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초기 및 즉위
에그버트는 혼란스럽고 복잡했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정치적 격동기 속에서 성장했으며, 젊은 시절 망명 생활을 통해 통치자로서의 자질을 기르고 웨식스 왕위에 올랐다.
1.1. 가족 및 혈통
역사학자들은 에그버트의 혈통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가장 초기 판본인 『파커 연대기』는 에그버트의 아들 애설울프의 혈통을 에그버트, 앨흐문드(켄트 왕 앨흐문드로 추정), 그리고 다른 알려지지 않은 에아파와 에오파를 거쳐 726년 퇴위한 웨식스 왕 이네의 형제인 잉길드까지 추적한다. 나아가 웨식스 가문의 창시자인 체르디치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가 프랭크 스텐턴은 에그버트가 잉길드의 후손이라는 점은 받아들였으나, 체르디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초기 계보는 신뢰하지 않았다. 헤더 에드워즈는 에그버트가 켄트 출신이며 웨스트 색슨 혈통 주장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조작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로리 나이스미스는 켄트 출신 가능성이 낮고, "에그버트가 좋은 웨스트 색슨 왕족 혈통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보았다.
에그버트의 아내의 이름은 알려져 있지 않다. 옥스퍼드 대학교에 소장된 15세기 연대기에는 그녀의 이름이 레드부르가(Redburga레드부르가영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녀가 에그버트가 프랑키아로 추방되었을 때 결혼한 샤를마뉴의 친척으로 추정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학술 역사가들은 이 기록이 후대에 작성된 점을 들어 이를 기각하고 있다. 애설울프는 에그버트 부부의 유일하게 알려진 자녀이다.
에그버트에게는 윌턴 수도원을 설립한 공로로 성인으로 시성된 이복 누이 앨부르가(Alburga앨부르가영어)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앨부르가는 윌트셔의 얼더먼 울프스탄과 결혼했고, 802년 울프스탄 사망 후 수녀가 되어 윌턴 수도원의 수도원장이 되었다.
1.2. 정치적 배경과 망명
757년부터 796년까지 통치한 오파 머시아 왕은 8세기 후반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지배적인 세력이었다. 757년부터 786년까지 웨식스 왕이었던 키네울프와 오파의 관계는 잘 문서화되어 있지 않지만, 키네울프는 머시아의 지배로부터 어느 정도 독립성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772년 오파의 헌장에는 키네울프가 "웨스트 색슨인의 왕"으로 등장하고, 779년에는 벤싱턴 전투에서 오파에게 패배했지만, 키네울프가 오파를 최고 군주로 인정한 기록은 없다. 오파는 잉글랜드 남동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764년 헌장은 그가 켄트의 헤아흐베르트와 함께 있었음을 보여주며, 이는 오파의 영향력이 헤아흐베르트의 즉위를 도왔음을 시사한다. 765년에서 776년 사이 오파의 켄트 통제 범위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776년부터 784년경까지 켄트 왕들은 머시아로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에그버트인 켄트의 에그버트 2세는 770년대 내내 켄트를 통치했으며, 779년 로체스터의 토지 하사 헌장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다. 784년에는 켄트의 새로운 왕 앨흐문드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등장한다. 여백의 주석에 따르면 "이 앨흐문드 왕은 에그버트(웨식스의 에그버트)의 아버지였고, 에그버트는 애설울프의 아버지였다." 이는 『연대기』의 A본문 서문에서도 에그버트의 아버지 이름이 앨흐문드라고 언급됨으로써 뒷받침된다. 서문은 9세기 후반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며, 여백 주석은 켄트 판본인 『연대기』 F사본에 있는데, 이 사본은 1100년경의 것이다.
