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오쿠 야스카타는 1847년 1월 5일 (일본 고카 3년 음력 11월 19일) 부젠국 (현재의 후쿠오카현) 고쿠라번 오가사와라 가의 가신인 오쿠 리에몬 호노리(奥利右衛門保矩)의 장남으로 고쿠라(현재의 기타큐슈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다메지로(為次郎다메지로일본어)였다. 15세 때 그는 본가인 오쿠 야스요시(奥保義)의 양자가 되어 가문의 대를 이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가독을 이은 오쿠 야스카타는 사무라이 가문의 양자로 성장했으며, 집안의 말 관리인인 `우마마와리`(馬廻우마마와리일본어)와 경비대장인 `모노가시라`(物頭모노가시라일본어) 직책을 맡으며 300석(石) 상당의 봉록을 받았다. 이 시기에 그의 이름은 시치로자에몬(七郎左衛門시치로자에몬일본어)으로 변경되었다. 그는 에도 막부 말기, 주가가 막부 측에 서서 조슈 정벌에 참가했을 때 그들을 따랐다.
1.2. 초기 경력
메이지 유신 이후, 오쿠 야스카타는 새로운 일본 제국 육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1869년 1월, 그는 아시가루 대장으로 취임했으며, 이듬해인 2월에는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1871년 5월에는 상비4번 소대장으로, 같은 해 6월에는 육군에 입영하여 서해진대(西海鎮台) 2번대대 소대장으로 부임했다. 1871년 11월에는 육군 대위 대리(大尉心得)가 되어 진세이진대(鎮西鎮台, 후의 구마모토 진대)에 소속되었고, 1872년 4월에는 육군 대위로 승진하여 가고시마 분영소에 배속되었다.
1873년 8월, 그는 구마모토 진대 중대장으로 이동하여 사가의 난에 출정하여 전투 중 부상을 입었다. 1874년 6월에는 육군 소령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11대대장에 취임했으며, 같은 해 8월에는 타이완 출병에 종군했다. 1875년 2월에는 보병 제13연대 대대장이 되어 신푸렌의 난 평정에 참여했다.
2. 군 경력
오쿠 야스카타는 일본 근대화 과정의 주요 내전과 전쟁에 참전하며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입증했다.
2.1. 보신 전쟁 및 초기 군사 활동
보신 전쟁 이후에도 일본 열도에서는 새로운 정부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며 여러 내란이 발생했다. 오쿠 야스카타는 1877년 2월 세이난 전쟁에 참전하여 구마모토 성 농성전에 참가했다. 2월 21일부터 시작된 구마모토 성 방어전에서 그는 보병 1개 대대를 이끌고 사쓰마 군의 포위를 돌파하여 사쓰마 군 후방에 상륙한 정부군(충배군)과의 연락에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총탄이 그의 입에서 뺨을 관통하는 큰 부상을 입었으나, 그는 왼손으로 상처를 누르고 오른손으로 군도를 든 채 흔들림 없이 지휘를 계속하여 부하들의 사기를 높였다. 4월 20일에는 구마모토 진대 보병 제14연대장 대리가 되었다.
1878년 11월 육군 중좌로 진급하여 보병 제14연대장을 지냈고, 이후 보병 제10연대장으로 이동했다. 1882년 2월에는 육군 대좌로 승진했으며, 근위보병 제2연대장을 거쳐 1885년 5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하여 보병 제7여단장에 착임했다. 그는 근위보병 제1여단장, 동궁무관장(東宮武官長), 근위보병 제2여단장 등을 역임하며 주요 보직을 거쳤다. 1894년 2월부터 9월까지는 유럽에 출장하여 서구의 군사 시스템을 시찰하기도 했다.
2.2. 청일 전쟁
오쿠 야스카타는 1894년 11월 노즈 미치츠라의 후임으로 제5사단장이 되었고, 이듬해 12월 청일 전쟁에 출정했다. 이 전쟁에서의 군공으로 1895년 8월 남작 작위를 받아 화족이 되었다.
전쟁 후에도 그의 진급은 계속되어 1896년 10월 14일 제1사단장이 되었고, 1897년 10월 27일에는 근위사단장에 임명되었다. 이후에는 도쿄 방어 총독(東京防禦総督)과 동부 도독(東部都督) 등을 역임하며 수도 방어의 책임을 맡았다. 1902년 10월에는 인도에 출장하여 다음 해 3월에 귀국했으며, 1903년 11월에는 육군 대장으로 진급했다.
2.3. 러일 전쟁
1904년 1월, 오쿠 야스카타는 군사참의관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3월 러일 전쟁이 발발하자 제2군 사령관으로 출정했다. 이때 모리 오가이가 제2군 군의부장으로 그의 휘하에 있었다. 그는 러일 전쟁에서 남산 전투, 득리사 전투, 요양 회전, 사하 회전, 흑구대 회전, 봉천 전투 등 주요 작전과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큰 공적을 세웠다.

