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왕찬(王粲, 王粲Wáng Càn중국어, 177년 ~ 217년)은 중국 후한 말기의 정치인이자 문장가로, 자는 중선(仲宣)이다.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 현재의 산둥성 웨이산현) 출신이며, 증조부 왕공(王龔)과 조부 왕창(王暢)은 모두 삼공에 오른 명문가 출신이다. 그는 조조 휘하에서 위나라의 법률 및 의례 제도 제정에 크게 기여했으며, 문학적으로는 건안 시대의 문학을 대표하는 '건안칠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특히 전란 속 백성의 고통을 담은 《칠애시》와 같은 작품으로 유명하다. 또한 그는 비범한 기억력과 박학다식함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2. 생애
왕찬의 생애는 크게 전란을 피해 유표에게 의탁한 시기, 그리고 조조 휘하에서 재능을 펼친 시기로 나눌 수 있다.
2.1. 출생 및 배경
왕찬은 177년에 연주(兗州) 산양군(山陽郡) 고평현(高平縣, 현재의 산둥성 웨이산현)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고위 관직을 지낸 명문가였다. 증조부 왕공(王龔)과 조부 왕창(王暢)은 각각 후한 순제와 후한 영제 시기에 삼공의 직위에 올랐다. 아버지 왕겸(王謙)은 대장군 하진의 장사(長史)를 지냈다. 하진은 왕겸의 집안이 삼공을 배출한 명문가임을 고려하여 자신의 두 딸 중 한 명과 왕겸을 혼인시키려 했으나, 왕겸은 이를 거절했다. 이로 인해 왕겸은 면직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병으로 집에서 사망했다.
2.2. 초기 활동과 학문
189년, 동탁이 권력을 장악하고 후한 헌제를 옹립하며 낙양에서 장안으로 천도했을 때, 당시 13세였던 왕찬도 장안으로 이주하여 이후 3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장안에서 당대의 저명한 학자이자 서예가인 채옹은 왕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조정에 추천했다. 채옹은 왕찬을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모가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기이하게 여겼으며, 당시 채옹의 집에 고위 관료들이 많이 모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발을 거꾸로 신을 정도로 황급히 나가 왕찬을 맞이했다. 채옹은 "이 사람은 왕공(王龔)의 손자로서 비범한 재능을 가졌으니, 내가 미치지 못한다. 내 집에 있는 모든 서적과 문학 작품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말했다. 왕찬은 17세에 사도 순우가(淳于嘉)의 초빙을 받았고, 조서에 의해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나, 당시 장안의 혼란스러운 상황 때문에 모두 취임하지 않았다.
2.3. 유표 휘하에서의 활동
194년, 왕찬은 전란을 피해 족형(族兄) 왕개(王凱)와 채목(蔡睦) 등과 함께 장안을 떠나 형주로 가서 자사(刺史) 유표에게 의탁했다. 유표는 왕창의 제자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표는 왕찬의 창백하고 병약한 용모와 경솔한 행동을 싫어하여 처음에는 그를 중용하지 않았다. 유표는 자신의 딸을 왕찬에게 시집보내려 했으나, 그의 외모를 꺼려 용모가 단정한 왕개에게 딸을 시집보냈다. 208년 유표가 사망하자, 왕찬은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유종에게 조조에게 항복할 것을 설득했다. 유종은 왕찬과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조조에게 귀순했다.
2.4. 조조 휘하에서의 경력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한 후, 왕찬은 조조에게 초빙되어 승상연(丞相椽)으로 임명되었고, 관내후의 작위를 받았다. 이후 그는 군모제주(軍謀祭酒)로 승진했으며, 213년 조조가 위공(魏公)에 오르고 열 개 성읍으로 구성된 위국(魏國)을 세우자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다. 조조는 옛 제도를 참고하여 새로운 법률과 의례(儀禮) 제도를 제정할 때, 반드시 왕찬에게 책임자를 맡겼다. 216년 말, 왕찬은 조조를 따라 숙적 손권에 대한 네 번째 정벌에 동행했다. 이듬해인 217년 봄, 그는 예성(鄴城, 현재의 허베이성 한단)으로 돌아오는 길에 41세(동아시아 나이 계산법)의 나이로 병사했다. 조조의 세자 조비는 왕찬의 장례식에 참석하여 조문객들에게 "왕중선(왕찬)은 당나귀 울음소리를 좋아했으니, 우리 각자 당나귀 울음소리를 내어 그를 배웅하자"고 말했고, 모든 조문객이 이에 따랐다고 전해진다.
