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요르요스 파판드레우(Γεώργιος Παπανδρέου, 1888년 2월 13일 ~ 1968년 11월 1일)는 그리스의 저명한 정치인으로, 파판드레우 정치 왕조의 설립자이다. 그는 그리스의 총리로 1944년부터 1945년까지, 1963년에, 그리고 1964년부터 1965년까지 세 차례 재임하며 그리스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23년부터 시작된 그의 50년이 넘는 정치 경력 동안 그는 여러 차례 장관직을 수행했으며, 1950년부터 1952년까지는 니콜라오스 플라스티라스와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정부에서 부총리를 역임하기도 했다.
파판드레우는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사회 개혁을 추진하는 데 헌신했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을 받아 관대한 사회 정책을 지지했으며, 왕정에 대한 확고한 반대 입장을 견지했다. 동시에 그리스 공산당(KKE)에 대해서는 강력한 반공주의 입장을 보였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교육 개혁, 보건 및 복지 향상, 소득 분배 개선 등 진보적인 정책들이 시행되어 사회적 진보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1960년대 총리 재임 시기에는 교육 시스템을 혁신하고 대규모 사회 개혁을 추진하며 그리스 사회의 현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의 정치 경력은 왕실 및 보수 세력과의 끊임없는 대립으로 점철되었다. 1965년에는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의 갈등 끝에 이른바 "배신(Apostasia)" 사건으로 총리직에서 해임되었고, 이는 그리스 정치 불안의 상징적인 사건으로 남았다. 1967년 군사 쿠데타 이후에는 체포되어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으나,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반독재 시위로 이어지며 민주주의를 향한 국민적 열망을 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정치사에서 민주주의의 강력한 옹호자이자 웅변가로 기억되며, "민주주의의 노장(ο Γέρος της Δημοκρατίας)"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유산은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와 손자 요르요스 A. 파판드레우로 이어지는 파판드레우 정치 왕조의 초석이 되었다.
2. 생애 초기 및 배경
2.1. 출생 및 가족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는 1888년 2월 13일 펠로폰네소스반도 북부 아하이아현의 칼렌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정교회 대사제(protopresvyteros)인 안드레아스 스타브로풀로스(Andreas Stavropoulos)였다. 그의 성씨 '파판드레우'는 아버지의 세례명 '안드레아스'와 그리스어로 '사제'를 뜻하는 '파파스(papas)'에서 유래했다. 그의 형제 중 한 명인 니코스(Nikos)는 킬키스-라하나라스 전투에서 전사했다.
2.2. 교육 및 초기 영향
파판드레우는 아테네에서 법학을, 베를린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그의 정치 철학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강한 영향을 받았다. 이로 인해 그는 평생 동안 왕정에 대해 확고한 반대 입장을 유지했으며, 관대한 사회 정책을 지지했다. 동시에 그는 그리스 공산당(KKE)의 정책에 대해 매우 강력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는 자유주의 지도자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지지자로서 정치에 입문했으며, 발칸 전쟁 이후 베니젤로스는 그를 키오스섬의 주지사로 임명했다.
2.3. 개인 생활
파판드레우는 두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폴란드 출신의 소피아 미네이코(Sofia Mineyko)였으며, 그녀는 지그문트 미네이코의 딸이자 스타니스와프 미네이코(1802-1857)의 손녀였다. 이들 부부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는 1919년 키오스섬에서 태어났다. 두 번째 부인은 배우인 키벨레 안드리아누였고, 이들 사이에는 요르요스 파판드레우라는 이름의 아들이 있었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자녀들은 이후 그리스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파판드레우 정치 왕조'의 시작을 알렸다.
3. 정치 경력
3.1. 초기 정치 활동 및 장관직

제1차 세계 대전 참전을 둘러싼 정치적 위기 시기에 파판드레우는 친독일 성향의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에 맞서던 베니젤로스의 가장 가까운 지지자 중 한 명이었다. 1916년 베니젤로스가 아테네를 떠나야 했을 때, 파판드레우는 그를 크레타섬까지 동행한 뒤 레스보스섬으로 가서 섬 지역의 반왕정 지지자들을 동원하고 테살로니키에 기반을 둔 베니젤로스의 친연합국 정부에 대한 지지를 결집시켰다.
1920년 총선에서 파판드레우는 레스보스 선거구에서 무소속 자유주의자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21년 그는 변호사로서 콘스탄티노스 국왕에 대한 비판으로 기소된 알렉산드로스 파파나스타시우를 변호했다. 국왕의 퇴위를 요구하는 기사 때문에 왕당파 정권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이후 레스보스에서 왕당파 극단주의자들의 암살 시도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1923년 1월부터 10월까지 그는 스틸리아노스 고나타스 내각에서 내무부 장관을 지냈다. 1923년 12월 선거에서 그는 베니젤로스주의를 따르는 자유당 소속으로 레스보스 지역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25년 6월에는 단 11일 동안 재무부 장관을, 1930년부터 1932년까지 교육부 장관을, 1933년에는 교통부 장관을 역임했다. 교육부 장관 재임 시 그는 그리스 학교 시스템을 개혁하고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난민 아동들을 위한 많은 학교를 건설했다.