2.3.1. 남산 전투
제2군은 제1사단, 제3사단, 제4사단, 기병 제1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랴오둥반도의 거점인 다롄을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5월 5일부터 13일까지 랴오둥반도에 상륙한 제2군은 5월 26일 오전 5시부터 러시아군의 진지인 남산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제2군은 러시아군의 견고한 방루와 기관총 사격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으나, 오쿠는 공격을 포기하지 않고 맹렬하게 병력을 투입했다. 오후 5시에는 일본 제국 해군의 포함에 의한 함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돌격을 감행했고, 오후 8시에 마침내 남산을 점령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의 사상자는 4,387명에 달했으며, 손해 보고를 들은 도쿄의 대본영은 '0이 하나 더 많지 않으냐'며 귀를 의심했다고 전해진다. 이 승리로 오쿠는 '남산의 오쿠'라는 별명과 함께 더욱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2.3.2. 득리사 전투
다롄 점령 후, 뤼순 공격을 담당하는 제3군으로 제1사단이 이동했고, 제2군은 재편성을 통해 제3사단, 제4사단, 제5사단, 야전포병 제1여단, 기병 제1여단을 지휘하에 두게 되었다. 이후 제2군은 랴오양을 목표로 북상했다. 6월 14일, 뤼순 원호를 위해 남하한 러시아군 4만 명과 랴오양 남방 210 km 지점의 득리사(德利寺)에서 격돌했다. 이틀간의 전투에서 제2군은 효과적인 측면 공격을 활용하여 자신들보다 병력이 우세한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이 승리로 뤼순 요새의 고립이 결정적으로 굳어졌다.
2.3.3. 요양 회전
득리사 전투 승리 후, 제2군은 새로이 제6사단을 지휘하에 추가했으며, 개평(蓋平)과 대석교에서 승리했다. 이후 제5사단이 제4군 지휘하로 이동했지만, 8월 4일까지 랴오양을 위협할 수 있는 위치까지 전진했다. 8월 24일 제1군이 작전을 개시한 데 이어, 제2군은 제4군과 함께 8월 25일부터 작전 행동에 돌입했다. 안산역(鞍山站)은 저항 없이 점령했으나, 이어서 공격한 수산보(首山堡)에서는 완강한 저항에 직면하여 처참한 혈전이 벌어졌다. 후에 육군 군신 제1호가 된 제3사단 보병 제34연대 제1대대장 타치바나 츄타 소좌가 전사한 곳도 바로 이 수산보였다. 8월 31일 아침 한때 점령했으나 다시 탈환당했고, 제2군은 붕괴 위기에 처했으나, 9월 1일 제1군이 러시아군 좌익에 대한 측면 공격을 감행하자 러시아군이 동요하며 후퇴하기 시작했다. 제2군은 이를 추격하여 9월 4일 아침까지 랴오양 일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2.3.4. 사하 회전
10월 2일, 일본군의 보급 부족을 예측한 러시아군이 반전 공세에 나섰다. 이에 맞서는 일본군은 우익의 제1군을 축으로 한 선회 포위 작전을 개시했고, 좌익의 제2군은 10일부터 과감히 전진했다. 특히 10월 13일부터 14일에 걸쳐, 랴오닝성 사하(沙河) 좌안 일대에서 야습을 거듭하는 맹렬한 공격을 퍼부었다. 이 공격으로 러시아군 수뇌부는 일본군에 풍부한 예비대가 있을 것이라는 큰 오해를 하게 되었다. 10월 17일까지 공격을 계속하자 러시아군은 퇴각을 시작했으나, 제2군은 이미 전력의 한계에 도달하여 추격할 여력이 없었다.
2.3.5. 흑구대 회전
1월 25일, 일본군 최좌익을 방어하던 제2군 소속 아키야마 지대 (아키야마 요시후루 소장 지휘, 기병 제1여단을 주축으로 한 보병·포병·공병 혼성 부대) 8,000명에 러시아군 10만 명이 공격을 개시했다. 아키야마 지대는 우익의 이대인둔(李大人屯), 한산대(韓山台), 침단보(沈旦堡), 흑구대(黒溝台) 등 네 개 진지를 축으로 완강히 저항했다. 만주군 총사령부는 예비대인 제8사단을 지원군으로 급파했으나, 제8사단 사령부의 적정 오판으로 흑구대 진지 포기가 강요되었고, 심지어 제8사단 자체도 1월 26일 역습 포위되는 사태에 처했다. 제2군은 예하 제3사단을 파견했으나, 만주군 총사령부의 병력 순차 투입과 급작스러운 임시군(임시 타테미군: 제8사단장 타테미 나오후미 중장이 임시 사령관) 편성이라는 잘못된 전략에 휘말려 신속한 작전 행동을 취할 수 없었다. 1월 28일에 이르러서야 제3사단과 제5사단이 아키야마 지대 우익 진지의 러시아군을 격퇴했다. 흑구대 진지 또한 제8사단 및 제5사단의 대규모 야습 감행으로 러시아군은 궤멸되었다.
