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엘머 라이스는 뉴욕 시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몰두했으며, 법학을 전공했으나 곧 극작의 길로 들어섰다. 그의 초기 경력은 혁신적인 데뷔작의 성공과 함께 시작되었고, 이는 그의 사회적 의식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라이스는 1892년 9월 28일 뉴욕 시 이스트 90번가 127번지에서 엘머 리오폴드 라이젠슈타인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1848년 독일 혁명에 참여했던 정치 운동가로, 혁명 실패 후 미국으로 이주하여 사업가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은퇴 후 라이스 가족과 함께 살면서 손자 엘머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정치적으로 동기 부여된 작가이자 할아버지의 자유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정치 사상을 공유하게 된 엘머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독실한 무신론자였던 할아버지는 엘머가 히브리 학교에 가거나 바르 미츠바를 하지 않으려 하는 등 종교에 대한 그의 생각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라이스는 아버지와 매우 소원한 관계를 유지했다. 자서전에서 그는 할아버지와 윌 삼촌(두 분 모두 가족과 함께 하숙했다)이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한 애정과 관심을 채워주었다고 회고했다. 빈민가에서 자란 라이스는 가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어린 시절 대부분을 독서에 할애했으며, 훗날 "도서관에 가입한 단순한 행위만큼 내 삶에 도움이 된 것은 없었다"고 언급했다.
아버지의 간질이 악화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했던 라이스는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여러 허드렛일을 전전했다. 이후 독학으로 주 시험을 준비하여 고등학교 졸업장을 취득하고 법학대학원에 진학했다. 법학 공부를 싫어하고 수업 시간 대부분을 희곡을 읽는 데 보냈음에도 (그는 희곡이 두 시간짜리 강의 시간 안에 다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라이스는 1912년 뉴욕 법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짧은 법률가 경력을 시작했다.
1.2. 초기 경력
1914년 법률계를 떠난 후에도 라이스는 변호사에 대해 냉소적인 시각을 유지했지만, 2년간의 법률 사무소 경험은 그에게 여러 희곡의 소재를 제공했으며, 특히 『변호사』(1931)가 대표적이다. 법정 드라마는 라이스의 전문 분야가 되었다.
생계를 위해 그는 전업 작가로 활동하기로 결심했다. 이는 현명한 결정이었다. 1914년 발표된 그의 첫 희곡인 멜로드라마 형식의 살인 미스터리 『재판』은 큰 성공을 거두며 뉴욕에서 365회 공연되었다. 조지 M. 코핸은 3만 달러에 판권을 사겠다고 제안했지만, 라이스는 코핸이 진지할 리 없다고 생각하여 거절했다. 친구 프랭크 해리스(유명한 오스카 와일드 전기 작가는 아니다)와 공동 집필한 이 희곡은 이야기를 결말에서 시작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순 진행 기법을 사용한 최초의 미국 드라마로 알려져 있다. 『재판』은 이후 세 개의 극단에 의해 미국 전역을 순회 공연했으며, 아르헨티나, 오스트리아, 캐나다,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헝가리, 아일랜드, 일본, 멕시코, 노르웨이, 스코틀랜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도 공연되었다. 작가는 이 첫 무대 작품으로 궁극적으로 10.00 만 USD를 벌어들였다. 그의 이후 작품 중 『재판』만큼 많은 수입을 안겨준 작품은 없었다. 이 희곡은 1917년, 1928년, 1939년에 세 차례 영화로 각색되었다.
이 시기에 정치적, 사회적 문제 또한 라이스의 관심을 사로잡았다. 제1차 세계 대전과 우드로 윌슨의 보수주의는 그에게 현상 유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고히 심어주었다. 그는 10대 시절 조지 버나드 쇼, H. G. 웰스, 존 골즈워디, 막심 고리키, 프랭크 노리스, 업턴 싱클레어의 글을 읽으며 사회주의자로 확고히 전환되었다고 말했다. 1910년대 후반 그는 당시 뉴욕 시에서 가장 보헤미안적인 지역이었던 그리니치 빌리지를 자주 방문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시인 제임스 웰던 존슨과 삽화가 아트 영을 비롯한 많은 사회 의식 있는 작가 및 활동가들과 친분을 맺었다.
2. 경력 및 주요 작품
엘머 라이스는 다양한 희곡을 창작하며 미국 연극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을 뿐만 아니라, 소설과 논픽션을 집필하고 연출가 및 제작자로도 활동하며 연극계 전반에 걸쳐 영향력을 행사했다.
