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오쿠보 다다치카는 도쿠가와 막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했으며, 히데타다 정권의 핵심 인물로 부상했다. 그의 몰락은 개인적인 불운과 함께 당시 막부 내 권력 투쟁의 결과로 해석된다.
1.1. 초기 생애 및 가문 배경
오쿠보 다다치카는 덴분 22년(1553년)에 미카와국 누카타군 가미와다(현 아이치현 오카자키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중신이자 도쿠가와 십육신장 중 한 명인 오쿠보 다다요이며, 어머니는 곤도 유키마사의 딸이다. 오쿠보 가문은 도쿠가와 가문의 대대로 이어진 후다이 다이묘 가문으로, 다다치카는 이러한 유서 깊은 배경 속에서 성장하며 자연스럽게 무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1.2.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 활약
다다치카는 에이로쿠 6년(1563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기기 시작했으며, 에이로쿠 11년(1568년) 도토미국 호리카와성 공격에서 첫 전투를 치르며 적장의 목을 베는 무공을 세워 16세의 나이에 첫 전과를 올렸다. 호리카와성은 이듬해인 1569년에 함락되었는데, 이에야스는 성을 점령한 후 이시카와 한자부로에게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성내의 포로들과 주민들을 학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학살로 미야코다강 기슭에서 약 700명이 참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다치카는 이 학살을 직접 목격했으며, 그의 개인적인 저술인 『미카와 이야기』에서 "...남녀 모두 조각조각 잘려나갈 수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후 다다치카는 이에야스의 주요 군사 작전에 대부분 참여했다. 겐키 원년(1570년)의 아네가와 전투, 겐키 3년(1572년)의 미카타가하라 전투, 그리고 덴쇼 12년(1584년)의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와 덴쇼 18년(1590년)의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활약했다.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는 도쿠가와군이 붕괴하여 혼란에 빠지는 상황 속에서도 이에야스의 곁을 떠나지 않고 하마마쓰성까지 수행하며 이에야스에게 충성심을 인정받았다. 이 공로로 그는 부교시키(奉行職일본어)에 임명되었다. 당시 부교시키(奉行職)는 훗날의 로주와 유사한 중요한 직책으로, 이는 다다치카가 젊은 나이부터 도쿠가와 가문 내에서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시사한다. 도쿠가와 정권의 여명기에는 아직 로주 제도가 확립되지 않았지만, 다다치카는 정적인 혼다 마사노부와 함께 사실상의 '초대 로주'와 같은 입장에 있었다.
덴쇼 10년(1582년) 혼노지의 변이 발생했을 때, 이에야스가 위험한 이가고에를 통해 미카와로 탈출하는 여정에 고위 가신 중 한 명으로 동행했다. 이후 이에야스가 간토 지방으로 본거지를 옮기자, 다다치카는 무사시국 하뉴에 2만 석의 영지를 받고 하뉴성주가 되었다. 분로쿠 2년(1593년)에는 이에야스의 적자인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가로로 임명되었다. 이듬해인 분로쿠 3년(1594년)에는 아버지 다다요의 사망 후 가독을 계승하고, 아버지의 유령을 상속받아 상미국 오다와라 6만 5천 석의 영주(후에 초대 오다와라 번주)가 되었다. 이로써 그의 총 영지는 7만 석에 달했다.
게이초 5년(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당시에는 동군의 주력을 이끈 히데타다를 따라 나카센도를 지나며 진군했으나, 도중에 시나노국 우에다성에 농성하던 서군의 사나다 마사유키를 공격하는 문제로 혼다 마사노부 등과 대립하며 전투 도착이 지연되었다. 게이초 6년(1601년)에는 고즈케국 다카사키번 13만 석으로의 가증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고사했다. 게이초 15년(1610년)에는 로주에 취임하여 제2대 쇼군 히데타다 정권의 유력자가 되었다. 게이초 19년(1614년) 1월, 실질적인 쇼군인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기독교인 박해를 명했을 때, 다다치카는 교토 주민들에게 모든 기독교 사제를 추방하라는 명령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오쿠보 가문 개역 사건
오쿠보 다다치카의 개역 사건은 그의 가문이 막부의 신임을 잃고 몰락하게 된 일련의 비극적인 사건들을 의미한다. 이는 단순한 개인의 불운을 넘어, 도쿠가와 막부 초기 권력 구조와 정치적 역학 관계의 복잡성을 보여준다.

