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가나모리 에이지는 PL학원 고등학교와 와세다대학을 거쳐 프린스 호텔 야구단에서 활약한 후 세이부 라이온즈, 한신 타이거스,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프로 선수 생활을 했다. 특히 선수 시절 '몸에 맞는 공'으로 유명세를 탔으며, 은퇴 후에는 다양한 구단과 아마추어 야구팀에서 지도자로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1. 유년기 및 학창 시절
가나모리 에이지는 PL학원 중학교를 졸업하고 PL학원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4년에는 '3번 2루수'로 여름 고시엔에 출전했으나, 첫 경기인 2회전에서 이 대회 우승팀인 지바현립 조시 상업 고등학교의 에이스 쓰치야 마사카쓰에게 막혀 패퇴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인 1975년에는 와세다대학 야구부에 진학하여 포수로 전향했지만, 3학년이던 1977년까지는 야마쿠라 가즈히로의 백업 선수였다. 야마쿠라가 졸업한 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여, 4학년이던 1978년 춘계 도쿄 6대학 리그에서 수위 타자를 차지했다. 당시 무카이다 요시모토, 기타구치 가쓰히사와 배터리를 이루며 포수로서 그 시즌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같은 해 추계 리그에서는 오카다 아키노부에 이어 5번 타자로 활약하며 9시즌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지만, 직후의 메이지 진구 야구 대회 준결승에서 나카모토 시게키가 이끌던 도시샤대학에 패배했다. 리그 통산 32경기에 출전하여 97타수 39안타, 타율 .402, 2홈런, 25타점을 기록했다.
1.2. 아마추어 야구 경력
대학 졸업 후인 1979년에는 주장이었던 나카야 에쿠오와 함께 막 창단된 프린스 호텔 경식 야구부에 입단했다. 1980년에는 이시게 히로미치, 나카오 다카요시 등과 함께 팀을 염원하던 도시 대항 야구 대회 첫 출전으로 이끌었으나, 2회전에서 신닛테쓰 가마이시 경식 야구부와의 연장 13회 접전 끝에 패배했다.
1981년의 도시 대항 야구 대회에는 도쿄 가스 경식 야구부의 보강 선수로 출전하여 준결승 진출에 공헌했지만, NTT 히가시니혼 경식 야구부에 아깝게 패했다. 이 대회에서 수위 타자도 획득했으며, 이때의 팀 동료로는 사이토 히로유키가 있었다. 같은 해 IBAF 인터콘티넨탈컵 일본 대표로 선발되었고, 사회인 베스트 나인 (외야수 부문)에도 선정되었다. 같은 해 드래프트에서 세이부 라이온즈에 2위로 지명되어 입단했다.
1.3. 프로 선수 경력
가나모리 에이지는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후 한신 타이거스를 거쳐 야쿠르트 스왈로스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1.3.1. 세이부 라이온즈 시절
프로 1년 차인 1982년 9월 9일 롯데 오리온스와의 경기 (세이부 구장)에 8번 포수로 선발 출장하며 프로 첫 경기를 치렀다. 모리 시게카즈와 다카하시 나오키와 배터리를 이루었으며, 5회 말에는 후카자와 에비쓰로부터 2점 적시타를 터뜨리며 프로 첫 안타와 첫 타점을 기록했다. 같은 달 14일 긴테쓰 버펄로스와의 경기 (닛세이 구장)에서도 선발 마스크를 썼으며, 이모토 다카시로부터 안타를 기록했다. 그 해 이 두 경기에서 8번 포수로 선발 출장했지만, 오이시 요시히로, 구로다 마사히로, 이토 쓰토무의 벽을 넘지 못했다.
2년 차인 1983년에는 외야수로 전향하여 74경기에 출전해 타율 .293를 기록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5월 13일 긴테쓰전 (닛세이 구장)에서는 7회 초 야나기다 유타카로부터 솔로 홈런을 터뜨리며 첫 홈런을 기록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와의 일본 시리즈 6차전에서는 연장 10회에 에가와 스구루로부터 끝내기 안타를 날렸다.
