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옥정의 생애와 배경에 대한 기록은 주로 전통적인 문헌에 의존하며, 그의 가계와 즉위 과정은 다음과 같다.
1.1. 출생 및 가계
옥정은 상나라의 4대 왕인 태갑의 아들로 알려져 있다. 그의 개인적인 이름은 현(绚현중국어)이며, 일부 기록에서는 자현(子絢자현중국어)으로도 불린다. 그의 출생 연도나 구체적인 출생지는 명확히 전해지지 않지만, 상나라 왕실의 일원으로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2. 즉위
옥정은 아버지 태갑의 뒤를 이어 상나라의 왕위에 올랐다. 《사기》에 따르면, 그는 계사(癸巳계사중국어)년에 즉위했으며, 수도는 박(亳박중국어)이었다. 즉위 당시 경사(卿士경사중국어) 또는 사청(卿士사청중국어)이라는 인물이 그의 재상으로 활동하며 국정을 보좌했다.
2. 재위 기간 및 주요 활동
옥정의 재위 기간 동안의 주요 사건과 활동은 전통 기록에 따라 전해지며, 특히 전임 재상을 기리는 의례가 중요하게 언급된다.
2.1. 통치 기간
옥정의 재위 기간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에서 차이를 보인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그는 기원전 1628년부터 기원전 1609년까지 19년간 통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면, 다른 자료에서는 기원전 1720년부터 기원전 1692년까지 29년간 재위했다고 전하기도 한다. 이처럼 재위 연대와 기간에 대한 정보가 일치하지 않는 것은 고대 기록의 한계를 보여주는 부분이다.
2.2. 주요 의례 및 정책
옥정은 재위 8년째에 이전 재상이었던 이윤을 기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이윤은 상나라 건국에 큰 공을 세운 인물로, 옥정은 그의 무덤을 박(亳박중국어)으로 옮기고 추모 의례를 통해 그의 업적을 기렸다. 또한, 구단(咎單구단중국어)이라는 신하가 《옥정》이라는 글을 지어 백성들에게 성탕의 모범을 따르도록 권유했다는 기록도 있다.
3. 역사적 기록과 고고학적 논란
옥정의 존재는 전통적인 역사 기록과 현대 고고학적 증거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학계에서 중요한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3.1. 전통적 기록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사마천이 저술한 《사기》에는 옥정이 상나라의 5대 왕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사기》는 그가 아버지 태갑의 뒤를 이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중요한 의례를 행했다고 서술한다. 이러한 전통적 기록은 오랫동안 옥정의 역사적 존재를 뒷받침하는 주요 근거로 활용되어 왔다.
3.2. 고고학적 증거
그러나 20세기 초 은허에서 대규모로 발굴된 갑골문은 옥정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은허 갑골문은 상나라 후기 왕들의 제사 기록을 담고 있으며, 이를 통해 초기 상나라 왕들의 계보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 갑골문에 새겨진 상나라 왕 명단에는 옥정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는 《사기》를 비롯한 전통 문헌의 기록과 직접적으로 상충되는 부분으로, 옥정이 실제로 존재했던 왕인지, 아니면 후대에 추가되거나 재구성된 인물인지에 대한 심각한 논란을 야기했다. 고고학적 증거의 부재는 옥정의 실존 여부를 불확실하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4. 계승
옥정은 상나라의 왕위 계승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재위 기간이 끝난 후 사망했으며, 옥정이라는 시호가 주어졌다. 그의 뒤는 동생인 태경이 이었으며, 선대 왕은 태갑이었다.
5. 평가
옥정은 중국 고대사의 미스터리한 인물 중 하나로 평가된다. 전통적인 역사서인 《사기》에는 상나라의 5대 왕으로 명확히 기록되어 있으며,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이윤을 추모하는 의례를 행하는 등 일정한 통치 활동을 수행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그가 상나라의 정통적인 계보에 속하는 왕이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에 그의 이름이 상나라 왕 명단에서 누락되어 있다는 점은 옥정의 역사적 실존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고고학적 증거는 전통 문헌의 신뢰성에 도전하며, 옥정이 실제로 상나라를 통치했던 왕이었는지, 아니면 후대에 전승 과정에서 추가되거나 재구성된 인물인지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러한 고고학적 불일치로 인해 옥정의 존재는 여전히 학계의 중요한 연구 과제로 남아 있으며, 그의 역사적 위상에 대한 평가는 불확실성에 기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