앨흐문드는 오래 권력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784년 이후 그의 활동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780년대 후반 오파가 켄트를 지배했다는 광범위한 증거가 있으며, 그의 목표는 단순한 최고 군주권을 넘어 왕국을 완전히 합병하는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켄트 왕들의 경쟁자이지 최고 군주가 아니었다"고 묘사되기도 했다. 젊은 에그버트는 785년경 웨식스로 망명했을 가능성이 있는데, 『연대기』가 나중에 베오르트리치(키네울프의 후계자)가 오파를 도와 에그버트를 추방했다고 언급하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키네울프는 786년에 암살되었다. 그의 후계는 에그버트에 의해 다투어졌으나, 그는 베오르트리치에게 패배했는데, 이는 아마 오파의 도움을 받았을 것이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그버트가 왕이 되기 전 3년 동안 프랑키아에서 베오르트리치와 오파에 의해 추방당했다고 기록한다. 본문에는 "iii"(3)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서기관의 오류일 수 있으며, 정확한 판독은 "xiii"(13)일 수 있다. 베오르트리치의 통치는 16년이었지 13년은 아니었다. 『연대기』의 모든 현존 사본은 "iii"에 동의하지만, 많은 현대 기록은 에그버트가 실제로 13년 동안 프랑키아에서 보냈다고 가정한다. 이는 필사 오류가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모든 사본에 공통적이라는 가정을 필요로 한다. 많은 역사가들이 이 가정을 하지만, 일부는 자료의 일관성을 고려할 때 가능성이 낮다고 이를 거부한다. 어느 쪽이든 에그버트는 아마도 789년, 그의 경쟁자인 베오르트리치가 오파 머시아 왕의 딸과 결혼했을 때 추방되었을 것이다.
에그버트가 망명해 있던 시기에 프랑키아는 샤를마뉴가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는 노섬브리아에 프랑크족의 영향력을 유지했고, 남부에서 오파의 적들을 지원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 갈리아에 있던 또 다른 망명객은 사제 오드베르트(Odberht오드베르트영어)였는데, 그는 나중에 켄트 왕이 된 에아드베르트와 거의 확실히 동일 인물이다. 후대 연대기 작가인 윌리엄 말름즈베리에 따르면, 에그버트는 갈리아에 머무는 동안 통치 기술을 배웠다고 한다.
1.3. 웨식스 왕국 즉위
베오르트리치의 머시아 의존성은 오파 사망 몇 달 후 머시아 왕이 된 센울프의 통치까지 이어졌다. 베오르트리치는 802년에 사망했으며, 에그버트는 웨식스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는 아마 샤를마뉴와 교황청의 지원을 받았을 것이다. 머시아인들은 계속해서 에그버트에게 저항했다. 그가 즉위한 날, 원래는 독립된 왕국이었으나 당시에는 머시아의 일부였던 흐위체족은 그들의 얼더먼(Ealdorman) 애설문드의 지휘 아래 웨식스를 공격했다. 웨식스의 얼더먼 웨오흐스탄(Weohstan웨오흐스탄영어)은 윌트셔 출신 병사들과 함께 그들을 맞이했다. 15세기 문헌에 따르면 웨오흐스탄은 에그버트의 누이 앨부르가와 결혼했으므로 에그버트의 처남이었다. 흐위체족은 패배했지만 웨오흐스탄과 애설문드 모두 전사했다. 이 전투 이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에그버트와 머시아의 관계에 대한 추가 기록은 없다. 에그버트가 자신의 국경 밖에서는 영향력이 없었겠지만, 센울프의 종주권을 인정한 증거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센울프는 남부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에 대한 종주권을 가지고 있었지만, 웨식스 왕국의 독립성 때문에 센울프의 헌장에는 "남부 잉글랜드의 최고 군주"라는 칭호가 나타나지 않는다.
815년,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에그버트가 당시 코른월에 해당하던 서부 웨일스인의 땅이자 마지막 브리튼 왕국인 둠노니아의 모든 영토를 황폐화시켰다고 기록한다. 10년 후인 825년 8월 19일자 헌장은 에그버트가 다시 둠노니아에서 원정 중이었음을 나타내는데, 이는 823년 가풀포드 전투에서 데번인과 코른월 브리튼인 사이에 벌어진 전투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
2. 세력 확장과 패권 확립
에그버트의 통치 기간 동안 웨식스 왕국은 군사적 승리와 전략적 확장을 통해 잉글랜드 남부의 지배적인 세력으로 부상하며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립했다.
