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망명
에드워드는 애설레드 2세의 일곱 번째 아들이자, 그의 두 번째 아내 노르망디의 엠마 소생으로는 첫 번째 아들이었다. 에드워드는 1003년에서 1005년 사이에 이슬립에서 태어났으며, 1005년 두 개의 헌장에서 '증인'으로 처음 기록되었다. 그에게는 알프레드라는 친형제와 고드기푸라는 자매가 있었다. 그는 헌장에 항상 이복형제들 뒤에 기록되었는데, 이는 그가 그들보다 서열이 낮았음을 보여준다.
그의 어린 시절, 잉글랜드는 스베인 포크비어드와 그의 아들 크누트 대왕이 이끄는 바이킹 습격과 침략의 대상이었다. 1013년 스베인이 왕위를 찬탈하자 엠마는 노르망디로 피신했고, 에드워드와 알프레드도 뒤를 따랐으며, 애설레드 역시 노르망디로 망명했다. 스베인이 1014년 2월에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주요 인사들은 애설레드에게 이전보다 '더 정의롭게' 통치하겠다는 약속을 조건으로 그를 다시 불러들였다. 애설레드는 동의하고 사절단과 함께 에드워드를 돌려보냈다. 애설레드는 1016년 4월에 사망했으며, 에드워드의 이복형제인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가 뒤를 이어 스베인의 아들 크누트에 맞서 싸웠다. 스칸디나비아 전통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에드먼드와 함께 싸웠다고 하지만, 당시 에드워드가 기껏해야 13세였음을 고려하면 이 이야기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에드먼드는 1016년 11월에 사망했고, 크누트는 이견 없는 왕이 되었다. 에드워드는 형제자매와 함께 다시 망명길에 올랐으며, 1017년 그의 어머니는 크누트와 결혼했다. 같은 해, 크누트는 에드워드의 마지막 생존 이복형제인 이드위그를 처형했다.
에드워드는 25년간의 망명 생활을 보냈으며, 주로 노르망디에서 지냈을 것으로 추정된다. 1030년대 초까지 그의 정확한 위치에 대한 증거는 없지만, 1024년경 맹트 백작 드로고와 결혼한 그의 누이 고드기푸로부터 지원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1030년대 초, 에드워드는 노르망디에서 네 개의 헌장을 목격했으며, 그중 두 개에는 잉글랜드의 왕으로 서명했다. 노르만 연대기 작가 쥐미에주의 기욤에 따르면, 로베르 1세는 1034년경 에드워드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잉글랜드 침공을 시도했으나, 그 배가 항로를 벗어나 저지섬으로 흘러갔다. 그는 또한 여러 대륙의 수도원장들, 특히 나중에 에드워드의 캔터베리 대주교가 된 쥐미에주 수도원장 로베르로부터 왕위 주장에 대한 지지를 받았다. 에드워드는 이 기간 동안 강렬한 개인적 경건함을 발전시켰다고 전해지지만, 현대 역사학자들은 이를 후대의 시성 운동의 산물로 본다. 프랭크 발로우의 견해로는 "그의 생활 방식은 전형적인 시골 귀족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잉글랜드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으며, 야심 찬 어머니 엠마는 크누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하데크누트를 지지하는 데 더 관심이 있었다.
크누트는 1035년에 사망했고, 하데크누트가 덴마크의 왕위를 계승했다. 그가 잉글랜드까지 계속 보유하려 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는 덴마크에서의 자신의 지위를 방어하느라 잉글랜드에 와서 왕위 주장을 펼칠 수 없었다. 따라서 그의 이복형제 해럴드 헤어풋이 섭정 역할을 하고, 엠마는 하데크누트를 대신하여 웨식스를 지키기로 결정되었다. 1036년, 에드워드와 그의 형제 알프레드는 각자 잉글랜드로 왔다. 엠마는 나중에 그들이 자신을 방문하도록 해럴드가 위조한 편지에 응답하여 왔다고 주장했지만, 역사학자들은 엠마가 해럴드의 증가하는 인기에 대항하기 위해 실제로 그들을 초대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알프레드는 고드윈에게 붙잡혀 해럴드 헤어풋에게 넘겨졌다. 해럴드는 알프레드의 눈에 뜨거운 막대를 꽂아 눈을 멀게 하여 왕위 자격을 박탈했으며, 알프레드는 상처로 인해 곧 사망했다. 이 살해 사건은 에드워드가 고드윈에게 품었던 증오의 주된 원인이자 1051년 가을 고드윈이 추방된 주요 이유 중 하나로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사우샘프턴 근처에서 성공적인 소규모 전투를 벌인 후 노르망디로 후퇴했다고 한다. 그는 이로써 자신의 신중함을 보여주었지만, 노르망디와 스칸디나비아에서는 군인으로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었다.