2.1. 희곡 창작
라이스는 다작하는 작가였으며, 그의 희곡은 시기별로 다양한 특징과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2.1.1. 초기 성공작

『재판』의 성공 이후 라이스는 특별한 성공을 거두지 못한 네 편의 희곡을 더 썼지만, 1923년 그의 다음 작품인 대담한 표현주의 희곡 『계산기』로 관객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이 작품을 17일 만에 집필했다. 기계 시대의 삶의 증가하는 규격화에 대한 풍자극인 이 작품은 따분한 회계원 미스터 제로의 삶과 죽음, 그리고 기이한 사후 세계를 다룬다. 기업 기계의 단순한 톱니바퀴에 불과했던 미스터 제로는 자신이 직장에서 계산기로 대체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이성을 잃고 상사를 살해한다. 재판과 처형 후 그는 다음 생으로 들어가지만 똑같은 문제들에 직면하고, 천국에서는 쓸모가 거의 없다고 판단되어 재활용을 위해 지구로 돌려보내진다. 연극 평론가 브룩스 앳킨슨은 이 작품을 "그때까지 어떤 미국 작가도 쓰지 못했던 가장 독창적이고 뛰어난 희곡... [브로드웨이가 본] 현대 사회에 대한 가장 가혹하고 가장 통찰력 있는 희곡"이라고 평했다. 도로시 파커와 알렉산더 울콧도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다른 평론가들은 그를 과장되게 미국의 헨리크 입센이 될 수도 있는 작가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필립 뮐러의 뛰어난 연출, 리 시몬슨의 디자인, 시어터 길드의 제작으로 이 작품은 당시 연기 경력을 시작한 더들리 디기스와 에드워드 G. 로빈슨이 주연을 맡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은 작가에게 전혀 돈을 벌어주지 못했다. (2007년 혁신적인 무대 뮤지컬로 각색된 『계산기』는 2008년 오프브로드웨이에서 성공적으로 공연되었다.)
이듬해 도로시 파커가 자신의 희곡(동료 앨곤퀸 원탁 회원 로버트 벤츨리, 그의 결혼 문제, 그가 씨름하던 혼외 유혹을 바탕으로 한)을 집필하면서 공동 작가가 필요해지자 그녀는 당시 브로드웨이의 "소년 천재"로 인정받던 엘머 라이스에게 접근했다. 이는 순조로운 협업이었고, 라이스의 끈질긴 권유로 이미 결혼한 라이스와 파커 사이에 짧은 연애로 이어졌다. 그러나 희곡의 공연은 순조롭지 못했다. 좋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클로즈 하모니』(1924)는 빠르게 막을 내리고 잊혀졌다.
2.1.2. 표현주의 및 사실주의 시기

라이스의 두 번째 히트작(『계산기』 이후)은 그의 가장 오래 지속되는 문학적 성과로 입증되었다. 원래 『인물과 풍경』이라는 제목이었던 『거리의 정경』(1929)은 훗날 쿠르트 바일의 오페라 소재가 되었으며, 빈민가 삶의 사실적인 기록으로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을 수상했다. 브룩스 앳킨슨은 "50명의 인물이 무심코 거닐면서, 즉흥극처럼 보였다... 라이스가 전형적이라고 선택한 25 웨스트 65번가 건물의 외관을 바탕으로 한 높고 거대한 무대 장치는 낡은 갈색 석조 건물의 분위기와 인간미를 포착했다"고 썼다. 대본은 대부분의 제작자들에게 거절당했고, 연출가 조지 큐커는 리허설 이틀 만에 무대화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라이스는 직접 연출을 맡아, 내러티브 스타일과 혼란스러운 자연주의가 비전통적일지라도 무대화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계산기』처럼, 이 희곡은 무대 사실주의의 관습을 깨뜨린 것이 매력의 일부였다.
