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염입본은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재능을 보였으며, 아버지와 형의 영향 아래에서 초기 예술 교육을 받았다. 그는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아 건축과 회화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1. 가계 및 출신
염입본은 대략 600년 또는 601년에 태어나 673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 그의 조상은 본래 산시성 숴저우시의 마이(馬邑) 출신이었으나, 염입본이 태어나기 몇 세대 전 장안 주변의 관중 지역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염비(閻毘중국어)는 수나라 시대에 궁정 사무 부국장을 지냈으며, 염입본과 그의 형 염입덕(閻立德중국어) 모두 건축 분야에서 능력을 인정받아 황실 정부에 봉사했다. 염입본의 어머니는 북주 무제(武帝)의 딸인 청도공주(清都公主)로, 그는 북주 선제(宣帝)의 조카이자 정제(靜帝)의 사촌이기도 하다.
1.2. 예술적 수련 및 초기 영향
염입본은 아버지 염비와 형 염입덕의 영향을 받아 일찍부터 그림에 뜻을 두었다. 그의 아버지는 기술이 뛰어났고,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으로 염입덕과 염입본 형제는 모두 그림을 일찍부터 지향했다. 문헌에 따르면 형 염입덕은 선으로만 그리는 백화(白畫)를 그렸으며, 염입본은 정법사(鄭法士중국어) 등의 영향을 받아 인물화를 선호했다고 전해진다. 염입본은 장안에서 성장했으며, 초기에는 형과 함께 두 작품을 공동 제작한 기록이 있다.
2. 예술 경력
염입본은 궁정 화가로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며 당대 미술계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의 그림은 왕실의 권위를 드러내는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으며, 전통적인 기법을 바탕으로 세밀하고 힘 있는 선을 특징으로 한다.
2.1. 주요 작품
염입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역대제왕도권(歷代帝王圖卷중국어)」으로, 전한의 소제부터 수나라의 양제에 이르는 13명의 역대 황제를 그린 두루마리 그림이다. 이 작품은 현재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북송 시대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한 당 태종의 명을 받아 643년에 태종의 치세에 크게 공헌한 24명의 공신을 기념하기 위한 「영언각 인물도(凌煙閣人物圖중국어)」를 그렸다. 태종이 진왕으로 있을 때 그를 섬겼던 18명의 대학사를 기념하는 18점의 초상화도 제작했다. 그의 그림에는 한나라부터 수나라 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중국 황제들의 초상화가 포함되어 있다.

당 태종의 조릉에 있는 여섯 필의 애마 부조는 전통적으로 염입본이 디자인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조는 매우 평평하고 선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어, 염입본의 그림이나 스케치를 바탕으로 조각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염입본은 이 능묘를 위해 현재는 소실된 초상화 시리즈를 제작했으며, 능묘 전체의 구조를 설계했을 수도 있다.

이 시기의 다른 주요 작품으로는 「당태종이 티베트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步輦圖중국어)」이 있으며, 이 또한 후대의 모사본으로 추정된다. 1120년의 기록에 따르면 염입본의 작품 42점의 제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중에는 「역대제왕도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불교 주제는 4점, 도교 주제는 12점이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는 초상화, 행성 및 별자리의 신, 궁정 행사 기록 등이다. 현재 남아있는 그의 작품 중 「역대제왕도권」은 "부분적으로 원본으로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최초의 작품"이지만, 상당 부분이 후대에 추가된 것으로 보인다. 둔황 막고굴 제200굴의 한 황제 프레스코화는 동일한 작가의 작품일 수 있으며, 642년이라는 적절한 연대를 가지고 있다.