1037년, 해럴드가 왕으로 받아들여졌고, 다음 해 그는 엠마를 추방하여 엠마는 브뤼허로 후퇴했다. 엠마는 에드워드를 불러 하데크누트를 위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에드워드는 침략을 시작할 자원이 없다는 이유로 거절했고, 왕위에 대한 자신의 어떠한 관심도 부인했다. 덴마크에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한 하데크누트는 침략을 계획했으나, 해럴드가 1040년에 사망했고, 하데크누트는 어머니와 함께 아무런 저항 없이 잉글랜드로 건너와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2. 잉글랜드 복귀 및 즉위
1041년, 하데크누트는 에드워드를 잉글랜드로 다시 초대했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후계자로 삼기 위함이었다. 12세기 문헌인 쿼드리파르티투스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윈체스터 주교 엘프윈과 고드윈 백작의 중재로 소환되었다고 한다. 에드워드는 현대의 허스트 스핏 건너편 와이트섬 인근에 위치한 허스테스헤버에서 "잉글랜드의 모든 대귀족들"을 만났다. 그곳에서 에드워드는 크누트의 법을 계속 지킬 것이라는 맹세를 대가로 왕으로 인정받았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하데크누트와 함께 왕으로 즉위 서약을 했으나, 1042년 하데크누트가 발행한 외교 문서에서는 그를 왕의 형제로 묘사하고 있다.
1042년 6월 8일 하데크누트가 사망한 후, 잉글랜드의 가장 강력한 백작 중 한 명인 고드윈이 에드워드를 지지했고, 에드워드는 왕위를 계승했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그의 즉위 당시 인기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그 [하데크누트]가 묻히기 전에 모든 백성들은 런던에서 에드워드를 왕으로 선택했다." 에드워드는 웨식스 왕실의 중심지인 윈체스터 대성당에서 1043년 4월 3일 부활절 일요일에 대관식을 치렀다.
3. 통치 기간
에드워드 참회왕의 통치는 초기 왕권 강화 노력과 귀족 세력, 특히 고드윈 가문과의 복잡한 관계로 점철되었다. 그는 노르만인 고문을 중용하고 외교 및 국방에서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으나, 말년에 이르러 정치에서 점차 물러나면서 고드윈 가문의 영향력이 증대되는 등 왕권이 약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3.1. 초기 통치와 권력 기반
에드워드는 어머니가 "왕이 되기 전에도, 그리고 그 후에도 자신이 원했던 것보다 적게 해 주었다"고 불평했다. 1043년 11월, 그는 세 명의 주요 백작인 머시아 백작 레오프릭, 고드윈, 그리고 노섬브리아 백작 시워드와 함께 윈체스터로 가서 어머니의 재산을 박탈했다. 이는 아마도 그녀가 왕에게 속한 보물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고문인 스티간드는 엘름햄 주교직을 박탈당했으나, 둘 다 곧 다시 총애를 받았다. 엠마는 1052년에 사망했다.
에드워드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지위는 약했다. 효과적인 통치를 위해서는 세 명의 주요 백작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으나, 덴마크 통치 기간 동안 옛 웨식스 왕조에 대한 충성심이 약화되었다. 오직 레오프릭만이 애설레드를 섬겼던 가문 출신이었다. 시워드는 아마도 덴마크인 출신이었고, 고드윈은 잉글랜드인이었지만 크누트의 새로운 사람들 중 하나였으며 크누트의 전 시누이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에드워드는 전통적인 강력한 군주제를 회복시키며 프랭크 발로우의 견해처럼 "충동적인 애설레드와 강력한 엠마의 진정한 아들인 정력적이고 야심 찬 인물"임을 보여주었다.