2.1.3. 후기 희곡

1930년대 라이스의 희곡으로는 파리에서 미국 물질주의로부터 피상적으로 탈출하려는 국외 거주자의 이야기를 극화한 코미디 『더 레프트 뱅크』(1931)와 라이스가 훈련받았던 법률 직업의 현실적인 모습을 그린 활기찬 작품 『변호사』(1931)가 있다. (후자의 희곡은 라이스의 다른 희곡들보다 지역 극장에서 더 자주 재공연되는 경향이 있다.) 이 10년 동안 그는 두 편의 소설도 썼고, 시나리오를 집필하며 할리우드에서 상당한 수입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많은 스튜디오 수장들에게 "동부의 빨갱이들" 중 한 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의 시간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대공황에서 영감을 받은 반자본주의 희곡 『우리, 인민』(1933)은 라이스에게 특히 소중한 작품이었다. 작가 자신이 묘사했듯이, 이 작품은 "국가적 역경의 흐름에 무기력하게 휩쓸린 전형적인 숙련공과 그의 가족의 불행"을 다루었다. 라이스는 활동가 지향적인 출연진과 유명한 무대 디자이너 앨린 번스타인을 고용하여 야심 찬 이 희곡이 요구하는 15개의 다른 세트를 디자인하게 했다。 『우리, 인민』은 라이스가 "격앙된" 평론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실패했다. 1932년 소련과 독일 여행, 그곳에서 아돌프 히틀러와 요제프 괴벨스의 연설을 들은 경험은 라이스의 다음 희곡들의 소재가 되었다. 국회의사당 방화 사건 재판은 『심판의 날』(1934)의 한 요소이며, 상충하는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는 대화극 『두 세계 사이에서』(1934)의 주제를 이룬다.

이러한 희곡들의 실패 후, 라이스는 1937년 브로드웨이로 돌아와 맥스웰 앤더슨, S. N. 베어먼, 시드니 하워드, 로버트 E. 셔우드와 함께 설립을 도왔던 극작가 극단을 위해 집필하고 연출했다. 그의 후기 희곡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환상극 『꿈꾸는 처녀』(1945)로, 지나치게 상상력이 풍부한 소녀가 현실에서 예상치 못한 로맨스를 만나는 이야기이다. 라이스의 마지막 희곡은 『열정에 대한 단서』(1958)로, 다이애나 윈야드가 거트루드와 같은 인물을 연기한 햄릿 주제의 현대 정신분석학적 변형이다. 은퇴 후 라이스는 미국 드라마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 『살아있는 연극』(1960)과 풍부하게 상세한 자서전 『소수 보고서』(1964)를 집필했다.
엘머 라이스는 자신이 작가로서 성공했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생계를 꾸려야 했고, 뉴욕 무대의 상업주의를 비웃으면서도 상당한 돈을 벌었지만, 이는 그의 더 실험적인 비전을 희생한 대가였다. 그가 쉽게 쓸 수 있었던 사실주의 드라마는 그를 가장 매료시켰던 혁신과 상충했다. 『계산기』와 『거리의 정경』은 예외적인 작품이었고 돈을 벌지 못했다. 1925년의 훨씬 더 급진적인 시도인 『뉴욕의 보도』는 대사 없는 에피소드 극으로, "몸짓으로 대사가 표현되고, 대사가 필요 없는 일련의 상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시어터 길드는 이 대본을 단칼에 거절했다. 브로드웨이는 라이스를 고무시켰던 수준의 실험에 결코 준비되지 않을 것이었으며, 이는 그에게 끊임없는 좌절의 원인이었다.
2.1.4. 주요 희곡 목록
- 『은혜로부터의 탈선』(A Defection from Grace, 1913, 프랭크 해리스와 공동 집필, 미출판)
- 『일곱 번째 계명』(The Seventh Commandment, 1913, 프랭크 해리스와 공동 집필, 미출판)
- 『차우차우의 죽음』(The Passing of Chow-Chow, 1913, 1막, 1925년 출판)
- 『재판』(On Trial, 1914, 프랭크 해리스와 공동 집필)
- 『철십자』(The Iron Cross, 1917)
- 『자유의 집』(The Home of the Free, 1918)
- 『변호를 위해』(For the Defense, 1919)
- 『그것은 법이다』(It Is the Law, 1922)
- 『계산기』(The Adding Machine, 1923)
- 『잡종개』(The Mongrel, 1924, 헤르만 바르의 소설 원작)
- 『클로즈 하모니』(Close Harmony, 1924, 도로시 파커와 공동 집필)
- 『뉴욕의 보도』(The Sidewalks of New York, 1925, 1925년 미출판, 1934년 『세 편의 대사 없는 희곡』으로 출판)
- 『그는 유죄인가?』(Is He Guilty?, 1927)
- 『깨어나라, 조나단』(Wake Up, Jonathan, 1928, 해처 휴즈와 공동 집필)
- 『게이 화이트 웨이』(The Gay White Way, 1928)
- 『콕 로빈』(Cock Robin, 1929, 필립 배리와 공동 집필)
- 『거리의 정경』(Street Scene, 1929, 직접 연출)
