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연갱요의 출생과 가족 관계, 그리고 관직에 입문하게 된 초기 배경에 대해 설명한다.

1.1. 출생과 가족
연갱요는 1679년에 태어났으며, 원적은 안후이성 회원현이다. 그의 아버지 연하령(年遐齡녠샤링중국어)은 1692년부터 1704년까지 호광 총독을 지냈다. 연갱요의 여동생은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 옹친왕(雍親王) 시절 측실로 들어갔으며, 훗날 돈숙황귀비가 되었다. 이로 인해 연갱요의 가문은 청나라 귀족 사회에서 더욱 명예를 얻게 되었다. 연씨 가문의 조상은 원래 회원현 화묘북(火廟北)의 연가장(年家庄) 우왕전(牛王殿)에 본적을 두었으나, 명나라 말기에 회원현 서남쪽의 호탄사(湖疃寺, 현 호탄)로 이주했고, 청나라 순치제 연간에는 풍양 연가강(鳳陽年家崗)으로, 이후 다시 성경(盛京) 광녕현(廣寧縣, 현 랴오닝성 베이전시)으로 전적했다. 연씨 가문은 대대로 명나라 때 환관을 배출한 가계였다고 전해진다.
1.2. 교육 및 관직 입문
연갱요는 1700년(강희 39년)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출사하였고, 한림원 서길사(庶吉士서지스중국어)로 선발되었다. 1703년(강희 42년)에는 한림원 검토(檢討젠타오중국어)로 승진했으며, 1705년(강희 44년)에는 사천성 향시의 정고관으로, 1708년(강희 47년)에는 광둥성 향시의 정고관으로 전임되었다. 1709년(강희 48년) 2월 8일에는 한림원 시강학사에서 내각학사로 승진하고 예부 시랑을 겸임하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연씨 가문이 속한 팔기군은 훗날 옹정제가 되는 황자 윤진을 섬기도록 배정되었다.
2. 관직 생활
청나라 관리로서 연갱요가 수행했던 주요 직책과 행정 경험을 연대순으로 서술한다.
2.1. 사천 순무
1709년(강희 48년) 10월, 연갱요는 사천 순무로 임명되었으며, 점차 강희제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는 사천 지역에서 16년간 행정 업무를 수행하며 지역 내 소요 사태를 진압하고 청나라의 통치권을 확고히 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사천 서부의 원주민 봉기를 여러 차례 진압했다. 1711년(강희 50년) 4월 20일, 그는 악승룡의 부대와 합류하여 오위(斡偉)의 생번(生番)을 토벌하라는 칙명을 받았음에도 합류하지 않고 중도에 귀환한 일로 순무직에서 파면될 위기에 처했으나, 정상 참작되어 유임되었다.
2.2. 사천 섬서 총독
1718년(강희 57년) 10월, 연갱요는 사천 순무에서 사천 총독으로 승진하며 군사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같은 해 10월 23일에는 사천 순무의 행정 업무도 겸임하게 되었다. 1721년(강희 60년) 5월 25일, 그는 섬서 총독을 겸임하게 되면서 사천과 섬서 지역의 총독으로서 더욱 넓은 범위의 행정 및 군사적 책임을 맡게 되었다.
2.3. 옹정제와의 관계
연갱요는 옹정제가 황제로 즉위하기 전부터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의 여동생이 옹친왕 윤진의 측실이 되면서 연갱요는 황실과 인척 관계를 맺게 되었고, 옹친왕의 신임을 얻었다. 1722년(강희 61년) 12월, 강희제가 사망하고 윤진이 옹정제로 즉위하자, 연갱요는 옹정제의 즉위 공신으로서 막강한 신임을 받았다. 1723년(옹정 원년) 초, 옹정제는 연갱요를 접견하고 그에게 낮은 세직 작위와 태보의 칭호를 수여했으며, 그의 형 연희요를 광동 순무로 임명했다. 옹정제는 그에게 이례적으로 격의 없는 태도를 보였으며, 융과다와 연갱요 사이의 친분을 도모하기도 했다. 연갱요는 강력한 군권을 장악하고 융과다와 함께 옹정제의 황위 계승을 확고히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조정의 안정을 위해 옹정제의 아우들을 감시하는 역할도 맡았다.
