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Gaius Ofonius Tigellinus가이우스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라틴어는 서기 10년경에 태어나 69년에 사망한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네로 황제 집권기인 62년부터 68년까지 황제의 경호원 부대인 친위대의 사령관을 지냈다. 그는 네로의 어머니 소 아그리피나와의 친분을 통해 황가의 총애를 얻었으며, 전임자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의 사망 후 친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파이니우스 루푸스와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공동으로 직무를 수행했다.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총애를 받는 친구로서 로마 전역에서 잔인함과 냉담함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한 증거를 위조하고,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를 부당하게 고발하는 등 권력을 남용했다. 60년대 중반 이후 네로의 인기가 하락하고 반란이 임박하자, 티겔리누스는 네로를 배신하고 새로운 황제 갈바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러나 갈바가 즉위한 지 불과 6개월 만에 오토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면서, 민중의 극심한 증오를 받던 티겔리누스는 오토의 명령으로 자결을 강요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의 생애는 부도덕한 젊은 시절과 잔인한 노년으로 평가되며, 후대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도 악인으로 자주 묘사되었다.
2. 생애
티겔리누스는 초라한 배경에서 태어나 로마 황실과 깊은 관계를 맺으며 권력의 중심부로 진입했다.
2.1. 출생 및 배경
가이우스 오포니우스 티겔리누스는 서기 10년경에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시칠리아의 아그리젠토 출신으로, 그리스인 혹은 히스파니아인 혈통을 가진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아버지는 남부 이탈리아의 스킬레티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티겔리누스 역시 그곳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20대 무렵 그는 로마에 거주하며 황가와 접촉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티겔리누스가 "부도덕한 젊은 시절과 잔인한 노년 시절"을 보냈다고 기록했다.
2.2. 칼리굴라 시대의 추방과 복귀
서기 39년, 칼리굴라 황제 집권기에 티겔리누스는 로마에서 추방당했다. 이는 칼리굴라의 두 자매인 소 아그리피나와 율리아 리빌라와의 간통 혐의 때문이었다. 그의 추방은 서기 41년 새로운 황제 클라우디우스에 의해 해제되었으나, 황궁 출입은 여전히 금지되었다.
2.3. 네로의 총애를 얻기까지
추방 해제 후 티겔리누스는 처음에는 그리스에서 상인으로 활동했다. 이후 그는 재산을 상속받아 이탈리아 본토의 풀리아와 칼라브리아에 토지를 구매하고 경주마 사육에 전념했다. 이 직업을 통해 그는 마침내 네로 황제의 인정을 받고 총애를 얻게 되었다. 그는 네로의 비행과 잔인한 행위들을 돕고 사주하며 네로의 신임을 얻었으며, 네로의 애인이었던 포파이아 사비나의 신뢰까지 얻어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되었다. 서기 60년경 로마에 정착한 그는 로마 시의 준군사 경찰 조직인 세 개의 수도 군단을 지휘하는 프라이펙투스 우르비가 되었다.
3. 네로 치하의 친위대 사령관
티겔리누스는 네로 황제 치하에서 친위대 사령관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며 잔혹하고 부패한 행적을 남겼다.
3.1. 사령관 임명 및 공동 사령관
서기 62년, 전임 친위대 사령관이었던 섹스투스 아프라니우스 부루스가 사망하자, 티겔리누스는 그의 뒤를 이어 친위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처음에는 파이니우스 루푸스와, 이후에는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공동 사령관직을 수행했다.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가장 가까운 조언자이자 신뢰받는 인물로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기 위해 공동 사령관들을 연달아 박해했다.
3.2. 잔혹성, 부패, 그리고 권력 남용
네로의 친구로서 티겔리누스는 로마에서 잔인함과 냉담함으로 빠르게 악명을 얻었다. 그는 네로의 첫 번째 부인인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 증거를 조작했으며,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와 같은 정치적 정적들을 제거하는 데 앞장섰다. 서기 65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의 음모 사건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자,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두 번째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함께 일종의 추밀원을 조직하여, 궁정인이자 소설가인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를 반역 혐의로 부당하게 고발했다. 이 사건으로 페트로니우스는 자살을 강요받았다. 또한 서기 67년, 그는 유명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자결 명령을 받고 사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피소의 음모를 진압한 공로로 티겔리누스는 네로로부터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 및 푸블리우스 페트로니우스 투르필리아누스와 함께 개선의 영예를 얻었으며, 자신의 흉상을 광장에 세우는 것까지 허락받았다.
3.3. 주요 사건에서의 역할
- 로마 대화재 (64년): 서기 64년 7월에 발생한 로마 대화재와 관련하여 티겔리누스는 방화 혐의를 강하게 의심받았다. 화재가 처음 진압된 후, 로마 시의 아멜리아누스 지구에 있는 티겔리누스의 소유지에서 다시 불이 붙으면서 그에 대한 의심은 더욱 커졌다. 타키투스는 이로 인해 티겔리누스가 방화범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 피소의 음모 (65년): 서기 65년, 가이우스 칼푸르니우스 피소가 황제를 옹립하려던 계획이 발각되면서 대대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두 번째 아내 포파이아 사비나와 함께 이 사건의 수사를 주도하며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와 같은 많은 이들을 반역 혐의로 거짓 고발했다. 해안 휴양 도시 쿠마에의 자택에 구금된 페트로니우스는 처형 선고를 기다리지 않고 자살을 택했다. 그는 며칠에 걸쳐 손목을 반복적으로 긋고 지혈하는 행위를 반복하면서도 친구들을 즐겁게 했다고 전해진다.
