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어린 시절과 교육
얀 판 에이크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의 출생 일자와 장소는 문서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6세기 후반의 기록에 따르면 그는 리에주 주교후국의 자치구였던 마세이크에서 태어났다고 추정된다. 그의 성씨인 '판 에이크' 역시 '에이크(출신)의'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마세이크 출생설에 힘을 더한다. 더욱이 그의 딸 리빈은 아버지가 사망한 후 마세이크의 수녀원에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 《추기경 니콜로 알베르가티의 초상》을 위한 준비 드로잉 메모가 마슬란트 방언으로 쓰여 있다는 점도 그의 마세이크 지역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
그의 생애에 대한 현존하는 최초의 기록은 1422년에서 1424년 사이에 헤이그의 바이에른의 요한 궁정에서 '화가 얀 선생'(Meyster Jan den malre)에게 급여가 지급되었다는 내용이다. 당시 그는 이미 한 명 또는 두 명의 조수를 거느린 시종(valet de chambre) 신분의 궁정 화가였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늦어도 1395년 이전에 태어났음을 알 수 있지만, 일부 학자들은 1380년에 더 가깝게 태어났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얀 판 에이크에게는 마르가레타라는 여동생과, 그와 함께 도제 생활을 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형 후베르트(1426년 사망), 그리고 람베르트(1431~1442년 활동)라는 두 명의 형제가 있었는데, 이들 역시 화가였다. 다만 형제들의 출생 순서는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남프랑스에서 활동했던 젊은 화가 바르텔레미 판 에이크 또한 그의 친척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얀 판 에이크가 어디서 교육을 받았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라틴어를 구사하고 작품 서명에 그리스어와 히브리어 알파벳을 사용했다는 점은 그가 고전 교육을 받았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수준의 교육은 당시 화가들 사이에서는 드문 일이었으며, 교양 있는 필리프 공작의 관심을 끄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1.2. 궁정 화가 및 외교관
얀 판 에이크는 초기 생애 동안 홀란트, 에노, 제일란트의 통치자인 바이에른-슈트라우빙의 요한 3세의 관리로 일했다. 이때 그는 이미 작은 작업실을 꾸렸으며, 헤이그의 비넨호프 궁전 재장식 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 1425년 요한 3세가 사망한 후, 그는 브뤼허로 거처를 옮겼고 같은 해 선량공 필리프 공작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필리프 공작의 궁정 화가로 임명되면서 그의 명성은 크게 높아졌고, 이때부터 그의 궁정 활동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는 궁정 예술가이자 외교관으로 활동했으며, 투르네의 화가 길드의 고위 회원이었다. 1427년 10월 18일 성 루카의 축일에는 투르네에서 자신을 기리는 연회에 참석했는데, 이 자리에는 로버르트 캄핀과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과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도 함께했다.
궁정 봉급을 받게 되면서 판 에이크는 개인 의뢰 작업의 부담에서 벗어나 상당한 예술적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후 10년 동안 그는 유화 물감을 다루는 혁신적인 접근법을 통해 명성과 기술을 발전시켰다. 대부분의 동시대 화가들과 달리 그의 명성은 꾸준히 유지되었으며, 수세기 동안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유화에 대한 혁명적인 접근 방식은 너무나 독특하여 조르조 바사리가 퍼뜨린 신화처럼 그가 유화를 발명했다는 이야기까지 생겨났다. 하지만 실제로 유화는 목조 조각상이나 다른 물체에 채색하는 기법으로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으며, 테오필루스 프레스비테르는 1125년에 쓴 저서 《여러 가지 예술에 관하여》에서 이미 이를 설명하고 있다. 판 에이크 형제는 정교한 패널화에 유화를 사용한 최초의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 중 하나였으며, 글레이징과 번지기 기법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전례 없는 새로운 효과를 창조해냈다.
그의 형제 후베르트 판 에이크는 얀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인 《겐트 제단화》 제작에 협력했다. 미술사학자들은 이 작품이 1420년경 후베르트가 시작하여 1432년 얀이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부르고뉴 궁정 문서에 언급된 또 다른 형제인 람베르트 역시 화가였으며, 얀 사망 후 그의 작업실을 관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판 에이크의 작품 디자인과 기법은 생전에도 혁명적인 것으로 평가되어 널리 모사되고 재현되었다. 1434년에서 1436년 사이는 일반적으로 그의 전성기로 여겨지며, 이 시기에 《롤랭 수상의 성모》, 《루카 성모》, 《참사 판 데르 팔러와 성모자》 등 여러 명작을 제작했다. 1437년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르고뉴 고위 귀족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해외 의뢰도 꾸준히 받았다.