1985년에는 개막 직후부터 2번 타자로 정착하여 처음으로 규정 타석에 도달했고, 리그 8위의 타율 .312를 기록했다. 베스트 나인과 골든 글러브상에 선정되었고, 그 해부터 1987년까지 3년 연속으로 올스타전에 출장했다. 첫 출장이었던 1985년 올스타전에는 히로오카 다쓰로 감독의 추천으로 선발되어 전 3경기에서 출전 기회를 얻었지만, 이후 부상 등으로 출전 기회가 줄었다. 한신 타이거스와의 일본 시리즈에서는 전 6경기에 2번 좌익수로 선발 출장하여 19타수 4안타에 그쳤지만, 타선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다.
1984년, 1985년 2년 연속으로 리그에서 가장 많은 몸에 맞는 공을 기록했으며, 공이 몸 가까이 오면 남의 시선에 아랑곳 않고 "아아악!" 하고 크게 소리쳤다. 이 때문에 당시 `프로 야구 진기한 플레이 호 플레이 대상프로 야구 진기한 플레이 호 플레이 대상일본어`에서는 "생채기 남자 가나모리 특집"이라는 제목으로, 그가 큰 소리를 지르며 몸에 맞는 공을 맞는 장면들을 편집한 코너가 방영되기도 했다. 몸에 맞는 공이 많아 "동쪽의 가나모리, 서쪽의 다쓰카와 미쓰오", "폭소 생채기 남자"라고 불렸다. 1984년에는 12개의 몸에 맞는 공을 기록했는데, 가나모리가 몸에 맞는 공을 맞은 경기에서 팀은 11승 1패를 기록했다. 1985년에는 15개를 기록했지만, 1986년에는 6개로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1987년에는 PL학원 고등학교 후배인 기요하라 가즈히로와 같은 외야수인 아키야마 고지, 요시타케 하루키와 함께 올스타 팬 투표로 선출되었고,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에도 기여했다.
1.3.2. 한신 타이거스 시절
1988년 시즌 도중 기타무라 데루후미와의 맞트레이드로 한신 타이거스로 이적했다. 5월 28일 다이요 웨일스와의 경기 (고시엔)에서, 이시바시 미쓰구가 날린 외야 플라이를 잡으려다 럭키 존 펜스를 타고 오르려 했지만, 공을 잡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균형을 잃고 럭키 존 안쪽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요미우리 TV 방송의 중계 아나운서가 "가나모리도 들어갔습니다!"라고 절규한 장면은 `진기한 플레이 호 플레이진기한 플레이 호 플레이일본어`에서 다뤄졌다. 1989년에는 시즌 후반에 5번 타자로 기용되어 타율 .306의 성적을 남겼지만, 1992년을 끝으로 자유 계약 선수가 되었다.
1.3.3.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절
1993년,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 스왈로스로 이적했다. 대타 전문 선수로 재기하여, 낮은 타율에도 불구하고 .370의 출루율을 기록하며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9월 19일 요미우리와의 경기 (도쿄 돔)에서는 PL학원 후배인 하시모토 기요시의 빈볼에 격분하여 마운드에 있던 하시모토에게 달려들어 양 팀 벤치에서 관계자들이 뛰쳐나오는 대규모 난투극을 초래했다. 그는 나중에 관계자들에게 사과했지만, 미수 포함 몸에 맞는 공에 얽혀 격분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1995년에는 대타로 .324의 높은 타율을 기록하며 2년 만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9월 29일 요미우리와의 경기 (진구 구장)에서 8회 말 가토 히로토의 대타로 기용되어 1000경기 출장을 달성했다. 노무라 감독은 구단에 "숫자로만 판단하지 말아 달라. 벤치의 분위기 메이커, 연습 태도 등 젊은 선수들의 본보기이자 귀중한 전력이다. 내가 감독을 하는 한 계속 있어 달라"고 요청하는 등 그의 평가가 높았지만, 1996년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했다.
2. 플레이 스타일
가나모리 에이지는 자신부터 몸에 맞는 공을 맞으려 하는 경우가 많아 `当たり屋아타리야일본어` (몸에 맞는 공 전문 선수)로 알려졌으며, 몸에 맞는 공 퍼포먼스로 팬들을 열광시킨 시기가 있었다. 한신으로 이적 후 처음으로 몸에 맞는 공을 맞았을 때, 관중들로부터 "축하합니다!"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오기도 했다. 또한, 다리를 내밀어 실제로 공에 맞았지만 심판이 몸에 맞는 공을 인정하지 않아 다시 타석에 들어서 홈런을 친 적도 있다.