1043년, 고드윈의 장남 스베인 고드윈슨은 남서부 미들랜즈의 백작으로 임명되었고, 1045년 1월 23일 에드워드는 고드윈의 딸 에디스와 결혼했다. 얼마 후, 에디스의 오빠 해럴드 고드윈슨과 그녀의 덴마크인 사촌 베오른 에스트리드손도 잉글랜드 남부에서 백작으로 임명되었다. 고드윈과 그의 가문은 이제 잉글랜드 남부 전역을 종속적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1047년, 스베인은 레오민스터의 수도원장을 납치한 죄로 추방당했다. 1049년, 그는 자신의 백작직을 되찾으려 돌아왔으나, 이는 해럴드와 베오른의 반대에 부딪혔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그들이 스베인 부재 시 그의 땅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스베인은 사촌 베오른을 살해하고 다시 망명했다. 에드워드의 조카 겁쟁이 랄프가 베오른의 백작직을 받았지만, 다음 해 스베인의 아버지는 그의 복직을 확보할 수 있었다.
에드워드의 영지는 가장 강력한 백작들의 영지보다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었지만, 이들은 남부 백작령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그는 개인적인 권력 기반이 없었고, 이를 구축하려 시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050-51년에는 심지어 상설 해군을 구성했던 14척의 외국 선박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고 이를 위한 세금을 폐지하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 및 외교 문제에 있어서는 자신의 정책을 따를 수 있었다. 노르웨이의 망누스 1세는 잉글랜드 왕위를 열망했으며, 1045년과 1046년 에드워드는 침략을 우려하여 샌드위치에서 함대를 지휘했다. 베오른의 형인 스베인 2세는 덴마크 지배권을 놓고 망누스와의 전투에서 도움을 바라며 "에드워드에게 아들처럼 복종"했지만, 1047년 에드워드는 스베인에게 원군을 보내라는 고드윈의 요구를 거부했고, 10월에 망누스가 사망한 후에야 잉글랜드는 공격을 면하고 스베인이 덴마크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현대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가 주로 노르만인 총신들을 고용했다는 전통적인 견해를 부정하지만, 그는 실제로 소수의 노르만인을 포함한 외국인들을 자신의 가신으로 두었으며, 이들은 인기가 없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쥐미에주 수도원장 로베르였다. 그는 1030년대부터 에드워드를 알고 있었고 1041년에 그와 함께 잉글랜드로 와서 1043년 런던 주교가 되었다. 비타 에드워디(Vita Edwardi)에 따르면, 그는 "항상 왕의 가장 강력한 신뢰를 받는 고문"이 되었다.
3.2. 귀족 세력과의 관계
교회 임명에 있어서 에드워드와 그의 고문들은 지역 연줄이 있는 후보자들에게 편향된 모습을 보였으며, 1051년 캔터베리의 성직자와 수도승들이 고드윈의 친척을 캔터베리 대주교로 선출했을 때, 에드워드는 그를 거부하고 로베르 드 쥐미에주를 임명했다. 로베르는 고드윈이 일부 대주교령 재산을 불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1051년 9월, 에드워드는 그의 처남이자 고드기푸의 두 번째 남편인 외스타슈 2세의 방문을 받았다. 그의 부하들이 도버에서 소동을 일으키자, 에드워드는 켄트 백작 고드윈에게 도시의 시민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했으나, 고드윈은 그들 편을 들며 거부했다. 에드워드는 강력한 백작을 제어할 기회를 포착했다. 로베르 대주교는 고드윈이 1036년 에드워드의 형제 알프레드를 살해했던 것처럼 왕을 죽이려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했고, 레오프릭과 시워드는 왕을 지지하며 그들의 봉신들을 소집했다. 스베인과 해럴드도 자신들의 봉신들을 소집했지만, 어느 쪽도 싸움을 원하지 않았으며, 고드윈과 스베인은 각각 아들을 인질로 주어 노르망디로 보낸 것으로 보인다. 고드윈의 부하들이 왕과 싸우려 하지 않으면서 고드윈 가문의 입지는 무너졌다. 중재자 역할을 하던 스티간드가 고드윈이 알프레드와 그의 동료들을 살아서 돌려보낼 수 있다면 평화를 얻을 수 있다는 왕의 농담을 전하자, 고드윈과 그의 아들들은 플랑드르와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에드워드는 에디스를 부인하고 수녀원으로 보냈다. 아마도 그녀가 아이를 낳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로베르 대주교는 이혼을 촉구했다.