-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죽음: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첫 번째 부인이자 황후였던 클라우디아 옥타비아의 살인을 정당화하기 위해 거짓 증거를 조작하는 데 관여했다.
- 코르불로의 죽음: 서기 67년, 티겔리누스는 네로의 그리스 순방에 동행했다. 이 순방 중 그는 유명한 장군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가 자결 명령을 받고 사망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코르불로 역시 그리스로 초청받았으나 결국 자결을 강요받았다.
3.4. 사치와 방종
티겔리누스는 사치스럽고 방종한 생활로도 악명이 높았다. 특히 서기 64년, 그는 아그리파 욕장에서 난교 파티를 주최하여 로마 사회에 큰 물의를 일으켰다.
4. 몰락과 죽음
네로의 몰락이 임박하자 티겔리누스는 그를 배신했으나, 결국 새로운 황제 오토의 명령으로 자결을 강요받으며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4.1. 네로로부터의 이탈
서기 68년, 네로 황제의 인기가 민중과 로마군 사이에서 점차 하락하고 여러 차례의 반란으로 그의 몰락이 임박하자, 티겔리누스는 그를 버리고 새로운 권력자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핑계를 대며 네로를 배신했는데, 일부 기록에서는 그가 암에 걸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그는 공동 사령관 님피디우스 사비누스와 함께 친위대의 이탈을 유도했으며, 이후 님피디우스는 티겔리누스에게 지휘권을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네로는 결국 6월 9일에 자살했다.
4.2. 갈바와 오토 시기
네로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갈바의 통치 시기, 티겔리누스는 갈바의 총신 티투스 비니우스와 그의 미망인 딸(티겔리누스가 한때 목숨을 구해준 적이 있다)에게 막대한 선물을 바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는 친위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으나, 죄를 묻지 않았다. 그러나 갈바의 폭정으로 아울루스 비텔리우스가 새로운 반란을 일으키는 등 내전은 수그러들지 않았고, 서기 69년 1월 갈바가 살해되면서 오토가 새로운 황제로 즉위했다. 오토는 로마 시민들에게 극심한 증오를 받던 티겔리누스를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4.3. 자결
오토 황제는 해안가 스파 도시인 시누에사 근처의 교외 사유지에 머물고 있던 티겔리누스에게 로마로 돌아오라는 황제의 명령을 내렸다. 죽음이 임박했음을 직감한 티겔리누스는 뇌물을 써서 목숨을 구하려 시도했으며,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배를 물가에 정박해 두기도 했다. 이 시도가 실패하자, 그는 오토의 전령에게 뇌물을 주어 작별 잔치를 열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 잔치가 끝난 뒤, 티겔리누스는 떠나기 전 면도를 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면도칼로 자신의 목을 베어 자결했다.
5. 역사적 평가 및 영향
티겔리누스는 로마 역사에서 잔혹하고 부패한 인물로 기억되며, 후대의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도 주로 악인으로 묘사되었다.
5.1. 비판과 논란
티겔리누스는 네로 황제의 총신으로서 잔인하고 냉담한 성격과 부패한 행적으로 인해 당대와 후대 역사가들로부터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는 클라우디아 옥타비아 살인 조작, 페트로니우스 아르비테르 등 무고한 인물들에 대한 거짓 고발, 그리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코르불로 장군의 강제 자살에 관여하는 등 권력을 남용하여 수많은 비극을 초래했다. 타키투스는 그의 젊은 시절이 부도덕했고 노년은 잔인했다고 평가하며, 그의 전 생애에 걸친 도덕적 타락을 지적했다. 네로의 몰락이 임박하자 황제를 배신하고 자신의 안위를 도모한 그의 행적은 충성심 없는 기회주의자로 비판받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
5.2. 문학 및 예술에서의 묘사
티겔리누스의 삶과 행적은 후대의 다양한 문학 및 예술 작품에서 묘사되었다.
- 오페라: 후안 마넨의 1928년 오페라 《Neró i Acté네로 이 악테카탈루냐어》에 등장한다.
- 연극 및 영화: 1895년 연극 《십자가의 기호》와 1932년 영화 《십자가의 기호》에 등장한다.
- 소설:
- 헨리크 시엔키에비치의 1895년 소설 《쿠오 바디스》에서 악인으로 묘사된다.
- E. E. "독" 스미스의 1934년 과학 소설 《트리플래너터리》에 등장한다.
- 앤서니 버제스의 1985년 소설 《악마의 왕국》 후반부에 중요한 인물로 등장한다.
- 존 허시의 1972년 소설 《음모》에서는 로마를 경찰 국가로 묘사하며 티겔리누스를 주연으로 다룬다.
- 사이먼 스캐로우의 2011년 소설 《친위대》(서기 51년 배경)에서는 친위대의 하급 장교인 '옵티오'로 등장하며, 소설 말미에는 부루스 사령관의 부관으로 승진하고 네로가 즉위한 후 그를 계승할 것으로 예상된다.
- 미니시리즈: 1985년 6시간짜리 미니시리즈 《A.D.》에 등장한다.
- 영화 《쿠오 바디스》(1951):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에서 티겔리누스(랄프 트루먼 분)는 영화 말미에 로마 시민들이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킬 때 네로 원형극장에서 반란군 병사에게 "플라우티우스의 칼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칼에 찔려 사망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역사적 사실과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