다).
분큐 2년(1862년) 6월, 후쿠이번의 네 번째 초청을 받아 구마모토를 떠났다. 7월에는 에도의 에치젠 마쓰다이라가 별저를 방문하여 에도 막부의 정사총재직(政事総裁職세이지소사이쇼쿠일본어)을 맡고 있던 슌가쿠의 조언자로서 막부 개혁에 관여했으며, 막부에 대한 건백서 형식으로 『국시칠조』(国是七条코쿠제시치조일본어)를 초안했다. 8월, 오메쓰케(大目付오메쓰케일본어) 오카베 나가쓰네(岡部長常오카베 나가쓰네일본어)에게 초청되어 『국시칠조』의 내용을 설명했고, 히토쓰바시 도쿠가와가 저택에서는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만나 막부 정치에 대해 의견을 개진했다. 이 무렵 후쿠이번저에서 사카모토 료마와 오카모토 겐자부로(岡本健三郎오카모토 겐자부로일본어)를 만났다. 쇼난은 『해국도지』(海國圖志하이궈투즈중국어)를 읽고 일본이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저지른 실수를 피하기 위해 서양에 "신중하고 점진적이며 현실적인 국경 개방"을 시작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또한 주요 번들의 국회 구성을 주장했으며, 쇼군이 총리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1.4. 사건과 시련
분큐 2년(1862년) 겨울, 훗날 '士道忘却事件'(사도망각사건)으로 알려진 소동이 일어났다. 같은 해 12월 19일, 쇼난은 구마모토 번 에도 주재 관리인 요시다 헤이노스케(吉田平之助요시다 헤이노스케일본어)의 별저를 방문하여 구마모토 번사 쓰즈키 시로(都築四郎쓰즈키 시로일본어)와 다니 쿠라노스케(谷内蔵允다니 쿠라노스케일본어)와 술자리를 가졌다. 다니가 돌아간 후, 3명의 자객(구로세 이치로스케, 야스다 키스케, 쓰쓰미 마쓰자에몬)의 습격을 받았다. 불의의 습격에 쇼난은 마루에 놓인 다이쇼를 잡지 못하고 몸을 피하여 숙소인 도키와바시의 후쿠이 번저로 돌아가 예비 다이쇼를 가지고 요시다의 별저로 돌아왔으나, 이미 자객의 모습은 없었고 요시다와 쓰즈키는 부상당한 상태였다 (요시다는 후에 사망했다). 이 사건 후 쇼난은 분큐 3년(1863년) 8월까지 후쿠이에 체류했다. 구마모토 번에서는 쇼난의 행동, 즉 '적에게 맞서지 않고 친구를 남겨둔 채 혼자 탈출했다'는 점이 무사답지 못하다며 '사도망각'으로 비난했고, 쇼난의 인계와 처벌을 요구했다. 쇼난을 숨겨준 후쿠이번은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쇼난이 습격당한 것은 단순히 무사도를 저버린 자와 동일시할 수 없으며, 칼을 가지러 돌아간 것은 당연하다고 쇼난을 옹호했다. 같은 해 12월 16일, 관대한 처분으로 할복은 면했으나, 쇼난은 지행 150석을 몰수당하고 사무라이 신분을 박탈당하여 낭인이 되었다. 그는 히고로 돌아와 누마야마즈의 시지켄(현 요코이 쇼난 기념관)에서 칩거했다. 쇼난 등이 추진했던 후쿠이번의 '거번상락'(挙藩上洛쿄한조라쿠일본어, 번 전체의 교토 상경) 계획은 좌절되었다.
1.5. 메이지 유신과 최후
겐지 원년(1864년) 2월, 료마는 가쓰 가이슈의 심부름으로 구마모토에 있는 쇼난을 찾아갔다. 쇼난은 『국시칠조』를 설명해주었고, 이는 훗날 료마의 선중팔책의 원안 중 하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회담에는 도쿠토미 카즈타카도 동석했다. 이때 쇼난은 형의 유자이자 자신의 조카인 사헤이타와 요코이 타이헤이(横井太平요코이 타이헤이일본어)를 고베 해군 훈련소에 입소할 수 있도록 료마를 통해 가쓰에게 부탁했다.