얀 판 에이크는 1426년에서 1429년 사이에 필리프 공작을 대신하여 여러 차례 "비밀" 임무를 띠고 여행을 떠났으며, 이로 인해 연봉의 몇 배에 달하는 보수를 받았다. 이 임무의 정확한 성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궁정의 사절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1426년에는 "먼 지역"으로 떠났는데, 성지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 가설은 그의 작업실 구성원들이 1440년경 완성한 《무덤가의 세 마리아》에 예루살렘의 지형이 매우 정확하게 묘사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얀 판 에이크의 플랑드르에서 그라나다까지의 여행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www.academia.edu/32068434/Jan_van_Eycks_travel_from_Flanders_to_Granada_1428-1429_El_viaje_de_Jan_van_Eyck_de_Flandes_a_Granada_1428-1429_Madrid_2016 얀 판 에이크의 플랑드르에서 그라나다까지의 여행(1428-1429)] 문서를 참고할 수 있다.
더 자세히 기록된 임무는 1428년부터 1429년까지 리스본으로 떠난 여행으로, 필리프 공작과 포르투갈의 이자벨의 혼인 계약을 위한 준비의 일환이었다. 판 에이크는 공작이 결혼 전에 신부의 모습을 볼 수 있도록 이자벨의 초상화를 그리는 임무를 맡았다. 당시 포르투갈은 흑사병에 시달리고 있었기에 궁정은 이동 중이었고, 네덜란드 일행은 외딴 아비스 성에서 이자벨을 만났다. 판 에이크는 그곳에서 9개월을 보낸 후 이자벨과 함께 네덜란드로 돌아왔으며, 두 사람은 1429년 성탄절에 결혼했다. 공주가 특별히 매력적인 외모는 아니었던 것으로 보이나, 판 에이크는 현재는 소실된 그 초상화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했다. 그는 인물들을 품위 있게 묘사하면서도 그들의 결점을 숨기지 않는 경향이 있었다. 귀국 후 그는 《겐트 제단화》 완성에 몰두했고, 이 작품은 1432년 5월 6일 필리프 공작을 위한 공식 행사에서 성 바프스 대성당에서 축성되었다.
1.3. 결혼과 사생활
얀 판 에이크는 1432년경 자신보다 15세 연하의 마르가레트와 결혼했다. 비슷한 시기에 브뤼허에 집을 샀는데, 1434년에 그들의 두 자녀 중 첫째가 태어나기 전까지 마르가레트는 기록에 언급되지 않았다. 마르가레트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심지어 결혼 전 성씨조차 전해지지 않아 당시 기록에는 주로 '마르가레트 부인'(Damoiselle Marguerite)으로 불린다. 초상화에서 그녀가 입은 옷차림은 유행을 따랐지만,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신부가 입은 옷처럼 호화롭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그녀가 하급 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후일 유명 화가의 미망인이 된 마르가레트는 얀 사망 후 브뤼허 시로부터 소액의 연금을 받았으며, 이 수입의 일부는 복권에 투자하기도 했다.
1.4. 사망
얀 판 에이크는 1441년 7월 9일 브뤼허에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성 도나티아누스 성당 묘지에 묻혔다. 필리프 공작은 그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얀의 미망인 마르가레트에게 화가의 연봉에 상당하는 일시금을 지급했다. 그는 사망 당시 많은 미완성 작품을 남겼는데, 이 작품들은 그의 작업실 직인들이 완성했다. 얀의 명성과 위상은 사후에도 꾸준히 높아졌다. 1442년 초, 그의 형제 람베르트 판 에이크가 작업실을 운영하며 얀의 시신을 파내어 성 도나티아누스 대성당 내부로 이장하였다.
2. 예술 경력 및 작품
얀 판 에이크는 궁정 작업 외에도 개인 의뢰인을 위한 그림을 제작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1432년에서 1439년 사이에 집중되어 있으며, 약 20점의 회화 작품이 현재 확실하게 그의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이 중 10점에는 그의 모토인 'ALS ICH KAN'의 변형이 서명과 함께 제작 연도가 적혀 있다. 1998년 홀랜드 코터는 "확실성 정도가 다양하지만, 약 24점의 그림과 몇 점의 드로잉, 그리고 《토리노-밀라노 시기도서》의 몇 페이지"만이 그에게 귀속된다고 추정했다. 그는 또한 "작품 귀속과 관련하여 미술사학자들과 소장 미술관 사이의 복잡한 관계와 긴장"을 언급하며, 1980년대 중반에 진품으로 여겨진 약 40점의 작품 중 약 10점은 현재 주요 연구자들에 의해 그의 작업실 작품이라는 강력한 이의가 제기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2.1. 주요 작품
얀 판 에이크의 작품은 단일 패널화, 두폭화, 세폭화, 다폭화 등 다양한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속적 주제와 종교적 주제를 모두 다루었다.