3. 군사 활동 및 업적
연갱요가 청나라를 위해 세운 주요 군사적 공적과 업적을 구체적으로 기술한다.
3.1. 티베트 및 준가르 원정 지원
1717년(강희 56년), 준가르 부족의 지도자 체왕 랍탄이 티베트를 침범하여 라짱 칸을 살해하고 달라이 라마를 통제하려 했다. 사천 제독 강태가 군사를 이끌고 진압에 나섰으나, 도중에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켜 퇴각했다. 연갱요는 이 소식을 듣고 참장 양진신을 보내 병사들을 회유하는 한편, 조정에 비밀리에 보고하고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강희제는 연갱요의 충성스러운 노력을 칭찬하며 도통 법라를 파견하여 사천에서 그를 돕도록 했다. 순무에게는 병사 지휘권이 없었기에, 1718년(강희 57년) 강희제는 연갱요를 사천 총독으로 승진시키고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여 사천 순무의 업무를 겸임하며 티베트 반란을 진압하도록 했다. 1720년(강희 59년), 연갱요는 정서장군으로 임명되어 부원대장군 윤티를 보좌하여 체왕 랍탄의 티베트 원정을 지원했다. 그는 군수 물자를 지원하며 간접적으로 기여했고, 준가르족을 티베트에서 몰아내는 데 일조했다.
3.2. 청해 토벌
1723년(옹정 원년), 연갱요는 청해 지역에서 호쇼트 부족의 로브잔 단진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악종기 장군의 도움을 받아 반란군에 대한 여러 차례의 승리를 거두었으며, 몇 달 만에 반란을 진압하고 청해를 청나라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이 군사 작전은 청나라가 티베트를 판도에 편입하는 계기가 되었다.
3.3. 작위 승진과 황제의 총애
군사적 성공으로 인해 연갱요는 높은 작위와 황제로부터 받은 총애 및 특권으로 권력을 확장했다. 1723년(옹정 원년) 2월 21일, 그는 이등아달하합번(二等阿達哈哈番, 이등경거도위에 해당)의 세직을 수여받았다. 3월 5일에는 태보의 칭호를 받았고, 3월 9일에는 삼등공에 봉해졌다. 로브잔 단진 토벌을 위해 부원대장군에 임명된 후, 1723년(옹정 원년) 10월 8일에는 고록 평정의 은상으로 이등공으로 승진했다. 1724년(옹정 2년) 4월 2일, 청해 평정의 은상으로 일등공으로 승진했으며, 11월 25일에는 일등아사하니합번(一等阿思哈尼哈番, 일등남작에 해당)으로 승진했다. 1724년 말, 연갱요가 베이징을 방문하여 옹정제에게 문안을 올렸을 때, 그는 일등왕에게 부여되는 추가적인 명예와 특권을 받았다.
4. 몰락과 처형
권력의 정점에서 연갱요가 몰락하게 된 과정과 그 결과를 상세히 다룬다.
4.1. 황제의 총애 상실
연갱요는 군사적 성공과 황제의 총애를 믿고 점차 오만하고 방자한 태도를 보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동료 관리들의 증오와 질투를 불러일으켰고, 많은 관리들이 연갱요에게 적대적인 상소를 올렸다. 1725년(옹정 3년), 연갱요는 사소한 실수를 저질렀는데, 옹정제는 이를 '공로를 믿고 불경한 뜻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했다. 특히 그가 '조건석척(朝乾夕惕)'이라 써야 할 것을 '석양조건(夕陽朝乾)'으로 잘못 쓴 상소는 옹정제의 분노를 샀다. '석양'은 노쇠나 몰락을 의미하며, 옹정제는 연갱요가 고의로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옹정제는 연갱요가 평소 부주의하게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분석하며, 그가 이러한 저급한 실수를 저지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이로 인해 옹정제는 연갱요의 청해 평정 공적을 말살시켰다. 연갱요는 자신이 황제의 총애를 잃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1725년 1월 서안으로 돌아와 충성을 맹세하며 황제의 자비를 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옹정제를 더욱 격분시켰고, 옹정제는 연갱요의 상소를 두고 '관점이 변했고,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반란의 의도를 내포하고 있다고 암시했다.