이후 게이오 원년(1865년) 5월에도 료마가 쇼난을 찾아왔는데, 제2차 조슈 정벌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쇼난은 조슈번에 잘못이 있으므로 정벌이 정당하다고 주장했고, 료마는 이에 동의하지 않아 언쟁이 벌어졌다고 한다. 이것이 쇼난과 료마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게이오 2년(1866년), 조카 사헤이타와 타이헤이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자 『송별의 어』(送別の語소베쓰노 고일본어)를 써서 보냈다.
게이오 3년(1867년) 12월 18일, 나가오카 모리요시(長岡護美나가오카 모리요시일본어)와 쇼난에게 조정으로부터 신정부에 등용하고 싶으니 상경하라는 서한이 교토의 구마모토 번저로 보내졌다. 번 내에서는 쇼난의 등용에 이견이 많았고, 가록 몰수 및 사무라이 신분 박탈 상태였기 때문에, "쇼난은 병이 있어 사퇴하고 싶다"고 조정에 신청했으며, 쇼난 문하생들의 등용도 거절했다.
게이오 4년(1868년) 3월 5일, 참여직에 임명된 나가오카 모리요시가 그 사퇴서를 부총재인 이와쿠라 도모미에게 제출했으나, 이와쿠라는 쇼난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 없다"고 내시하며 3월 8일 다시 쇼난에게 상경 명령이 내려졌다. 구마모토 번으로서도 더 이상 쇼난의 상경을 거부할 수 없다고 결정하여, 3월 20일 쇼난과 쓰즈키 모쿠베이(都築黙兵衛쓰즈키 모쿠베이일본어, 쓰즈키 시로)의 사무라이 신분을 회복시키고 3월 22일 상경을 명했다. 4월 11일 오사카에 도착했다. 4월 22일 징사 참여(徴士参与초시산요일본어)에 임명되었고, 윤 4월 4일 교토에 입성하여 윤 4월 21일 참여에 임명되었다. 이튿날 22일에는 종4위하의 위계를 받았다. 그러나 격무로 인해 5월 하순 고열로 위독한 상태가 되었으나, 7월에 위기를 넘기고 9월에는 다시 출근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다.
메이지 2년(1869년) 1월 5일 오후, 교토 데라마치도리 마루타마치 아래 동쪽(현 교토시 나카교구)에서 도쓰카와 고시 6인조(우에다 다테오, 나카이 도네오, 쓰시타 시로자에몬, 마에오카 리키오, 야나기다 나오조, 가시마 마타노신)의 습격을 받았다. 우에다가 쇼난이 탄 가마를 향해 발포했고, 6명이 칼을 휘둘렀다. 호위병들이 응전하고 쇼난도 단도 한 자루로 공격을 막아내려 했지만 결국 암살당했다. 향년 61세였다. 쇼난의 목은 가시마에 의해 절단되어 도주했지만, 현장에 달려온 젊은 종자가 추격하여 되찾아왔다.
살해 이유는 '요코이가 개국을 추진하고 일본을 기독교화하려 한다'는 사실무근의 소문 때문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 쇼난은 기독교가 국내에 유입될 경우 불교와의 사이에 다툼이 발생하여 혼란이 일어날 것을 우려하고 있었다. 게다가 탄정대의 고가 주로(古賀十郎고가 주로일본어) 등 신정부의 개국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가 재판 과정에서 요코이가 썼다고 조작한 『천도각명서』(天道覚明書텐도카쿠메이쇼일본어)라는 위서를 제출하여 요코이가 은밀히 황실 전복을 꾀했다는 혐의로 고발하는 등, 사건은 큰 혼란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실행범 4명(우에다, 쓰시타, 마에오카, 가시마)이 메이지 3년(1870년) 10월 10일에 처형되었다. 나머지 실행범 2명 중 야나기다는 습격 당시의 부상으로 메이지 2년(1869년) 1월 12일 사망했고, 나카이는 도주하여 소식이 불명이다. 이 외에 실행범의 협력자 3명(상평 주세이 등)은 유배형을, 4명은 금고형을 받았다.
2. 사상과 정치 철학
요코이 쇼난은 당시의 쇄국과 막번 체제를 비판하고, 공공성과 통상 교역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국가와 사회를 구상했다. 그는 서양 문명을 비판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일본의 국체를 유지하며 근대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1. 개혁 사상
쇼난은 쇄국정책과 막번체제를 비판하고, 이에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구상을 '공공성'과 '교역'의 입장에서 모색했다. 그는 공공성 및 공공권의 실현을 위해 '강습토론'(講習討論고슈토론일본어)과 '붕우강학'(朋友講学호유코가쿠일본어)과 같이 신분 계층을 초월한 토의를 정치 운영의 가장 중요한 행위로 강조했다. 또한 교역을 중시하는 입장에서 외국과의 통상 무역을 추진하고, 산업 진흥 또한 교역의 일환으로 보아 국내 자율적인 경제 발전 방책을 건의했으며, 이를 위해 막부와 번을 초월한 통일 국가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공화제(대통령제)를 요순 시대의 선양에 비유하며 이상적인 정치 형태로 평가하기도 했다.