2.1. 초기 웨식스 통치

에그버트가 왕위에 오른 후 첫 20년간은 주로 웨식스 왕국의 내실을 다지고 주변 지역으로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기였다. 이 기간 동안 에그버트는 머시아의 지배력에 대한 웨식스의 독립을 유지하는 데 주력했다. 이는 당시 잉글랜드 남부의 다른 왕국들을 압도하던 머시아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지 않기 위한 중요한 노력으로 평가된다.
특히 815년, 에그버트는 당시 웨일스 서부로 불리던 브리튼계 왕국인 둠노니아(오늘날의 콘월 지역에 해당)를 침략하여 초토화시켰다. 이 원정은 웨식스의 서쪽 국경을 확장하고 브리튼계 주민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으로 수행되었다. 또한 823년 데번 주민과 코른월 브리튼인들 사이에 벌어진 가풀포드 전투는 에그버트의 지속적인 둠노니아 지역 개입과 관련이 있을 수 있으며, 825년 8월 19일의 헌장은 그가 다시 둠노니아에서 원정 중이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초기 군사 활동은 에그버트가 웨식스의 안정화를 넘어 영토 확장에 적극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2.2. 엘랜던 전투와 동남부 정복
825년은 앵글로색슨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전투 중 하나인 엘랜던 전투가 벌어진 해로, 에그버트가 머시아의 베오른울프를 격파한 이 전투는 잉글랜드 남부에 대한 머시아의 지배가 종식되었음을 알리는 전환점이었다. 『연대기』는 에그버트가 승리 후 어떻게 행동했는지 기록한다. "그는 그의 아들 애설울프와 주교 에알스탄(Ealhstan에알스탄영어), 그리고 얼더먼 울프헤아르드(Wulfheard울프헤아르드영어)를 대규모 병력과 함께 켄트로 보냈다." 애설울프는 켄트의 왕 발드레드를 템스강 너머 북쪽으로 몰아냈고, 『연대기』에 따르면 켄트, 에식스, 서리, 서식스의 주민들은 "이전에는 그의 친척들로부터 잘못 강제로 분리되었기 때문에" 모두 애설울프에게 복속했다. 이는 에그버트의 아버지 앨흐문드가 왕이 되었을 때 오파가 켄트에 개입했던 것을 언급하는 것일 수 있으며, 만약 그렇다면 연대기 작가의 언급은 앨흐문드가 잉글랜드 남동부 다른 지역에도 연고가 있었음을 시사할 수 있다.
『연대기』의 사건 기록은 발드레드가 전투 직후 쫓겨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826년 3월 날짜가 기입된 켄트의 문서가 남아 있는데, 이는 베오른울프 통치 3년째 되는 해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이 날짜에도 베오른울프가 발드레드의 종주로서 켄트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에식스에서는 에그버트가 시게레드(Sigered시게레드영어) 왕을 축출했는데, 그 날짜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829년까지 미뤄졌을 수 있다. 이는 후대 연대기 작가가 그 해 에그버트의 머시아 원정과 축출을 연관 짓기 때문이다.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엘랜던 전투의 공격자가 누구였는지 명시하지 않지만, 최근 한 역사서는 베오른울프가 거의 확실하게 공격자였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베오른울프는 825년 여름 웨식스의 둠노니아 원정을 기회로 삼았을 수 있다. 베오른울프가 공격을 감행한 동기는 남동부 지역의 불안정이나 소요 사태의 위협이었을 것이다. 켄트와의 왕조적 연결은 웨식스를 머시아 지배에 대한 위협으로 만들었다.