하지만 가나모리 본인은 퍼포먼스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진심으로 아팠다고 한다. 몸에 맞는 공을 맞을 때 "아아악!" 하고 소리쳤던 것은 고통을 잊기 위함이었다. 공을 몸 가까이 끌어당겨 치는 타격 스타일 때문에, 아무래도 피하는 것이 늦어져 몸에 맞는 공이 많았던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3. 은퇴 후 경력
선수 은퇴 후 가나모리 에이지는 야구계에서 지도자와 해설가 및 평론가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3.1. 지도자 경력
가나모리 에이지는 프로 야구팀뿐만 아니라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코치 및 감독으로 활동했다.
3.1.1. 프로 야구 코치 경력
야쿠르트 스왈로스의 1군 타격 코치 보좌(1997년 ~ 1999년)로 추천한 인물은 노무라 가쓰야 감독으로, 그는 가나모리에 대해 "저 녀석은 선수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좋다. 벤치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정도로 신뢰했다. 그는 1997년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친정팀인 세이부 라이온즈에서는 1군 타격 코치 보좌(2001년)와 1군 타격 코치(2002년)를 맡아 와다 가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스콧 매클레인을 성장시키며 2002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카브레라로부터는 깊은 존경을 받았는데, 그가 임기 만료로 코치를 퇴임했을 때 카브레라가 "저도 그만두겠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였다. 한편, 당시 다른 코칭스태프와 고립되어 작전 회의 등에 참석하지 않고 카브레라 전담 코치처럼 지내기도 했다. 와다 또한 가나모리가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을 맡고 있을 때 "호쿠리쿠 원정을 가면 식사를 같이 한다. 제자는 어디까지나 제자이므로"라고 말하며 스승과의 인연을 이어갔다.
다이에 호크스의 스카우트(2003년) 시절에는 훌리오 술레타를 발굴했으며, 스카우트라는 직함에도 불구하고 왕정치 감독으로부터 타격 보조적인 역할을 요청받아 종종 그라운드에 나와 선수들의 연습을 도왔다. 춘계 캠프에서는 조지마 겐지나 이구치 다다히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고, 이후 두 선수의 타격 개안에 큰 역할을 했으며, 특히 조지마와는 은퇴 후에도 강한 사제 관계로 맺어져 조지마가 출전한 미일 야구나 사세보시에서의 자율 훈련 등에도 모습을 드러냈다.
한신 타이거스의 1군 타격 코치(2004년)를 지낸 후 BC 리그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2007년 ~ 2009년)을 역임했다. 감독 첫 해부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으며, 우치무라 겐스케를 프로 야구 드래프트 지명 선수로 배출했다.
지바 롯데 마린스의 1군 타격 겸 야수 수석 코치(2010년 ~ 2011년)로 니시오카 쓰요시, 오기노 다카시, 기요타 이쿠히로, 오카다 요시후미 등을 지도하여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지만, 2011년에는 팀 타율과 득점이 리그 최하위로 떨어졌다. 롯데에서는 상대 투수가 교체될 때 다음 타자에게 다가가 조언하는 모습이 자주 보였다. 이후 2군 타격 코치(2012년)와 1군 타격 코치(2018년)로 다시 롯데에 몸담았다.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의 1군 타격 수석 코치(2019년), 1군 타격 코치(2020년 ~ 2021년), 육성 타격 코치(2022년)를 역임하는 등 많은 팀에서 지도자로 일했다.
3.1.2. 아마추어 야구 지도자 경력
BC 리그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2007년 ~ 2009년) 재임 시절에는 `NHK-BS 메이저리그 중계NHK-BS 메이저리그 중계일본어` 해설자도 겸임했다.
2013년에는 일본 학생 야구 협회의 지도자 강습회를 수강했으며, 2014년 3월 4일자로 일본 학생 야구 협회로부터 학생 야구 자격 회복을 인정받았다. 2014년 4월 1일자로 고향인 가나자와 가쿠인 고등학교 감독으로 3년 계약 기간으로 취임했다. 대학 시절 교직 과정을 이수했기 때문에, 2015년 봄부터는 이 학교의 교원으로 보건 체육 실기와 수업도 담당했다.
