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와 배경
올더스 헉슬리는 저명한 헉슬리 가문의 일원으로, 그의 삶과 배경은 가족의 학문적, 문학적 유산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올더스 헉슬리는 1894년 7월 26일 영국 서리주의 고덜밍에서 태어났다. 그는 작가이자 교사인 레너드 헉슬리와 그의 첫 번째 부인 줄리아 아널드의 셋째 아들이었다. 줄리아는 시인이자 비평가인 매슈 아널드의 조카이자 메리 어거스타 워드의 언니였다. 올더스라는 이름은 그녀의 언니 소설 속 등장인물에서 따왔다. 그의 할아버지는 유명한 동물학자이자 불가지론자이며 "다윈의 불독"으로 불렸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였다. 그의 형 줄리언 헉슬리와 이복동생 앤드루 헉슬리 또한 뛰어난 생물학자가 되었다. 올더스에게는 또 다른 형인 노엘 트레베넌 헉슬리(1889-1914)가 있었는데, 그는 임상 우울증을 겪은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어린 시절 헉슬리의 별명은 "오기(Ogie)", 즉 "오거(Ogre)"의 축소형이었다. 그의 형 줄리언은 그를 "사물의 기이함을 자주 숙고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사촌인 거바스 헉슬리에 따르면,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 그리기에 관심을 보였다. 헉슬리의 교육은 아버지의 잘 갖춰진 식물학 실험실에서 시작되었고, 이후 고덜밍 근처의 힐사이드 스쿨에 입학했다. 그는 어머니가 위독해지기 전까지 몇 년간 어머니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힐사이드 스쿨 이후 그는 이튼 칼리지에 진학했다. 그의 어머니는 헉슬리가 14세이던 1908년에 사망했다.
1911년, 헉슬리는 각막염에 걸려 "2~3년간 거의 맹인 상태"가 되었고, 이로 인해 "의사가 되겠다는 초기 꿈을 접게 되었다". 1913년 10월, 헉슬리는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공부했다. 1916년 1월,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영국군에 자원했지만, 한쪽 눈이 거의 실명 상태였던 건강 문제로 인해 거부되었다. 그의 시력은 나중에 부분적으로 회복되었다. 그는 1916년에 《옥스퍼드 포에트리》를 편집했고, 같은 해 6월에 최우수 학위로 문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의 형 줄리언은 "그의 실명은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고 생각한다. 우선, 그것은 의학을 직업으로 삼으려던 그의 생각을 접게 했다... 그의 독특함은 그의 보편성에 있었다. 그는 모든 지식을 자신의 영역으로 삼을 수 있었다"고 썼다.
베일리얼 칼리지 졸업 후, 헉슬리는 아버지에게 재정적으로 빚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취업을 결정했다. 그는 이튼 칼리지에서 1년간 프랑스어를 가르쳤는데, 당시 그의 학생 중에는 훗날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사용하게 될 에릭 블레어와 스티븐 런시먼이 있었다. 그는 주로 수업을 통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교사로 기억되었지만, 블레어와 다른 이들은 그의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 헉슬리는 또한 1920년대에 영국 북동부 더럼주의 빌링엄에 있는 브루너 앤드 몬드(Brunner and Mond)라는 첨단 화학 공장에서 잠시 일했다. 그의 공상 과학 소설 《멋진 신세계》(1932)의 서문에 따르면, 그곳에서 "계획 없는 혼란의 세계 속에서 질서 잡힌 우주"를 경험한 것이 이 소설의 중요한 영감이 되었다고 한다.
2. 문학 경력과 초기 활동

헉슬리는 20대 초반에 작가로서의 경력을 시작하여 성공적인 작가이자 사회 풍자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2.1. 문학 데뷔와 초기 작품
헉슬리는 17세에 첫 소설(미출판)을 완성했으며, 20대 초반에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하여 성공적인 작가이자 사회 풍자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첫 출판 소설들은 사회 풍자 작품으로, 《크롬 옐로》(1921), 《앤틱 헤이》(1923), 《메마른 잎들》(1925), 《연애대위법》(1928) 등이 있다. 《멋진 신세계》(1932)는 그의 다섯 번째 소설이자 첫 디스토피아 작품이었다. 1920년대에는 《배니티 페어》와 영국 《보그》 잡지에도 기고했다.