스베인은 예루살렘으로 순례를 떠났으나(돌아오는 길에 사망), 고드윈과 그의 다른 아들들은 1년 후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고 상당한 지지를 받았다. 반면 레오프릭과 시워드는 왕을 지지하지 않았다. 양측은 내전이 발생하면 국가가 외국 침략에 노출될 것을 우려했다. 왕은 격분했지만, 고드윈과 해럴드를 그들의 백작령으로 복권시키는 데 굴복할 수밖에 없었고, 로베르 드 쥐미에주와 다른 프랑스인들은 고드윈의 복수를 두려워하여 도망쳤다. 에디스는 여왕으로 복권되었고, 위기 상황에서 다시 양측의 중재자 역할을 했던 스티간드는 로베르의 자리에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스티간드는 기존의 윈체스터 주교직을 유지했으며, 그의 복수 직위는 교황과의 지속적인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3.3. 외교 및 국방
1050년대에 에드워드는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를 다루는 데 있어 공격적이고 전반적으로 성공적인 정책을 추구했다. 말콤 칸모어는 1040년 그의 아버지 던컨 1세가 맥베스가 이끄는 군대와의 전투에서 사망하고 맥베스가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한 후 에드워드의 궁정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1054년, 에드워드는 시워드를 보내 스코틀랜드를 침공하게 했다. 그는 맥베스를 물리쳤고, 원정에 동행했던 말콤은 스코틀랜드 남부를 장악했다. 1058년까지 말콤은 맥베스를 전투에서 죽이고 스코틀랜드 왕위를 차지했다. 1059년, 그는 에드워드를 방문했지만 1061년에는 자신의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해 노섬브리아를 습격하기 시작했다.
1053년, 에드워드는 잉글랜드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남웨일스 공작 리스 압 리데르흐의 암살을 명령했으며, 리스의 머리가 그에게 전달되었다. 1055년, 그리피드 압 리웰린은 웨일스의 통치자로 자리 잡았고, 반역죄로 추방된 머시아 백작 앨프가르와 동맹을 맺었다. 그들은 헤리퍼드에서 랄프 백작을 물리쳤고, 해럴드는 침략자들을 웨일스로 다시 몰아내기 위해 잉글랜드 거의 전역에서 군대를 모아야 했다. 앨프가르의 복권으로 평화가 체결되었고, 그는 1057년 아버지 사망 시 머시아 백작직을 계승할 수 있었다. 그리피드는 에드워드의 충성스러운 부왕이 되겠다고 맹세했다. 앨프가르는 1062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며, 그의 어린 아들 머시아 백작 에드윈은 머시아 백작직을 계승할 수 있었지만, 해럴드는 그리피드를 기습 공격했다. 그리피드는 탈출했으나, 다음 해 해럴드와 토스티그가 다시 공격하자 그는 후퇴했고 웨일스 적들에게 살해당했다. 에드워드와 해럴드는 그 후 일부 웨일스 공작들에게 신하의 맹세를 강요할 수 있었다.

3.4. 후기 통치와 정치적 은퇴
1050년대 중반까지 에드워드는 고드윈 가문이 지배적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백작령을 재편할 수 있었다. 고드윈은 1053년에 사망했고, 해럴드가 그의 웨식스 백작직을 계승했지만, 그의 다른 형제들은 이 시점에 백작이 아니었다. 당시 고드윈 가문은 에드워드의 즉위 이후 가장 약한 상태였으나, 1055년부터 1057년까지 연속된 사망으로 백작령의 통제가 완전히 바뀌었다. 1055년에 시워드가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은 노섬브리아를 지휘하기에는 너무 어리다고 여겨져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가 임명되었다. 1057년에 레오프릭과 랄프가 사망했고, 레오프릭의 아들 머시아 백작 앨프가르가 머시아 백작직을 계승했으며, 해럴드의 동생 기르트 고드윈슨이 앨프가르의 뒤를 이어 동앵글리아 백작이 되었다. 살아남은 네 번째 고드윈 형제인 레오프윈 고드윈슨은 해럴드의 영토를 분할하여 남동부의 백작직을 받았고, 해럴드는 그 보상으로 랄프의 영토를 받았다. 그리하여 1057년까지 고드윈 형제들은 머시아를 제외한 잉글랜드 전역을 종속적으로 통치했다. 에드워드가 이러한 변화를 승인했는지, 아니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점부터 그는 적극적인 정치에서 물러나 매일 교회에 참석한 후 사냥에 몰두한 것으로 보인다.
