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가계 및 출생
오토 3세는 1261년 2월 11일 부르크하우젠에서 니더바이에른 공작 하인리히 13세 (바이에른 공작)와 그의 아내인 헝가리의 엘리자베트 (바이에른 공작부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 엘리자베트는 벨러 4세 헝가리 국왕의 딸로, 오토 3세는 외조부인 벨러 4세를 통해 헝가리 아르파드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다.
2. 바이에른 공작으로서의 통치
1290년 오토 3세는 아버지 하인리히 13세의 뒤를 이어 니더바이에른 공작으로 즉위했으며, 그의 두 남동생인 루트비히 3세 (바이에른 공작)와 슈테판 1세 (바이에른 공작)와 함께 공동 통치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오토 3세는 합스부르크가에 대항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는 1180년에 바이에른 공국이 잃었던 슈타이어마르크 주를 되찾으려 시도했다. 또한 합스부르크가에 맞서 아돌프 (독일 국왕)를 지지했으며, 괼하임 전투에서 아돌프의 편에 서서 싸웠다.
1305년부터 1308년까지 오토 3세가 헝가리에 머무는 동안 니더바이에른은 그의 동생 슈테판 1세가 통치했다. 1310년에는 합스부르크가와의 새로운 전쟁으로 인해 부르크하우젠이 황폐해졌다. 오토 3세의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 문제 개입은 바이에른 내에서의 그의 지위를 약화시켰고, 결국 재정 문제로 인해 실패로 이어졌다. 1312년 오토 3세가 사망한 후 니더바이에른 공작위는 그의 아들 하인리히 15세 (바이에른 공작)와 슈테판 1세의 아들들인 하인리히 14세 (바이에른 공작) 및 오토 4세 (니더바이에른 공작)에게 계승되었다. 하인리히 14세의 아들 요한 1세 (바이에른 공작)는 니더바이에른의 마지막 공작이었으며, 1340년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공국이 재통합되었다.
3.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국왕으로서의 통치
오토 3세의 헝가리 및 크로아티아 국왕으로서의 통치는 복잡한 배경과 치열한 왕위 경쟁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결국 그의 퇴위로 막을 내렸다.
3.1. 헝가리 왕위 계승 배경
1301년 아르파드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언드라시 3세의 사망으로 헝가리 왕위는 단절되었다. 이에 헝가리 귀족들은 새로운 국왕을 찾기 시작했고, 오토 3세는 외조부인 벨러 4세를 통해 아르파드 왕조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1301년에 헝가리 왕위 계승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당시 이 제안을 즉시 수락하지 않았다.
이후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던 경쟁자 바츨라프 3세는 1305년 8월 오토 3세에게 자신의 헝가리 왕위 주장을 포기했다. 이에 오토 3세는 헝가리 왕위를 수락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알브레히트 1세 (신성 로마 제국)가 이끄는 합스부르크가가 오스트리아를 통과하는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에, 오토 3세는 상인으로 변장하여 1305년 11월에 부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3.2. 즉위와 통치
1305년 12월 6일, 오토 3세는 세케슈페헤르바르에서 베스프렘 주교 베네딕트 라드와 차나드 주교 안토니에 의해 성 이슈트반 왕관을 쓰고 헝가리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통치를 강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306년 동안, 그의 주요 경쟁자였던 앙주가의 카롤리 로베르트는 에스테르곰, 스피시 성, 즈볼렌을 포함한 왕국 북부의 여러 요새들을 점령했다. 이듬해인 1307년에는 부다까지 점령하며 오토 3세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켰다.
3.3. 통치의 종결
1307년 6월, 오토 3세는 강력한 트란실바니아 보이보드인 라슬로 칸을 방문했으나, 라슬로 칸은 그를 투옥했다. 같은 해 10월 10일, 라코시에서 열린 헝가리 의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카롤리 로베르트를 국왕으로 선포했다. 그러나 가장 강력한 귀족들인 마테 차크, 아마데 아바, 그리고 라슬로 칸은 카롤리 로베르트의 선포를 무시했다.
연말에 라슬로 칸은 오토 3세를 석방했고, 오토 3세는 헝가리를 떠났다. 하지만 라슬로 칸은 성 이슈트반 왕관을 카롤리 로베르트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했는데, 이는 성 이슈트반 왕관으로 대관식을 거치지 않으면 왕위의 정통성이 의심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토 3세는 1308년에 헝가리 왕위에서 공식적으로 퇴위했다.
4. 개인사
오토 3세는 두 차례 결혼했다.
첫 번째 결혼은 1279년 1월에 루돌프 1세 (신성 로마 제국)와 호엔베르크의 게르트루트의 딸인 카타리나와 이루어졌다. 이들 사이에서는 1280년에 쌍둥이 아들 하인리히와 루돌프가 태어났으나, 두 아들 모두 같은 해에 요절했다. 카타리나는 1282년 4월 4일에 사망했으며, 오토 3세는 이후 23년간 홀아비로 지냈다.
두 번째 결혼은 1309년 5월 18일에 글로고프의 아그네스와 이루어졌다. 아그네스는 하인리히 3세 (글로고프 공작)와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의 마틸다의 딸이었다. 오토 3세와 아그네스 사이에서는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 비텔스바흐의 아그네스 (1310년 ~ 1360년): 하인리히 4세 (오르텐부르크 백작)와 결혼했다.
- 하인리히 15세 (바이에른 공작) (1312년 8월 28일 ~ 1333년 6월 18일): 아버지의 뒤를 이어 니더바이에른 공작이 되었다.
5. 사망
오토 3세는 1312년 11월 9일 란츠후트에서 사망했다.
6. 평가 및 유산
오토 3세의 통치는 헝가리 왕위 계승을 둘러싼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있었다. 헝가리 역사에서 그는 1301년부터 1310년까지의 공위시대 동안의 대립왕으로 평가받는다. 헝가리 국왕으로서의 그의 통치는 왕권을 강화하는 데 실패했으며, 카롤리 로베르트와의 경쟁에서 밀려 결국 왕위에서 물러났다.
그의 헝가리 및 오스트리아 문제 개입은 바이에른에서의 그의 지위까지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이는 심각한 재정 문제로 이어졌다. 오토 3세의 이러한 정치적 결정과 그로 인한 실패는 그의 통치가 당시 사회 및 정치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으로 지적된다. 비록 니더바이에른 공작으로서의 역할은 유지했지만, 헝가리 왕위 도전의 실패는 그의 전반적인 통치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사후 니더바이에른 공작위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계승되었고, 이후 루트비히 4세 (신성 로마 제국)에 의해 바이에른 공국이 재통합되는 계기가 되었다.
7. 외부 링크
- [http://www.historisches-lexikon-bayerns.de/artikel/artikel_45631 Historisches Lexikon Bayerns: Ungarisches Königtum Ottos III. von Niederbayern, 1305-1307 (Sarah Hadry)]
- [http://genealogy.euweb.cz/wittel/wittel1.html#H1 A listing of descendants of Otto I, Count of Scheyern, including Henry XIII and his childr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