2.2. 블룸즈버리 그룹과의 교류

제1차 세계대전 중 헉슬리는 옥스퍼드 근처의 가싱턴 매너에서 농장 노동자로 일하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이곳은 레이디 오톨린 모렐의 집이었다. 매너에 머무는 동안 그는 버트런드 러셀,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 클라이브 벨 등 여러 블룸즈버리 그룹 인사들을 만났다. 훗날 그는 《크롬 옐로》(1921)에서 가싱턴의 생활 방식을 풍자했다. 당시 일자리가 매우 드물었지만, 1919년 존 미들턴 머리가 《아테나움》을 재편하면서 헉슬리에게 직원으로 합류해달라고 요청했고, 그는 즉시 수락했다. 그리고 가싱턴에서 만난 벨기에 난민 마리아 니스(1899-1955)와 빠르게 결혼했다. 1920년대에는 어린 아들과 함께 이탈리아에서 일부 시간을 보냈고, 그곳에서 친구 D. H. 로렌스를 방문하기도 했다. 1930년 로렌스가 프로방스에서 사망하자(헉슬리와 마리아가 사망 현장에 있었다), 헉슬리는 로렌스의 편지들을 편집하여 1932년에 출판했다. 1929년 초 런던에서 헉슬리는 작가이자 방송인, 철학자이자 현대 과학 해석가인 제럴드 허드를 만났다. 허드는 헉슬리보다 거의 5살 연상이었으며, 그에게 다양한 심오한 사상, 미묘한 상호 연결성, 그리고 여러 새로운 영적 및 심리 치료 방법을 소개했다.
이 시기의 작품으로는 과학 발전의 비인간적인 측면을 다룬 소설(그의 대표작 《멋진 신세계》)과 평화주의적 주제를 다룬 소설(《가자에서 눈이 멀어》) 등이 있다. 디스토피아적 런던을 배경으로 한 《멋진 신세계》에서 헉슬리는 대량 생산과 파블로프식 조건화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사회를 묘사한다. 헉슬리는 F. 마티아스 알렉산더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를 바탕으로 《가자에서 눈이 멀어》에 등장인물을 만들었다. 이 시기에 헉슬리는 《목적과 수단》(1937), 《평화주의 백과사전》, 《평화주의와 철학》 등 평화주의 관련 비소설 작품을 쓰고 편집하기 시작했으며, 평화 서약 연합의 활동적인 회원이었다.
3. 주요 저작 및 주제
헉슬리는 소설, 수필, 시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수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저작들은 당대 사회에 대한 깊은 통찰과 비판, 그리고 인간 존재와 영적 탐구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을 담고 있다.
3.1. 소설
헉슬리의 소설은 사회 비판과 미래 사회에 대한 예견을 담고 있으며, 인간 본성과 문명의 방향에 대한 그의 철학적 사유를 보여준다.
- 《크롬 옐로》(1921): 그의 첫 소설로, 가싱턴 매너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사회 풍자 소설이다.
- 《앤틱 헤이》(1923): 보스턴에서 한때 금지되었던 작품이다.
- 《메마른 잎들》(1925)
- 《연애대위법》(1928): 그의 초기 소설 중 하나로, 복잡한 인간 관계와 사회적 관습을 다룬다.
- 《멋진 신세계》(1932): 그의 가장 유명한 디스토피아 소설이다. 이 작품은 생화학적으로 관리되고 세뇌 교육을 통해 욕구가 충족되며, 관리되는 것에 의문을 품지 않는 시민들이 살아가는 관리 사회를 풍자한다. 소설 속 사회는 대량 생산과 파블로프식 조건화 원리에 따라 운영되며, 종교는 헨리 포드 숭배로 대체되고, 인간의 연대기는 포드 자동차가 처음 출시된 1908년을 기점으로 시작된다.
- 《가자에서 눈이 멀어》(1936): 평화주의적 주제를 담고 있으며, F. 마티아스 알렉산더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 등장한다.
- 《긴 여름 후》(1939): 이 소설로 헉슬리는 1939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 문학상 소설 부문을 수상했다.
- 《시간은 멈춰야 한다》(1944)
- 《원숭이와 본질》(1948): 제2부가 레이제 시나리오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 《루당의 악마들》(1952): 17세기 프랑스에서 일어난 악마 빙의 사건을 다룬 작품이다. 헉슬리는 이 사건을 집단 히스테리와 정치적 음모의 결과로 해석했으며, 이 작품은 훗날 많은 악마 빙의 관련 영화에 영향을 미쳤다.
- 《천재와 여신》(1955)
- 《섬》(1962): 그의 마지막 소설이자 유토피아 소설이다. 이 작품에는 해탈을 유도하는 물질인 '모크샤'가 등장하는데, 헉슬리는 LSD 합성자인 알베르트 호프만에게 이 책을 선물하며 "모크샤 약물 발견자 호프만 박사에게"라고 서명했다.
- 《제이콥의 손: 우화》(Jacob's Hands: A Fable영어)(1997년 발굴):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와 공동 집필했다.
3.2. 비소설 및 에세이
헉슬리의 비소설과 에세이는 그의 철학적, 영적 탐구를 심도 깊게 다루며, 사회 비평과 인간 의식에 대한 그의 독특한 시각을 보여준다.