엘랜던 전투의 결과는 남동부에서 머시아의 즉각적인 권력 상실을 넘어섰다. 『연대기』에 따르면, 이스트앵글리아인들은 같은 해인 825년(실제로는 다음 해였을 수 있음) 머시아인들에 대한 에그버트의 보호를 요청했다. 826년 베오른울프는 이스트앵글리아를 침공했는데, 아마도 그의 종주권을 회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전사했고, 그의 후계자인 루데카도 같은 이유로 827년 이스트앵글리아를 침공했다가 전사했다. 머시아인들은 켄트로부터 지원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캔터베리 대주교 울프레드(Wulfred울프레드영어)가 웨스트 색슨의 통치에 불만을 품고 있을 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에그버트가 울프레드의 통화 발행권을 종료하고 로체스터와 캔터베리에서 자신만의 화폐를 주조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에그버트가 캔터베리 소유의 재산을 압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스트앵글리아의 결과는 머시아인들에게 재앙이었으며, 남동부에서 웨스트 색슨의 권력을 확고히 했다.
2.3. 머시아 정복과 브레트왈다 칭호

829년, 에그버트는 머시아를 침공하여 위글라프 머시아 왕을 추방했다. 이 승리로 에그버트는 런던 조폐소를 통제하게 되었고, 머시아의 왕으로서 주화를 발행했다. 이 승리 이후, 웨스트 색슨 서기관은 『앵글로색슨 연대기』의 유명한 구절에서 그를 '브레트왈다'(bretwalda영어 (고대), '광역 통치자' 또는 '브리튼 통치자')로 묘사했다. 『연대기』의 C 사본에 있는 해당 연대기 기록은 다음과 같다.
> ⁊ þy geare geeode Ecgbriht cing Myrcna rice ⁊ eall þæt be suþan Humbre wæs, ⁊ he wæs eahtaþa cing se ðe Bretenanwealda wæs.영어 (고대)
> (현대 영어 번역: And the same year King Egbert conquered the kingdom of Mercia, and all that was south of the Humber, and he was the eighth king who was 'Wide-ruler'.)
> (한국어 번역: 같은 해 에그버트 왕은 머시아 왕국과 험버 강 남쪽의 모든 것을 정복했으며, 그는 '광역 통치자'였던 여덟 번째 왕이었다.)
이전에 언급된 7명의 '브레트왈다'들은 연대기 작가에 의해 이름이 명시되는데, 이들은 베다가 `imperium`을 가졌다고 열거한 7명(엘레 오브 서식스에서 노섬브리아의 오스위까지)과 일치한다. 이 목록은 펜다와 오파 같은 일부 지배적인 머시아 왕들을 누락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으로 종종 간주된다. '브레트왈다' 칭호의 정확한 의미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왔다. 이는 "찬사적 시의 용어"로 묘사되기도 했지만, 확실한 군사적 리더십의 역할을 의미했다는 증거도 있다.
829년 후반, 『앵글로색슨 연대기』에 따르면 에그버트는 셰필드 교외인 도어에서 노섬브리아인들의 복종을 받아냈다. 당시 노섬브리아 왕은 아마도 에안레드였을 것이다. 후대 연대기 작가인 로저 오브 웬도버에 따르면, 에그버트는 에안레드가 복종하기 전에 노섬브리아를 침공하여 심하게 약탈했다고 한다. "에그버트가 모든 남부 왕국들을 얻은 후, 그는 대군을 이끌고 노섬브리아로 들어가 심한 약탈로 그 지방을 황폐하게 만들었고, 에안레드 왕에게 조공을 바치게 했다." 로저 오브 웬도버는 그의 기록에 노섬브리아 연대기를 통합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연대기』에는 이러한 사건들이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에안레드의 복종의 성격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어 왔는데, 한 역사가는 도어에서의 만남이 주권의 상호 인정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더 높다고 제안했다.
830년, 에그버트는 웨일스인들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이끌었는데, 이는 거의 확실하게 이전에 머시아의 영향권 내에 있던 웨일스 지역으로 웨스트 색슨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였다. 이는 에그버트의 영향력의 정점을 찍은 사건이었다.