3. 문학적 업적
왕찬은 후한 말기 건안 시대 문학의 중요한 인물로,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통해 당대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3.1. 건안 문학 및 건안칠자
왕찬은 당대 최고의 시인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동시대의 여섯 명의 시인들과 함께 '건안풍골(建安風骨)'로 알려진 문학 양식의 중추를 형성했으며, 이들은 통칭 '건안칠자'라 불렸다. '건안'은 196년부터 220년까지 이어진 후한 헌제의 연호이다. 후한 말기의 극심한 내란은 건안 시대 시가에 특유의 비장하면서도 가슴 저미는 분위기를 부여했으며,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애가는 이 시기 작품들의 핵심 주제였다. 중국 문학사에서 건안 시가는 초기 민요에서 학문적인 시로 넘어가는 전환점 역할을 했다. 건안 문학은 당시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록하며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3.2. 주요 작품 및 특징
왕찬은 시, 부(賦), 논(論), 의(議)를 포함하여 약 60편에 달하는 작품을 저술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전쟁의 해에 백성들의 고통을 애도하는 5언시인 《칠애시》와 《등루부(登樓賦)》, 《종군시(從軍詩)》 등이 있다. 특히 《칠애시》는 "문을 나서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흰 뼈가 평원을 덮었네"와 같은 구절을 통해 전쟁의 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며 당시 동한 사회의 비참하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등루부》는 형주 강릉(江陵)의 누각에 올라 지은 작품으로, 재능이 있음에도 쓰이지 못하는 자신의 울분과 슬픔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이후 위진 시대의 짧은 서정적 부(賦)의 발전에 길을 열었다고 평가된다. 또한 왕찬은 역사서인 《영웅기》도 편찬했다. 그의 문장은 붓을 들면 바로 이루어졌고, 고치는 일이 없었을 정도로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사람들은 그가 미리 글을 생각해 두었다가 쓰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끊임없는 노력의 결과였다. 조비는 왕찬의 문장을 "해골이 약하고 활력이 부족하다"고 평하기도 했으나, 동시에 "사(辭)와 부(賦)에 뛰어나 서간(徐幹)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조식이 지은 왕찬의 뇌명(誄銘)인 「왕중선뇌(王仲宣誄)」는 조식의 뇌명 중에서도 특히 심정이 잘 드러난 명작으로 평가된다.
4. 뛰어난 재능과 기억력
왕찬은 그의 비범한 지적 능력으로도 유명했다. 그는 박학다식했으며, 당대의 어떤 인물보다도 뛰어난 기억력을 가졌다고 《삼국지》에 기록되어 있다. 한번은 다른 사람들과 길을 걷다가 길가의 비석을 읽었는데, 사람들이 암송할 수 있는지 묻자 그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비석의 내용을 외우도록 했는데, 왕찬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 또 다른 일화로는, 그가 사람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구경하고 있을 때 바둑판이 실수로 흐트러졌는데, 왕찬이 모든 바둑돌의 위치를 원래대로 완벽하게 복원시켜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바둑을 두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며 수건으로 왕찬이 바둑알을 올려 놓았던 바둑판을 가리고, 다시 다른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게 한 후 비교해 보았는데, 역시 한 알도 틀리지 않았다. 그는 계산에도 능하여 산법(算法)을 만들기도 했다. 조조는 왕찬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자신의 순행(巡行) 시 자주 그를 수레에 동승시켰다.
5. 개인적인 삶과 가족
왕찬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다. 그러나 왕찬이 사망한 지 2년 후인 219년, 위풍이 조조의 정권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는데, 그의 두 아들이 이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이로 인해 왕찬의 직계 가계는 단절되었다. 하지만 왕찬의 친척 동생인 왕개(王凱)의 아들 왕업(王業, 자는 장후(章詡))이 결국 왕찬의 양자로 지정되어 그의 가계를 잇게 되었다. 왕업은 왕찬이 소장했던 약 1만 권의 서적(채옹의 소장 도서 포함)을 물려받았고, 이를 다시 자신의 아들인 왕필(王弼)과 왕홍(王宏)에게 전해주었다.
6. 평가 및 영향
왕찬은 당대 및 후대 인물들에게 문학적 재능과 공적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 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6.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왕찬의 문학적 재능과 공적은 동시대 및 후대 인물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좌중랑장 채옹은 왕찬을 "비범한 재능을 가진 젊은이"로 칭하며 자신의 모든 서적과 문학 작품을 물려주려 했다. 위(魏)나라의 문제(文帝)로 즉위한 조비는 자신의 저서 《전론(典論)》에서 왕찬을 '건안칠자' 중 한 명으로 언급하며, "사(辭)와 부(賦)에 뛰어나 서간조차 왕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극찬했다. 그러나 그는 오질에게 보낸 편지에서는 "그의 문장은 골격이 약하고 활력이 부족하다"는 단점도 지적했다. 그럼에도 조비는 왕찬을 서간, 진림 등과 함께 "과거의 문인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한 시대의 준재임에는 틀림없다"고 평가했다. 《삼국지》의 편찬자 진수는 왕찬이 "특히 측근의 관직에 있으면서 위나라의 제도 마련에 공헌했다"고 그의 공적을 높이 평가했지만, 인물됨에 있어서는 "허심하고 큰 덕성을 지닌 서간의 순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평했다. 《위략(魏略)》에서는 위단(韋誕)이 왕찬에 대해 "살이 찌고 어리석을 정도로 정직한 것이 단점"이라고 평가한 기록이 보인다. 베트남 학자 응우옌 히엔 레(Nguyễn Hiến Lê)는 왕찬의 시가 "말이 평이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두보의 사회시를 연상시킨다"고 칭찬했다.