- 《여백에》(On the Margin영어)(1923)
- 《길을 따라》(Along the Road영어)(1925)
- 《새롭고 오래된 에세이》(Essays New and Old영어)(1926)
- 《적절한 연구》(Proper Studies영어)(1927)
- 《네 뜻대로 하라》(Do What You Will영어)(1929)
- 《문학의 저속함》(Vulgarity in Literature영어)(1930)
- 《밤의 음악》(Music at Night영어)(1931)
- 《본문과 구실》(Texts and Pretexts영어)(1932)
- 《올리브 나무 외 에세이》(The Olive Tree and other essays영어)(1936)
- 《목적과 수단》(1937): 전쟁, 불평등, 종교, 윤리에 대한 논문을 담고 있다.
- 《단어와 그 의미》(Words and their Meanings영어)(1940)
- 《보는 기술》(1942): 헉슬리는 이 책에서 베이츠 시력교정법을 통해 자신의 시력이 극적으로 개선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는 25년 이상 만에 처음으로 안경 없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 《영원의 철학》(1945): 세계의 모든 주요 종교에서 동일한 형이상학적 진리가 발견된다는 '영원한 철학'을 논한다. 이 책은 서양과 동양의 신비주의 사이의 공통점을 보여주며, 신성한 실재를 직접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특정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는 이 책에서 "최소한의 작업 가설"을 제시하며, 신성과 하나 되는 지식을 얻는 것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 《과학, 자유 그리고 평화》(1946)
- 《주제와 변주》(Themes and Variations영어)(1950)
- 《지각의 문》(1954): 메스칼린을 복용한 자신의 환각 경험을 해석한 작품이다. 이 책은 1960년대 의식 혁명의 발단으로 평가받으며, 티모시 리어리와 테렌스 매케나 등 환각제 연구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 《천국과 지옥》(1956)
- 《아도니스와 알파벳》(Adonis and the Alphabet영어)(1956): 미국판 제목은 《내일 그리고 내일 그리고 내일》(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영어)이다.
- 《수필집》(Collected Essays영어)(1958)
- 《멋진 신세계 재방문》(1958): 세계 인구 과잉, 뚜렷한 계층적 사회 조직의 경향, 설득에 취약한 대중 사회에서 기술 사용 평가의 중요성, 현대 정치인을 잘 팔리는 상품으로 대중에게 홍보하는 경향 등 여러 주요 우려 사항을 제시한다.
- 《예술가와 예술에 대하여》(On Art and Artists영어)(1960)
- 《문학과 과학》(1963): "현대 과학의 윤리적, 철학적 함의는 기독교적이라기보다는 불교적이다"라고 썼다.
- 《모크샤: 환각제와 환영적 경험에 대한 글 1931-63》(Moksha: Writings on Psychedelics and the Visionary Experience 1931-63영어)(1977)
- 《인간의 상황: 산타바바라 강의 1959》(The Human Situation: Lectures at Santa Barbara, 1959영어)(1977)
3.3. 시와 기타 저작
헉슬리는 소설과 에세이 외에도 시, 여행기, 각본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했다.
- 시집:
- 《타오르는 수레바퀴》(The Burning Wheel영어)(1916)
- 《요나》(Jonah영어)(1917)
- 《젊음의 패배와 다른 시들》(The Defeat of Youth and Other Poems영어)(1918)
- 《레다》(Leda영어)(1920)
- 《선택된 시들》(Selected Poems영어)(1925)
- 《아라비아 인펠릭스 외 시들》(Arabia Infelix and Other Poems영어)(1929)
- 《매미 외 시들》(The Cicadas and Other Poems영어)(1931)
- 《시집》(Collected Poems영어)(1971)
- 여행기:
- 《길을 따라: 여행자의 기록과 에세이》(Along The Road: Notes and essays of a tourist영어)(1925)
- 《농담하는 빌라도: 여행 일기》(Jesting Pilate: The Diary of a Journey영어)(1926)
- 《멕시코 만 너머: 여행자의 여정》(Beyond the Mexique Bay: A Traveller's Journey영어)(1934)
- 희곡:
- 《발견》(The Discovery영어)(1924): 프랜시스 셰리던의 작품을 각색했다.
- 《빛의 세계》(The World of Light영어)(1931)
- 《인생의 굴레: 희곡》(Mortal Coils - A Play영어)(1948): 《조콘다의 미소》의 무대 버전이다.
- 《천재와 여신》(The Genius and the Goddess영어)(1958): 베티 웬델과 공동 집필했다.
- 《캅트리페디아 대사》(The Ambassador of Captripedia영어)(1967)
- 《지금 그 어느 때보다》(Now More Than Ever영어)(2000): 뮌스터 대학교 영문학과에서 재발견된 오래된 희곡이다.
- 각본:
- 《오만과 편견》(1940)
- 《퀴리 부인》(1943)
- 《제인 에어》(1944)
- 《여인의 복수》(A Woman's Vengeance영어)(1947)
- 《명성으로의 서곡》(Prelude to Fame영어)(1950)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1951): 월트 디즈니가 의뢰한 각본이었으나 사용되지 않았다.