2.1.1. 겐트 제단화

상인이자 금융가, 정치인이었던 요도쿠스 베이츠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트 보를루트를 위해 제작된 《겐트 제단화》는 판 에이크의 가장 중요하고 유명한 작품이다. 1426년 이전에 시작되어 1432년에 완성된 이 다폭화는 "북방에서 현실을 최종적으로 정복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고전적 이상화를 추구했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작품들과 달리, 자연을 충실하게 관찰하고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이 작품은 그의 형제 후베르트 판 에이크가 1420년경 시작했으나, 1426년 후베르트가 사망하면서 얀이 이어받아 1432년에 완성했다. 1천억 픽셀로 보는 《겐트 제단화》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http://closertovaneyck.kikirpa.be 판 에이크에 더 가까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2.1.2. 토리노-밀라노 시기도서

1901년부터 얀 판 에이크는 《토리노-밀라노 시기도서》의 익명 화가인 '필체 G'로 자주 지목되어 왔다. 만약 이 추정이 사실이라면, 토리노의 삽화들은 그의 초기 시기 작품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토마스 크렌에 따르면, '필체 G'의 초기 작품들은 에이크의 스타일이 알려진 어떤 패널화보다도 앞서 제작되었으므로, 이는 "필사본 채색이 에이크의 유화에서 찬사를 받는 사실성에 어떤 역할을 했을지에 대한 도발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판 에이크의 작품으로 귀속되는 근거는 부분적으로 인물들이 대부분 국제 고딕 양식이면서도 그의 후기 작품에 다시 등장한다는 점에 있다. 또한 그가 헤이그에서 관계를 맺었던 비텔스바흐가와 연관된 문장이 있으며, 세밀화의 일부 인물들은 《겐트 제단화》의 기마상을 연상시킨다.
《토리노-밀라노 시기도서》의 대부분은 190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사진과 모사본으로만 전해진다. '필체 G'의 작품으로 귀속되는 페이지는 많아야 세 페이지만이 남아 있는데, 《세례 요한의 탄생》, 《성십자가 발견》, 《죽은 자를 위한 기도》(또는 《진혼 미사》)의 큰 세밀화가 있는 것들로, 이 중 첫 번째와 마지막 작품에는 페이지 하단을 장식하는 주로 테두리가 없는 삽화인 하단부(bas-de-page) 세밀화와 이니셜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는 얀의 1438년에서 1440년경 작품인 《성당의 성모》를 연상시키는 것으로 종종 언급된다. 1904년 화재로 네 점이 더 소실되었는데, 《해변에서의 기도》(또는 《해변의 바이에른 공작 빌헬름》), 밤 장면인 《그리스도의 배반》(화재 전에도 이미 "닳았다"고 묘사되었던 작품), 《성모 대관》과 그 하단부, 그리고 바다 풍경화인 《성 율리아노와 성 마르타의 항해》의 큰 그림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2.1.3. 종교화

《겐트 제단화》를 제외한 얀 판 에이크의 종교화에서는 성모 마리아가 중심 인물로 자주 등장한다. 그녀는 전형적으로 보석이 박힌 왕관을 쓰고 앉아 있으며, 자신을 바라보며 옷자락을 잡고 노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은 13세기 비잔틴의 엘레우사 성화(애정 성모) 전통을 연상시킨다. 때로는 시기도서를 읽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기도 하며, 주로 붉은색 옷을 입고 있다. 1432년의 《겐트 제단화》에서 마리아는 꽃과 별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신부의 옷차림을 하고 있으며, 녹색 천으로 덮인 허리띠 책을 읽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로버르트 캄핀의 《수태고지의 성모》에서 차용한 요소로 추정된다. 이 패널에는 후기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여러 모티프가 담겨 있으며, 마리아는 이미 천상의 여왕으로서 꽃과 별로 장식된 왕관을 쓰고 있다. 판 에이크는 주로 마리아를 옆에서 기도하며 무릎 꿇고 있는 기부자 앞에 현현하는 모습으로 표현한다. 성인이 평신도 앞에 나타나는 이러한 도상은 당시 북방의 기부자 초상화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참사 판 데르 팔러와 성모자》(1434~1436년)에서는 참사가 손에 든 성경의 한 구절을 잠시 묵상하는 순간에 성모자와 두 성인이 그의 앞에 나타나는데, 이는 마치 그의 기도가 현실로 구현된 것 같다.
