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센고쿠 시대부터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인 야마나카 유키모리(山中 幸盛일본어)는 통칭 시카노스케(鹿介일본어)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이즈모국의 아마고 가문을 섬긴 사무라이로, 뛰어난 무용과 지략으로 '산인의 기린아'(山陰の麒麟児일본어)라는 이명을 얻었다. '아마고 3걸' 중 한 명이자 '아마고 10용사'의 필두로 꼽힌다.
유키모리는 주군인 아마고 가문이 멸망한 후에도 가문의 재흥을 위해 평생을 바친 충신으로, 특히 "원하건대 내게 칠난팔고(七難八苦일본어, 온갖 고난)"를 주소서"라고 초승달에 기도하며 고난을 자처한 일화로 유명하다. 그의 투구에는 종종 초승달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그가 수확의 달 아래 태어났고 초승달이 수호의 힘을 지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유키모리의 삶은 비극적이었으나, 그의 불굴의 의지와 충성심은 후대에 영웅적인 이미지로 각인되어 다양한 문학 및 대중문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2. 생애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생애는 아마고 가문의 흥망성쇠와 궤를 같이하며, 끊임없는 재흥 노력과 비극적인 최후로 점철되었다.
2.1. 출생과 유년기
유키모리의 전반생은 확실한 사료가 부족하여 불분명한 점이 많다. 통설에 따르면, 그는 덴분 14년 8월 15일(1545년 9월 20일) 이즈모국 도미타 장원(현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초)에서 태어났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사료인 『운요군실기』에 따르면 덴분 9년(1540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어, 출생 연도에 대한 이설이 존재한다.
야마나카 가문 역시 불분명한 점이 많으나, 유력한 설로는 우다 겐지의 후예인 사사키 가문(佐々木氏일본어)의 지류이자 교고쿠 가문(京極氏일본어)의 분가로, 아마고 가문의 일문이었다고 한다. 아마고 기요사다의 동생인 야마나카 유키히사를 시조로 하며, 유키모리는 유키히사의 4대 또는 6대 후손으로 전해진다.
유키모리의 아버지 야마나카 미쓰유키는 일찍 사망했고, 어머니 나미는 홀로 유키모리를 키운 현명한 여인이었다. 나미는 낡은 옷을 입고 밭에서 삼을 길러 유키모리의 옷을 만들었으며, 가난한 아이들에게도 옷과 음식, 잠자리를 제공했다. 이러한 나미의 친절에 감동한 아이들은 성장하여 유키모리를 돕게 되었다. 나미는 유키모리에게 "따르는 사람들과 성공과 실패를 함께 나누고,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병사들을 죽게 내버려 두거나 승리의 영광을 독차지하지 말라"고 가르쳤으며, 유키모리는 이 가르침을 평생 잊지 않았다고 한다.
2.2. 초기 활동
유년기부터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문을 섬겼다. 8세에 적을 죽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10세경부터 기마 궁술과 군사 전술을 익혔고, 13세에는 적장의 목을 베어 공을 세웠다. 16세 때 주군 아마고 요시히사의 호키국 오다카성 공격에 동행하여, 인바(이나바국과 호키국)에 이름을 떨치던 호걸 기쿠치 오토하치를 일기토로 쓰러뜨렸다.
유키모리는 차남이었기 때문에 한때 아마고 가문의 중신인 가메이 가문의 양자로 들어가 가메이 성을 사용하기도 했으나, 후에 야마나카 가문으로 돌아와 당주인 형 야마나카 유키타카를 대신하여 가독을 이었다.
2.3. 아마고 가문의 몰락
에이로쿠 5년(1562년) 7월, 모리 가문은 아마고 가문을 멸망시키기 위해 이즈모국으로 진군했다. 모리 가문은 이미 이쓰쿠시마 전투에서 스에 하루카타를 격파하고 오우치 가문을 멸망시키며 주고쿠 지방의 맹주로 부상한 상태였다. 반면 아마고 가문은 당주 아마고 하루히사가 급사하고, 뒤를 이은 아마고 요시히사가 외교 정책 실패 등으로 세력이 약화되고 있었다.