- 《가자에서 눈이 멀어》(1971): BBC 미니시리즈로, 로빈 채프먼과 공동 작업했다.
- 아동 소설:
- 《배꽃 까마귀》(The Crows of Pearblossom영어)(1967)
- 기타:
- 《평화주의와 철학》(Pacifism and Philosophy영어)(1936)
- 《평화주의 백과사전》(An Encyclopedia of Pacifism영어)(1937): 편집자로 참여했다.
- 《회색 고위 성직자》(Grey Eminence영어)(1941): 프랑수아 르클레르 뒤 트렘블레의 전기이다.
- 《생태학의 정치학》(The Politics of Ecology영어)(1962)
- 《선택된 편지들》(Selected Letters영어)(2007)
4. 철학과 영적 탐구
헉슬리의 사상적 여정은 평화주의적 신념에서 시작하여 깊은 신비주의와 동양 철학으로 확장되었고, 환각제 경험을 통해 인간 의식의 경계를 탐구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4.1. 평화주의와 사회 비평
헉슬리는 평화주의자였다. 그는 평화 서약 연합의 활동적인 회원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작을 통해 사회, 정치, 기술 발전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분석했다. 1949년 10월 21일, 헉슬리는 《1984년》의 저자인 조지 오웰에게 편지를 보내 "이 책이 얼마나 훌륭하고 심오하게 중요한지" 축하하며 다음과 같이 예측했다. "다음 세대 안에 세계 지도자들은 유아 조건화와 나르코최면이 곤봉과 감옥보다 더 효율적인 통치 수단이며, 권력에 대한 욕망이 사람들을 채찍질하고 복종하게 만드는 것만큼이나 그들의 노예 상태를 사랑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완전히 충족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믿는다."
헉슬리는 1935년 편지에서 정치에 대한 좌절감을 표현하며, "결국 문제는 종교적인 문제로 귀결된다. 이는 불편한 사실이지만 직시해야 할 것이며, 지난 1년 동안 나는 이를 더 쉽게 직시하게 되었다"고 썼다. 1962년 12월 형 줄리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산타바바라에서 발표한 논문을 요약하며 "우리가 인간 문제를 권력 정치의 관점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에서 생각하기 시작하지 않으면 곧 나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4.2. 신비주의와 동양 철학
헉슬리는 철학적 신비주의와 보편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베단타 철학(우파니샤드 중심 철학), 명상, 그리고 아힘사 원리를 통한 채식주의에 관심을 가졌다. 1938년 헉슬리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친분을 맺었고 그의 가르침을 크게 존경했다. 헉슬리와 크리슈나무르티는 수년간 지속적인 교류(때로는 논쟁에 가까운)를 가졌는데, 크리슈나무르티는 더 순수하고 초월적인 입장을, 헉슬리는 실용적인 관심사를 가진 더 사회적이고 역사적으로 정보에 입각한 입장을 대표했다. 헉슬리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본질적인 진술인 《최초이자 마지막 자유》(1954)에 서문을 썼다.
헉슬리와 허드는 스바미 프라바바난다를 중심으로 형성된 그룹에서 베단타주의자가 되었고, 이후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를 이 모임에 소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헉슬리는 널리 통용되는 영적 가치와 사상에 대한 그의 책 《영원의 철학》을 썼는데, 이 책은 세계의 저명한 신비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다루었다. 1941년부터 1960년까지 헉슬리는 베단타 협회에서 발행하는 《베단타와 서양》에 48편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또한 1951년부터 1962년까지 이셔우드, 허드, 극작가 존 반 드루텐과 함께 편집 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42년 뉴욕의 라마크리슈나-비베카난다 센터에서 《라마크리슈나의 복음》이 출판되었다. 이 책은 스바미 니킬라난다가 조지프 캠벨과 마거릿 우드로 윌슨의 도움을 받아 번역했다. 올더스 헉슬리는 서문에서 "...성인전 문학에서 제가 아는 한 독특한 책이다. 관조하는 자의 일상생활의 작은 사건들이 이토록 친밀한 세부 사항과 풍부하게 묘사된 적이 없었다. 위대한 종교 교사의 우연하고 꾸밈없는 발언들이 이토록 세밀한 충실함으로 기록된 적이 없었다"고 썼다. 1944년 헉슬리는 스바미 프라바바난다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가 번역한 《바가바드 기타》의 서문을 썼는데, 이 책은 남부 캘리포니아 베단타 협회에서 출판되었다. 영원한 철학의 옹호자로서 헉슬리는 《기타》에 매료되었는데, 제2차 세계대전 중 누가 승리할지 불분명했던 시기에 쓴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바가바드 기타는 아마도 영원한 철학에 대한 가장 체계적인 경전적 진술일 것이다. 평화를 위한 지적, 영적 전제 조건이 부족하여 불안정한 무장 휴전만을 기대할 수 있는 전쟁 중인 세계에, 이 책은 자멸이라는 스스로 부과한 필연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명확하고 확실하게 가리키고 있다."