2.1.4. 세속 초상화

얀 판 에이크는 초상 화가로서 매우 인기가 높았다. 북유럽 전역에 걸쳐 부유층이 증가하면서 초상화는 더 이상 왕족이나 고위 귀족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되었다. 신흥 상인 중산층의 등장과 개인 정체성에 대한 인본주의적 사상의 확산은 초상화 수요를 증대시켰다.
판 에이크의 초상화는 유화 물감의 능숙한 사용과 세부에 대한 치밀한 주의,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색과 톤의 깊이를 표현하기 위해 얇고 반투명한 채색층을 겹겹이 바르는 기법이 특징이다. 그는 1430년대에 초상화 기법을 개척했으며, 그의 자연스러운 묘사는 멀리 이탈리아에서도 찬사를 받았다. 오늘날 9점의 4분의 3면 초상화가 그의 작품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의 화풍은 널리 수용되어 특히 판 데르베이던, 페트뤼스 크리스튀스, 한스 멤링 등이 그의 영향을 받아 발전시켰다.


1430년경의 작은 《푸른 샤프롱을 쓴 남자의 초상》은 현존하는 그의 가장 이른 초상화이다. 이 작품에는 그의 초상화 양식에서 표준이 될 많은 요소가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고대에서 부활하여 곧 유럽 전역으로 퍼진 4분의 3면 구도, 방향성 있는 조명, 정교한 머리 장식, 그리고 단독 초상화의 경우 평평한 검은 배경 앞에 불분명한 좁은 공간 안에 인물을 배치하는 구도 등이 있다. 이 작품은 인물 외모의 작은 세부까지 사실적이고 예리하게 관찰한 점이 주목받는다. 이 남성은 하루나 이틀 정도 자란 가벼운 수염이 있는데, 이는 판 에이크의 초기 남성 초상화에서 자주 나타나는 특징으로, 인물이 면도를 하지 않았거나 로른 캠벨의 말을 빌리면 "다소 서툴게 면도한" 모습을 하고 있다. 캠벨은 판 에이크가 그린 다른 면도하지 않은 인물들도 나열했는데, 《니콜로 알베르가티》(1431년), 《요도쿠스 베이츠》(1432년), 《얀 판 에이크?》(1433년), 《요리스 판 데르 팔레》(1434~1436년경), 《니콜라 롤랭》(1435년), 《얀 데 레우》(1436년) 등이 있다.
《추기경 니콜로 알베르가티의 초상》을 위한 종이 습작 뒷면의 메모는 판 에이크가 인물의 얼굴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방식에 대한 통찰을 제공한다. 수염이 자라는 것에 대해 그는 "die stoppelen vanden barde wal grijsachtig"(수염의 그을린 수염덥수룩한 모습)이라고 썼다. 노인의 얼굴을 기록하려는 시도의 다른 측면에 대해서는 "동공 뒤쪽의 홍채는 갈색빛 노란색. 흰자위에 접한 윤곽선은 푸르스름하고... 흰자위 역시 노란빛을 띰..."이라고 적었다.


1432년의 《레알 수브니르》 초상화는 사실주의와 인물 외모의 세부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후기 작품에서는 인물이 더 멀리 배치되고 세부 묘사에 대한 관심이 덜 두드러진다. 묘사가 덜 법의학적이고 더 개괄적이며, 형태는 더 넓고 평평해진다. 초기 작품에서조차 모델의 묘사는 충실한 재현이 아니다. 더 나은 구도를 보여주거나 이상에 맞추기 위해 인물의 얼굴이나 형태의 일부를 변경했다. 그는 종종 자신이 관심을 가진 특징적 요소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 모델의 머리와 몸의 상대적 비율을 바꾸었다. 이로 인해 그림에서 현실이 왜곡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그의 아내 초상화에서는 코의 각도를 바꾸고 당시 유행하던 높은 이마를 그려 넣었는데, 이는 실제 그녀의 모습이 아니었다.
