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영성은 관직 생활을 시작한 경제 시대부터 무제 시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관직을 거치며 혹독한 통치 방식을 선보였다. 탄핵으로 몰락한 후에도 재산을 축적하며 영향력을 유지했고, 무제에 의해 재임용되었으나 그 성정은 변치 않았다.
1.1. 출생과 성장
영성은 남양군 양현(穰縣) 출신이다. 그는 경제 시대에 알자(謁者중국어)로 관직을 시작했다. 영성은 잔꾀가 많고 성품이 잔혹하며, 윗사람을 찍어 누르고 아랫사람을 능숙하게 부리는 데 능했다. 또한 권력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1.2. 경제 시대의 관직 생활
영성은 제남 도위로 임명되었다. 당시 제남군에는 훗날 '창응(蒼鷹중국어, 푸른 매)'이라 불리며 두려움을 안겨준 질도가 태수로 있었다. 이전의 도위들은 질도를 두려워하여 직접 걸어서 관청까지 갔고, 아전들은 그를 마치 현령을 배알하듯이 대했지만, 영성은 질도를 동등하게 여기며 오만하게 대했고 심지어 그를 능가하려 했다. 질도는 영성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그를 후대하고 친구처럼 지냈다. 몇 년 후 질도가 사망하자, 경제는 황족들의 범죄를 막기 위해 영성을 장안의 군사 지휘관으로 임명했다. 영성은 질도의 통치 방식을 본받아 곧 황실의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1.3. 무제 시대의 관직 생활
무제가 즉위한 후, 영성은 수도의 내사(內史중국어)로 전임되었다. 그는 중위(中尉중국어)로 활동하며 질도의 통치 방식을 모방했지만, 질도와 같은 청렴함은 부족했다. 영성은 타고난 교활함으로 과혹하게 법을 집행하여, 한나라의 황족과 종실, 외척 및 귀족들은 모두 영성을 두려워하며 전율했다. 무제 즉위 이듬해인 건원 원년(기원전 140년)에 내사로 임무가 바뀌었다.
1.4. 몰락과 탈옥
영성이 임지로 부임하여 조정에서 사라지자, 그를 두려워했던 사람들은 그의 잘못을 고발하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탄핵을 받아 곤과 겸에 처해져 머리카락과 수염이 깎이고 하옥되었다. 당시 구경에 이른 고위 관료들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어 형벌을 피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영성은 관직 생활을 아예 단념하고 가장 가혹한 형벌까지도 감수했다. 결국 그는 감옥을 탈출하고는 통행증을 위조하여 함곡관을 빠져나가 고향으로 도피했다. 이때 영성은 "관직에 나아가 2천 석의 녹봉을 받는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장사를 하여 천만 전의 재산을 모으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라고 말했다.
1.5. 은퇴 후 활동과 재산 형성
탈옥 후 영성은 돈을 벌 생각에 외상으로 밭 천여 경(頃중국어, 약 6140 ha에 해당)을 사들였다. 그는 이 땅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를 놓아 수천 가구의 소작농을 거느릴 정도로 세력을 키웠다. 몇 년 후 사면령이 내려져 이전의 모든 죄가 용서될 무렵, 그는 이미 수천만 금에 달하는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여 백만장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또한 유협의 무리처럼 행동하며 현지 관리들의 약점과 비리를 알아내어 그들을 조종했다. 외출할 때에는 수십 명의 부하를 거느렸으며, 백성을 부릴 때에는 그 권위가 군수에 비견될 정도여서 주민들은 군의 태수보다 영성을 더 중시했다.
1.6. 함곡관 도위 임명과 의종 사건
영성에 대한 소식을 들은 무제는 그를 다시 불러들여 군수에 임명하려 했다. 그러나 어사대부 공손홍은 전과가 있는 영성을 재등용해서는 안 된다며 그를 "양 떼를 모는 늑대"에 비유하며 반대했다. 하지만 무제는 공손홍의 말을 듣지 않고 영성을 함곡관의 도위로 임명했다. 과연 공손홍의 간언은 적중하여, 남양과 함곡관 사람들은 영성의 학정에 시달리며 "영성이 노하는 것보다 젖 물린 흉포한 범과 마주하는 것이 낫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후 의종이 남양 태수로 임명되어 하내(河內중국어)에서 남양으로 부임하기 위해 함곡관을 지나갈 때, 영성은 이미 다시 은퇴하여 남양에 살고 있었다. 영성은 직접 함곡관까지 마중 나와 의종을 깍듯이 맞이하고 길을 안내했다. 그러나 의종은 영성의 예의를 받아들이기는커녕 그를 상대조차 하지 않고 곧바로 영성 일가의 잘못을 들추어내어 그들의 집안을 철저히 파멸시켰다. 이로 인해 영성은 다시 죄를 지어 유죄 판결을 받았고, 이에 전율한 영성은 함곡관의 토호인 공씨와 폭씨 일족과 함께 도망쳤다.
2. 통치 방식과 개인적 신념
영성은 통치자로서 혹독하고 잔인한 방식을 고수했다. 그는 윗사람을 억누르고 아랫사람을 교묘하게 부리는 데 능했으며, 법을 매우 가혹하게 집행하여 황족과 귀족들에게까지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이는 그가 질도의 통치 방식을 모방한 것이었으나, 질도와 달리 청렴함은 부족했다. 그의 삶의 태도와 출세, 재산에 대한 신념은 "관직에 나아가 2천 석의 녹봉을 받는 고위직에 오르지 못하거나, 장사를 하여 천만 전의 재산을 모으지 못한다면 사람이라 불릴 자격이 없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부와 권력을 인간으로서 마땅히 추구해야 할 목표로 여겼으며, 이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3. 평가와 영향
3.1. 혹리로서의 평가
영성은 '혹리(酷吏중국어, 혹독한 관리)'로 불리게 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이다. 그의 혹독한 법 집행 방식은 대중에게 큰 두려움을 안겼으며, "영성이 노하는 것보다 젖 물린 흉포한 범과 마주하는 것이 낫다"는 속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그는 자신의 교활함과 잔인함을 이용해 상대를 억압하고, 법을 빌미로 가혹하게 사람들을 다스렸다. 이는 그가 관직에 있을 때뿐만 아니라, 재야에 있을 때에도 관리들의 약점을 잡아 조종하고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방식으로 이어졌다.
3.2. 역사적 평가 및 영향
영성의 통치 방식은 후대에 혹리의 전형으로 기억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사마천의 《사기》 '혹리열전'과 반고의 《한서》 '혹리전'에 기록되어 그의 잔혹함과 탐욕스러운 면모를 후세에 전하고 있다. 일본의 만화가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만화 《사기》에서는 '야심가 영성'으로 등장하여 그의 삶과 행적이 묘사되기도 했다. 만화에서는 남양 태수 의종의 조사를 두려워하여 남양에서 도망쳐 행방불명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4. 최후
영성의 정확한 사망 시점, 장소, 사망 원인에 대한 역사적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