모리 모토나리가 이끄는 모리군은 이즈모에 입국하여 아마고 측 유력 고쿠진들을 차례로 복종시키며 진군했다. 에이로쿠 5년(1562년) 12월에는 아라쿠마에 본진을 세우고 아마고 가문의 거성 갓산토다성 공격을 본격화했다.
에이로쿠 6년(1563년) 8월 13일, 모리군은 아마고 10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시라카성 공격을 시작했다. 시라카성은 신지호 북안에 위치하며 동해에 면한 시마네반도와 갓산토다성을 잇는 요충지로, 보급로 확보에 중요한 거점이었다. 9월 21일, 아마고 가문은 아마고 도모히사를 대장으로 하는 구원군을 파견했고, 유키모리도 이에 종군했다. 전투 결과 모리군이 승리하고 아마고군은 갓산토다성으로 퇴각했다(시라카성 전투). 퇴각 시 유키모리는 약 200명의 병사를 이끌고 후미를 담당하며 추격하는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군대를 7차례 격퇴하고 적의 목 7개를 베는 공을 세웠다. 시라카성은 10월 중순경 함락되었다.
에이로쿠 7년(1564년), 아마고군은 스기하라 모리시게가 이끄는 모리군과 미호노세키, 유미가하마에서 싸웠고 유키모리도 참전했다(유미가하마 전투). 이 전투에서 아마고군은 승리했으나, 이어진 호키국의 중요 거점인 오다카성 전투에서 패배하며 호키국은 모리군에 의해 제압되었다. 이로써 아마고군은 각지에서 패배하며 보급로가 끊겼고, 갓산토다성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에이로쿠 8년(1565년) 4월, 모리군은 갓산토다성 북서쪽 3 km 지점의 호시가미산에 본진을 세우고 성 아래에서 보리 베기 약탈을 벌이며 갓산토다성 공격을 시작했다. 4월 17일, 모리군은 갓산토다성에 총공격을 감행했다(제2차 갓산토다성 전투). 유키모리는 시오타니 입구에서 깃카와 모토하루 등의 군대와 싸워 이를 격퇴했다. 또한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고노 감물을 일기토로 쓰러뜨렸다. 4월 28일, 모리군은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패퇴하여 갓산토다성에서 약 25 km 떨어진 아라쿠마성으로 철수했다.
9월, 모리군은 다시 갓산토다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시나가와 쇼인을 일기토로 쓰러뜨렸다(야마나카 유키모리·시나가와 쇼인 일기토). 같은 달, 유키모리는 시라카타(현 마쓰에시)에 체류하던 오가와치 유키쓰나 등이 이끄는 모리군을 야습하여 다수의 병사를 죽였다.
에이로쿠 9년(1566년) 5월 24일, 모리군은 세 번째로 갓산토다성에 총공격을 감행했으나, 역시 성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11월 21일, 성내 병량이 고갈되고 장병들의 도망자가 속출하자,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한 아마고 요시히사는 모리군에 항복을 제안했다. 11월 28일, 요시히사는 성을 넘겨주었고, 이로써 센고쿠 다이묘 아마고 가문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게 되었다. 요시히사를 비롯한 아마고 3형제는 일부 종자들과 함께 엔묘지로 연행되어 유폐되었다. 유키모리는 주군을 따르기를 원했지만 허락되지 않았고, 이즈모타이샤에서 주군과 이별했다. 그 후 유키모리는 아마고 가문을 재흥시키기 위해 힘쓰게 된다.
2.4. 아마고 재흥 운동
유키모리의 아마고 재흥 운동은 크게 세 차례로 나눌 수 있다.
2.4.1. 제1차 재흥 운동

아마고 가문 멸망 후 유키모리는 낭인이 되었다. 에이로쿠 9년(1566년)부터 에이로쿠 11년(1568년) 사이 유키모리의 행적은 불분명하다. 여러 설에 따르면, 아리마 온천에서 부상을 치료한 후 순례자 차림으로 동국으로 가서 다케다 가문, 나가오 가문(우에스기 가문), 호조 가문 등의 군법을 엿보고, 에치젠국의 아사쿠라 가문의 가풍을 살핀 후 교토로 올라갔다고 한다.