3.2. 왕정 및 독재 정권에 대한 반대
파판드레우는 평생 동안 그리스 왕정에 대한 확고한 반대자였다. 그는 테오도로스 판갈로스 장군의 독재 기간 동안 다시 투옥되었다. 1935년에는 그리스 민주사회당을 창당했다. 같은 해, 왕정 복고를 위한 요르요스 콘딜리스 장군의 왕당파 쿠데타가 발생했고, 그는 내부 유배를 당했다. 1938년에는 그리스 왕당파 독재자 요안니스 메탁사스에 의해 다시 망명길에 올랐다.
3.3. 제2차 세계 대전 및 망명 정부
제2차 세계 대전 중 추축국의 그리스 점령 이후, 그는 파시스트 이탈리아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이후 중동으로 도피하여 주로 베니젤로스주의자들로 구성된 이집트 왕국에 기반을 둔 망명 정부에 합류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아 요르요스 2세 국왕은 그를 총리로 임명했으며,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레바논 회의(1944년 5월)와 카세르타 협정(1944년 9월)이 이루어졌다. 이는 그리스 내전의 전조였던 EAM과 비-EAM 세력 간의 위기 및 갈등을 중단시키고 국민 통합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시도였다.
3.4. 해방기 총리 재임과 데켐브리아나
추축국이 그리스에서 철수한 후, 그는 일부 그리스군 부대 및 연합군 영국군과 함께 망명 정부의 총리로서 1944년 10월 아테네에 입성했다. 같은 달, 그는 망명 정부의 뒤를 이은 1944년 그리스 국민 통합 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카세르타 협정 이후 모든 연합군을 책임지던 로널드 스코비 중장과 주로 협력하며, EAM과 비-EAM 세력 간의 고도로 양극화된 상황을 정상화하려 노력했다.
그는 1945년 데켐브리아나 사건 이후 총리직에서 사임했지만, 계속해서 고위직을 역임했다. 1946년부터 1952년까지 그는 노동부 장관, 보급부 장관, 교육부 장관, 재무부 장관, 공공 질서 장관 등을 지냈다. 1950년부터 1952년까지는 부총리도 역임했다.
1952년부터 1961년까지는 파판드레우에게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그리스 왕국의 자유주의 정치 세력은 내부 분쟁으로 심각하게 약화되었고 보수주의자들에게 선거에서 패배했다. 파판드레우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의 지도력이 침울하고 영감을 주지 못한다고 비판하며 지속적으로 그를 비난했다.
3.5. 중도 연합 창당 및 이후 왕실과의 대립
1961년, 파판드레우는 구 자유주의 베니젤로스주의자들, 사회민주주의자들, 그리고 불만을 품은 보수주의자들의 연합체인 중도 연합당을 창당하여 그리스 자유주의를 부활시켰다. 1961년 "폭력과 사기" 선거 이후, 파판드레우는 우익 국민 급진 연합(ERE)과 우익의 "파라크라토스(심층 국가)"에 대한 "타협 없는 투쟁"을 선언했다.
결국 그의 당은 1963년 11월 선거와 1964년 선거에서 승리했으며, 두 번째 선거에서는 압도적인 승리(지정학적 대승)를 거두었다. 총리로서 그의 진보적인 정책은 보수 진영에서 많은 반대를 불러일으켰고,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가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도 마찬가지였다. 안드레아스의 정책은 상당히 중도 좌파적으로 여겨졌다. 안드레아스는 많은 중요한 문제에서 아버지와 의견을 달리했으며, 더 진보적인 정책을 로비하기 위해 "민주 동맹(Dimokratikoi Syndesmoi)"이라는 정치 조직망을 구축했다. 그는 또한 중도 연합의 청년 조직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
파판드레우는 키프로스 공화국 건국의 토대가 된 취리히 및 런던 협정에 반대했다. 그리스계 키프로스인과 튀르키예계 키프로스인 공동체 간의 충돌 이후, 그의 정부는 그리스군 사단을 섬으로 파견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은 파판드레우 정부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며, 군부 내에서는 빈번하게 극우 쿠데타 음모가 진행되어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었다. 결국 국왕은 중도 연합의 분열을 조장했고, 1965년 7월, 이른바 1965년의 배신(Apostasia) 또는 이울리아나(Iouliana)로 알려진 위기 속에서 국방부 장관 통제권을 둘러싼 분쟁 끝에 정부를 해임했다.