2.1. 개역의 배경
오쿠보 다다치카의 권세는 게이초 16년(1611년) 10월 10일 그의 적자인 오쿠보 다다쓰네가 병으로 사망하면서 서서히 기울기 시작했다. 다다쓰네의 사망 당시 막부의 허락 없이 조문을 온 이들이 근신 처분을 받았다. 적자의 죽음에 의기소침한 다다치카는 이후 정무에 자주 불참하며 이에야스의 불만을 샀다. 또한 히데타다가 다다치카를 위해 정진오치(精進落とし, 장례 후의 첫 식사) 연회를 열려 했으나, 다다치카가 이를 거절하여 다른 로주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게이초 18년(1613년) 1월 8일에는 야마구치 시게마사가 막부의 허가 없이 다다치카의 양녀를 아들 야마구치 시게노부에게 시집보낸 사건으로 개역을 당했다. 다다치카는 이전에 양녀의 친할아버지인 이시카와 이에나리가 혼인에 대한 허락을 받았으므로, 자신이 다시 허락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며 히데타다의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이 사건에 대한 막부의 결정에 대해 다다치카는 같은 달 15일 심하게 분노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튿날 아들과 함께 에도성으로 출사했다. 또한 같은 해 4월에는 그의 요리키(与力)였던 오쿠보 나가야스가 사망한 후 그의 부정 축재가 드러나, 나가야스의 아들들이 할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오쿠보 나가야스 사건). 이 사건은 오쿠보 가문에 연이은 불행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2월, 에도에서 슨푸로 귀국하던 이에야스가 6일 사가미국 나카하라에 도착하여 며칠간 머물다 13일에 갑자기 에도로 되돌아갔다. 『슨푸기』에는 이 이유가 이듬해 도카네에서 매사냥을 하기 위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도다이기』에는 전날 에도에서 도이 도시카쓰가 히데타다의 사자로 왔다는 점과 옛 아나야마씨의 로닌 바바 하치자에몬이 다다치카가 모반을 꾀한다고 고소했다는 점을 이유로 들었다. 바바의 고소는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시카와 마사니시 견문집』에 따르면 히데타다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낸 것이 이에야스가 에도로 돌아간 이유라고 하며, 『슨푸기』에도 7일 이타쿠라 시게무네가 사자로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2.2. 개역의 경과 및 이후 삶
이후 게이초 19년(1614년) 1월 18일, 다다치카는 막부로부터 기리시탄 추방 명령을 받아 교토로 올라가 바테렌(기독교 선교사) 사찰을 파괴하고 신도들의 강제 개종을 추진했으며, 개종 거부자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이튿날 갑작스럽게 개역 통보를 받았다. 그의 거성인 오다와라성은 혼마루를 제외하고 파괴되었고, 2월 2일에는 전년도에 후사가 끊겨 단절된 오쿠보 다다스케의 거성인 산마이바시성 또한 파괴되었다.
다다치카는 이후 오미국으로 유배되어 이이 나오타카에게 맡겨지는 신세가 되었다. 이때 구리타군 나카무라향에 5천 석의 영지를 받았다. 3월 1일 다다치카는 덴카이를 통해 이에야스에게 변명서를 제출했으나, 이에야스는 이를 보고도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3월 15일에는 호리 도시시게가 연좌되어 개역을 당했다.
그 후 다다치카는 출가하여 게이안 도하쿠(渓庵道白게이안 도하쿠일본어)라는 법명을 사용했다. 간에이 5년(1628년) 6월 27일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그는 생전에 쇼군 가문의 용서를 끝내 받지 못했다.
2.3. 개역에 대한 역사적 논의
다다치카의 개역 이유에 대해 『슨푸기』는 앞서 언급된 무단 혼인을, 『도다이기』는 여기에 바바의 고소 내용을 덧붙였으나, 바바를 불성실한 자로 간주하여 그의 주장이 완전히 거짓임을 밝히고 있다. 『슨푸기』에는 2월 1일 도이 도시카쓰가 이에야스와 면담했을 때, 히데타다가 다다치카와 친한 사람들이 많다는 점에 불만을 표했다는 보고가 있다. 이에 따라 2월 14일 에도 막부의 중신들이 제출을 요구받은 기청문(起請文)에는 다다치카와 그 아들과의 서신 왕래를 금지하는 조항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에 더해 혼다 마사노부와 혼다 마사즈미 부자가 정적인 다다치카를 몰아내기 위한 계략을 꾸몄다는 견해가 에도 시대부터 제기되었다. 마사즈미는 오카모토 다이하치 사건에 부하가 연루되면서 정치적 입지가 흔들렸기 때문에, 다다치카를 제거하여 자신의 발판을 굳히려 했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지키』 또한 혼다 부자의 음모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당시 사료에는 이 점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다만 호소카와 다다오키가 서신에서 다다치카 개역으로 인해 마사노부의 권세가 이전보다 10배나 커졌다고 평가했을 뿐이다. 마사노부는 유배 후 다다치카에게 오다와라에 있는 다다치카의 어머니와 부인의 안부를 전하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는 앞서 언급된 기청문의 원인이 된 '다다치카와 친한 자들'에 해당한다. 또한 『미카와 이야기』의 저자인 오쿠보 다다타카도 마사노부가 다다치카에게 은혜를 입었기 때문에 두 사람 사이의 다툼은 꾸며낸 이야기라고 단언했다.