《레알 수브니르》 화폭 하단의 석조 난간은 흠집이 나거나 상처 난 돌을 모사하듯 그려져 있으며, 세 개의 별도 층위의 글귀가 들어 있는데, 각각은 환영적 방식으로 표현되어 돌에 새겨진 듯한 인상을 준다. 판 에이크는 종종 글귀를 인물의 목소리인 것처럼 써서 "말하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예를 들어 《얀 데 레우의 초상》에는 "...얀 데 [레우]는 성 우르술라 축일[10월 21일]인 1401년에 처음 눈을 떴다. 이제 얀 판 에이크가 나를 그렸으니, 그가 언제 시작했는지 알 수 있다. 1436년"이라고 적혀 있다. 1439년의 《마르가레트 판 에이크의 초상》의 글귀는 "내 남편 요하네스가 1439년 6월 17일, 내가 33세일 때 나를 완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이라고 쓰여 있다.
손은 판 에이크의 그림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초기 초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자신의 직업을 나타내는 물건을 들고 있다. 《레알 수브니르》의 남자는 법률 문서를 닮은 두루마리를 들고 있어 법률가였을 수 있다.
1432년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환영과 상징으로 가득 차 있으며, 1435년의 《롤랭 수상의 성모》도 마찬가지인데, 이 그림은 롤랭의 권력과 영향력, 경건함을 과시하기 위해 의뢰된 것이다.
2.2. 작업실 및 소실된 작품
1441년 여름 얀 판 에이크가 사망한 후, 그의 작업실 구성원들은 그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다. 이는 당시로서는 흔한 일이었는데, 장인이 사망한 후에는 미망인이 종종 사업을 이어갔다. 1441년 이후에는 그의 아내 마르가레트나 형제 람베르트가 작업실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작품으로는 《인스 홀의 성모》, 《서재의 성 예로니무스》, 1443년경의 《얀 포스의 성모》(《성 바르바라와 엘리자베스가 있는 성모자》) 등이 있다. 여러 디자인은 페트뤼스 크리스튀스와 같은 1급 제2세대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재현되었는데, 크리스튀스는 《엑서터의 성모》의 한 버전을 그리기도 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전시 도록인 [http://libmma.contentdm.oclc.org/cdm/compoundobject/collection/p15324coll10/id/91807/rec/320 《페트루스 크리스투스: 브뤼헤의 르네상스 거장》]에서 얀 판 에이크에 대한 상세한 논의를 찾아볼 수 있다.
작업실 구성원들은 또한 그의 사망 후 미완성 그림을 완성했다. 《십자가형과 최후의 심판 두폭화》의 오른쪽 화폭 상단 부분은 일반적으로 개성이 덜한 화풍의 더 약한 화가의 작품으로 여겨진다. 판 에이크가 밑그림은 완성했으나 화폭을 미완성인 채로 남기고 사망했으며, 상단 부분은 작업실 구성원이나 추종자들이 완성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확실히 그의 작품으로 여겨지지만 모사본으로만 알려진 작품이 세 점 있다. 《포르투갈의 이자벨 초상》은 1428년 필리프 공작을 위해 포르투갈의 주앙 1세의 딸과의 예비 혼인 계약을 맺으러 포르투갈을 방문했을 때의 작품이다. 현존하는 모사본을 통해 실제 참나무 액자 외에도 "그려 넣은" 액자가 두 개 더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하나는 상단에 고딕체 글귀가 적혀 있었고, 모조 석조 난간은 그녀의 손이 놓일 받침대 역할을 했다.
그의 사망 후 60년 동안 만들어진 《목욕하는 여인》의 모사본이 두 점 현존하지만, 이 작품은 주로 빌럼 판 하에흐트의 1628년 대작 《코르넬리스 판 데르 헤스트의 화랑》에 등장하는 모습을 통해 알려져 있다. 이 그림은 다른 많은 식별 가능한 고대가의 작품이 있는 수집가의 화랑을 보여준다. 《목욕하는 여인》은 침대와 작은 개가 있는 실내, 거울과 그 반영, 서랍장, 바닥의 나막신 등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과 많은 유사점을 보인다. 더 넓게 보면 시녀의 옷, 그녀의 형태의 윤곽, 그리고 그녀가 향한 각도가 비슷하다.