2.4. 노섬브리아 복속 및 웨일스 원정
829년, 에그버트는 북쪽으로 원정하여 도어(현재 셰필드 교외)에서 노섬브리아 왕 에안레드의 복속을 받아냈다. 일부 기록은 에그버트가 노섬브리아를 침공하고 약탈한 후에야 에안레드가 조공을 바치며 복종했다고 전하지만, 『앵글로색슨 연대기』는 이러한 무력 충돌을 명시하지 않으며, 일부 학자들은 도어에서의 만남이 상호 주권 인정을 위한 것이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또한 830년, 에그버트는 웨일스에 대한 성공적인 원정을 감행했다. 이는 이전에 머시아의 영향권에 있던 웨일스 지역으로 웨식스의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의도였으며, 이 시기가 에그버트의 지배력이 최정점에 달했던 때로 평가된다. 이러한 일련의 군사적 성공을 통해 에그버트는 잉글랜드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의 위상을 확립하고, 웨식스를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최강국으로 만들었다.
3. 위기 및 통제력 감소
에그버트의 통치 후반기는 이전의 광범위한 지배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으며, 이는 머시아의 재독립과 바이킹 침략이라는 새로운 위협으로 나타났다.
3.1. 머시아의 독립 재확보
830년, 머시아는 위글라프의 통치 아래 독립을 되찾았다. 『연대기』는 단순히 위글라프가 "다시 머시아 왕국을 얻었다"고만 기록하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은 이것이 웨식스 통치에 대한 머시아인의 반란의 결과였다는 것이다. 에그버트의 남부 잉글랜드에 대한 지배력은 위글라프가 권력을 회복하면서 막을 내렸다. 위글라프의 복귀 이후 그의 웨식스 독립 증거들이 나타난다. 헌장들은 위글라프가 미들섹스와 버크셔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며, 836년 헌장에서 위글라프는 캔터베리 대교구의 주교좌 소속 11명의 주교(웨스트 색슨 영토의 주교 포함)를 포함하는 집단을 묘사할 때 "나의 주교들, 공작들, 행정관들"이라는 문구를 사용한다. 위글라프가 여전히 그러한 유력자 집단을 소집할 수 있었다는 것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웨스트 색슨인들은 그렇게 할 수 있었더라도 그러한 공의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위글라프는 왕위를 되찾은 후 몇 년 동안 에식스를 머시아의 영향권으로 되돌렸을 수도 있다. 이스트앵글리아에서는 에설스탄(Æthelstan에설스탄영어) 왕이 이르면 827년에 주화를 주조했을 수 있지만, 위글라프가 머시아에서 권력을 되찾아 에그버트의 영향력이 줄어든 830년경에 주조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이스트앵글리아 측의 이러한 독립 시위는 놀라운 일이 아닌데, 에설스탄이 베오른울프와 루데카 모두의 패배와 사망에 책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820년대 후반 웨식스의 갑작스러운 권력 상승과 이후 이 지배적 위치를 유지하는 데 실패한 이유는 역사가들이 근본 원인을 찾는 데 주목해왔다. 이 시기 사건들에 대한 한 가지 그럴듯한 설명은 웨식스의 운명이 어느 정도 카롤링거 제국의 지원에 의존했다는 것이다. 프랑크족은 808년에 노섬브리아의 왕위를 되찾은 에아르둘프를 지원했으므로, 802년 에그버트의 즉위를 지원했을 가능성이 크다. 839년 부활절, 에그버트가 사망하기 얼마 전, 그는 프랑크족의 왕 경건왕 루이와 접촉하여 로마로 안전한 통행을 준비했다. 따라서 9세기 전반 남부 잉글랜드 정치에서 프랑크족과의 지속적인 관계는 중요한 부분이었다.
카롤링거의 지원은 에그버트가 820년대 후반의 군사적 성공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된 요인 중 하나였을 수 있다. 그러나 820년대 또는 830년대에 라인강 및 프랑크족의 상업 네트워크가 붕괴되었고, 또한 830년 2월 경건왕 루이에 대한 반란이 발생했는데, 이는 830년대 이후 계속된 일련의 내부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러한 혼란은 루이가 에그버트를 지원하는 것을 방해했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프랑크족의 영향력 철수는 이스트앵글리아, 머시아, 웨식스가 외부의 도움에 의존하지 않는 세력 균형을 찾게 만들었다.