헉슬리는 "신성한 실재"를 개인적으로 깨닫는 수단으로 스바미 프라바바난다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의 《바가바드 기타》 번역본 서문과 《베단타와 서양》에 실린 독립 에세이에서 "최소한의 작업 가설"을 설명했다. 헉슬리가 이 글에서 상세히 설명하는 개요는 다음과 같다. "선천적으로 조직 교회의 구성원이 아니며, 인본주의와 자연 숭배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고, 무지의 어둠, 악덕의 더러움 또는 존경의 또 다른 더러움 속에 머무르기를 원치 않는 우리에게 최소한의 작업 가설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현현의 비현현된 원리인 신성, 근원, 브라만, 텅 빈 명확한 빛이 존재한다. 근원은 동시에 초월적이며 내재적이다. 인간은 신성한 근원을 사랑하고, 알고, 잠재적으로는 실제로 동일하게 될 수 있다. 이 신성에 대한 통일적 지식을 얻는 것이 인간 존재의 궁극적인 목적이자 목표이다. 인간이 궁극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면 반드시 따라야 할 법 또는 다르마, 따라야 할 도 또는 길이 있다."
헉슬리에게 베단타의 매력적인 특징 중 하나는 그것이 모든 세계 종교의 신비주의적 분파에 걸쳐 경험의 공통성을 포괄하는 역사적이고 확립된 철학과 실천을 제공한다는 점이었다. 헉슬리는 그의 책 《영원의 철학》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영원한 철학은 주로 사물, 생명, 마음의 다양한 세계에 실재하는 유일하고 신성한 실재에 관심을 둔다. 그러나 이 유일한 실재의 본질은 특정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 즉 자신을 사랑하고, 마음이 순수하며, 영적으로 가난한 사람이 아니면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헉슬리는 또한 할리우드와 산타바바라 베단타 사원에서 가끔 강의를 했다. 이 강의 중 두 개는 1955년의 《지식과 이해》(Knowledge and Understanding영어)와 《우리는 누구인가?》(Who Are We?영어)라는 제목으로 CD로 발매되었다.
많은 헉슬리 동시대인들과 비평가들은 헉슬리가 신비주의로 전환한 것에 실망했다. 이셔우드는 자신의 일기에서 헉슬리의 미망인 로라에게 비판을 설명해야 했던 상황을 묘사한다. "[1963년 12월 11일, 올더스 헉슬리 사망 몇 주 후] 출판사는 존 리먼이 전기를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로라[헉슬리]는 내게 그 생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고, 그래서 나는 존이 올더스가 가졌던 형이상학적 신념을 믿지 않고 적대적이라고 말해야 했다. 그가 묘사할 것은 단지 영리한 젊은 지식인이었지만 나중에 할리우드에 의해 타락하고 유령을 쫓아 헤매게 된 모습일 것이다." 헉슬리는 뉴욕에서 "친애하는 스즈키 선생님"을 만났다고 언급했으며, 스즈키 다이세츠의 《신비주의, 기독교 및 불교》(1957)와 《불교의 정수》(1957)를 칭찬하며 "심리학에 관해서는 이 극동의 불교도들이 서양의 누구보다도 섬세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고 언급했다.
4.3. 사이키델릭 경험

1953년 초, 헉슬리는 환각제 메스칼린을 처음 경험했다. 헉슬리는 캐나다 기관에 고용된 영국 정신과 의사 험프리 오스몬드 박사와 서신을 주고받기 시작했고, 결국 그에게 메스칼린을 공급해달라고 요청했다. 오스몬드는 이에 응하여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헉슬리의 세션을 감독했다. 헉슬리는 이 경험을 기록한 《지각의 문》을 출판한 후, 환각제 경험의 의미와 중요성에 대해 스바미 프라바바난다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아 관계가 소원해졌을 수 있지만, 헉슬리는 계속해서 협회 저널에 글을 기고하고 사원에서 강의를 하며 사교 행사에 참석했다. 헉슬리는 나중에 《지각의 문》에 상세히 기술된 경험보다 더 심오하다고 생각하는 메스칼린 경험을 했다.
헉슬리는 "신비주의적 경험은 이중으로 가치 있다. 그것은 경험자에게 자신과 세계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제공하고, 덜 자기중심적이고 더 창의적인 삶을 살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썼다. 1950년대에 LSD를 시도한 후, 그는 1960년대 초 하버드에서 티모시 리어리와 리처드 앨퍼트의 환각제 연구 작업에 고문으로 참여했다. 리어리가 약물을 무분별하게 홍보하는 데 너무 열심이라고 헉슬리가 우려하면서 성격 차이로 인해 헉슬리는 리어리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헉슬리의 저작은 존 C. 릴리에게도 강한 영향을 미쳤다.
