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덴마크의 공주이자 명예 여왕으로 알려진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Estrid Svendsdatter덴마크어, 990년대/997년경 출생 ~ 1057년/1073년 사망)는 스벤 1세 포크비어드의 딸이자 크누트 대왕의 이복 누이이다. 그녀는 울프 야를과의 결혼을 통해 훗날 덴마크의 국왕이 되는 스벤 2세 에스트리드센과 베오른 에스트리드센의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에스트리센 왕조는 1047년부터 1412년까지 덴마크를 통치하였다. 에스트리드는 실제로 군주나 왕의 배우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스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덴마크에서 '여왕'으로 불리며 독특한 지위를 누렸다. 이러한 배경은 그녀가 단순한 왕족을 넘어 덴마크 역사에서 강력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로 평가받게 한다.
2. 생애와 가족 관계
에스트리드 스벤스다테르는 10세기 말과 11세기 초 덴마크의 왕실 가문에서 태어나 다양한 혼인 관계를 통해 유럽 왕가들과의 복잡한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2.1. 출생과 성장 배경
에스트리드는 990년경 또는 997년경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인 스벤 1세 포크비어드는 덴마크의 국왕이었다. 어머니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일부 연구자들은 그녀의 어머니를 벤덴의 군힐드로 보며, 이 경우 에스트리드는 크누트 대왕의 이복 누이가 된다. 또 다른 연구자들에 따르면, 에스트리드의 어머니는 오만한 시그리드이며, 그녀는 스벤 포크비어드와 결혼하기 전 에리크 승리왕과 결혼하여 올로프 셰트코눙을 낳았으므로 올로프는 에스트리드의 이복 형제가 된다. 이 설에 따르면 크누트 대왕, 하랄 2세, 시비엔토스와바 폴스카는 스벤 포크비어드와 폴란드 공작 미에슈코 1세의 딸 군힐드 사이의 자녀이므로 에스트리드와는 또 다른 이복 형제가 된다. 그녀의 아버지 스벤 1세는 1014년에 사망했다.
2.2. 초기 혼인과 논란
에스트리드는 어린 시절 두 번의 혼인 또는 약혼에 얽힌 논란을 겪었다. 첫 번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공작과의 짧은 결혼이었다. 이 인물은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의 아들인 볼히니아의 프세볼로트로 추정되며, 1015년 키예프 대공 사망 후 루스 전쟁 중에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번째 혼인은 그녀의 이복 형제인 크누트 대왕이 잉글랜드 왕위에 오른 후,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와 합의하여 리샤르의 아들 로베르와 결혼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결혼이 실제로 성사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역사가 랄프 글라베르는 그의 저서 『Historiarum libri quinque라틴어』에서 크누트의 이름 없는 누이가 로베르와 결혼했다고 기록했지만, 브레멘의 아담은 에스트리드(그는 그녀를 마르그레테라고 불렀다)가 리샤르 2세와 결혼했으며, 그 후 리샤르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난 뒤 울프와 결혼했다고 전한다. 하지만 리샤르는 실제로 예루살렘에 가지 않았고, 로베르가 갔었다는 점에서 혼란이 있다. 노르망디의 기록에는 이러한 결혼에 대한 언급이 없어 역사학자들은 이를 단명한 결혼, 약혼, 혹은 혼동의 결과로 보고 있다.
2.3. 울프 야를과의 혼인 및 그 영향
에스트리드는 이복 형제 크누트 대왕의 주선으로 울프 야를과 결혼했다. 그러나 1026년, 울프는 크누트의 명령에 의해 살해당했다. 일부 기록에 따르면 이 암살이 에스트리드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울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에스트리드는 크누트의 신뢰를 잃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로부터 광대한 영토를 하사받으며 왕실 내에서의 강력한 지위를 유지했다. 이 사건은 에스트리드의 정치적 수완과 왕실 내 영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일화로 평가된다.