3.6. 군사 정권 하 체포 및 사망
게오르요스 파파도풀로스가 이끄는 대령들의 군사 정권에 의한 1967년 4월 군사 쿠데타 이후, 파판드레우는 체포되었다. 그는 1968년 11월 가택 연금 상태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식은 대규모 반독재 시위의 계기가 되었다. 그는 아들 안드레아스와 함께 아테네 제1묘지에 안장되었다.
4. 철학 및 이념
4.1. 핵심 이념적 원칙
요르요스 파판드레우의 정치적 사고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이러한 영향 아래 확고하게 왕정 철폐를 주장했으며, 사회 복지를 강조하는 관대한 사회 정책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의 이념은 민주주의적 가치와 사회 정의를 기반으로 했으며, 이를 통해 그리스 사회의 진보와 발전을 추구했다.
4.2. 공산주의 및 민주주의에 대한 관점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공산당(KKE)에 대해 확고한 반공주의 입장을 견지했다. 그는 공산당을 민주주의에 대한 주요 위협으로 간주했으며, 평생에 걸쳐 민주주의 원칙과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싸웠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그리스 내전과 전후 정치적 양극화 시기에 더욱 두드러졌다. 그는 어떤 형태의 독재나 권위주의에도 반대하며 오직 민주주의만이 그리스의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믿었다.
5. 주요 정책 및 사회 개혁
5.1. 교육 개혁
파판드레우는 교육부 장관 시절 그리스 학교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혁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그리스-튀르키예 전쟁 이후 발생한 난민 아동들을 위해 수많은 학교를 건설하여 교육 기회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의 교육 개혁 노력은 그리스 사회의 지적 기반을 강화하고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를 확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5.2. 복지 및 경제 개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총리 재임 기간 동안 파판드레우는 광범위한 진보적 사회 개혁을 추진했다. 이 시기에는 보건 및 복지 서비스가 크게 개선되었고, 교육 서비스에 대한 정부 이전 지출은 55% 이상 증가했다. 이는 중등 및 고등 교육 기관의 학생 등록률이 크게 증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한, 1인당 소비는 1.40 만 GRD에서 1.70 만 GRD로 증가했으며, 그의 당이 추진한 임금 및 농업 소득 증대 정책 덕분에 소득 분배 또한 개선되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그리스 경제의 발전과 국민 생활 수준 향상에 기여했다.
6. 유산 및 평가
6.1. 긍정적 평가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정치계에서 가장 뛰어난 웅변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았으며, 민주주의를 위한 끈질긴 투사로 인정받았다. 군사 정권 시기와 그의 사망 이후, 그는 종종 애정 어린 별명으로 "민주주의의 노장"(ο Γέρος της Δημοκρατίαςo Géros tis Dimokrátias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이라 불렸다. 이는 그가 민주주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위대한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그의 총리 재임 기간 동안 광범위한 진보적 사회 개혁이 이루어졌으며, 보건 및 복지가 개선되고 교육 서비스에 대한 정부 지출이 크게 증가하는 등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6.2. 비판 및 논란
파판드레우의 정치 경력은 여러 비판과 논란을 동반했다. 특히, 그리스 내전의 전조가 되었던 데켐브리아나 사건 이후 그는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며, 이 시기의 정치적 양극화 처리 과정은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또한, 1965년 콘스탄티노스 2세 국왕과의 갈등으로 인한 총리직 해임 사건인 "배신"은 그리스 정치에 큰 혼란을 야기했고, 이는 왕실과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 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졌다. 이 사건은 파판드레우의 정치적 판단과 국왕에 대한 대응 방식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6.3. 영향력 및 정치 왕조
파판드레우는 그리스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파판드레우 정치 왕조'의 창시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의 아들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와 손자 요르요스 A. 파판드레우 역시 그리스의 총리를 역임하며 그의 정치적 유산을 이어받았다. 현재 그의 손자인 요르요스 A. 파판드레우가 정계에 진출한 이후, 대부분의 그리스 작가들은 할아버지를 지칭할 때는 Γεώργιο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게오르요스)를 사용하고, 손자를 지칭할 때는 비격식적인 Γιώργος현대 그리스어 (1453년 이후)(요르요스)를 사용하여 구별하는 관례가 확립되었다.
7. 저작
- 《그리스의 해방 (The Liberation of Greece)》, 아테네, 1945년
8. 영예 및 추모
1965년 베오그라드 대학교는 그에게 명예 박사 학위를 수여하며 그의 업적을 기렸다.
9. 같이 보기
- 안드레아스 파판드레우
-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952년)
- 그리스의 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