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와 남북전쟁 이전 경력
1.1. 출생과 교육
어빈 맥다월은 오하이오주 콜럼버스에서 에이브럼 어빈 맥다월과 엘리자 셀던 맥다월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잉글랜드 및 스코틀랜드-아일랜드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 맥다월은 존 뷰포드의 사촌이었으며, 그의 형제인 존 애데어 맥다월은 남북전쟁 중 제6아이오와 자원보병연대의 첫 번째 대령으로 복무했다. 맥다월은 1818년 10월 15일에 태어났다. 그는 처음 프랑스의 트로이 대학교에 다녔으며, 이후 1838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웨스트포인트에서 그의 동급생 중 한 명은 훗날 제1차 불런 전투에서 그의 적수가 될 P. G. T. 보우리가드였다.
1.2. 초기 군사 복무
육군사관학교 졸업 후 맥다월은 소위로 임관하여 제1미국포병연대에 배속되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에서 전술 교관으로 근무했으며, 이후 미국-멕시코 전쟁 중 존 E. 울 장군의 부관을 지냈다. 그는 부에나 비스타 전투에서 명예 대위로 승진했고, 전쟁 후에는 부관감 부서에서 복무했다. 이 부서에서 그는 1856년 5월 31일 소령으로 진급했다. 1848년부터 1861년까지 맥다월은 주로 고위 군 지휘관의 참모 장교로 복무하면서 병참 및 군수 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그는 윈필드 스콧 장군의 참모로 근무하면서 그와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훗날 남군 장군이 되는 조지프 E. 존스턴 휘하에서도 복무한 경험이 있다.
2. 미국 남북전쟁
2.1. 북동 버지니아군 지휘

맥다월은 1861년 5월 14일 정규군의 준장으로 승진했으며, 5월 27일에는 북동 버지니아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승진은 그의 후원자였던 미국 재무부 장관 새먼 P. 체이스의 영향력 덕분이었다. 맥다월은 자신의 부대가 경험이 부족하고 전투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자신은 보급 장교이지 야전 지휘관이 아니라고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워싱턴 D.C.의 정치인들로부터의 압력으로 인해 북버지니아의 남부 연합군에 대한 시기상조의 공격을 감행해야 했다. 맥다월은 북동 버지니아군 지휘관에 임명되면서 큰 정치적 압력에 직면했다. 그의 부대는 훈련이 부족하고 전투 경험이 전무한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의 정치적 요구는 조속한 공세를 촉구했다. 맥다월은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지휘 능력과 병력의 준비 상태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지만, 결국 전투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
2.2. 제1차 불런 전투
제1차 불런 전투에서 맥다월의 전략은 창의적이었으나 야심적이고 복잡했다. 그의 병사들은 이 복잡한 전략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만큼 경험이 많지 않았고, 이는 당혹스러운 패주로 이어졌다. 이 전투는 남북전쟁 최초의 대규모 회전이었으며, 북군에게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주었다. 맥다월은 이 패배로 인해 큰 비난을 받았다.
2.3. 이후의 남북전쟁 지휘
불런에서의 패배 이후, 소장 조지 B. 매클레런이 워싱턴을 방어하는 새로운 북군인 포토맥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맥다월은 포토맥군의 사단 지휘관이 되었다. 1862년 3월 14일,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군대를 군단으로 재편성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맥다월은 제1군단의 지휘권을 맡았으며 자원군 소장으로 승진했다. 포토맥군이 4월에 버지니아 반도로 향할 때, 맥다월의 부대는 스톤월 잭슨의 셰넌도어 계곡 전역 활동에 대한 우려 때문에 래퍼핸녹 강 지역에 배치되었다. 맥다월의 40,000명 병력은 워싱턴을 방어하기 위해 후방에 남겨졌고, 훗날 한 사단은 반도로 파견되었다.
결국, 맥다월, 존 C. 프레몬트, 너새니얼 P. 뱅크스 장군들의 세 독립적인 지휘권은 존 포프 소장의 버지니아군으로 통합되었고, 맥다월은 그 군대의 제3군단을 이끌었다.