2017년에는 노스 아시아 대학 코치를 맡았다. 2023년 1월부터 2월까지 와세다대학 야구부 코치로 활동했으며, 같은 해 3월부터는 조감독으로 취임했다.
3.2. 야구 해설 및 평론 활동
선수 은퇴 후 2013년에는 `TBS 뉴스 버드TBS 뉴스 버드일본어` 및 테레아사 채널의 해설자, `유칸 후지유칸 후지일본어`의 평론가로 활동했다.
4. 지도 철학
가나모리 에이지는 타격 코치로서 `이론파`로 알려져 있다. 그의 지도는 기본적으로 공을 몸 가까이까지 끌어당겨 옆구리를 조이고 허리 회전을 사용하여 치는 방식이다.
후지타 다이라는 이러한 지도 방식에 대해 "아카호시 노리히로나 후지모토 아쓰시와 같은 힘 없는 타자들에게까지 적용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이론에 대해 가나모리는 "힘 없는 타자일수록 해야 한다", "팔이 펴진 상태보다 옆구리를 조이고 몸 가까이에서 배트를 휘두르는 것이 조작하기 쉽고 힘도 전달된다"고 설명했다. 반면 이세 다카오는 후지타와는 반대로 "이 스윙은 애버리지 히터에게는 적합하지만, 장거리 타자에게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5. 인물
가나모리 에이지는 와세다대학 축구부 출신인 가토 히사시와 현재까지도 절친한 친구이다. 가토는 체육계 학생으로서 학업이 매우 성실했기 때문에, 가나모리는 가토로부터 리포트나 시험 답안을 베껴 쓰기도 했다고 자신의 저서에 기록했다.
그는 하수라서 맥주 1잔에도 얼굴이 빨개지고, 1병을 마시면 속이 좋지 않아 토할 정도이다. 세이부 시절에는 금주와 엄격한 통금으로 술을 마시러 다니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 선수들도 있었지만, 가나모리는 술에는 관심이 없었고, 숙소 식사도 맛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한다. 한신 시절에는 와세다대학 1년 후배였던 오카다 아키노부가 통솔력이 있고 술자리 중심이었는데, 가나모리가 전혀 술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능숙하게 배려해주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는 니시노미야 구장에서 릴리프 카 운전수를 맡았던 여성으로, 그들의 연애 스토리는 미즈시마 신지의 만화 `아부상아부상일본어`에 그려지기도 했다.
6. 평가 및 영향
가나모리 에이지는 선수 시절 독특한 플레이 스타일과 함께 은퇴 후 지도자로서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노무라 가쓰야 감독으로부터 "선수들에게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아도 좋다. 벤치에 있어 주기만 하면 된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신뢰를 받았다.
세이부 라이온즈 코치 시절에는 와다 가즈히로, 알렉스 카브레라, 스콧 매클레인 등 핵심 선수들의 성장을 이끌어 2002년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특히 카브레라와의 깊은 유대 관계는 유명하다. 다이에 호크스 스카우트 및 코치 시절에는 훌리오 술레타를 발굴하고, 조지마 겐지와 이구치 다다히토의 타격 능력을 향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조지마와는 은퇴 후에도 사제 관계를 이어갔다.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으로서는 첫 해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우치무라 겐스케를 프로로 배출하는 성과를 냈다. 지바 롯데 마린스 코치 시절에는 니시오카 쓰요시, 오기노 다카시, 기요타 이쿠히로, 오카다 요시후미 등 젊은 선수들을 지도하여 2010년 팀의 일본 시리즈 우승에 공헌했다. 그의 지도력은 선수들의 잠재력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7. 상세 정보
가나모리 에이지의 프로 선수 및 감독 경력에 대한 상세 정보는 다음과 같다.