- 『지하철』(The Subway, 1929)
-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See Naples and Die, 1930, 직접 연출)
- 『더 레프트 뱅크』(The Left Bank, 1931, 직접 제작 및 연출)
- 『변호사』(Counsellor-at-Law, 1931, 직접 제작 및 연출)
- 『블라인드 앨리 하우스: 3막극』(The House in Blind Alley: A Play in Three Acts, 1932)
- 『우리, 인민』(We, the People, 1933, 직접 제작 및 연출)
- 『세 편의 대사 없는 희곡』(Three Plays Without Words, 1934, 1막)
- 『인물과 풍경』(Landscape with Figures)
- 『시골의 도시』(Rus in Urbe)
- 『외관』(Exterior)
- 『자유의 집』(The Home of the Free, 1934, 1막)
- 『심판의 날』(Judgment Day, 1934, 직접 제작 및 연출)
- 『두 편의 희곡』(Two Plays, 1935)
- 『두 세계 사이에서』(Between Two Worlds, 직접 제작 및 연출)
- 『어린이를 위한 것이 아님』(Not for Children)
- 『검은 양』(Black Sheep, 1938, 직접 제작 및 연출)
- 『미국 풍경』(American Landscape, 1938, 직접 연출)
- 『섬 위의 두 사람』(Two on an Island, 1940, 직접 연출)
- 『서부로의 비행』(Flight to the West, 1940, 직접 연출)
- 『탈리 방식』(The Talley Method, 1941, 직접 제작 및 연출)
- 『새로운 삶』(A New Life, 1944)
- 『꿈꾸는 처녀』(Dream Girl, 1946, 직접 연출)
-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 1952, 직접 연출)
- 『승자』(The Winner, 1954, 직접 연출)
- 『열정에 대한 단서』(Cue for Passion, 1959, 직접 연출)
- 『폐허 속의 사랑』(Love Among the Ruins, 1963)
- 『최후의 항소 법원』(Court of Last Resort, 1965)
2.2. 기타 저술
라이스는 희곡 외에도 소설과 논픽션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펼쳤다.
2.2.1. 소설
- 『재판』(On Trial, 1915, 희곡의 소설화)
- 『아빠가 뭔가를 찾는다』(Papa Looks for Something, 1926, 미출판)
- 『푸릴리아로의 항해』(A Voyage to Purilia, 1930, 1929년 『뉴요커』에 연재)
- 『제국 도시』(Imperial City, 1937)
-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The Show Must Go On, 1949)
2.2.2. 논픽션 및 자서전
- 『연출가로서의 극작가』("The Playwright as Director", 『시어터 아츠 먼슬리』 13호, 1929년 5월, pp. 355-360)
- 『조직화된 자선단체가 검열관으로 변하다』("Organized Charity Turns Censor", 『네이션』 132호, 1931년 6월 10일, pp. 628-630)
- 『비관주의의 즐거움』("The Joys of Pessimism", 『포럼』 86호, 1931년 7월, pp. 33-35)
- 『현대 연극의 성』("Sex in the Modern Theatre", 『하퍼스』 164호, 1932년 5월, pp. 665-673)
- 『시어터 얼라이언스: 협동 레퍼토리 프로젝트』("Theatre Alliance: A Cooperative Repertory Project", 『시어터 아츠 먼슬리』 19호, 1935년 6월, pp. 427-430)
- 『최고의 자유』("The Supreme Freedom", 1949, 소책자)
- 『예술의 순응주의』("Conformity in the Arts", 1953, 소책자)
- 『매카시 시대의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in the Age of McCarthy", 『뉴 리퍼블릭』 176호, 1953년 4월 13일, pp. 14-17)
- 『살아있는 연극』(The Living Theatre, 1959)
- 『소수 보고서』(Minority Report, 1964)
- 『작가여! 작가여!』("Author! Author!", 『아메리칸 헤리티지』 16호, 1965년 4월, pp. 46-49, 84-86)
2.2.3. 기타 저술 목록
- 『로미오를 위한 대역』(Doubling for Romeo, 1921, 시나리오)
- 『무료 임대』(Rent Free, 1922, 시나리오)
- 『홀리데이 인』(Holiday Inn, 1942, 각색)
2.3. 연극계 활동
라이스는 자신의 작품을 직접 연출하고 제작하는 데 관심을 가졌으며, 동료 작가들과 함께 '극작가 극단'을 창립하는 데 기여했다. 또한 연방 극장 프로젝트의 초기 책임자로서 정부 검열에 항의하며 사임하는 등 사회적 입장을 분명히 했다.