1065년 10월, 해럴드의 형제이자 노섬브리아 백작인 토스티그가 왕과 함께 사냥을 하고 있을 때, 노섬브리아 반란 (1065년)에서 그의 대귀족들이 그의 압제적인 통치에 반란을 일으켜 약 200명의 부하를 죽였다. 그들은 머시아 백작 에드윈의 형제인 모르카르를 백작으로 지명하고 남쪽으로 진군하는 데 동참할 것을 요청했다. 그들은 노샘프턴에서 해럴드를 만났고, 토스티그는 왕 앞에서 해럴드가 반란군과 공모했다고 비난했다. 토스티그는 왕과 왕비의 총애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반란을 진압할 것을 요구했지만, 해럴드나 다른 누구도 토스티그를 지지하며 싸우려 하지 않았다.
에드워드는 토스티그를 추방하는 데 굴복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굴욕은 그의 죽음으로 이어진 일련의 뇌졸중을 야기했을 수 있다. 그는 1065년에 실질적으로 완성된 새로운 웨스트민스터 교회의 봉헌식(12월 28일)에 참석하기에는 너무 쇠약했다.
4. 웨스트민스터 사원 건축
에드워드의 노르만인에 대한 호의는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큰 건축 사업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이는 잉글랜드 최초의 노르만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교회였다. 이 프로젝트는 1042년에서 1052년 사이에 왕실의 매장 교회로 시작되었으며, 1065년 12월 28일에 봉헌되었고, 그의 사망 후 1090년경에 완공되었다. 이 건물은 1245년 헨리 3세의 새로운 건물(현재의 건물)을 위해 철거되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같은 시기에 지어진 쥐미에주 수도원과 매우 유사했다. 로베르 드 쥐미에주가 두 건물 모두에 밀접하게 관여했을 것이 분명하지만, 어느 것이 원본이고 어느 것이 사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에드워드는 책이나 관련 예술에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의 수도원은 잉글랜드 로마네스크 건축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그가 혁신적이고 관대한 교회의 후원자였음을 보여주었다.
한국어 자료에 따르면, 에드워드는 노르망디 망명 도중 다시 왕위를 되찾게 된다면 로마로 순례를 가겠다고 하느님께 맹세했다고 한다. 즉위 후 그는 서약을 지키기 위해 로마 순례를 추진했으나, 당시 정국이 안정되지 못했음을 들어 대부분의 귀족들이 이를 반대했다. 이에 그는 당시 교황 레오 9세에게 조언을 구했고, 교황은 에드워드에게 로마 순례 비용으로 수도원을 짓고 빈민을 구제하는 것을 권유했다. 왕은 이에 따라 성당 부속으로 있던 수도원을 증축할 것을 지시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이다.
5. 왕위 계승 문제와 노르만 정복
12세기 초 맬름즈베리의 윌리엄 이래로,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의도에 대해 의문을 품어왔다. 한 학설은 에드워드가 윌리엄 정복왕을 항상 자신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는 노르만 측의 주장을 지지하며, 에드워드가 결혼 전에 이미 독신주의를 결정했다는 중세의 주장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그가 1051년 고드윈과의 불화가 있기 전까지는 적어도 에디스 사이에서 후계자를 낳기를 희망했다고 믿는다. 윌리엄 정복왕의 할아버지인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는 에드워드 참회왕의 어머니 노르망디의 엠마의 형제였으므로, 두 사람은 육촌 관계였고 혈연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윌리엄은 고드윈의 망명 기간 동안 에드워드를 방문했을 수 있으며, 이 시점에 윌리엄에게 왕위 계승을 약속했다고 여겨진다. 그러나 역사학자들은 그 약속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그리고 나중에 마음을 바꿨는지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에드먼드 아이언사이드의 아들 에드워드 유배자는 에드워드의 후계자로 고려될 가장 확실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 헝가리로 보내졌으며, 1054년 우스터 주교 에들레드는 하인리히 3세를 방문하여 그를 에드워드의 후계자로 삼으려는 의도로 그의 귀환을 확보했다. 에드워드 유배자는 1057년에 가족과 함께 잉글랜드로 돌아왔지만 거의 즉시 사망했다. 그의 아들 에드거 애셀링은 당시 약 6세였으며 잉글랜드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그는 '왕위에 합당한'이라는 의미의 애셀링이라는 칭호를 받았는데, 이는 에드워드가 그를 후계자로 고려했을 수 있음을 의미하며, 그는 1066년 해럴드 사망 후 잠시 왕으로 선포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거는 에드워드의 외교 문서 증인 목록에 없으며, 둠즈데이 북에도 그가 상당한 토지 소유자였다는 증거가 없어, 에드워드 통치 말기에 그가 소외되었음을 시사한다.