염입본의 작품으로 알려진 황제 초상화들은 다음과 같다:
황제 | 재위 기간 | 초상화 |
---|---|---|
전한의 소제 | 기원전 94년 - 기원전 74년 | ![]() |
후한의 광무제 | 기원전 5년 - 기원 57년 | ![]() |
조위의 문제 | 187년 - 226년 | ![]() |
동오의 대제 | 182년 - 252년 | ![]() |
촉한의 소열제 | 162년 - 223년 | ![]() |
서진의 무제 | 236년 - 290년 | ![]() |
남진의 선제 | 530년 - 582년 | ![]() |
남진의 문제 | 522년 - 566년 | ![]() |
남진의 폐제 | 554년 - 570년 | ![]() |
남진의 후주 | 553년 - 604년 | ![]() |
북주의 무제 | 543년 - 578년 | ![]() |
수나라의 문제 | 541년 - 604년 | ![]() |
수나라의 양제 | 569년 - 618년 | ![]() |
2.2. 예술적 기법 및 특징
염입본의 작품은 주경현(朱景玄중국어)과 장언원(張彥遠중국어) 등 당대의 저명한 문인들에게 "모든 시대의 영광스러운 작품 중 하나"라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그림은 왕의 권위를 보여주는 사회적 기능이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개성의 표현은 억제되었고 전통적인 회화 기법이 사용되었다. 염입본의 작품은 가늘고 힘 있는 면밀한 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래의 묘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전통적 화법에 대해 당시 서역 화파가 대두하기 시작했으며, 위지을승(尉遲乙僧중국어) 등이 새로운 화풍을 선보였다. 염입본의 전통적 화법은 설직(薛稷중국어) 등이 계승했다.
3. 정치 경력
염입본은 화가로서의 명성 외에도 당나라 조정에서 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는 건축 분야에서도 뛰어난 능력을 보였다.
3.1. 관직 생활
염입본은 공공 사업 프로젝트에 능숙했지만, 특히 예술적 기술로 명성을 얻었다. 그는 당 고종 시대의 함경 연간(656년-661년)에 황실 건축가로 일했다. 이후 그의 형 염입덕의 뒤를 이어 공부상서(工部尚書중국어)를 역임했다. 669년 새해 무렵, 그는 서대(西臺중국어)의 수장이자 재상직으로 간주되는 우상(右相중국어) 대행이 되었고, 고종 황제는 그를 박릉의 남작으로 봉했다. 염입본의 동료 재상인 강극(蔣恪중국어)이 전장에서의 공로로 동시에 재상으로 승진하자, 당시 "좌상은 사막에서 권력을 세웠고, 우상은 화폭에서 명성을 세웠다"는 반쯤 경멸적인 대구가 쓰이기도 했다. 670년, 염입본은 공식적으로 입법부의 수장이 되었으며, 이때 그의 직함은 중서령(中書令중국어)으로 변경되었다.
3.2. 태종 황제 시대의 활동
당 태종은 염입본에게 영언각에 24명의 공신 초상화를 그리도록 명했으며, 태종이 진왕이었을 때 그를 섬겼던 18명의 대학사 초상화도 그리게 했다. 그의 「당태종이 티베트 사신을 맞이하는 장면」은 아마 이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중국 귀족 사회에서는 그림을 허용된 여가 활동 중 하나로 여겼지만, 화가라는 직업은 그다지 존경받는 직업이 아니었다. 한 번은 태종 황제가 시종 학자들과 함께 황실 연못에서 배를 젓고 있을 때 새들이 날아왔다. 태종은 학자들에게 그 장면을 칭송하는 시를 쓰게 한 다음 염입본을 불러 그 장면을 그리게 했다. 염입본은 당시 이미 중급 관리였지만, 황실 시종들이 "황실 화가 염입본을 부르라!"고 외치며 그를 불렀다. 염입본은 이 명령을 듣고 화가로만 알려진 것에 수치심을 느꼈으며, 아들에게 "나는 어릴 때부터 학문을 잘 닦았고, 다행히도 관직에서 쫓겨나지 않고 능력으로 알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오직 그림 기술로만 알려져 하인처럼 일하게 되었다. 이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이 기술을 배우지 말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그림을 좋아했기 때문에 이 사건 이후에도 계속 그림을 그렸다.
3.3. 고종 황제 시대의 활동
염입본은 당 태종의 아들인 당 고종 치세의 함경 연간(656년-661년)에 황실 건축가로 봉직했다. 그는 669년경부터 673년까지 고종 황제 아래에서 재상으로도 활동했다. 그가 재상으로 임명되었을 때, 동료 재상 강극이 전장에서의 공로로 동시에 승진하자, "좌상은 사막에서 권력을 세웠고, 우상은 화폭에서 명성을 세웠다"는 대구가 유행했다. 이는 강극이 군사적 공적으로 재상이 된 반면, 염입본은 그림으로 명성을 얻어 재상에 올랐다는 점을 풍자한 것이었다.
4. 평가 및 영향
염입본은 당대부터 후대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업적과 정치적 경력에 대해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그의 작품은 중국 회화사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4.1. 당대 및 후대의 평가
염입본의 작품은 주경현과 장언원과 같은 당대 문인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들은 염입본의 그림을 "모든 시대의 영광스러운 작품 중 하나"라고 칭송했다. 그러나 화가라는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낮았던 당시의 상황은 염입본이 황제에게 그림을 그리라는 명을 받고 수치심을 느꼈다는 일화를 통해 잘 드러난다. 이 일화는 그가 예술가로서의 명성과 관리로서의 지위 사이에서 느꼈던 갈등을 보여주며, 당시 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가 높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림에 대한 애정으로 작업을 계속했다.
4.2. 예술사적 의의
염입본은 중국 회화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왕실의 권위를 선양하는 사회적 기능을 중시하는 그림을 그렸으며, 개성 표현보다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따랐다. 그의 작품은 가늘고 힘 있는 면밀한 선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고래의 묘법을 특징으로 한다. 이러한 전통적 화법은 당시 서역 화파의 대두와 위지을승과 같은 새로운 화풍의 등장 속에서도 굳건히 계승되었으며, 설직 등 후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염입본은 당나라 초기의 사실주의적 인물화 발전에 크게 기여했으며, 그의 작품은 후대 인물화의 중요한 본보기가 되었다.
5. 사망
염입본은 673년 11월 14일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