2.4. 논란과 지휘 평가
맥다월은 시더 산 전투에서의 공로로 정규군 명예 소장으로 승진했지만, 이어진 제2차 불런 전투에서의 참사로 인해 비난을 받았다. 맥다월은 자신의 부대원들로부터도 적과 내통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널리 미움을 샀다. 그는 이 전투에서 명령 불복종 혐의로 군법회의에 회부된 피츠 존 포터 소장에 대해 증언함으로써 책임을 면했다. 포프와 맥다월은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맥다월은 전쟁이 끝난 후 자신은 여전히 장군으로 남을 것이고 포프는 대령 계급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점을 알았기 때문에 포프 휘하에서 복무하는 것을 용인했다. 공식적으로는 책임에서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맥다월은 이후 2년 동안 새로운 임무를 부여받지 못했다.
2.4.1. 제2차 불런 전투와 피츠 존 포터 재판
1879년,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이 위촉한 심의 위원회가 피츠 존 포터에 대한 사면을 권고하는 보고서를 발표했을 때, 제2차 불런 전투의 패배 책임의 상당 부분이 맥다월에게 귀속되었다. 이 보고서에서 맥다월은 우유부단하고, 의사소통이 부족하며, 무능한 인물로 묘사되었다. 그는 포터의 정보 요청에 반복적으로 응답하지 않았고,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위치에 대한 정보를 포프에게 전달하지 않았으며, 군법에 따라 자신의 의무였던 북군 좌익 지휘를 소홀히 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이러한 내용은 맥다월의 지휘 방식과 전투 결과에 대한 비판적 평가의 핵심을 이룬다.
3. 남북전쟁 이후 경력과 은퇴
3.1. 전후 군사 임무
1864년 7월, 맥다월은 태평양 방면군의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1865년 7월 27일부터 1868년 3월 31일까지 캘리포니아 방면군을 지휘했고, 잠시 제4군관구를 지휘했으며, 1868년 7월 16일부터 1872년 12월 16일까지 동부 방면군을 지휘했다. 1872년 11월 25일, 그는 소장으로 진급했다. 1872년 12월 16일, 맥다월은 조지 G. 미드 장군의 뒤를 이어 남부 군사 사령부의 지휘관이 되었고, 1876년 6월 30일까지 그 자리를 유지했다. 1876년 7월 1일부터는 태평양 사령부의 지휘관을 맡았다.
3.2. 은퇴와 만년
1882년, 미국 의회는 군 장교의 의무 은퇴 연령을 64세로 지정했고, 맥다월은 그 해 10월 14일 군에서 은퇴했다. 군 은퇴 후, 맥다월 장군은 조경에 대한 애정을 살려 샌프란시스코 공원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1885년 사망할 때까지 이 직책을 수행했다. 이 직책에서 그는 방치되었던 프레시디오의 보존 지역에 공원을 조성하고, 골든게이트의 경치를 조망할 수 있는 도로들을 건설했다.
4. 사망과 매장
맥다월은 1885년 5월 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의 장례는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내에 위치한 샌프란시스코 국립 묘지에 매장되었다.
5. 유산과 역사적 평가
5.1. 역사적 평가와 비판
맥다월의 군사적 능력과 주요 결정은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다. 특히 그의 가장 큰 오점은 제1차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였다. 이 전투에서 그의 복잡한 전략과 병력의 미숙함이 결합되어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했다는 지적은 끊이지 않는다.
1879년 러더퍼드 B. 헤이스 대통령이 설치한 조사위원회 보고서는 제2차 불런 전투에서의 패배 원인 대부분을 맥다월에게 돌렸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결단력이 부족하고, 소통에 능숙하지 못하며, 무능력하다고 묘사되었다. 구체적으로, 그는 피츠 존 포터의 정보 요청에 반복적으로 응답하지 않았고, 제임스 롱스트리트의 부대 배치에 대한 정보를 존 포프에게 전달하지 않았으며, 군법에 따라 자신의 의무였던 북군 좌익 지휘를 소홀히 한 것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비판은 맥다월이 전투 상황에서 필요한 지휘와 판단을 제대로 내리지 못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러한 점들로 인해 그는 남북전쟁의 '잊혀진 장군'으로 일컬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