2.2. 주요 저술 및 정책 제안
체계적으로 쇼난의 국가론이 제시된 문서는 만엔 원년(1860년)에 후쿠이번의 번정 개혁을 위해 집필된 『국시삼론』이다. 이 외에도 학문과 정치의 연관성을 논한 가에이 5년(1852년) 집필의 『학교문답서』, 매튜 페리와 예프피미 푸탸틴에 대한 대응 방안을 담은 가에이 6년(1853년) 집필의 『이려응접대의』, 겐지 원년(1864년)의 이노우에 코와시와의 대화를 기록한 『누마야마 대화』(沼山対話누마야마 다이와일본어), 게이오 원년(1865년)의 모토다 나가자네와의 대화를 기록한 『누마야마 한화』(沼山閑話누마야마 칸와일본어) 등이 있다.
2.3. 서양 문명에 대한 인식
쇼난은 동시대 역사가들에 의해 "친서양적"으로 평가되기도 했지만, 동시에 기독교에 대해서는 일본 불교에 비해 거짓되고 이단적이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기독교가 일본에 유입될 경우 불교와의 충돌로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했다. 그러나 그는 『해국도지』를 읽고 일본이 아편 전쟁에서 청나라가 저지른 실수를 피하기 위해 서양에 "신중하고 점진적이며 현실적인 국경 개방"을 시작해야 한다고 확신했다. 또한 그는 완전한 대외 무역 개방, 경제 개혁, 그리고 서양식 근대 군대의 도입을 주장했다. 그는 주요 번들의 국회 구성을 주장했으며, 쇼군이 총리와 유사한 형태로 발전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3. 인물과 품성
요코이 쇼난은 탁월한 지혜와 용기를 지녔으면서도 인간적인 면모와 솔직함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성품과 생활 습관은 주변 인물들의 평가를 통해 잘 드러난다.
3.1. 성품과 교류
가쓰 가이슈는 쇼난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대단히 총명한 사람"이라고 마음 깊이 존경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쇼난이 "오늘은 이렇게 생각하지만, 내일이 되면 다를 수도 있다"고 항상 덧붙이는 겸손함에 감탄했다고 전했다. 가쓰는 쇼난이 보통 사람의 척도로는 헤아릴 수 없는 인물이었으며, 결코 사물에 의태하지 않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한 가지 고정된 견해를 가지지 않았지만, 때에 임하여 변화에 대응하며 일을 처리하는 여유가 있었다고 보았다. 어떤 일에 실패한 사람이 찾아와 선후책을 물으면, 그 실패를 이용하여 유리한 방향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그의 상례였다고 한다. 또한, 가쓰가 미국에서 돌아왔을 때 쇼난이 미국의 사정을 물어 여러 가지를 알려주자,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식의 모습으로 순식간에 미국의 사정에 정통해졌다고 회고했다. 그는 쇼난이 언변이 뛰어났다고 평하며, 쇼난은 검은 명주 저고리에 평범한 하카마를 입는 등 외모는 평범하여 대개 다이묘의 오루스야쿠(御留守役오루스야쿠일본어, 에도 거주 번사 대표)처럼 보였으며, 인물이 원만하여 굳이 사람과 다투는 무례함이 없었다고 했다. 이는 사쿠마 쇼잔과는 정반대였다고 언급했다.