3. 주요 활동과 역할
에스트리드는 생애 동안 다양한 활동을 통해 덴마크 왕실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아들 스벤 2세가 국왕으로 즉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3.1. 교회 후원과 로스킬레 대성당
에스트리드는 독실한 신앙심을 바탕으로 교회에 대한 광범위한 기부 활동을 펼쳤다. 그녀는 아들 스벤 2세의 교육을 교회에 맡겼으며, 덴마크에서 최초의 석조 교회인 로스킬레 대성당을 건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로스킬레 대성당은 덴마크 왕실의 주요 매장지이자 종교적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며, 에스트리드의 이러한 후원 활동은 그녀의 깊은 신앙심과 더불어 덴마크 교회의 발전에 기여한 점을 보여준다.
3.2. 아들 스벤 2세의 즉위 지원
에스트리드는 아들 스벤 2세가 덴마크 국왕의 지위를 얻는 데 있어 핵심적인 지지자였다. 그녀는 아들이 덴마크에서의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한 노력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047년, 스벤 2세는 어머니 에스트리드의 혈통 덕분에 덴마크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스벤 에스트리드센' 즉 '에스트리드의 아들 스벤'이라는 모계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스벤 2세는 또한 참회왕 에드워드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왕위를 주장했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울프의 누이인 기타가 고드윈 백작과 결혼하여 그의 가문을 확고히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진영에 편입시킨 것은 이러한 정치적 맥락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3.3. 명예 여왕으로서의 위상
에스트리드는 실제로 덴마크의 군주가 아니었으며, 국왕의 배우자 또한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아들 스벤 2세의 통치 기간 동안 '여왕'을 뜻하는 'Dronning덴마크어'이라는 명예 호칭을 부여받았고, '에스트리드 여왕'으로 불렸다. 이러한 호칭은 일반적으로 왕의 배우자에게만 허용되는 것이었기에, 에스트리드의 이 같은 독특한 위상은 그녀가 왕실 내에서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과 존경을 받았는지 보여준다. 이는 그녀의 정치적 역할과 아들 스벤 2세의 왕위 계승에 미친 결정적인 기여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4. 사망과 매장지 논란
에스트리드의 정확한 사망 시점은 불분명하며, 그녀의 매장지는 오랜 시간 동안 역사적인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전은 이 논란에 대한 새로운 단서를 제공했다.
4.1. 사망
에스트리드의 정확한 사망 연도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녀의 장례를 집전한 로스킬레의 빌헬름 주교의 재임 기간이 1057년에서 1073년 사이였던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에스트리드의 사망 시점은 최소 1057년 이후이며 1073년 이전으로 추정된다.
4.2. 로스킬레 대성당 매장지 논란
오랜 세월 동안 에스트리드는 로스킬레 대성당의 북동쪽 기둥에 매장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그러나 2003년, 해당 매장지에서 발견된 유골에 대한 DNA 검사가 진행되었고, 그 결과 유골이 에스트리드로 알려진 인물보다 훨씬 젊은 여성의 것으로 밝혀지면서 기존의 설은 부정되었다.
이후 새로운 이론이 제기되었다. 현재 유력하게 제기되는 설은 로스킬레 대성당에 표시된 묘비가 사실 에스트리드와 동일한 이름을 가졌던 마르그레테 하스비에른스다테르를 지칭한다는 것이다. 마르그레테는 스벤 2세의 아들인 하랄 3세의 왕비였으며, 그녀 또한 '에스트리드'로 불리기도 했다. 이 발견은 덴마크 왕실의 매장 역사에 대한 이해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5. 유산과 후대 영향
에스트리드는 덴마크 왕실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오랜 기간 덴마크를 통치한 왕조의 시조로서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5.1. 에스트리센 왕조의 시조
에스트리드의 가장 중요한 유산 중 하나는 그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된 에스트리센 왕조의 시조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왕조는 1047년부터 1412년까지 거의 400년 동안 덴마크를 통치하며 덴마크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에스트리드의 아들 스벤 2세가 그녀의 혈통을 통해 왕위를 계승하고, 그 후손들이 덴마크 왕실을 이어가면서 에스트리드는 덴마크 왕실 역사의 중심 인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는 그녀가 비록 직접 통치하지 않았지만, 간접적으로 덴마크의 정치적 지형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친 강력한 여인이었음을 증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