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에티엔 드 실루엣(Étienne de Silhouette, 1709년 7월 5일 ~ 1767년 1월 20일)은 프랑스 왕국의 앙시앵 레짐 시대 루이 15세의 재정총감을 지낸 인물이다. 재정 전문가로서 그의 삶은 7년 전쟁으로 인해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던 프랑스를 구원하려는 시도로 점철되었다. 그는 재정 건전성을 회복하기 위해 공채 발행, 왕실 지출 삭감, 국고 연금 개정, 자유 무역 촉진, 그리고 부유층 대상의 새로운 세금 부과 등 다양한 긴축 정책을 추진했으나, 이는 귀족과 대중의 거센 반발을 샀고, 결국 8개월이라는 짧은 재임 기간 후 사임하게 되었다.
그의 이름 '실루엣'은 그의 검소하고 긴축적인 정책 기조와 당시 유행하던 저렴하고 단순한 초상화 기법에 대한 인식과 결부되어 예술 용어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는 값비싼 회화나 조각 초상화 대신 검은 종이를 오려 만든 그림자가 특징인 이 초상화 기법이 저렴한 대안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름이 초상화 기법에 사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을 그린 현존하는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2. 어린 시절과 배경
에티엔 드 실루엣은 프랑스 루이 15세 시대 재정총감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기 이전, 재정 및 경제학 분야에서 깊이 있는 학업과 폭넓은 대외 활동을 통해 기반을 다졌다.
2.1. 출생과 가족 배경
에티엔 드 실루엣은 1709년 7월 5일 프랑스 중부 리모주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슈발리에 아르노 드 실루엣(Chevalier Arnaud de Silhouette)은 바스크인 출신으로, 바스크어de Zulueta바스크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아르노 드 실루엣은 비아리츠에서 태어나 부르봉 왕가의 행정관으로 리모주에 파견되어 근무했다.
q=Limoges|position=left
2.2. 교육과 초기 활동
실루엣은 재정과 경제학을 깊이 있게 공부했으며, 영국 경제를 배우기 위해 1년 동안 런던에 머물렀다. 이 시기 동안 그는 알렉산더 포프, 헨리 볼링브로크, 윌리엄 워버턴의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활동을 했다. 특히 워버턴의 '교회와 국가 간의 동맹 (The Alliance between Church and State)'을 '종교, 도덕, 정치의 연합에 대한 논문 (Dissertations sur l'Union de la Religion, de la Morale, et de la Politique)'으로 번역하여 1742년에 출판했다. 또한 발타사르 그라시안의 '정치인 (El político)'도 번역했다. 그는 번역한 포프의 저서들을 서민들에게 기증하기도 했다. 나중에 콩데 공작 루이 앙리 드 부르봉의 당파는 그가 영국 문학을 번역한 이력을 이용하여 그를 비판하기도 했다.
3. 재정총감으로서의 경력
에티엔 드 실루엣은 1759년 루이 15세의 재정총감으로 임명되어 프랑스의 심각한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한 어려운 임무를 맡았다. 그의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그는 다양한 재정 개혁 조치를 시도하며 프랑스 재정에 큰 영향을 미치려 했다.
3.1. 임명과 개혁 목표
에티엔 드 실루엣은 퐁파두르 부인의 지원을 받아 1759년 3월 4일 재정총감에 임명되었다. 선대 루이 14세가 대외 전쟁과 낭비로 재정난을 심화시킨 결과, 프랑스는 7년 전쟁의 여파로 심각한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그의 주된 임무는 이 적자를 억제하고 전쟁을 위한 재정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재정총감직은 앙시앵 레짐 시대의 가장 광범위한 행정직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매우 불안정한 자리이기도 했다.
3.2. 재정 정책과 계획
실루엣은 프랑스 왕국의 재정을 회복하기 위해 다양한 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기존의 외주 세금 징수 시스템인 페름 제네랄보다 공채 발행을 선호하여, 7200.00 만 FRF의 공채를 발행했다. 그는 왕실 지출을 삭감하고 국고 연금 제도를 개정하는 등 긴축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자유 무역을 장려하기 위해 일부 오래된 세금을 줄이는 동시에, 통일된 프랑스 시장 구축이라는 비전에 따라 새로운 세금들을 도입했다.
그는 1760년 예산에 대해 암울한 전망을 내놓았는데, 수입은 2.86 억 FRF인 반면 지출은 5.03 억 FRF에 달하며, 이 중 최소 9400.00 만 FRF가 국가 채무 상환에 사용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는 영국식의 부유층 및 특권층(앙시앵 레짐 시대에는 귀족과 교회가 면세 대상이었다)에 대한 과세 방식을 도입하여 왕국 재정을 회복하려 시도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반 보조금'이라는 새로운 세금을 고안했는데, 이는 문과 창문, 농장, 사치품, 하인, 이익 등 부의 외적 징후에 세금을 부과하는 방식이었다. 10월 26일에는 전시 조치로 금은 제품을 녹여 국고로 환수하도록 명령하기도 했다.
3.3. 대중과 귀족의 반응 및 사임
실루엣의 긴축 정책은 대중과 귀족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그는 "무능한 대신"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 자신은 솔선수범하여 검소한 생활을 실천했다. 볼테르와 같은 당대 지식인들도 그의 정책이 이론적으로는 유익하나 전시 상황과 프랑스의 정치적 현실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반발과 비판 속에서 그는 1759년 11월 20일, 불과 8개월 만에 재정총감직에서 물러났다.
q=Bry-sur-Marne|position=right
그는 관직에서 물러난 후 브리쉬르마른에 있는 자신의 성으로 은퇴하여 예산 개선 작업에 착수했다.
4. 유산
에티엔 드 실루엣의 재임 기간은 짧았지만, 그의 이름은 특정 예술 형식과 연관되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4.1. '실루엣'이라는 용어의 유래
에티엔 드 실루엣이 재정총감으로 재직하면서 보여준 '절약' 지향적인 태도와 빈약한 재정 상황에 대한 인식이 그의 이름이 '실루엣'이라는 용어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인기를 얻고 있던 미술 형식 중 하나는 검은 종이를 오려 만든 그림자 형태의 초상화였다. 이는 회화나 조각과 같은 더 값비싸고 장식적인 초상화 형식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단순하고 저렴한 대안을 제공했다. 이 초상화 기법을 값싸다고 여겼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따 '실루엣 (Silhouette프랑스어)'이라는 단어를 붙였다. 이러한 예술 형식은 오늘날까지도 '실루엣 커팅' 또는 '실루엣 아트'로 불리며 전해지고 있다.

4.2. 역사적 평가와 역설
에티엔 드 실루엣은 재무 최고 책임자로서의 짧은 임기 동안 적대감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인색한 태도로 인해 '아 라 실루엣 (à la Silhouette프랑스어)'이라는 용어가 '값싼' 또는 '검소한' 것으로 인식되는 사물에 적용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은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이름이 초상화 기법과 연관되어 현대까지 이어지는 역설적인 유산을 남겼다. 흥미롭게도 그의 이름이 실루엣이라는 예술 형식에 적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을 그린 현존하는 초상화는 단 한 점도 없다. 여러 유화 초상화가 제작되었지만, 모두 프랑스 혁명 중에 파괴되었다.
5. 죽음
에티엔 드 실루엣은 1767년 1월 20일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조카이자 상속인인 클레망 드 라아주(Clément de Laage)가 그가 시작했던 예산 개선 작업을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