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arly life
블루지는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도시의 구스 아일랜드 지역에서 성장했다. 그의 남동생인 오토 블루지 역시 내야수였으며,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신시내티 레즈 소속으로 109경기에 출전하는 등 13년간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1915년 루터 비즈니스 행정 연구소를 졸업한 오시 블루지는 인터내셔널 하베스터에서 회계사로 일했다. 그는 지역 샌드롯 팀에서 야구 기술을 연마했다.
2. Playing career
오스월드 루이스 블루지는 18년의 프로 야구 선수 경력 동안 워싱턴 세너터스의 핵심 3루수로 활약하며 팀의 성공에 기여했으며, 특히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명성을 얻었다. 그의 선수 경력은 팀의 역사적인 월드 시리즈 우승과 더불어 여러 중요한 업적을 포함한다.
2.1. Debut and early years
블루지는 서던 어소시에이션 소속 채터누가 룩아웃츠를 운영하고 워싱턴 구단주 클라크 그리피스를 위해 스카우트 활동을 하던 야구 프로모터 조 엥겔에 의해 발굴되었다. 그는 1922년 4월 24일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으며, 1939년 7월 13일 마지막 경기를 치르기까지 18년간 총 1,867경기를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뛰었다. 블루지는 1924년 월드 시리즈 우승팀의 일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1925년과 1933년 아메리칸 리그 페넌트를 획득한 세너터스 팀의 주전 3루수였다.
2.2. World Series championships and key achievements
블루지는 주로 뛰어난 수비 능력으로 잘 알려져 있었으며, 세 차례에 걸쳐 아메리칸 리그 3루수 중 가장 많은 더블 플레이를 기록했다. 팀 동료들은 그가 비시즌에 회계사로 부업을 한 덕분에 "회계사"(The Accountant)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블루지의 유일한 올스타전 출전은 그가 주로 유격수로 뛰었던 1935년에 이루어졌다.
2.3. Playing style and statistics
그의 18년 메이저 리그 경력(총 1,867경기) 동안 블루지는 타율 .272(6,440타수 1,751안타)를 기록했으며, 883득점, 276 2루타, 67 3루타, 43 홈런, 848 타점, 140 도루, 723 볼넷, 출루율 .352, 장타율 .356을 기록했다. 그의 경력 수비율은 .961이었다. 그가 출전했던 세 차례의 월드 시리즈에서 17경기 동안 그는 타율 .200(60타수 12안타), 5득점, 5타점을 기록했다.
3. Post-playing career
오시 블루지는 선수 은퇴 후에도 야구계에 남아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며 워싱턴 세너터스와 미네소타 트윈스 구단의 발전에 기여했다.
3.1. Coaching and managerial career
1939년 선수에서 은퇴한 후, 블루지는 1940년부터 1942년까지 워싱턴 세너터스의 코치로 활동했다. 이후 1943년부터 1947년까지 세너터스의 감독을 맡았다. 감독으로서 그는 379승 394패의 통산 기록을 남겼으며, 1943년과 1945년에는 팀을 두 차례 아메리칸 리그 2위에 올려놓는 성과를 거두었다. 1945년에는 스포팅 뉴스 선정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3.2. Front office and executive roles
1948년, 블루지는 구단의 팜 시스템 디렉터로 임명되었다. 이 시기 그의 가장 큰 스카우트 성공은 젊은 하먼 킬러브루를 발굴한 것이었다. 1958년에는 세너터스의 회계 감사관이자 팀의 수석 회계사가 되었는데, 이는 팀이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세인트폴 지역으로 이전하여 미네소타 트윈스가 되기 직전이었다. 그는 1971년 은퇴할 때까지 트윈스의 회계 감사관으로 재직하며, 이 조직에서 총 50년간 봉사했다.
4. Death and legacy
블루지는 1985년 미네소타주 이디나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사망 시기는 85세 생일을 열흘 앞둔 때였다. 사망하기 일주일 전, 그는 워싱턴 D.C.에서 열린 워싱턴 레드스킨스 미식축구 경기 하프타임에 참석하여 워싱턴 세너터스 경기장의 "스타 명예의 전당"(Hall of Stars)에 헌액되는 영예를 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