1050년대 중반 이후, 에드워드는 고드윈 가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정치에서 물러난 것으로 보이며, 그들 중 한 명이 자신을 계승할 것이라는 생각에 체념했을 수 있다. 노르만족은 에드워드가 1064년경 해럴드를 노르망디로 보내 윌리엄에게 왕위 계승 약속을 확인시켰다고 주장했다. 가장 강력한 증거는 노르만족 변호자 푸아티에의 윌리엄에게서 나온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에 해럴드가 윌리엄에게 사절을 보내 에드워드가 윌리엄에게 왕위를 약속했음을 인정하면서도, 에드워드의 임종 시 해럴드에게 한 약속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윌리엄은 임종 시 약속을 부인하지 않았지만, 에드워드가 자신에게 먼저 한 약속이 우선한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스티븐 백스터의 견해로는 에드워드의 "계승 문제 처리는 위험할 정도로 우유부단했으며, 잉글랜드인들이 겪었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에 기여했다."
에드워드가 후계자를 명확히 정하지 않고 사망한 것은 왕위 계승 분쟁으로 이어졌다. 결국 1066년 그가 사망하자 당시 잉글랜드 귀족들은 해럴드 고드윈슨을 왕으로 추대했다. 그러나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은 자신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며 잉글랜드를 침공했고, 1066년 10월 14일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 2세의 잉글랜드군을 격파하고 잉글랜드의 왕위에 오르면서 노르만 정복이 일어났다.
6. 죽음
에드워드는 1066년 1월 5일 웨스트민스터에서 사망하기 직전, 왕국을 해럴드와 에디스에게 맡겼을 것으로 보인다. 1월 6일, 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고, 같은 날 해럴드가 대관식을 치렀다.
7. 성인 추대와 숭배
교황 알렉산데르 3세는 1161년 2월 7일에 에드워드 참회왕을 시성했다. 그의 축일은 10월 13일과 1월 5일이며, 10월 13일은 잉글랜드 성공회의 소규모 축일로, 가톨릭교회의 잉글랜드 교구에서는 선택적인 기념일로 기념된다. 매년 10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그를 기리는 일주일간의 축제와 기도가 열린다. 그는 또한 어려운 결혼 생활의 수호성인으로도 여겨진다.
에드워드는 교황에 의해 시성된 유일한 잉글랜드 왕이지만, 그는 윈체스터의 이드버흐(에드워드 장로의 딸), 윌턴의 이디스(에드거 평화왕의 딸), 소년왕 에드워드 순교왕과 같은 (시성되지 않은) 앵글로색슨 왕실 성인들의 전통에 속했다. 격노하는 경향과 사냥을 즐기는 모습 때문에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참회왕을 성인으로 보지 않으며, 그의 시성을 정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그의 숭배가 너무 일찍 시작되어 신뢰할 만한 기반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에드워드는 교회 임명에 있어 세속적인 태도를 보였다. 1051년 로베르 드 쥐미에주를 캔터베리 대주교로 임명했을 때, 로베르의 후임 런던 주교로는 저명한 장인 스피어해포크를 선택했다. 로베르는 교황이 금지했다고 말하며 스피어해포크의 서품을 거부했지만, 스피어해포크는 에드워드의 지지를 받아 수개월 동안 주교직을 차지했다. 고드윈 가문이 나라를 떠난 후, 에드워드는 스피어해포크를 추방했고, 그는 에드워드의 왕관을 만들기 위해 받았던 상당량의 금과 보석을 가지고 도망쳤다. 스티간드는 거의 100년 만에 수도승이 아닌 첫 캔터베리 대주교였으며, 그는 캔터베리와 윈체스터를 겸임(복수 직위)했기 때문에 여러 교황으로부터 파문당했다고 전해진다. 스티간드의 직위가 불규칙했기 때문에 여러 주교들이 해외에서 서품을 구하기도 했다. 에드워드는 일반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부유한 주교직에 수도승보다는 성직자를 선호했으며, 주교직이나 수도원장직 후보자들로부터 선물을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의 임명은 전반적으로 존경할 만했다. 1056년 디어허스트의 오다가 후계자 없이 사망했을 때, 에드워드는 오다가 페르쇼어 수도원에 부여했던 토지를 압수하여 자신의 웨스트민스터 재단에 기부했다. 역사학자 앤 윌리엄스는 "참회왕은 11세기에는 나중에 누렸던 성스러운 명성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이는 주로 웨스트민스터 수도승들의 노력 덕분이었다"고 언급한다.