또 다른 설로는 도요토미 정권을 완전히 제거하려던 이에야스가 서국 다이묘들과 친분이 깊어 도요토미 가문과의 화해를 주장할 가능성이 있던 다다치카를 멀리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처럼 다다치카의 개역은 막부 내 권력 투쟁, 이에야스의 정치적 전략, 그리고 개인적인 불운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2.4. 가문의 복권과 후손
다다치카의 오랜 세월에 걸친 무공이 컸기 때문에, 오쿠보 가문의 가독은 그의 적손인 오쿠보 다다토모에게 계승이 허락되었다. 그의 양자이자 다다토모의 사촌인 오쿠보 다다토모(大久保 忠朝おおく보 다다토모일본어)는 후에 오다와라번주로 복귀하여 가문의 명예를 회복했다.
또한 연좌되어 근신 중이던 그의 차남 이시카와 다다후사는 양가(養家)의 조상인 이시카와 이에나리의 공로와 오사카 전투에서의 전공이 고려되어 복귀가 허락되었다. 그는 최종적으로 오가키번주와 제제번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이세국 이세카메야마번주가 되었다.
3. 저술: 미카와 이야기
오쿠보 다다치카는 『미카와 이야기』(三河物語미카와 모노가타리일본어)라는 중요한 저작을 남겼다. 이 책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권력 상승 과정과 초기 도쿠가와 막부의 역사를 기록한 연대기이다. 다다치카의 『미카와 이야기』는 이에야스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를 둘러싼 초기 도쿠가와 가문의 역사를 상세하게 기술하여 당대의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이 책에는 1568년 호리카와성 전투 후 벌어진 호리카와성 학살 사건에 대한 다다치카 자신의 증언이 담겨 있어 역사적 중요성이 크다. 그는 이 학살을 직접 목격하고 "남자도 여자도 조각조각 잘려나갈 수 있었다"고 기록하며 당시의 잔혹성을 증언했다. 이 증언은 『미카와 이야기』가 단순한 연대기를 넘어 당대 무사들의 시각과 경험을 담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편, 다다치카의 숙부인 오쿠보 히코자에몬 다다타카 또한 동명의 『미카와 이야기』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혼동이 있을 수 있다. 다다치카의 『미카와 이야기』가 이에야스의 치세와 막부의 초창기를 다룬 반면, 히코자에몬의 『미카와 이야기』는 도쿠가와 가문의 초기부터 세키가하라 전투에 이르는 과정을 다루는 자전적인 성격이 강하다. 다만, 오쿠보 다다타카가 본인의 『미카와 이야기』에서 혼다 마사노부와 다다치카 사이의 불화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단언하는 등, 두 인물이 서로의 저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시사된다.
4. 인물과 일화
오쿠보 다다치카는 강직한 성품과 이에야스를 향한 깊은 충성심을 지닌 인물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 개역 통보 당시의 태도
게이초 19년(1614년) 1월 19일, 다다치카가 개역 명령을 받은 날, 그는 교토의 도도 다카토라 저택에서 장기를 두고 있었다. 그곳에 이에야스의 상사(上使)인 교토소시타이 이타쿠라 가쓰시게가 예고 없이 나타나자, 다다치카는 모든 것을 직감하고 "유배자의 몸으로는 장기도 즐길 수 없다. 이 한 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 달라"고 말했고, 가쓰시게는 이를 승낙했다고 한다. 또한 다다치카의 개역 소식을 들은 교토 시민들이 크게 동요하며 "도성 안팎이 시끄러운데, 교토 사람들은 다다치카가 죄를 입었다는 소식을 듣고 큰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재물을 여기저기 옮기며 심하게 소동했다"고 『한판보(藩翰譜)』에 기록되어 있다. 이 일화는 그의 태연함과 당시 그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준다.
- 이에야스에 대한 충성심
이이 나오타카가 이에야스 사후에 오쿠보 다다치카의 억울한 개역을 쇼군 히데타다에게 탄원하려 하자, 다다치카는 이에야스에 대한 불충이 될 것이라며 이를 거절했다고 전해진다. 이는 이에야스에 대한 그의 변함없는 충성심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 히데타다의 쇼군 추천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가 중신들을 모아 후계자 문제를 논의할 때, 히데타다의 형인 유키 히데야스나 동생 마쓰다이라 다다요시의 이름이 거론되는 가운데, 다다치카가 히데타다를 추천했다는 일화가 『다이토쿠인도노 고짓키(台徳院殿御実記)』에 전해진다.