4.2. 정치적 숙청과 탄핵
연갱요는 옹정제의 동생이자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윤탕과 비밀리에 서신을 주고받은 사실이 발각되었다. 그의 옛 친구들과 관리들로부터 비난이 쏟아져 나왔다. 직례 총독 이위군은 연갱요가 '권력을 모아 농간을 부리고, 권력을 남용하여 부를 축적하며, 파벌을 만들고, 공금을 횡령하며,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고, 선량한 백성을 해쳤다'고 탄핵했다. 1725년(옹정 3년) 7월 20일, 악종기의 탄핵을 받아 이등공으로 강등되었으며, 7월 25일에는 전문경의 탄핵을 받아 삼등공으로 다시 강등되었다.
4.3. 좌천 및 체포
연갱요의 휴가 요청은 거부되었다. 1725년 5월 말, 그는 항저우의 팔기군을 지휘하는 항주장군(杭州將軍)으로 전임되었으며, 병졸 훈련이 그의 주된 업무가 되었다. 그가 한때 지휘했던 군대는 악종기의 통제하에 놓였다. 몇 달 만에 연갱요는 계속해서 강등되어 결국 평범한 팔기군 병사로 전락했다. 1725년 11월, 그는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되었다.
4.4. 재판과 사형 선고
1726년(옹정 4년) 초, 연갱요의 죄목이 92가지로 열거되었고,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죄목들 대부분은 과장되거나 근거 없는 비방이었지만, 황제의 뜻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4.5. 죽음과 가족의 결과
옹정제는 연갱요에게 자결할 특권을 부여했고, 연갱요는 감옥에서 자결을 택했다. 그의 장남 연부는 참수되었고, 15세 이상의 다른 아들들은 병사로 유배되었다. 연갱요가 죽은 후, 옹정제의 관용으로 그의 아들들은 연갱요의 아버지 연하령의 보살핌을 받게 되었다. 연갱요의 또 다른 여동생(호봉휘에게 시집간)과 그녀의 남편 호봉휘는 자살했다. 그의 가산은 몰수되었다.
5. 개인 생활
연갱요의 사적인 면모와 가족 관계, 성격에 대한 일화 등을 다룬다.

5.1. 가족 관계
연갱요의 아버지 연하령은 1727년에 사망했다. 그는 필첩식, 병부주사, 형부낭중, 하남도어사, 공부시랑, 호광순무 등 여러 관직을 역임했으며, 1723년(옹정 원년)에는 일품상서와 일등공에 봉해졌다. 연갱요에게는 연희요(1671년 ~ 1738년), 연법요, 연칙요, 연술요 등의 형제들이 있었다. 연희요는 공부우시랑, 내무부총관대신, 경덕진 어요창 감조 등을 역임했다. 연갱요의 여동생 중 한 명은 호봉휘에게 시집갔으며, 훗날 부부가 함께 자살했다. 또 다른 여동생은 윤진의 측복진(側福晉)이 되었으며, 훗날 돈숙황귀비가 되었다.
연갱요의 정실 부인은 나라란 싱더의 딸인 나라란씨였다. 계실 부인은 부국공 소엄의 딸인 아이신기오로씨였다. 연갱요에게는 연희(年熙, 장남, 일설에는 연덕주로 개명), 연부, 연빈, 연흥, 연수 등 여러 아들이 있었다. 연부(年富)는 아버지의 전공으로 일등아사하니합번(一等阿思哈尼哈番, 일등남작에 해당)에 봉해졌으나, 연갱요와 함께 단죄되어 참수되었다. 연갱요의 딸 중 한 명은 취푸의 공씨 가문, 즉 공자의 후손에게 시집갔다. 연갱요에게는 연왕신이라는 손자도 있었다.
5.2. 일화 및 성격
연갱요는 오만하고 과시적인 행동으로 유명했다. 장정옥과 연갱요는 1700년(강희 39년)에 함께 진사시를 통과하여 서길사가 된 동기였다. 그러나 장정옥은 문관으로서 강희, 옹정, 건륭 삼대에 걸쳐 봉직하며 태묘에 배향된 반면, 연갱요는 무관으로서 출세했으나 결국 일개 병졸로 강등된 후 자결하는 대조적인 말로를 걸었다.