5. 미국에서의 삶
1937년, 헉슬리는 아내 마리아, 아들 매슈 헉슬리, 친구 제럴드 허드와 함께 할리우드로 이주했다. 시릴 코널리는 1930년대 후반 두 지식인(헉슬리와 허드)에 대해 "정치, 예술, 과학 등 모든 유럽의 길이 막혔고, 이는 1937년 그들 둘을 미국으로 이끌었다"고 썼다. 헉슬리는 사망할 때까지 주로 남부 캘리포니아에서 살았으며, 한때 뉴멕시코주 타오스에서도 거주하며 《목적과 수단》(1937)을 썼다. 이 책에는 전쟁, 불평등, 종교, 윤리에 대한 논문이 포함되어 있다.
이 시기에 헉슬리는 할리우드 시나리오 작가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그의 자서전 《나의 구루와 그의 제자》에서 헉슬리가 시나리오 작가로 주당 3000 USD 이상(2020년 기준 약 5.00 만 USD)을 벌었으며, 그 돈의 상당 부분을 아돌프 히틀러의 독일에서 탈출한 유대인 및 좌파 작가와 예술가 난민들을 미국으로 이송하는 데 사용했다고 언급했다. 1938년 3월, 헉슬리의 친구이자 소설가 겸 시나리오 작가인 애니타 루스는 그를 메트로-골드윈-메이어 (MGM)와 연결시켜 주었고, MGM은 그를 원래 그레타 가르보 주연에 조지 큐커 감독으로 기획된 《퀴리 부인》에 고용했다. (결국 이 영화는 1943년 MGM에서 다른 감독과 출연진으로 완성되었다.) 헉슬리는 《오만과 편견》(1940)으로 각본 크레딧을 받았으며, 《제인 에어》(1944)를 포함한 여러 영화 작업에 대한 대가를 받았다. 그는 1945년 월트 디즈니로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와 그 작가 루이스 캐럴의 전기를 바탕으로 한 각본을 의뢰받았으나, 이 각본은 사용되지 않았다.
1953년, 헉슬리와 마리아는 미국 시민권을 신청하고 심사를 받았다. 헉슬리가 미국을 위해 무기를 들기를 거부하고, 매캐런 국내 안보법에 따라 허용되는 유일한 변명인 종교적 이상에 근거한 반대라고 진술하지 않자, 판사는 절차를 연기해야 했다. 그는 신청을 철회했지만, 미국에 계속 머물렀다. 1959년, 헉슬리는 해럴드 맥밀런 정부로부터 기사작위를 받으라는 제안을 이유 없이 거절했다. 그의 형 줄리언은 1958년에 기사작위를 받았고, 그의 동생 앤드루는 1974년에 기사작위를 받았다.
1960년 가을 학기에 헉슬리는 휴스턴 스미스 교수의 초청으로 매사추세츠 공과대학교 (MIT)의 카네기 인문학 초빙 교수로 부임했다. MIT 인문학과가 주관한 MIT 100주년 기념 행사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헉슬리는 역사, 언어, 예술에 관한 "인간은 어떤 작품인가"라는 제목의 일련의 강연을 진행했다. 1930년대 영국에서 헉슬리와 시간을 보냈던 로버트 S. 드 로프 (과학자, 인도주의자, 작가)는 1960년대 초 미국에서 헉슬리와 다시 연락을 취하며 "거대한 지성, 아름답게 조율된 목소리, 온화한 객관성, 이 모든 것이 변함없었다. 그는 내가 만났던 가장 고도로 문명화된 인간 중 한 명이었다"고 썼다.
헉슬리는 옥시덴탈 칼리지 총장 렘슨 버드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이글 록 지역에 있는 이 대학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 대학은 그의 풍자 소설 《긴 여름 후》(1939)에서 "타르자나 칼리지"로 등장한다. 헉슬리는 또한 버드를 소설에 등장시켰다.
6. 개인적인 삶
헉슬리의 개인적인 삶은 그의 결혼 생활, 가족 관계, 건강 문제, 그리고 지적 교류를 통해 그의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헉슬리는 1919년 7월 10일 벨기에의 역학자 마리아 니스(1899년 9월 10일 - 1955년 2월 12일)와 결혼했다. 그는 마리아를 1919년 옥스퍼드셔의 가싱턴에서 만났다. 그들은 아들 매슈 헉슬리(1920년 4월 19일 - 2005년 2월 10일)를 두었는데, 그는 작가, 인류학자, 그리고 저명한 역학자로 활동했다. 1955년, 마리아 헉슬리는 암으로 사망했다.