2.3.6. 봉천 회전
2월 22일 압록강군의 작전 개시를 시작으로, 제2군은 제3, 4, 6, 8사단, 아키야마 지대 및 3개 후비여단을 지휘하에 두고 일본군 중앙 좌익을 담당했다. 2월 27일부터 포격을 시작하여 3월 7일까지 공격을 지속했으나, 러시아군의 저항이 격렬하여 전진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3월 7일 심야, 갑자기 러시아군이 퇴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일본군에 포위되었다고 오판한 러시아군 수뇌부가 중앙 부대에 퇴각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3월 8일부터 맹렬한 추격전을 벌여, 3월 10일 제2군은 제4군과 함께 봉천을 점령했다. 그러나 그 이상의 공격 여력이 없었으며, 이 회전이 사실상 러일 전쟁의 마지막 육상전이 되었다.
2.4. 주요 진급 및 계급
오쿠 야스카타는 군인으로서 일생 동안 꾸준히 진급하며 최고 계급인 원수에 올랐다.
- 1869년 1월: 아시가루 대장
- 1871년 11월: 육군 대위 대리
- 1872년 4월: 육군 대위
- 1874년 6월: 육군 소령
- 1878년 11월: 육군 중좌
- 1882년 2월: 육군 대좌
- 1885년 5월: 육군 소장
- 1895년 8월 20일: 남작 서작
- 1903년 11월: 육군 대장 진급
- 1906년 7월: 제7대 참모 총장 취임 (급서한 고다마 겐타로의 후임)
- 1907년 9월 21일: 백작으로 승작
- 1911년 10월 24일: 원수부에 편입, 원수 계급 부여
- 1912년 2월: 의정관 취임
그는 황족이나 사쓰마번 및 조슈번 출신이 아닌 인물로는 최초로 원수 칭호를 받은 인물이었다.
3. 개인 생활 및 성격
오쿠 야스카타는 군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외에도 독특한 개인적 특징과 성품으로 유명했다.
3.1. 성격 및 평판
오쿠 야스카타는 겸손하고 과묵한 성격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평생 자신의 전공을 자랑하거나 이야기한 적이 없으며, 오히려 자신의 공적을 지우려고 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특히 러일 전쟁 종전 후 개선하여 일장기를 들고 만세를 외치는 사람들을 보며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 (많은 장병들을 전사시킨 자책감으로 추정)라고 중얼거렸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그는 '외로운 늑대'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회의 참석을 거부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는 사실 그의 부분적인 난청 때문에 토론을 이해하고 기여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독립적인 작전 수행 능력이 뛰어난 명석한 전술가로 평가받았다. 러일 전쟁 당시 네 명의 군 사령관 중 작전 참모의 보좌 없이도 작전 계획을 수립할 수 있는 이는 오쿠뿐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난청 때문에 지휘에 지장이 있을 법도 했지만, 사령부에서는 막료들과 필담으로 의견을 교환하며 지휘에 차질이 없도록 했다고 한다.
막부 편이었던 고쿠라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육군 내에서 이례적으로 계속 발탁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오쿠 자신의 지휘 통솔 능력과 고풍스러운 무사에 비견될 만큼 겸손한 성격 때문이었다. 후년에 사쓰마·조슈 및 황족 이외 출신자로는 처음으로 원수가 되었을 때도 아무도 이견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3.2. 정치적 무관심과 은둔
오쿠 야스카타는 천생 군인답게 정치적인 일에는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제5사단장 시절, 가쓰라 타로가 타이완 총독을 사임했을 때 후임 총독직을 제안받았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했을 정도였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사실상 은둔 생활을 하며 조용히 만년을 보냈다. 이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었고, 1930년 그가 사망했을 때에도 '아직 살아있었느냐'며 놀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다이쇼 천황의 동궁무관장 및 동궁대부를 역임하며 황실과도 인연을 맺었다. 1926년 (다이쇼 15년) 다이쇼 천황이 서거할 때는 도고 헤이하치로 원수, 이노우에 요시카 원수와 함께 하야마 어용저택에 머무를 수 있었다. 1927년 (쇼와 2년) 대장제의 때에는 발걸음이 불안정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영차(轜車)를 모시고 싶다는 일념으로 지팡이에 의지한 채 걷는 연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섭씨 38 °C의 고열에도 불구하고 장례식장에 참석하는 등 황실에 대한 깊은 충성심을 보였다. 이러한 심로가 영향을 미쳤는지, 1928년 (쇼와 3년) 가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되었다.