3. 화풍과 기법
얀 판 에이크의 화풍은 그의 독창적인 예술적 기법, 상징 체계, 그리고 작품에 나타난 독특한 요소들을 통해 후대 미술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3.1. 유화 기법
얀 판 에이크는 유화 물감의 사용에 혁신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조르조 바사리에 의해 그가 유화를 발명했다는 신화가 퍼졌지만, 실제로는 목조 조각상 등에 유화가 사용된 역사는 훨씬 오래되었다. 예를 들어 테오필루스 프레스비테르는 1125년 저서에서 이미 유화 기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판 에이크 형제는 정교한 패널화에 유화를 활용한 최초의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 중 하나였으며, 글레이징(glazing)과 번지기 기법(wet-on-wet) 등 다양한 유화 기법을 시도하고 정립함으로써 이전에는 달성할 수 없었던 섬세하고 사실적인 표현을 가능하게 했다。 그는 이러한 유화 기법의 발전을 통해 새로운 수준의 기교와 깊이를 작품에 구현했다.
3.2. 도상학과 상징주의

얀 판 에이크는 작품 속에 다양한 도상학적 요소를 활용했는데, 이는 그가 영적 세계와 물질적 세계가 공존한다고 본 관념을 반영한다. 이러한 도상학적 요소들은 작품 속에 눈에 띄지 않게 교묘하게 삽입되었으며, 일반적으로 작지만 중요한 배경 세부 사항으로 구성되었다. 상징과 성서적 참조의 활용은 그의 작품의 특징이며, 그가 개척한 종교 도상학의 처리 방식은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한스 멤링, 페트뤼스 크리스튀스에게 계승되고 발전되었다. 이들 화가들은 모두 풍부하고 복잡한 도상학적 요소를 사용하여 당대의 신념과 영적 이상에 대한 고양된 감각을 창조했다.
크레이그 하비슨은 사실주의와 상징주의의 혼합을 "초기 플랑드르 미술의 아마도 가장 중요한 측면"이라고 설명한다. 삽입된 상징들은 장면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의도되었으며, 이는 "영적 계시의 경험을 창조하기 위한 의도적인 전략"이었다. 특히 판 에이크의 종교화는 "항상 관람자에게 가시적 현실의 변용된 모습을 제시한다." 그에게 일상적인 현실은 조화롭게 상징으로 가득 차 있어서, 하비슨에 따르면 "묘사적 데이터가 재배열되어... 지상의 존재가 아닌 그가 초자연적 진리라고 여긴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지상과 천상의 혼합은 "기독교 교리의 본질적 진리"가 "세속과 성스러운 세계의 결합, 현실과 상징의 결합"에서 발견될 수 있다는 판 에이크의 믿음을 보여준다. 그는 비현실적인 크기로 천상과 지상의 분리를 보여주는 지나치게 큰 성모를 그리면서도, 이들을 성당이나 가정의 방, 또는 궁정 관리와 함께 앉아 있는 등 일상적인 배경 속에 배치했다.
그러나 지상의 성당들은 천상의 상징으로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일부 가정의 방에는 천상의 왕좌가 분명히 표현되어 있다(예를 들어 《루카 성모》에서). 《롤랭 수상의 성모》와 같은 그림의 배경은 파악하기가 더 어려운데, 여기서 장소는 지상과 천상의 융합이다. 판 에이크의 도상학은 종종 매우 조밀하고 복잡하게 겹쳐져 있어서, 요소의 가장 명백한 의미조차 작품을 여러 번 봐야 알 수 있다. 상징들은 종종 그림 속에 미묘하게 짜여 있어서 자세히 반복해서 봐야만 드러나게 되며, 도상학의 많은 부분은 존 워드의 말처럼 "죄와 죽음에서 구원과 재생으로 가는 약속된 통로"가 있다는 관념을 반영한다.
3.3. 서명과 모토

얀 판 에이크는 15세기 네덜란드 화가들 중 유일하게 자신의 작품 패널에 서명한 화가였다. 그의 모토에는 항상 'ALS ICH KAN'(또는 그 변형)이라는 문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는 "내가 할 수 있는 한" 또는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라는 의미로, 자신의 이름 'Eyck'을 이용한 말장난이다. 여기서 기식음 'ICH'는 브라반트어의 'IK' 대신 그의 고향인 림뷔르흐 방언에서 유래했다. 이 서명은 때때로 'AAE IXH XAN'처럼 그리스 문자를 사용하여 새겨지기도 했다. 'Kan'이라는 단어는 네덜란드어 'kunst'나 독일어 'Kunst'("예술")와 관련된 중세 네덜란드어 'kunnen'에서 유래했다.