지배력 상실에도 불구하고, 에그버트의 군사적 성공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웨식스는 남동부 왕국들(에식스 제외 가능성 있음)에 대한 통제권을 유지했으며, 머시아는 이스트앵글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지 못했다. 에그버트의 승리는 켄트와 서식스 왕국의 독립적 존재가 끝났음을 의미했다. 정복된 영토는 얼마 동안 서리 및 아마도 에식스를 포함한 종속 왕국으로 관리되었다. 애설울프는 에그버트 휘하의 종속왕이었지만, 그가 자신의 왕실을 유지하며 왕국을 순회했던 것은 분명하다. 켄트에서 발행된 헌장들은 에그버트와 애설울프를 "웨스트 색슨인과 켄트인의 왕"으로 묘사했다. 애설울프가 858년에 사망했을 때, 그의 유언장(웨식스를 한 아들에게, 남동부 왕국을 다른 아들에게 남김)은 858년 이후에야 왕국들이 완전히 통합되었음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러나 머시아는 여전히 위협이었다. 켄트의 왕으로 자리 잡은 에그버트의 아들 애설울프는 캔터베리의 크라이스트 처치에 영지를 하사했는데, 이는 머시아인들이 그곳에 여전히 가질 수 있는 영향력을 상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3.2. 바이킹 및 콘월 지역과의 충돌

잉글랜드에 대한 바이킹의 침략은 793년 린디스판 약탈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에그버트의 통치 후반기에는 더욱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836년, 에그버트는 카햄턴 전투에서 데인인들에게 패배했지만, 838년 콘월의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데인인들과 그들의 동맹인 서부 웨일스 연합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둠노니아의 왕실 혈통이 이후에도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브리튼계 왕국 중 하나의 독립이 이 시점에 종식되었다고 볼 수 있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앵글로색슨족의 콘월 확장에 대한 세부 기록은 매우 빈약하지만, 일부 지명에서 증거를 찾을 수 있다. 론세스턴 근처에서 타마르 강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오터리 강은 경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오터리 강 남쪽의 지명은 압도적으로 콘월어 영향을 받지만, 북쪽은 새로 온 잉글랜드 이주민들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4. 계승과 죽음
에그버트는 왕국을 통합하고 아들의 안정적인 왕위 계승을 위해 노력했으며, 그의 죽음 이후에도 웨식스 왕국의 중요성은 계속되었다.
4.1. 왕위 계승 준비
838년 킹스턴 어폰 템스에서 열린 공의회에서 에그버트와 애설울프는 애설울프의 왕위 주장에 대한 지지를 약속받는 대가로 윈체스터와 캔터베리의 주교좌에 토지를 하사했다. 캔터베리 대주교 케올노트는 또한 에그버트와 애설울프를 케올노트의 통제 아래 있는 수도원들의 군주이자 보호자로 인정했다. 이 합의들, 그리고 애설울프가 교회의 특권을 확인해 준 후대 헌장은 교회가 웨식스가 새로운 정치 세력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했음을 시사한다. 성직자들은 대관식에서 왕을 성별했고, 왕의 상속자를 지정하는 유언장 작성에 도움을 주었다. 그들의 지원은 웨스트 색슨 통제를 확립하고 에그버트 가문의 원활한 계승을 보장하는 데 실질적인 가치를 지녔다. 킹스턴 공의회 기록과 그 해의 또 다른 헌장은 동일한 문구를 포함하고 있다. 이는 하사의 조건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상속인들은 이후 영원히 케올노트 대주교와 그의 크라이스트 처치 공동체로부터 확고하고 흔들림 없는 우정을 가질 것"이라는 것이다.
왕위에 대한 다른 경쟁자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지만, 웨식스의 모든 왕들의 조상으로 여겨지는 체르디치의 다른 살아남은 후손들이 왕국을 다투었을 가능성이 높다.