제자 도쿠토미 카즈타카는 쇼난의 풍채에 대해 "키는 평균보다 약간 작았고, 얼굴은 다소 길며, 눈썹이 선명하게 치켜 올라가고 눈빛은 예리했으며, 총명한 기운이 오척의 작은 몸에 넘쳐흘렀다"고 묘사했다. 그는 쇼난이 상당히 쾌활한 성품으로, 그의 말소리는 항상 문 밖까지 들렸고, 그가 오면 분위기가 급히 활기 넘쳤다고 했다. 비록 성격이 급한 편이었지만, 화를 낼 때는 불이 튀는 듯했으나, 일단 지나고 나면 마치 소나기 뒤처럼 맑고 상쾌하여 꾸중을 들어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적대하는 사람이라도 수그러들면 거리낌 없이 대했으며, 아무리 엄하게 꾸짖었던 사람이라도 개과천선하면 한없는 기쁨을 드러냈다고 회고했다. 마치 구름이 흐르고 물이 흐르는 듯 맑고 시원시원하며 대범한 사람이었다. 문하생을 가르칠 때도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의 성품에 따라 개발의 길을 열어주어 즐겁게 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 그는 항상 "인간은 백골이 되지 않으면 일을 해낼 수 없다"고 말했으며, 명예와 이득의 경계를 이미 넘어선 듯 마음이 광풍제월(光風霽月, 맑고 시원한 기상)과 같았다고 평가했다.
3.2. 개인적인 취향
쇼난의 여가 활동은 주로 낚시와 사냥이었다. 특히 사냥에 나갈 때는 대개 수수밥 도시락과 된장 절임을 챙겨 어깨에 총을 메고 한가로이 걸어 다녔다고 한다. 낚시는 낚싯대와 그물 모두 능숙했지만, 특히 蚊頭ひき가시라히키일본어 명인이었다고 전해지며, 이는 대개 눈이 내리는 날 즐겼다고 한다. 그는 술량이 약한 편이었지만 술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에도에서 술 때문에 큰 소동을 벌여 귀향 명령을 받은 후 잠시 금주했지만, 때때로 신단의 신주가 알 수 없게 사라지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누이가 쇼난이 금주하는 것을 안쓰럽게 여겨 매일 아침 아무렇지 않은 듯 신단의 술병에 술을 가득 채워두면, 이튿날 아침에는 반드시 비어 있었다고 전해진다.
4. 가족과 가계
요코이 가문은 간무 헤이시 호조 씨의 후손으로, 대대로 '時' 자를 이름에 사용해왔다. 이 문단에서는 쇼난의 배우자, 자녀 및 그에게 영향을 준 주요 친인척에 대해 서술한다.
4.1. 배우자와 자녀
쇼난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었다. 첫 번째 아내는 구마모토 번사 오가와 키치주로(小川吉十郎오가와 키치주로일본어)의 딸 히사(ひさ히사일본어)로, 가에이 6년(1853년) 2월에 결혼하여 안세이 3년(1856년)에 사별했다. 두 번째 아내는 쇼난의 문하생 야지마 겐스케의 여동생 쓰세요(津世子쓰세요일본어)로, 안세이 3년(1856년)에 결혼했다. 쓰세요와의 사이에서 훗날 도시샤 대학 제3대 총장 및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는 장남 요코이 도키오(横井時雄요코이 도키오일본어)와 에비나 단조(海老名弾正에비나 단조일본어)의 아내가 되는 장녀 미야(海老名みや에비나 미야일본어)가 태어났다.
4.2. 영향을 준 친인척
쓰세요의 언니로는 도쿠토미 카즈타카와 결혼한 도쿠토미 히사코(徳富久子도쿠토미 히사코일본어)와 다케자키 준코(竹崎順子다케자키 준코일본어)가 있으며, 여동생으로는 야지마 카지코(矢嶋楫子야지마 카지코일본어)가 있다. 소쇼야(惣庄屋소쇼야일본어) 야지마 츄자에몬 나오아키(矢島忠左衛門直明야지마 츄자에몬 나오아키일본어)의 딸들인 이 자매들은 '사현부인'(四賢婦人시켄후진일본어)으로 불리며, 그들의 고향인 구마모토현 마시키정에 기념관이 있다.
도쿠토미 소호는 아버지 도쿠토미 카즈타카의 영향으로 스스로 쇼난의 문하생이라 자처했으며, 쇼난을 평생의 스승으로 받들었다.
요코이 타이헤이는 쇼난의 조카로, 쇼난의 형 도키아키의 둘째 아들이다. 형 요코이 사헤이타와 함께 쇼난 등의 자금을 얻어 미국으로 밀항했다. 병을 얻어 귀국한 후에는 구마모토에 구마모토 양학교(熊本洋学校구마모토 요가코일본어)를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요코이 사헤이타의 아내는 여자미술학교를 창립한 요코이 타마코(横井玉子요코이 타마코일본어)이다.