7.1. 연도별 성적
연도 | 구단 | 경기 | 타석 | 타수 | 득점 | 안타 | 2루타 | 3루타 | 홈런 | 루타 | 타점 | 도루 | 도루실패 | 희생타 | 희생플라이 | 볼넷 | 고의사구 | 사구 | 삼진 | 병살타 | 타율 | 출루율 | 장타율 | OPS |
---|---|---|---|---|---|---|---|---|---|---|---|---|---|---|---|---|---|---|---|---|---|---|---|---|
1982 | 세이부 | 4 | 10 | 9 | 3 | 2 | 0 | 0 | 0 | 2 | 2 | 0 | 0 | 0 | 0 | 1 | 0 | 0 | 2 | 0 | .222 | .300 | .222 | .522 |
1983 | 세이부 | 74 | 210 | 174 | 26 | 51 | 7 | 1 | 3 | 69 | 22 | 3 | 1 | 7 | 2 | 22 | 0 | 5 | 17 | 5 | .293 | .384 | .397 | .781 |
1984 | 세이부 | 65 | 181 | 148 | 19 | 37 | 9 | 0 | 2 | 52 | 19 | 0 | 0 | 5 | 1 | 15 | 0 | 12 | 17 | 0 | .250 | .364 | .351 | .715 |
1985 | 세이부 | 129 | 514 | 413 | 71 | 129 | 18 | 2 | 12 | 187 | 55 | 2 | 3 | 30 | 1 | 55 | 0 | 15 | 50 | 11 | .312 | .411 | .453 | .864 |
1986 | 세이부 | 112 | 405 | 336 | 42 | 100 | 18 | 5 | 3 | 137 | 34 | 3 | 3 | 23 | 3 | 37 | 2 | 6 | 37 | 13 | .298 | .374 | .408 | .782 |
1987 | 세이부 | 91 | 291 | 268 | 21 | 65 | 13 | 1 | 2 | 86 | 22 | 3 | 1 | 8 | 1 | 13 | 1 | 1 | 25 | 6 | .243 | .279 | .321 | .600 |
1988 | 세이부 | 4 | 13 | 11 | 1 | 1 | 0 | 0 | 0 | 1 | 0 | 0 | 0 | 2 | 0 | 0 | 0 | 0 | 1 | 0 | .091 | .091 | .091 | .182 |
1988 | 한신 | 79 | 201 | 177 | 13 | 37 | 6 | 4 | 2 | 57 | 14 | 0 | 2 | 3 | 0 | 20 | 1 | 1 | 16 | 2 | .209 | .293 | .322 | .615 |
1988 합계 | 83 | 214 | 188 | 14 | 38 | 6 | 4 | 2 | 58 | 14 | 0 | 2 | 5 | 0 | 20 | 1 | 1 | 17 | 3 | .202 | .282 | .309 | .591 | |
1989 | 한신 | 77 | 138 | 121 | 13 | 37 | 5 | 2 | 0 | 46 | 17 | 0 | 0 | 2 | 0 | 13 | 1 | 2 | 11 | 4 | .306 | .382 | .380 | .763 |
1990 | 한신 | 68 | 120 | 95 | 11 | 25 | 9 | 0 | 0 | 34 | 13 | 0 | 1 | 0 | 1 | 20 | 2 | 4 | 5 | 4 | .263 | .408 | .358 | .766 |
1991 | 한신 | 73 | 148 | 136 | 13 | 32 | 8 | 1 | 2 | 48 | 14 | 0 | 0 | 0 | 1 | 9 | 0 | 2 | 9 | 3 | .235 | .291 | .353 | .643 |
1992 | 한신 | 42 | 44 | 44 | 1 | 10 | 0 | 0 | 0 | 10 | 3 | 0 | 0 | 0 | 0 | 0 | 0 | 0 | 9 | 2 | .227 | .227 | .227 | .455 |
1993 | 야쿠르트 | 46 | 55 | 41 | 3 | 7 | 1 | 1 | 0 | 10 | 3 | 0 | 0 | 1 | 0 | 13 | 0 | 0 | 7 | 1 | .171 | .370 | .244 | .614 |
1994 | 야쿠르트 | 71 | 72 | 70 | 1 | 19 | 3 | 0 | 0 | 22 | 5 | 0 | 0 | 0 | 0 | 2 | 0 | 0 | 10 | 4 | .271 | .292 | .314 | .606 |
1995 | 야쿠르트 | 67 | 80 | 71 | 8 | 23 | 6 | 1 | 1 | 34 | 10 | 0 | 0 | 1 | 1 | 5 | 0 | 2 | 5 | 4 | .324 | .380 | .479 | .859 |