1956년, 헉슬리는 작가이자 바이올리니스트, 심리치료사인 로라 아르케라(1911-2007)와 재혼했다. 그녀는 헉슬리의 전기인 《이 영원한 순간》(This Timeless Moment영어)을 썼다. 그녀는 2010년 메리 앤 브라우바흐의 다큐멘터리 《헉슬리에 대한 헉슬리》(Huxley on Huxley영어)를 통해 그들의 결혼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1960년, 헉슬리는 후두암 진단을 받았다. 이후 몇 년 동안 건강이 악화되면서 그는 유토피아 소설 《섬》을 썼고,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프란시스코 메디컬 센터와 에살렌 연구소에서 "인간 잠재력"에 대한 강연을 했다. 이 강연들은 인간 잠재력 운동의 시작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다.
헉슬리는 지두 크리슈나무르티와 로잘린드 라자고팔의 절친한 친구였으며, 캘리포니아 오하이의 해피 밸리 스쿨(현재 베산트 힐 스쿨) 설립에 참여했다.
1961년 벨에어 화재로 대부분의 문서가 소실된 후, 헉슬리의 남아있는 문서 중 가장 방대한 컬렉션은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일부는 스탠퍼드 대학교 도서관에도 있다. 1962년 4월 9일, 헉슬리는 영국 최고 문학 단체인 왕립 문학회의 문학 동료로 선출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고, 1962년 4월 28일 편지로 이 직함을 수락했다. 헉슬리와 협회 간의 서신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협회는 헉슬리를 1963년 6월 런던 서머셋 하우스에서 열리는 만찬에 참석하여 강연을 해달라고 초청했지만, 그의 건강 악화로 인해 참석할 수 없었다.
헉슬리의 시력에 대한 상세한 기록은 그의 삶의 특정 시점에서 서로 다른 내용을 보여준다. 1939년경, 헉슬리는 베이츠 시력교정법을 접했고, 마가렛 다스트 코벳에게 지도를 받았다. 1940년, 헉슬리는 할리우드에서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북부의 리아노에 있는 40 ha 규모의 작은 목장으로 이주했다. 헉슬리는 베이츠 시력교정법과 미국 남서부 사막의 극단적이고 순수한 자연광 덕분에 시력이 극적으로 향상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25년 이상 만에 처음으로 안경 없이 편안하게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보고했다. 심지어 목장 옆 비포장도로에서 운전도 시도했다. 그는 베이츠 시력교정법에 대한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보는 기술》을 1942년(미국)과 1943년(영국)에 출판했다. 이 책에는 일반적으로 논란이 되는 이론들이 포함되어 있었고, 출판은 헉슬리의 시력에 대한 대중적 논란을 증가시켰다.
헉슬리가 십대 시절의 질병 이후 거의 맹인이었다는 믿음은 부분적인 회복으로 옥스퍼드에서 공부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널리 퍼져 있었다. 예를 들어, 《보는 기술》 출판 10년 후인 1952년, 베넷 서프는 헉슬리가 할리우드 만찬에서 안경 없이 연단에서 원고를 어려움 없이 읽는 것처럼 보였을 때 그 자리에 있었다. 서프는 "그러다 갑자기 그가 주춤했고, 불편한 진실이 명확해졌다. 그는 연설문을 전혀 읽고 있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외웠던 것이다.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그는 원고를 점점 더 눈 가까이 가져갔다. 1인치 정도 떨어져 있을 때도 읽을 수 없었고,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야 글자가 보였다. 고통스러운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브라질 작가 주앙 우발두 히베이루는 1950년대 후반 헉슬리 부부와 여러 저녁을 보냈는데, 헉슬리가 그에게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거의 아무것도 볼 수 없다. 그리고 솔직히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썼다.
반면에 헉슬리의 두 번째 아내 로라는 훗날 자신의 전기적 기록인 《이 영원한 순간》에서 "그의 삶의 위대한 성과 중 하나는 시력을 되찾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월터 C. 알바레즈가 헉슬리를 "거의 볼 수 없는 불쌍한 사람"으로 묘사한 것에 대해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보낸 편지를 공개한 후, 자신의 진술을 완화하며 "올더스를 맹인처럼 취급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느끼지만, 그의 시력 손상을 나타내는 많은 징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올더스는 안경을 쓰지 않았지만, 돋보기를 꽤 자주 사용했다"고 덧붙였다. 로라 헉슬리는 헉슬리 시력의 특이한 불일치에 대해 몇 가지 미묘한 차이를 상세히 설명했다. 이 점에서 그녀의 설명은 《보는 기술》에서 헉슬리 자신의 말과 일치한다. "전체 유기체 또는 유기체의 어떤 부분의 기능에 대한 가장 특징적인 사실은 그것이 일정하지 않고 매우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헉슬리의 시력 문제는 계속해서 유사하고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미국의 대중 과학 작가 스티븐 존슨은 그의 책 《마음 활짝 열기》에서 헉슬리가 시각적 부호화에 어려움을 겪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인용했다. "나는 시각화 능력이 부족하고, 기억할 수 있는 한 항상 그랬다. 시인의 풍부한 단어조차도 내 마음속에 그림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잠들기 직전에도 환각적인 영상은 나를 맞이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기억할 때, 그 기억은 생생하게 본 사건이나 사물로 내게 나타나지 않는다. 의지의 노력으로 어제 오후에 일어난 일의 그다지 생생하지 않은 이미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7. 죽음과 유산
헉슬리의 죽음은 당대 주요 사건에 가려졌지만, 그의 사상과 작품은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1. 사망 당시 상황
1960년, 헉슬리는 구강암 진단을 받았고, 이후 3년 동안 그의 건강은 꾸준히 악화되었다. 헉슬리 사망 3주 전인 1963년 11월 4일, 25년 지기 친구인 작가 크리스토퍼 이셔우드는 시더스 시나이 병원에 입원한 헉슬리를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인상을 남겼다. "나는 거대하고 고귀한 배가 조용히 깊은 바다로 가라앉는 모습을 보았다. 그 섬세하고 경이로운 메커니즘의 많은 부분은 여전히 완벽하게 작동하고 있었고, 모든 불빛은 여전히 빛나고 있었다."