5. 평가
요코이 쇼난은 일본 근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한 선구자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그의 특정 사상이나 사건과 관련하여 비판적 시각과 논란도 존재한다.
5.1. 긍정적 평가
쇼난은 개국 통상, 부국강병, 그리고 공의정치(公議政治)를 주장한 선구적인 사상가로 높이 평가받는다. 그는 쇄국정책을 비판하고 서양 문명을 받아들여 근대적인 국가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이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근대화에 중요한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특히 막번 체제 해체와 중앙집권적 통일 국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한 점은 일본의 근대 국가 건설에 기여한 핵심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5.2. 비판과 논란
쇼난의 사상이나 행동, 결정과 관련하여 비판적 시각도 존재한다. 예를 들어, 그의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일본의 '국체'를 강조하며 외래 종교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사도망각사건' 당시 적에게 맞서지 않고 홀로 피신했다는 비난은 그의 무사도 개념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그의 암살 배경에는 '요코이가 개국을 진행하고 일본을 기독교화하려 한다'는 등 사실무근의 소문이 퍼졌으며, 심지어 신정부의 개국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파가 '천도각명서'라는 위서를 조작하여 그를 황실 전복 혐의로 고발하는 등 사회적 혼란과 논란이 얽혀 있었다. 이는 당시 일본 사회 내에서 개혁 세력과 보수 세력 간의 격렬한 사상적 대립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6. 유산과 영향
요코이 쇼난의 사상과 제안은 후대의 정치 개혁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를 기리기 위한 다양한 추모 시설들이 남아있다.
6.1. 후대에 미친 영향
쇼난의 사상은 사카모토 료마의 『선중팔책』 등 후대의 정치 개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국시칠조』에서 제시된 개혁 방안들은 료마가 제안한 일본 근대 국가 구상의 주요 원형 중 하나로 여겨진다. 또한 그의 공공성과 통상 중시 사상은 메이지 시대의 부국강병 정책과 근대 산업 발전에 영향을 주었다. 그의 문하생들 중에는 요코이 도키오, 유리 키미마사, 이노우에 코와시 등 메이지 신정부의 핵심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 쇼난의 사상과 영향력이 직접적으로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6.2. 추모와 기념
요코이 쇼난을 기리기 위해 여러 추모 시설이 건립되었다. 요코이 쇼난 기념관은 그의 사숙 '시지켄' 옆에 위치하며, 쇼난과 관련된 역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쇼난 공원은 쇼난의 유발(遺髮)이 묻힌 곳으로, 기념비(비문은 도쿠토미 소호 작)와 쇼난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의 묘는 교토 난젠지의 덴주안(天授庵덴주안일본어)에 있다. 매년 2월 15일에는 쇼난 공원에서 우키시마 신사가 주관하는 묘전제(墓前祭보젠사이일본어)가 거행되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7. 저술
- 요코이 도키오 편, 『소남유고』(小楠遺稿쇼난 이코일본어), 민우사, 1889년 11월
- 야마자키 마사토(山崎正董야마자키 마사토일본어}) 편, 『요코이 소남』 상권 전기편·하권 유고편, 메이지 서원, 1938년 5월
- 야마자키 마사토 편, 『요코이 소남 유고』, 일신서원, 1942년 7월
- 마쓰우라 레이(松浦玲마쓰우라 레이일본어) 편역, 『일본의 명저 30 요코이 소남·사쿠마 쇼잔』, 중앙공론사, 1970년 7월 (신판 중공백스)
- 사토 쇼스케(佐藤昌介사토 쇼스케일본어), 우에테 쓰유(植手通有우에테 쓰유일본어), 야마구치 무네유키(山口宗之야마구치 무네유키일본어) 교주, 『일본 사상 대계 55 와타나베 가잔·다카노 조에이·사쿠마 쇼잔·요코이 소남·하시모토 사나이』, 이와나미 서점, 1971년 6월
- 일본사적협회 편, 『요코이 소남 관계 사료 1·2』, 도쿄 대학 출판회, 1977년 2월·6월
- 하나타테 사부로(花立三郎하나타테 사부로일본어) 전역주, 『국시삼론』, 고단샤 <고단샤 학술 문고>, 1986년 10월
8. 외부 링크
- [http://www.ndl.go.jp/portrait/e/datas/345.html 일본 국회도서관 요코이 쇼난 생애 정보]
- [http://dl.ndl.go.jp/info:ndljp/pid/993507/33 쇼난 유고 -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근대 디지털 라이브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