4. 훈장 및 포상
오쿠 야스카타는 일생 동안 수많은 훈장과 포상을 받았으며, 그의 군사적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와 영예를 얻었다.
- 1874년 3월 23일: 정7위
- 1874년 11월 5일: 종6위
- 1878년 1월 31일: 훈4등 욱일소수장
- 1879년 12월 20일: 정6위
- 1882년 4월 3일: 종5위
- 1885년 4월 7일: 훈3등 욱일중수장
- 1885년 7월 25일: 정5위
- 1886년 10월 28일: 종4위
- 1889년 11월 25일: 대일본제국헌법발포기념장
- 1891년 5월 9일: 훈2등 태국 왕관훈장 (외국 훈장)
- 1891년 6월 1일: 오스만 훈장 2등 (외국 훈장)
- 1892년 2월 13일: 정4위
- 1893년 5월 26일: 훈2등 서보장
- 1895년 8월 20일: 남작, 공3급 금치훈장, 훈2등 욱일중광장
- 1895년 11월 18일: 메이지 27·8년 종군기장
- 1897년 5월 31일: 종3위
- 1900년 5월 31일: 훈1등 서보장 (서보대수장)
- 1902년 8월 20일: 정3위
- 1905년 5월 30일: 훈1등 욱일대수장
- 1906년 4월 1일: 공1급 금치훈장, 훈1등 욱일동화대수장, 메이지 37·8년 종군기장
- 1907년 8월 30일: 종2위
- 1907년 9월 21일: 백작
- 1909년 12월 6일: 제1등 제2품 어사쌍룡보성 (외국 훈장, 중국)
- 1911년 10월 24일: 원수 칭호
- 1914년 9월 10일: 정2위
- 1915년 4월 20일: 어문부 은배
- 1915년 11월 7일: 금배 1조, 다이쇼 3·4년 종군기장
- 1915년 11월 10일: 다이쇼 대례기념장
- 1920년 11월 1일: 금배 1조, 다이쇼 3년 내지 9년 전역종군기장
- 1925년 1월 14일: 어문부 은배
- 1926년 3월 26일: 비르투티 밀리타리 훈장 2등 (외국 훈장, 폴란드)
- 1928년 11월 10일: 대훈위 국화대수장, 쇼와 대례기념장
- 사후: 종1위
- 레지옹 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 (외국 훈장, 프랑스)
- 레오폴트 훈장 그로스크로이츠 (외국 훈장, 오스트리아)
- 무공 훈장 그로스크로이츠 (외국 훈장, 바이에른)
5. 가족
오쿠 야스카타의 가족 관계는 간략히 알려져 있다. 그의 장남은 오쿠 야스오(奥保夫오쿠 야스오일본어)로, 그 역시 육군 소장 계급까지 올랐다.
6. 사망
오쿠 야스카타는 1930년 7월 1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향년 85세(세는 나이)였다. 그의 사망 소식이 전해졌을 때, 많은 사람들이 그가 이미 오래전에 사망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이는 그가 전후 정치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은둔 생활을 했기 때문이었다. 사망하기 2년 전인 1928년 가을에는 뇌출혈로 쓰러져 반신불수가 된 상태였다.
7. 평가 및 영향
7.1. 긍정적 평가
오쿠 야스카타는 일본 제국 육군 초기와 중기에 걸쳐 여러 중요한 전쟁에서 뛰어난 지휘 능력을 발휘하며 결정적인 승리에 기여했다. 특히 러일 전쟁에서 제2군 사령관으로서 남산, 득리사, 요양, 사하, 흑구대, 봉천 등 주요 전투에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일본군의 전세를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는 사쓰마 및 조슈 출신이 아닌 인물로는 이례적으로 육군 내에서 높은 계급과 중요한 직책을 연이어 맡으며 결국 원수에까지 올랐다. 이는 그의 순수한 군사적 재능과 겸손하고 사심 없는 성품이 그만큼 탁월했음을 방증한다. 그의 지휘 능력과 독립적인 작전 수행 능력은 당시 육군부 내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평가되었으며, 군인으로서의 그의 위치는 그 누구도 대체하기 어려운 독보적인 것이었다. 평생 자신의 공적을 자랑하지 않고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걸었던 그의 태도는 많은 이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8. 관련 항목
- 일본 제국 육군
- 메이지 유신
- 보신 전쟁
- 세이난 전쟁
- 청일 전쟁
- 러일 전쟁
- 구마모토 성
- 모리 오가이
- 고다마 겐타로
- 가쓰라 타로
- 아키야마 요시후루
- 타치바나 츄타
- [https://www.ndl.go.jp/portrait/e/datas/44.html 일본 국립국회도서관 근대 일본인의 초상: 오쿠 야스카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