1066년 이후에는 성인 에드워드의 숭배가 침체되었는데, 아마도 초기 노르만 수도원장들이 이를 억제했기 때문일 수 있지만, 12세기 초에 점차 증가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수도원장인 클레어의 오스베르트는 사원의 부와 권력을 늘리기 위해 에드워드의 시성 운동을 시작했다. 1138년까지 그는 에드워드의 미망인이 의뢰했던 에드워드의 삶을 다룬 비타 에드워디 레지스를 전통적인 성인전으로 변형시켰다. 그는 에드워드와 에디스의 결혼이 순결했다는 모호한 구절을 활용하여, 에디스의 아이 없는 것이 그녀의 잘못이 아님을 암시하며 에드워드가 독신이었다고 주장했다. 1139년, 오스베르트는 스티븐 왕의 지지를 받아 에드워드의 시성을 청원하기 위해 로마로 갔으나,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완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스티븐은 교회와 불화가 있었기 때문에 교황 인노첸시오 2세는 에드워드의 성덕에 대한 충분한 증언이 부족하다며 결정을 연기했다.
1159년, 교황 선거에서 분쟁이 발생했고, 헨리 2세의 지지가 교황 알렉산데르 3세의 인정을 확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160년, 웨스트민스터의 새 수도원장 로렌스는 에드워드의 시성 주장을 다시 제기할 기회를 잡았다. 이번에는 왕과 잉글랜드 성직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고, 감사하는 교황은 1161년 2월 7일 시성 교서를 발표했다. 이는 웨스트민스터 사원, 헨리 2세, 알렉산데르 3세 교황의 이해관계가 결합된 결과였다. 그는 순교자는 아니지만 성스러운 삶을 살았다고 믿어진 사람을 의미하는 '참회왕'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230년대, 잉글랜드의 헨리 3세는 성 에드워드 숭배에 깊이 매료되었고, 매튜 패리스에게 새로운 성인전을 의뢰했다. 헨리 3세는 또한 1269년 재건된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에드워드를 위한 웅장한 새 무덤을 건설했다. 헨리 3세는 그의 장남인 에드워드의 이름을 에드워드 참회왕을 따서 지었다.
1350년경까지 에드먼드 순교왕, 그레고리오 대왕, 그리고 에드워드 참회왕은 잉글랜드의 국가 성인으로 여겨졌지만, 에드워드 3세는 더욱 전쟁적인 인물인 성 조지를 선호하여 1348년에 성 조지를 수호성인으로 하는 가터 훈장을 제정했다. 윈저성의 성 에드워드 참회왕 예배당은 성 조지에게 재봉헌되었고, 1351년 성 조지는 잉글랜드 민족의 수호성인으로 칭송받았다. 에드워드는 많은 사람들에게 덜 인기 있는 성인이었지만, 마지막 정당한 앵글로색슨 왕으로서 에드워드의 후계자임을 주장했던 노르만 왕조에게는 중요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성 에드워드 참회왕 성당은 1269년 10월 13일 헨리 3세에 의해 그의 유해가 성소 동쪽의 예배당으로 최종 이장된 이후 그 자리에 남아있다. 그의 유해 이장일인 10월 13일 (그의 첫 이장도 1163년 같은 날짜였다)은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구에서만 선택적인 기념일이다. 성 에드워드는 그의 사망 기념일인 1월 5일에도 기념될 수 있으며, 이 날짜는 로마 순교록에 기록되어 있다. 매년 10월,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는 그를 기리는 일주일간의 축제와 기도가 열린다. 에드워드는 또한 어려운 결혼 생활의 수호성인으로도 여겨진다.
8. 평가와 유산
에드워드 참회왕의 통치는 경건하고 성스러운 인물로 긍정적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정치적 약점과 귀족 세력과의 복잡한 관계로 인해 왕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노르만 정복의 배경을 마련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의 유산은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건축과 후대 잉글랜드 왕실에 미친 상징적 영향으로 현재까지 이어진다.