4.2. 죽음과 매장
에그버트는 839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자연사로 추정된다. 그의 유언은 그의 손자 알프레드 대왕의 유언에 남아 있는 기록에 따르면, 재산이 결혼을 통해 왕실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오직 가족의 남성 구성원에게만 땅을 남겼다. 정복을 통해 얻은 에그버트의 부는 의심할 여지 없이 그가 남동부 교회 세력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였으며, 그의 유언의 절약 정신은 그가 왕에게 개인적인 부의 중요성을 이해했음을 보여준다. 웨식스의 왕위는 왕가의 다른 분파들 사이에서 자주 다투어졌으며, 에그버트가 애설울프의 무탈한 계승을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업적이다. 또한, 에그버트의 남동부 정복으로 형성된 종속 왕국에서의 왕권 경험은 애설울프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귀중한 자산이 되었을 것이다.
에그버트는 윈체스터에 매장되었으며, 그의 아들 애설울프, 손자 알프레드 대왕, 증손자 에드워드 장로도 그곳에 매장되었다. 9세기에 윈체스터는 도시화의 징후를 보이기 시작했고, 일련의 매장지들은 윈체스터가 웨스트 색슨 왕가에 의해 높이 평가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노르만 정복 이후 윈체스터 대성당이 건설되면서 에그버트의 유해는 발굴되어 성 스위틴 제단 근처에 재매장되었다. 17세기 잉글랜드 내전 기간 동안 올리버 크롬웰의 병사들이 에그버트의 뼈를 사용하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문을 파괴하는 데 사용했으며, 이 과정에서 그의 유해는 다른 앵글로색슨 왕들과 주교, 그리고 윌리엄 루퍼스의 유해와 뒤섞이게 되었다. 이후 고고학자들은 유골이 섞인 석관들을 조사했다.
5. 유산과 역사적 평가
에그버트의 통치는 잉글랜드 역사에 깊은 흔적을 남겼으며, 그의 업적은 훗날 잉글랜드 통일 왕국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평가되지만, 그의 지배력에는 분명한 한계도 존재했다.
5.1. 잉글랜드 통일의 기틀 마련
에그버트는 엘랜던 전투에서의 승리를 통해 머시아의 패권을 종식시키고 잉글랜드 남동부 지역에 대한 웨식스의 통제권을 확립했다. 이후 머시아를 일시적으로 직접 통치하고 노섬브리아 왕의 복속을 받아냄으로써, 그는 '브레트왈다'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는 단순한 군사적 리더십을 넘어 잉글랜드 남부의 실질적인 지배자로서의 그의 위상을 보여준다. 비록 그의 지배가 일시적인 측면이 있었고, 애설스탠이 최초의 '잉글랜드 왕'으로 불리지만, 에그버트는 웨식스의 세력을 확장하고 잉글랜드 남부를 통합함으로써 훗날 잉글랜드 통일 왕국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그의 후손들은 1013년까지 웨식스 왕위와 이후 통일 잉글랜드 전체를 지속적으로 통치했으며, 이는 에그버트가 확립한 웨식스의 위상이 장기적으로 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의 군사적 성공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정치적 지형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켰다.
5.2. 비판과 한계
에그버트의 통일은 여러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830년 위글라프가 머시아의 왕위를 되찾으면서 에그버트의 직접적인 머시아 지배는 단명으로 끝났다. 이는 그의 '통일'이 완전한 통합 왕국이라기보다는 여러 왕국에 대한 일시적인 종주권에 가까웠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통치 기간 내내 바이킹의 침략은 지속적인 위협이었으며, 836년 카햄턴에서의 패배는 웨식스조차 바이킹의 공격에 취약했음을 드러냈다. 비록 838년 힝스턴 다운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바이킹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제거하지는 못했다. 켄트와 서식스 같은 왕국들이 웨식스에 흡수되기는 했지만, 이들 지역이 웨식스 왕국에 완전히 통합된 것은 에그버트 사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따라서 그의 통일은 광범위한 영향력을 확립했지만, 잉글랜드 전체를 단일한 행정 체계 아래 완전히 통합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