1996 | 야쿠르트 | 46 | 46 | 45 | 3 | 8 | 1 | 0 | 0 | 9 | 6 | 0 | 0 | 0 | 0 | 1 | 0 | 0 | 1 | 2 | .178 | .196 | .200 | .396 |
통산: 15년 | 1048 | 2528 | 2159 | 249 | 583 | 104 | 18 | 27 | 804 | 239 | 11 | 11 | 82 | 11 | 226 | 7 | 50 | 222 | 61 | .270 | .351 | .372 | .724 |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연도 | 포수 | ||||
---|---|---|---|---|---|
경기 | 기획 도루 수 | 허용 도루 | 도루 저지 | 저지율 | |
1982 | 4 | 4 | 0 | .000 | |
1983 | 1 | 0 | 0 | ---- | |
1986 | 1 | 0 | 0 | ---- | |
통산 | 6 | 4 | 0 | .000 |
7.2. 수상 및 기록
- 표창
- 베스트 나인: 1회 (외야수 부문: 1985년)
- 다이아몬드 글러브상: 1회 (외야수 부문: 1985년)
- 첫 기록
- 첫 출장·첫 선발 출장: 1982년 9월 9일, 롯데 오리온스 전기 11차전 (세이부 라이온스 구장)에서 8번 포수로 선발 출장
- 첫 안타·첫 타점: 상동, 5회 말 후카자와 에비쓰로부터 2점 적시타
- 첫 홈런: 1983년 5월 13일, 긴테쓰 버펄로스 6차전 (닛세이 구장)에서 7회 초 야나기다 유타카로부터 솔로 홈런
- 절목 기록
- 1000경기 출장: 1995년 9월 29일, 요미우리 24차전 (메이지 진구 야구장)에서 8회 말 가토 히로토의 대타로 출장 (역대 328번째)
- 기타 기록
- 올스타전 출장: 3회 (1985년, 1986년, 1987년)
7.3. 등번호 및 등록명
- 등번호
- 26 (1982년 ~ 1988년 도중)
- 5 (1988년 도중 ~ 1992년)
- 32 (1993년 ~ 1996년)
- 89 (1997년 ~ 1999년)
- 75 (2001년 ~ 2002년, 2010년 ~ 2012년)
- 88 (2004년)
- 81 (2005년 ~ 2006년, 2019년 ~ 2022년)
- 2 (2007년 ~ 2009년)
- 71 (2018년)
- 등록명
- 金森 栄治 (가나모리 에이지, 1982년 ~ 1984년, 1993년 ~ 1996년)
- 金森 永時 (가나모리 에이지, 1985년 ~ 1992년)
7.4. 감독 경력 성적
BC 리그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 시절의 팀 성적은 다음과 같다.
7.4.1. 정규 시즌
연도 | 구단 | 순위 | 경기 | 승리 | 패배 | 무승부 | 승률 | 팀 홈런 | 팀 타율 | 팀 방어율 | 연령 |
---|---|---|---|---|---|---|---|---|---|---|---|
2007년 | 이시카와 | 1위 | 72 | 43 | 22 | 7 | .662 | 12 | .266 | 3.02 | 50세 |
2008년 | 이시카와 | 2위 | 72 | 31 | 30 | 11 | .508 | 51세 | |||
2009년 | 이시카와 | 1위 | 72 | 42 | 27 | 3 | .609 | 52세 | |||
통산: 3년 | 216 | 116 | 79 | 21 | .594 | 지구 우승 2회 |
7.4.2. 포스트시즌
연도 | 구단 | 대회명 | 대전 상대 | 승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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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 이시카와 | 일본 독립 리그·그랜드 챔피언십 | 가가와 올리브 가이너스 (IL 1위) | 1승 3패 |
2008년 | 이시카와 | 호쿠리쿠 지구 플레이오프 | 도야마 선더버즈 (BC 호쿠리쿠 1위) | 1승 1패 (※1) |
2009년 | 이시카와 | 호쿠리쿠 지구 플레이오프 | 도야마 선더버즈 (BC 호쿠리쿠 2위) | 1승 2패 (※2) |
2009년 | 이시카와 | BC 리그 챔피언십 | 군마 다이아몬드 페가수스 (BC 가미신에쓰 1위) | 1승 3패 |
: ※1 도야마가 전·후기 우승으로 이시카와는 2전 전승이 조건. 도야마가 BC 리그 챔피언십에 출장
: ※2 이시카와가 전·후기 우승으로 도야마는 3전 전승이 조건. 이시카와가 BC 리그 챔피언십에 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