이 모토는 중세 문학에서 때때로 나타나는 일종의 겸양 공식과 관련이 있을 수 있는데, 여기서 작가는 작품을 시작하며 완벽하지 못함에 대한 사과를 표한다. 그러나 서명과 모토의 전형적인 화려함을 고려하면 단순히 장난스러운 참조일 수 있다. 실제로 그의 모토는 1440년경의 《그리스도의 초상》에서처럼 그리스도의 모노그램 'IHC XPC'를 모방하려는 방식으로 기록되기도 했다. 더욱이 서명이 종종 "나, 얀 판 에이크가 여기 있었다"는 식이라는 점에서, 이는 기록의 충실성과 신뢰성, 그리고 작품의 질('내가 할 수 있는 한')에 대한 다소 오만한 주장을 담고 있다고 해석될 수도 있다.
작품에 서명하는 그의 습관 덕분에 그의 명성이 유지될 수 있었고, 초기 네덜란드 화파의 다른 1세대 화가들처럼 작품 귀속이 어렵거나 불확실하지 않았다. 그의 서명은 보통 장식적인 필체로 완성되었는데, 《레알 수브니르》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서 볼 수 있듯이 흔히 법률 문서에 쓰이는 종류였다.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는 "Johannes de eyck fuit hic 1434"("얀 판 에이크가 1434년에 여기 있었다")라고 서명되어 있어 자신의 존재를 기록하는 방식이었다.
3.4. 글귀와 액자
얀 판 에이크의 많은 그림에는 그리스어, 라틴어, 또는 네덜란드어 방언으로 된 글귀가 많이 새겨져 있다. 그의 글씨체는 여러 작품에서 일관성을 보여주어,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니라 그가 직접 썼음을 시사한다. 글귀는 그것이 나타나는 작품의 유형에 따라 다른 기능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단독 초상화에서는 인물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데, 특히 《마르가레트 판 에이크의 초상》에서 두드러지며, 액자에 새겨진 그리스어 글귀는 "내 남편 요하네스가 1439년 6월 17일, 내가 33세일 때 나를 완성했다. 내가 할 수 있는 한"이라고 번역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의 공적이고 격식 있는 종교 의뢰 작품의 글귀는 후원자의 관점에서 쓰여졌으며, 그의 경건함과 자선, 그리고 함께 그려진 성인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이는 《참사 판 데르 팔러와 성모자》에서 볼 수 있는데, 하단의 모조 액자에는 기부에 대해 "이 성당의 참사 요리스 판 데르 팔러가 화가 얀 판 에이크에게 이 작품을 의뢰했다. 그리고 그는 여기 주님의 성가대석에 두 개의 사제직을 설립했다. 1434년. 그러나 1436년에야 완성했다"라고 적혀 있다. 글귀는 판 에이크의 모든 그림에 나타나지만, 성모 마리아를 그린 작품들에서 특히 두드러지며 여러 기능을 수행한다. 초상화에 생명을 불어넣고 마리아를 공경하는 이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동시에, 당시 종교화가 개인 신심을 위해 의뢰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글귀들은 일종의 주문이나 개인화된 면죄기도문으로 읽히도록 의도되었을 수 있다.

당시로서는 예외적으로 판 에이크는 종종 작품의 필수적인 부분으로 여겨진 액자에 서명하고 날짜를 적었다. 그림과 액자는 함께 그려지는 경우가 흔했는데, 액자는 화가의 작업실과는 별개의 장인 집단이 제작했지만, 그들의 작업은 흔히 화가의 기술과 대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단독 두상 초상화의 액자를 모조 석재처럼 보이도록 디자인하고 그렸으며, 서명이나 다른 글귀는 돌에 새겨진 것처럼 보이게 했다. 액자는 다른 환영적 목적도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액자에 설명된 《포르투갈의 이자벨 초상》에서 그녀는 수줍지만 직접적으로 그림 밖을 응시하며, 모조 석조 난간 위에 손을 올려놓고 있다. 이 몸짓으로 이자벨은 자신의 존재감을 그림 공간에서 관람자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원래의 액자 중 많은 것이 소실되어 모사본이나 목록 기록을 통해서만 알려져 있다. 런던의 《남자의 초상》은 아마도 쌍폭 초상화나 쌍을 이루는 초상화의 절반이었을 것이다. 원래 액자에 대한 마지막 기록에는 많은 글귀가 있었지만 모두가 원작의 것은 아니었다. 액자는 종종 후대 화가들에 의해 덧칠되었다. 《얀 데 레우의 초상》도 원래의 액자를 가지고 있는데, 청동처럼 보이도록 덧칠되어 있다.