2.3.1. 연출 및 제작
라이스는 자신의 희곡을 직접 연출하고 제작하는 데 점차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는 브로드웨이 극장인 유명한 벨라스코 극장을 직접 매입하기도 했다. 그는 『거리의 정경』, 『나폴리를 보고 죽어라』, 『더 레프트 뱅크』, 『변호사』, 『우리, 인민』, 『심판의 날』, 『두 세계 사이에서』, 『검은 양』, 『미국 풍경』, 『섬 위의 두 사람』, 『서부로의 비행』, 『탈리 방식』, 『꿈꾸는 처녀』, 『그랜드 투어』, 『승자』, 『열정에 대한 단서』 등 많은 작품을 직접 연출했다.
2.3.2. 극작가 극단 창립
라이스는 1937년 맥스웰 앤더슨, S. N. 베어먼, 시드니 하워드, 로버트 E. 셔우드와 함께 극작가 극단의 설립을 도왔다.
2.3.3. 연방 극장 프로젝트
라이스는 연방 극장 프로젝트 뉴욕 사무소의 초대 소장이었으나, 1936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극화한 프로젝트의 "리빙 뉴스페이퍼"에 대한 정부 검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거침이 없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의 예술적 표현 통제 시도에 대해 "경멸의 폭탄"을 퍼부으며 그 직책을 떠났다. (1932년 라이스는 허버트 후버와 루스벨트 모두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대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미국 공산당 후보를 대선에서 지지했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FDR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19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3. 철학과 사회 활동
엘머 라이스는 강한 정치적, 사회적 신념을 가진 인물로, 그의 자유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사상은 작품과 사회 활동 전반에 걸쳐 드러났다. 그는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행동했다.
3.1. 정치 및 사회적 견해
라이스는 10대 시절 조지 버나드 쇼, H. G. 웰스, 존 골즈워디, 막심 고리키, 프랭크 노리스, 업턴 싱클레어의 글을 읽으며 사회주의자로 확고히 전환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독실한 무신론자이기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과 우드로 윌슨의 보수주의를 통해 현상 유지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확고히 했으며, 대공황 시기에는 반자본주의적 시각을 담은 『우리, 인민』과 같은 작품을 집필했다.
3.2. 활동 및 사회적 입장
라이스는 당대 가장 정치적으로 솔직한 극작가 중 한 명이었으며, 미국 시민자유연맹 (ACLU), 작가 연맹, 미국 극작가 길드 (1939년 8대 회장으로 선출), 그리고 국제 펜클럽에서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연방 극장 프로젝트 뉴욕 사무소의 초대 소장이었으나, 1936년 베니토 무솔리니의 에티오피아 침공을 극화한 프로젝트의 "리빙 뉴스페이퍼"에 대한 정부 검열에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는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데 거침이 없었으며, 프랭클린 D. 루스벨트 행정부의 예술적 표현 통제 시도에 대해 "경멸의 폭탄"을 퍼부으며 그 직책을 떠났다. 1932년 그는 허버트 후버와 루스벨트 모두 국가가 직면한 위기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불만족스러운 대안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마지못해 미국 공산당 후보를 대선에서 지지했지만, 이후 선거에서는 FDR 지지자가 되었다. 그는 또한 19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해서도 공개적으로 반대 목소리를 냈다.
4. 개인 생활
엘머 라이스의 사적인 삶은 두 번의 결혼과 자녀들을 통해 형성되었으며, 연극과 정치 외에도 미술에 대한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4.1. 가족 및 관계
라이스는 1915년 헤이즐 레비와 결혼하여 마가렛과 로버트 두 자녀를 두었다. 1942년 이혼 후, 그는 여배우 베티 필드와 결혼하여 존, 주디, 폴 세 자녀를 두었다. 필드와 라이스는 1956년 이혼했다.