6.2. 문학사적 의의
왕찬의 작품은 후대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건안 시대의 혼란과 백성들의 고통을 생생하게 담아낸 현실주의 문학의 선구자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특히 《칠애시》는 전쟁의 참상을 구체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며 당시 사회의 비극적 현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문체는 간결하고 유창하여, 한(漢)나라 시대 부(賦)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풍과는 확연히 달랐으며, 이는 후대 위진 시대의 서정적이고 간결한 부(賦) 형식 발전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 왕찬은 불만과 혼란스러운 현실 속에서 평화로운 삶을 갈망하고 밝은 군주 아래서 뜻을 펼치고자 하는 진실된 감정을 작품에 담아냈다. 이러한 그의 문학적 특성과 기여는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7. 일화
왕찬의 성격, 재능, 그리고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여러 유명한 일화들이 전해진다.
- 채옹의 영접:** 젊은 시절 왕찬이 좌중랑장 채옹을 방문했을 때, 채옹은 그를 기이하게 여겼다. 당시 채옹의 집에는 고위 관료들이 가득했지만, 채옹은 왕찬이 문밖에 있다는 말을 듣자 신발을 거꾸로 신을 정도로 황급히 나가 그를 맞이했다. 다른 손님들이 놀라 그에게 왜 어린 왕찬에게 그토록 공손하냐고 묻자, 채옹은 "이 사람은 왕공(王龔)의 손자로서 비범한 재능을 가졌으니, 내가 미치지 못한다. 내 집에 있는 모든 서적과 문학 작품을 모두 그에게 주겠다"고 답했다.
- 비석 암송:** 어느 날 왕찬이 다른 사람들과 길을 걷다가 길가의 비석을 읽었는데, 사람들이 비석의 내용을 암송할 수 있는지 묻자 그는 "할 수 있다"고 대답했다。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비석의 내용을 외우도록 했는데, 왕찬은 한 글자도 빠뜨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
- 바둑판 복원:** 한번은 그가 사람들이 바둑을 두는 것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바둑을 두던 사람이 실수로 바둑알을 흩어 버렸다. 그러자 그 광경을 본 왕찬은 바둑알의 위치를 하나도 틀리지 않고 원래 모양대로 복원시켰다. 바둑을 두던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며 수건으로 왕찬이 바둑알을 올려 놓았던 바둑판을 가리고, 다시 다른 바둑판에 바둑알을 놓게 한 후 수건으로 가렸던 바둑판과 비교해 보았는데, 역시 한 알도 틀리지 않았다.
- 조조 연회에서의 연설:** 조조가 한수(漢水) 해안가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왕찬이 축배를 들며 원소와 유표를 비판하고 조조를 칭송하는 연설을 했다. 그는 "지금 원소는 하북에서 일어났으며, 의지하는 사람이 많고 천하를 겸병하려 하지만, 현인을 좋아할 뿐 기용하지 못해 재능 있는 선비들이 그를 떠납니다. 또 유표는 어리석게도 형초(荊楚) 땅에서 중원의 전란에 아랑곳하지 않고 앉아서 시세 변화를 관망하는 것만으로 스스로 주나라 문왕 같은 명군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난세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형주에 의탁한 선비들은 모두 이 나라의 준걸들이었으나, 유표는 그들을 등용할 줄을 몰랐으므로 자신의 나라가 위태로웠을 때에도 그를 보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반면에 밝으신 공께서는 기주를 평정하던 날에 수레에서 내려 군대를 정돈하고, 그곳의 호걸들을 받아들이고 기용하여 천하를 평정했습니다. 또한 장강과 한수 지역을 평정하여 그곳의 인자들과 현인을 초빙하여 그들을 관직에 올려놓고, 천하로 하여금 당신에게 마음이 돌아가도록 하여 당신의 풍채를 바라보고 다스림 받기를 원하도록 했습니다. 문인과 무인이 함께 기용되고, 영웅들은 공을 위해 힘을 다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삼왕(三王)과 같은 품행입니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