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는 1899년 6월 8일, 독일 제국 베를린 서부의 샤를로텐부르크에서 군의관이었던 에른스트 그라비츠(Ernst Grawitz)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내 일제는 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지크프리트 타우베르트의 딸이었다.
1.1. 어린 시절 및 배경
그라비츠는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안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의 가족 배경은 그가 훗날 나치 정권의 핵심 인물이 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 특히 그의 장인이 친위대 고위 간부였다는 점은 그의 친위대 내 입지에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1.2. 교육
그라비츠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여 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1929년부터 내과 의사로 활동했으며, 1933년에는 베를린-베스트엔트 병원의 주임 의사가 되었다.
1.3. 초기 경력 및 정치 활동
그라비츠는 1917년부터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1918년 영국군의 포로가 되었다가 1919년 포로 수용소에서 석방되었다. 전후 혼란기인 1920년에는 카프 반란에 의용군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는 1931년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sozialistische Deutsche Arbeiterpartei독일어, 나치당)에 입당했으며(당원 번호 1,102,844), 이듬해인 1932년 3월 29일에는 친위대에 입대했다(대원 번호 27,483). 이러한 초기 정치 활동은 그가 나치 정권 내에서 빠르게 승진하는 발판이 되었다.
2. 주요 직책 및 활동
그라비츠는 나치 정권 하에서 여러 중요한 직책을 맡으며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1. SS 의학 총감
그라비츠는 1935년 6월 1일 친위대 위생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37년에는 친위대 및 경찰 의학 총감(Reichsarzt SS und Polizei)이라는 막강한 직책에 올랐다. 이 직책은 그에게 친위대 및 경찰 조직 내 의료 시스템 전반에 대한 최고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는 이를 통해 나치 정권의 인종 위생 정책과 의학 범죄를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40년에는 무장친위대 위생 총감으로 임명되었고, 1941년에는 그라츠 대학교의 명예 교수가 되었다. 그의 최종 계급은 친위대 대장(SS-Obergruppenführer) 및 무장친위대 대장이었다.
2.2. 독일 적십자사에서의 역할
그라비츠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독일 적십자사(DRK)의 부총재를 역임했으며, 사실상 DRK의 수장이었다. 그는 이 직책을 이용하여 DRK의 원래 적십자 원칙을 나치 이념에 맞게 대폭 변경시켰다. 이는 인도주의적 구호 단체가 나치 정권의 도구로 전락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939년에는 베를린 외곽의 독일 적십자사 지도자 양성 학교 교원들과 함께 있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3. 나치 의학 범죄 가담
그라비츠는 나치 정권의 가장 잔혹한 의학 범죄에 깊이 관여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비인도적인 실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승인했으며, 나치 정권의 절멸 프로그램 실행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친위대 최고 의무 책임자로서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열정적인 실험자"로 알려져 있다.
3.1. 강제 수용소 인체 실험 지원
그라비츠는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이용한 실험을 포함하는 나치 프로그램에 자금을 지원했다. 친위대 내외부의 연구자들은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인력을 실험에 활용하고자 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그라비츠에게 신청서를 제출해야 했다. 그라비츠는 이 요청들을 친위대 전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전달하여 최종 승인을 받도록 했다. 이 과정은 그가 강제 수용소 내에서 벌어진 수많은 비인도적인 인체 실험의 직접적인 공모자이자 조력자였음을 명확히 보여준다.
3.2. 절멸 프로그램 (Action T4)
그라비츠는 정신 질환자와 신체 장애인들을 살해하는 액션 T4 프로그램의 책임자 그룹에 속해 있었다. 이 프로그램은 1939년부터 어린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갔다. 그라비츠를 포함한 관계자들은 살해 프로그램의 실행을 담당할 의사들을 직접 선발하는 데 관여했다. 이는 그가 나치 정권의 대량 학살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음을 의미한다.
3.3. 동성애자 대상 연구 및 실험
그라비츠는 코펜하겐의 의사 칼 푀르네트(Carl Værnet)를 만나 친위대를 대신하여 동성애를 "치료"하기 위한 연구를 수행할 것을 제안했다. 이 연구는 부헨발트 강제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포함했다. 그라비츠는 나치의 "동성애 박멸" 계획을 지원하고 동성애를 "치료"할 방법을 찾는 연구에 매진했으며, 이를 위해 강제 수용소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잔혹한 인체 실험을 자행했다. 이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의학을 이용한 인권 침해의 극명한 사례이다.
3.4. 기타 강제 수용소 실험
그라비츠는 칼 게프하르트 등과 함께 라벤스브뤼크 강제수용소에서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가스 괴저 감염 실험 등 잔혹한 인체 실험을 수행했다. 이러한 실험들은 수감자들에게 극심한 고통과 죽음을 안겨주었으며, 의학의 이름으로 저질러진 반인륜적 범죄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4.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및 죽음
제2차 세계 대전이 종반으로 치달으면서 나치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그라비츠의 행적에도 변화가 생겼다.
4.1. 퓌러엄폐호에서의 활동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그라비츠는 아돌프 히틀러의 퓌러엄폐호에서 히틀러의 주치의 중 한 명으로 활동했다. 1945년 4월 소련군이 베를린으로 진격해오자, 그는 다른 고위 관리들이 베를린을 떠나 피난하는 것을 보고 히틀러에게 자신도 베를린을 떠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그의 요청을 단호히 거부했다.
4.2. 가족과 함께한 자살
히틀러의 베를린 탈출 불허 지시에 절망한 그라비츠는 1945년 4월 24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바벨스베르크에 위치한 자신의 자택에서 가족과 함께 자살을 결심했다. 저녁 식사 중 그는 식탁 아래에 놓아둔 두 개의 수류탄의 안전핀을 뽑아 터뜨렸고, 이 폭발로 자신과 아내, 두 자녀가 모두 사망했다. 그의 자살은 나치 정권의 몰락과 함께 파멸한 핵심 인물들의 비극적인 최후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5. 평가 및 대중 매체 묘사
에른스트-로베르트 그라비츠는 나치 정권의 의학 범죄에 깊이 가담한 인물로서 역사적으로 엄중한 비판을 받고 있다.
5.1. 역사적 평가
그라비츠는 나치 독일의 인종 위생 정책과 대량 학살 프로그램에 의학적 정당성을 부여하고 실행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을 대상으로 한 인체 실험 지원, 액션 T4 프로그램 참여, 그리고 동성애 '치료'를 명목으로 한 잔혹한 실험 등 그의 행위는 의학 윤리와 인권에 대한 극심한 침해로 평가된다. 그는 의학적 지식을 악용하여 수많은 무고한 생명을 앗아가고 고통을 주었으며, 이는 의료인으로서의 기본적인 책무를 저버린 반인륜적 범죄로 규탄받는다.
5.2. 대중 매체에서의 묘사
그라비츠의 마지막 행적, 특히 베를린에서 히틀러에게 탈출을 요청했다가 거부당한 후 가족과 함께 자살한 사건은 2004년 독일 영화 《다운폴》(Der Untergang독일어, 한국 개봉명: 《히틀러: 마지막 12일》)에서 재현되었다. 영화에서 그라비츠는 배우 크리스티안 회닝(Christian Hoening)이 연기했으며, 그의 절망적인 자살 장면은 나치 정권의 몰락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 중 하나로 묘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