-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대응
도요토미 히데쓰구 사건 당시, 히데쓰구가 히데타다를 인질로 삼아 이에야스에게 중개를 요청하려 획책했다. 그러나 다다치카는 히데쓰구가 보낸 두 번의 사자를 교묘하게 돌려보내고, 그 사이에 히데타다를 후시미 저택으로 피신시켜 위기를 모면했다고 『한판보』에 기록되어 있다.
- 다도에 대한 관심과 논란
다다치카는 다도를 즐겨 후루타 오리베에게 다도를 배웠던 다인이기도 했다고 차인계보(茶人系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는 다실과 조경에 공을 들여 가미가타(上方) 다이묘들을 접대하는 데 사용했다. 또한 사자(使者)에게도 차를 대접하고 말까지 주었다. 이 때문에 다다치카는 오슈에서 대량의 말을 구입하여 에도와 오다와라에 두었다. 이에 대해 혼다 마사노부는 이러한 행위에 이의를 제기하며 오다와라에서의 전봉을 요청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나, 다다치카는 자신이 오다와라를 하사받은 것은 당연하다고 답하여 그 발언이 문제가 되었다고 『이시카와 마사니시 견문집』에 전해진다. 그의 다도에 대한 깊은 조예와는 별개로, 이러한 개인적 기호와 재정 운용 방식이 동료 중신들과의 마찰을 빚었음을 엿볼 수 있다.
5. 평가와 유산
오쿠보 다다치카는 도쿠가와 막부의 초기 정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실각은 그를 둘러싼 논란을 야기했다. 그의 생애는 도쿠가와 막부의 기초를 다지는 데 기여한 공헌과 함께, 당시의 정치적 역학 관계와 그가 연루된 사회적 문제들을 반영한다.
5.1. 긍정적 평가 및 공헌
오쿠보 다다치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다이 다이묘로서 도쿠가와 막부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는 이에야스 휘하에서 수많은 전투에 참여하여 뛰어난 무용을 선보였고, 특히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이에야스의 곁을 지키며 충성심을 입증했다. 막부 창건 후에는 로주로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쇼군의 정권을 안정화하고 초기 막부의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는 이에야스가 가장 경험 많고 신뢰하는 조언자 중 한 명으로 여겨질 만큼 뛰어난 행정 능력과 정치적 식견을 인정받았다. 그의 이러한 공헌은 도쿠가와 막부가 에도 시대를 통틀어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기반이 되었다.
5.2. 비판 및 논란
오쿠보 다다치카의 생애는 여러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부분은 그가 기리시탄 추방령 집행에 관여한 역할이다. 1614년, 그는 교토에서 기리시탄 사원들을 파괴하고 신도들에게 강제 개종을 명령하는 등, 당시 막부의 강력한 종교 탄압 정책을 직접적으로 집행했다. 이는 개인의 신앙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였으며, 그가 막부의 핵심 인물로서 이러한 정책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시각이 존재한다.
또한 그의 정치적 몰락인 "오쿠보 가문 개역 사건"은 그의 행적과 결정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아들 사망 후의 정무 소홀, 막부의 허락 없는 혼인 사건, 그리고 오쿠보 나가야스 사건과의 연루 등은 그의 행정적 판단력이나 처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 한다. 특히 그가 혼다 마사노부 등과의 정치적 암투에 휘말려 희생되었다는 음모론이나, 도요토미 씨 제거를 염두에 둔 이에야스의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제거되었다는 설은 그를 둘러싼 역사적 논쟁의 핵심을 이룬다. 그의 개인적인 자부심과 다도 및 말 구입에 대한 과도한 지출이 마사노부의 비판을 받았다는 일화는 그의 성격적 특성이 정치적 몰락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시사한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은 그의 공헌을 인정하면서도, 복잡한 인물로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6. 가계
오쿠보 다다치카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부모
- 아버지: 오쿠보 다다요
- 어머니: 곤도 유키마사의 딸
- 정실
- 이시카와 이에나리의 딸
- 자녀
- 오쿠보 다다쓰네 (장남)
- 이시카와 다다후사 (차남)
- 오쿠보 노리타카 (삼남)
- 오쿠보 유키노부
- 이시카와 나리타카
- 오쿠보 다다나오
- 오쿠보 다다무라
- 오쿠보 사다요시
- 요다 야스자네의 아내
- 구베이 주자에몬의 아내
- 쇼만지 교료의 아내
- 양녀
- 모리카와 시게토시의 아내 (딸: 시타라 사다키요의 딸)
- 야마구치 시게노부의 아내 (딸: 이시카와 야스미치의 딸)
- 하루 (다케코시 마사노부의 아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