연갱요는 베이징 선무문 안쪽 우측에 하사받은 저택을 가지고 있었으며, 문에는 '방가지광(邦家之光, 국가의 빛)'이라고 쓰인 편액이 걸려 있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오만해지는 연갱요의 저택 앞을 지나던 식자들은 그 편액을 보고 '패가지선(敗家之先, 몰락의 선구자)으로 고쳐 써야 한다'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연갱요는 옹정제의 분노를 사 여러 차례 강등을 당했다.
옹정제의 노여움을 사 대장군에서 항저우 주방 방어(駐防防禦) 직책으로 강등된 후에도, 그는 매일 용진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땔감 장수나 채소 장수들이 '연 대장군이 계신다'며 문을 통과하기를 꺼릴 정도로 그의 위엄은 건재했다고 한다. 19세기 중반 도광제 연간에 『소정잡록』을 저술한 소련(昭槤, 누르하치의 후손)은 '실로 근래의 훈신 중에는 없는 일이다'라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고 한다.
연갱요는 『치평승산전서(治平勝算全書)』 28권, 『회도병법(繪圖兵法)』 20권, 『본초류방(本草類方)』 10권, 『연갱요주접(年羹堯奏摺)』 등 세 권의 병법서를 저술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들은 모두 다른 사람이 쓰고 그에게 잘못 귀속된 것으로 보인다.
6. 역사적 평가와 영향
연갱요의 생애와 업적에 대한 역사적, 사회적 평가와 그가 후대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다.
6.1. 청나라 영토 확장 및 통치에 대한 영향
연갱요는 청나라의 영토 확장과 중앙 집권 강화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청해 지역의 로브잔 단진 반란을 진압하고 청해를 청나라의 판도에 편입시킨 것은 그의 가장 큰 군사적 업적으로 평가된다. 이는 청나라가 서부 변경을 안정시키고 티베트를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데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청나라의 국력을 과시하고 변경 지역에 대한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했다.
6.2. 비판과 논란
연갱요는 권력 남용과 오만함으로 인해 비판과 논란의 중심에 섰다. 황제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군사와 정치에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면서 점차 교만해졌고, 이는 동료 관리들의 질투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옹정제는 그의 오만한 태도를 불경으로 간주하고, '관점이 변했고, 무슨 의도인지 알 수 없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그에게 반역의 의도가 있다고 암시했다. 그가 저지른 92가지 죄목은 대부분 과장되거나 무고에 가까웠지만, 황제의 의심과 숙청 의지에 부합하여 그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연갱요의 몰락은 황제 중심의 권력 체제에서 신하가 아무리 큰 공을 세워도 황제의 의심을 사면 비참한 최후를 맞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아 있다.
6.3. 대중문화 속 묘사
연갱요는 그의 극적인 생애와 몰락 때문에 여러 TV 드라마와 소설 등 대중문화 작품에서 자주 묘사되었다.
| 방영년도 | 원제 | 한국어 제목 | 배역 | 
|---|---|---|---|
| 1980 | 大内群英 | 대내군영 | 양택림(楊澤霖) | 
| 1984 | 呂四娘 | 여사낭 | 보방(鮑方) | 
| 1987 | 滿清十三皇朝 | 만청십삼황조 | 능문해(凌文海) | 
| 1995 | 九王奪位 | 구왕탈위 | 서금강(徐錦江) | 
| 1996 | 乾隆大帝 | 건륭대제 | 서충신(徐忠信) | 
| 1997 | 江湖奇侠传 | 강호기협전 | 황해빙(黄海冰) | 
| 1999 | 雍正王朝 | 옹정왕조 | 두지국(杜志國) | 
| 2002 | 李卫当官 | 이위당관 | 두지국(杜志國) | 
| 2004 | 李卫当官 2 | 이위당관 2 | 두지국(杜志國) | 
| 2010 | 宮鎖心玉 | 궁 파레스 ~시간을 달리는 궁녀~ | 이심동(李沁東) | 
| 2011 | 步步惊心 | 보보경심 | 형한경(邢瀚卿) | 
| 2011 | 甄嬛传 | 궁정의 여인들 | 손녕(孫寧) | 
| 2014 | 食为奴 | 식위노 | 구서(歐瑞) | 
| 2017 | 花落宮廷錯流年 | 꽃 지는 궁정의 여인들 ~사랑과 배신의 생애~ | 정탁강(鄭拓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