그의 많은 액자에는 글귀가 많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이중의 목적을 가진다. 장식적이면서도 중세 필사본의 여백과 비슷하게 도상의 의미에 맥락을 부여하는 기능을 한다. 《드레스덴 제단화》와 같은 작품은 보통 개인 신심을 위해 의뢰되었으며, 판 에이크는 관람자가 글귀와 도상을 함께 묵상하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1437년 작은 《드레스덴 제단화》의 내부 화폭은 주로 라틴어 글귀가 새겨진 두 층의 채색된 청동 액자로 둘러싸여 있다. 글귀는 다양한 출처에서 가져온 것으로, 중앙 액자는 마리아의 승천에 대한 성서의 설명에서, 내부 날개는 성 미카엘과 성 카타리나에게 바치는 기도문의 단편으로 채워져 있다.
4. 명성과 유산
얀 판 에이크는 당대부터 혁명적인 화가로 인정받으며 높은 명성을 누렸으며, 그의 예술적 유산은 후대 유럽 미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4.1. 당대 평가
판 에이크에 대한 가장 이른 중요 자료는 제노바의 인문주의자 바르톨로메오 파치오가 1454년 출판한 저서 《위인전》(De viris illustribus)에 실린 그의 전기이다. 이 책에서 얀 판 에이크는 당대의 "최고의 화가"로 지목되었으며, 파치오는 그를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젠틸레 다 파브리아노, 피사넬로와 함께 15세기 초 최고의 예술가들 중 한 명으로 꼽았다. 이탈리아인인 파치오가 자국 화가들만큼이나 네덜란드 화가들에게도 강한 관심을 보였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위인전》은 현재는 소실된 판 에이크 작품에 대해서도 일부 언급하고 있는데, 예를 들어 저명한 이탈리아인이 소장했던 목욕 장면 그림이 기록되어 있다. 다만 파치오는 다른 이가 그린 세계 지도를 잘못하여 판 에이크의 작품으로 돌리는 오류를 범하기도 했다.
파치오는 판 에이크가 충분한 교육을 받은 인물로, 고전, 특히 고대 로마의 박물학자 대 플리니우스의 미술론에 정통했다고 기록했다. 고대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의 저서 《연애술》에서 인용한 구절이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의 원래 액자(현존하지 않음)에 새겨져 있었다는 점과, 많은 작품에 라틴어로 된 글귀가 발견된다는 점은 판 에이크가 상당한 수준의 고전 교육을 받았음을 뒷받침한다. 1449년에는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이자 고고학자인 치리아코 데 피치콜리가 그를 주목할 만한 실력 있는 화가로 언급했으며, 15세기 미술의 [https://www.nybooks.com/online/2024/08/14/worldly-van-eyck/ "세속적인 판 에이크"]와 관련된 그의 역할에 대한 현대적 관점을 포함하여, 1456년에는 바르톨로메오 파치오가 그를 자신의 기록에 남겼다.
4.2. 후대 영향
얀 판 에이크는 생전에 이미 북유럽 미술에 혁명을 일으킨 거장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그림 구성과 기법은 수없이 모방되고 재현되었다. 미술사상 가장 초기적이면서도 가장 독특한 화가의 모토 중 하나인 'ALS ICH KAN'(내(Eyck)가 할 수 있는 한)이라는 그의 서명은 1433년 작품인 《터번을 쓴 남자의 초상》(자화상으로 추정됨)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그의 높아진 자부심을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의 작품은 국제 고딕 양식에서 출발했지만, 자연주의와 사실주의를 더욱 강조함으로써 곧 그 양식을 뛰어넘었다. 그는 유화 기법의 혁신적인 발전을 통해 새로운 수준의 기교를 달성했다. 판 에이크는 매우 영향력 있는 화가였으며, 그의 기법과 화풍은 로히어르 판 데르베이던, 페트뤼스 크리스튀스, 한스 멤링과 같은 후대 초기 네덜란드 화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더욱 세련되게 발전되었다. 당시 부르고뉴 공국이 정치와 예술의 중심지였던 점도 판 에이크의 명성이 국내외로 퍼지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4.3. 기념물 및 추모


벨기에 브뤼허의 얀 판 에이크 광장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또한 벨기에 겐트의 성 바프스 대성당 앞뜰에는 그의 형제 후베르트와 함께한 기념비적인 동상이 세워져 그의 예술적 업적을 기리고 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2024년 3월 20일부터 6월 17일까지 [https://www.louvre.fr/en/exhibitions-and-events/exhibitions/a-new-look-at-jan-van-eyck 얀 판 에이크를 새롭게 보다: 《롤랭 수상의 성모》] 특별전이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