사망 당시 집에서 암 전이로 인해 말을 할 수 없었던 헉슬리는 아내 로라에게 "LSD, 100 마이크로그램, 근육 주사"를 서면으로 요청했다. 로라의 저서 《이 영원한 순간》에 기록된 그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에 따르면, 그녀는 오전 11시 20분에 한 차례 주사했고, 한 시간 후에 두 번째 주사를 놓았다. 헉슬리는 1963년 11월 22일 태평양 표준시 오후 5시 20분, 6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7.2. 평가와 영향
헉슬리의 죽음에 대한 언론 보도는 그가 사망하기 7시간도 채 되지 않아 같은 날 발생한 존 F. 케네디 암살 사건과 동료 영국 작가 C. S. 루이스의 죽음에 가려졌다. 2009년 《뉴욕》 매거진에 실린 "가려진 유명인 사망 클럽"이라는 기사에서 크리스토퍼 보나노스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지만 최악의 타이밍으로 사망한 챔피언 트로피는 두 명의 영국 작가에게 돌아간다. 《멋진 신세계》의 저자 올더스 헉슬리는 《나니아 연대기》 시리즈를 쓴 C. S. 루이스와 같은 날 사망했다. 불행히도 두 사람의 유산 모두에게, 그날은 1963년 11월 22일, 존 F. 케네디의 차량 행렬이 텍사스 스쿨 북 디포지토리를 지나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적어도 헉슬리는 흥미로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요청에 따라 아내가 사망 몇 시간 전에 LSD를 주사했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며 환각을 경험했다." 이 우연은 피터 크리프트의 책 《천국과 지옥 사이: 존 F. 케네디, C. S. 루이스, 올더스 헉슬리와 죽음 너머의 대화》의 바탕이 되었는데, 이 책은 세 사람이 죽음 후 연옥에서 대화하는 모습을 상상한다.
헉슬리의 추모식은 1963년 12월 런던에서 그의 형 줄리언의 주도로 거행되었다. 1971년 10월 27일, 그의 유해는 영국 서리주 컴턴에 있는 와츠 묘지, 즉 와츠 영안실 예배당의 가족 묘에 안장되었다.
헉슬리는 러시아 작곡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의 오랜 친구였으며, 스트라빈스키는 자신의 마지막 관현악 작품을 헉슬리에게 헌정했다. 《변주곡: 올더스 헉슬리를 추모하며》는 1963년 7월에 시작되어 1964년 10월에 완성되었고, 1965년 4월 17일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 의해 초연되었다.
헉슬리는 당대 최고의 지성인 중 한 명으로 널리 인정받았으며, 일부 집단에서는 "현대 사상의 선구자"로 여겨지기도 했다. 그의 사상과 작품은 사회 운동과 문화에 큰 파급 효과를 미쳤으며, 특히 인간 잠재력 운동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다.
8. 수상 및 영예
올더스 헉슬리는 그의 문학적 업적과 지적 기여를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수상과 영예를 얻었다.
- 1939년: 제임스 테이트 블랙 기념 문학상 (《긴 여름 후》로 수상)
- 1959년: 미국 예술 문학 아카데미 공로상 (《멋진 신세계》로 수상)
- 1962년: 왕립 문학회 문학 동료
- 노벨 문학상 후보에 아홉 차례 지명되었다.
9. 작품의 각색
헉슬리의 작품은 여러 매체로 각색되어 그의 사상을 더 넓은 대중에게 전달했다.
- 1968년: 《연애대위법》 (사이먼 레이븐 연출의 BBC 미니시리즈)
- 1971년: 《악마들》 (켄 러셀이 《루당의 악마들》을 각색)
- 1980년: 《멋진 신세계》 (미국 TV 각색)
- 1998년: 《멋진 신세계》 (미국 TV 각색)
- 《멋진 신세계》 (TV 시리즈)
- 《가자에서 눈이 멀어》 (1971년 BBC 미니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