4.2. 관심사 및 소장품
예술에 전혀 관심이 없는 노동 계급 가정에서 태어났고 주로 연극과 정치에 대한 애착으로 알려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이스는 올드 마스터와 현대 미술에 열정적이었다. 수년에 걸쳐 천천히 모은 그의 미술 컬렉션에는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조르주 루오, 페르낭 레제, 앙드레 드랭, 파울 클레, 아메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는 정기적으로 뉴욕의 박물관을 방문했으며, 자서전에서 스페인으로의 첫 여행과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그에게 미친 강력한 영향, 그리고 멕시코에서 그의 정치적 견해를 공유했던 디에고 리베라와 멕시코 벽화 운동가들의 작품을 즐겼던 경험에 대해 썼다. 그는 일본계 미국인 모더니즘 화가 구니요시 야스오와도 가까운 친구였다.
5. 죽음
엘머 라이스는 코네티컷주 스탬퍼드의 숲이 우거진 사유지에서 여러 해를 살다가 1967년 심장마비 후 폐렴으로 잉글랜드 사우샘프턴에서 사망했다.
6. 평가 및 유산
엘머 라이스의 작품과 활동은 동시대 및 후대 비평가들에게 다양한 평가를 받았으며, 미국 연극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6.1. 비평적 평가
사망 당시 그의 부고 기사들은 길고 존경받는 연극 경력을 언급했다. 브룩스 앳킨슨은 자신의 브로드웨이 역사서에서 라이스를 "과묵하고 완고한 성격을 가진 평범하고 다소 진지한 남자... 그러나 사회적 원칙이 위태로울 때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명확했고, 조용히 무적이었다... 그는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저명한 시민 중 한 명이었다"고 묘사했다.
라이스 스스로는 작가로서 성공했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생계를 꾸려야 했고, 뉴욕 무대의 상업주의를 비웃으면서도 상당한 돈을 벌었지만, 이는 그의 더 실험적인 비전을 희생한 대가였다. 그가 쉽게 쓸 수 있었던 사실주의 드라마는 그를 가장 매료시켰던 혁신과 상충했다. 『계산기』와 『거리의 정경』은 예외적인 작품이었고 돈을 벌지 못했다. 1925년의 훨씬 더 급진적인 시도인 『뉴욕의 보도』는 대사 없는 에피소드 극으로, "몸짓으로 대사가 표현되고, 대사가 필요 없는 일련의 상황으로 이루어진" 작품이었다. 시어터 길드는 이 대본을 단칼에 거절했다. 브로드웨이는 라이스를 고무시켰던 수준의 실험에 결코 준비되지 않을 것이었으며, 이는 그에게 끊임없는 좌절의 원인이었다.
6.2. 비판 및 논란
그의 저서 『살아있는 연극』(1960)은 미국 드라마에 대한 논란의 여지가 있는 책으로 평가받았다. 또한 그는 정치적으로 솔직한 극작가로, 연방 극장 프로젝트에서 정부 검열에 항의하며 사임하는 등 자신의 사회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며 논란의 중심에 서기도 했다. 1950년대 매카시즘에 대한 그의 비판적인 목소리도 주목할 만하다.
6.3. 영향
엘머 라이스는 『계산기』에서 표현주의 기법을 도입하고 『거리의 정경』에서 사실주의 연극의 지평을 넓히는 등 미국 연극계에 중요한 예술적 영향을 미쳤다. 그의 작품들은 사회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담아내며 관객들에게 깊은 메시지를 전달했다. 또한 그는 극작가 극단의 창립에 참여하고 연방 극장 프로젝트에서 활동하며 연극계의 구조와 운영에도 기여했다. 그의 표현의 자유 옹호와 사회 정의를 위한 활동은 후대 예술가와 사회 운동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7. 자료
엘머 라이스의 자료는 1968년 그의 사망 1년 후 텍사스 대학교 오스틴의 해리 랜섬 센터에 보관되었다. 가족 구성원들이 수년에 걸쳐 추가 자료를 기증했다. 이 컬렉션은 100개가 넘는 상자에 걸쳐 있으며 계약서, 서신, 원고 초안, 노트, 사진, 로열티 명세서, 대본, 극장 프로그램, 그리고 73권이 넘는 스크랩북을 포함한다. 랜섬 센터의 도서관 부서에는 라이스의 개인 서재에서 나온 900권 이상의 책이 있는데, 그 중 많은 책에 라이스의 친필 서명이나 주석이 달려 있다.
8. 영화에서의 묘사
엘머 라이스는 1994년 영화 『미세스 파커와 악랄한 서클』에서 배우 존 패브로가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