8.1. 긍정적 평가
에드워드 참회왕은 "참회왕"이라는 별칭처럼 경건하고 성스러운 인물로 존경받았다. 그는 순교하지 않고 성인적인 삶을 살았다고 여겨졌다. 그는 특히 웨스트민스터 사원 건설을 포함한 교회 후원자로서의 역할로 칭송받는다. 연대기 작가들은 그를 이상적인 왕으로 묘사하며, 노르만 정복 이전의 "자유로운 잉글랜드"와 그 법의 상징으로 여겼다. 잉글랜드의 헨리 3세와 이후의 군주들은 그의 유산을 소중히 여겼고, 아들들의 이름을 그를 따서 짓고 그의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8.2. 비판과 논란
역사학자들은 에드워드 참회왕의 통치 기간에 대해 의견이 엇갈린다. 비판적인 시각에서는 그의 통치가 잉글랜드 왕권의 해체를 초래했다고 본다. 그는 강력한 귀족들, 특히 고드윈 가문에 크게 의존했고, 이로 인해 왕실의 권위가 약화되었다. 역사학자 스티븐 백스터는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 문제에 대한 "위험할 정도로 우유부단한 처리"가 "잉글랜드인들이 겪었던 가장 큰 재앙 중 하나", 즉 노르만 정복에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일부 역사학자(프랭크 발로우, 피터 렉스)는 그를 정력적이고 수완이 좋으며 때로는 무자비한 성공적인 왕으로 묘사하지만, 그의 명성은 노르만 정복으로 인해 실추되었다. 리처드 모티머는 1052년 고드윈 가문이 망명에서 돌아온 사건이 "그의 실질적인 권력 행사의 효과적인 종말"을 의미했으며, 이는 "정치로부터의 철수"를 암시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한 뇌물을 받았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램지 수도원의 리베르 베네팩토룸에 따르면, 수도원장은 "어떤 강력한 인물"이 제기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다투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에드워드에게 금 20 마르크를, 그의 아내에게 5 마르크를 주어 유리한 판결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노르만인들을 신뢰한 것이 노르만 정복의 기반을 닦았다는 비판도 있다. 일본어 자료에서는 그를 "유약하고 무위무책"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8.3. 영향
에드워드 참회왕의 통치와 생애는 후대 잉글랜드 역사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그가 시작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은 잉글랜드 최초의 노르만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의 교회로서 잉글랜드 로마네스크 건축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헨리 3세 이후 잉글랜드의 왕들은 에드워드의 교회인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대관식을 거행했으며, 그들은 비록 에드워드 참회왕에게 직접적으로 귀속될 수 있는 특정한 법률이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참회왕의 법"을 지키겠다고 맹세했다. 헨리 3세는 그의 장남의 이름을 에드워드로 지으며 그의 유산을 왕실 혈통에 이어나갔다. 노르만 왕조 또한 자신들이 마지막 정당한 앵글로색슨 왕인 에드워드의 후계자임을 주장하며 그를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에드워드 참회왕은 노르만 정복으로 이어지는 사건들과 깊이 얽혀 있으며, 후대의 잉글랜드 역사와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상징적이고 실질적인 영향을 미쳤다.
9. 개인 생활 및 성격
비타 에드워디 레지스는 그의 외모를 "매우 적절한 몸매의 남자-뛰어난 키, 우윳빛 흰 머리카락과 수염, 풍만한 얼굴과 장밋빛 뺨, 가늘고 흰 손, 길고 투명한 손가락으로 구별되며; 몸의 나머지 부분은 흠 없는 왕실의 인물이었다"고 묘사한다.
그의 성격에 대해서는 "쾌적하면서도 항상 위엄 있었고, 눈을 아래로 깔고 걸었으며, 누구에게나 매우 상냥하고 다정했다. 어떤 일이 그의 분노를 자극하면 사자처럼 무시무시해 보였지만, 그는 결코 비난으로 자신의 분노를 드러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자 리처드 모티머는 이러한 묘사가 "키 크고 뛰어난, 다정하고 위엄 있으며 공정한 이상적인 왕의 명백한 요소들을 아첨하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고 언급한다.
에드워드는 뇌물을 받는 것에 개의치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램지 수도원의 리베르 베네팩토룸에 따르면, 수도원장은 "어떤 강력한 인물"이 제기한 주장을 공개적으로 다투는 것이 위험하다고 판단했지만, 에드워드에게 금 20 마르크를, 그의 아내에게 5 마르크를 주어 유리한 판결을 얻어낼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책이나 관련 예술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개인적인 경건함은 중요하게 여겨지지만, 역사학자들은 후대에 이상화된 측면이 있음을 지적한다. 후대 기록에서는 그가 독신이었다고 시사하지만,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적어도 1051년 고드윈과의 불화가 있기 전까지는 에디스 사이에서 후계자를 낳기를 희망했다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