에이로쿠 11년(1568년), 유키모리는 다치하라 히사쓰나 등 아마고 가문의 낭인들과 함께 교토 도후쿠지에서 승려로 있던 아마고 사네히사의 유자 아마고 가쓰히사를 환속시켰다. 그리고 각지의 아마고 유신들을 규합하여 은밀히 아마고 가문 재흥의 기회를 엿보았다.
에이로쿠 12년(1569년) 4월, 모리 모토나리가 오토모 가문을 공격하기 위해 기타큐슈로 군대를 파견하자, 거병의 기회를 엿보던 유키모리는 이즈모국으로 침공을 시작했다. 이때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을 지원한 것은 야마나 유토요였다. 야마나 가문의 총수로서 오랜 기간 아마고 가문과 적대해왔던 유토요였으나, 자신의 영지인 빈고국, 호키, 이나바를 모리 가문에 의해 제압당하여 세력 회복을 위해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모리 가문의 요청을 받은 오다 노부나가의 군대에 의해 영지가 공격받아 지원이 원활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23일, 유키모리 등은 단고국 또는 다지마국에서 수백 척의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시마네반도에 상륙하여 근처의 주야마 요새를 점령했다. 유키모리 등이 재흥의 격문을 날리자 국내에 잠복해 있던 옛 신하들이 속속 집결하여 5일 만에 3,000명 이상의 군세가 되었다고 한다. 같은 달 하순,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다가 모토타쓰가 농성하던 신야마성을 공략하고, 이어서 신지호 북안에 위치한 스에쓰구에 성을 쌓아 이곳을 거점(스에쓰구성)으로 삼았다. 그리고 산인 지방 각지에서 합전을 벌이며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아마고 재흥군의 운슈 침공).
7월 중순, 유키모리는 옛 아마고 가문의 거성 갓산토다성 공략에 착수했다(아마고 재흥군에 의한 갓산토다성 전투). 이 전투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공략은 아니었지만, 성에 농성하던 모리군의 식량이 고갈되고 성내에서 투항자가 나오는 등 아마고 측이 우세했다. 그러나 이와미국에서 활동하던 아마고 재흥군이 모리군에 공격받아 위험한 상태가 되자, 유키모리는 성 공격을 일시 중단하고 구원하러 향했다.
이와미에 달려간 유키모리는 하라테군에서 모리군을 격파하고(하라테 전투), 그 후 이즈모국 내에서 16개의 성을 공략하여 그 세력을 6,000명 이상으로 확대시켰다. 또한, 모토나리가 아마고 재흥군을 토벌하기 위해 규슈에서 귀환시킨 요네하라 쓰나히로, 미토야 히사스케 등 이즈모국의 유력 고쿠진들을 차례로 아군으로 끌어들여 이즈모국 전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호키국에서도 오다카성을 비롯하여 중앙의 야바세성, 이나바국과의 경계에 있는 이와쿠라성 등 많은 주요 성들을 공략했다. 모략을 사용하여 스에요시성의 간사이 모토미치를 배신하게 만들고, 히노군 일대를 지배하는 히노슈를 아군으로 삼는 등 호키국 전역으로도 세력을 확대했다. 그 외에도 미마사카국의 다카다성에서 성주를 맡고 있던 매형 사에키 시치로지로를 모략으로 배신하게 만드는 등 이나바, 빈고, 빗추국, 미마사카에서도 세력을 확장하며 전투를 벌였다.
덧붙여 10월 11일, 오우치 데루히로가 오우치 가문 재흥을 목표로 야마구치로 공격해 들어와 쓰키야마 저택 터를 점령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10월 15일, 잇따른 영내 반란으로 지배 체제의 위기를 느낀 모토나리는 반란군 진압을 우선하기 위해 규슈에서 군대를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 10월 18일,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 모리군은 규슈에서 진을 철수하여 조후로 귀환했고, 10월 25일경 오우치 가문 재흥군의 반란을 진압했다. 데루히로는 도미노우미에서 자결하며 오우치 가문 재흥의 싸움은 불과 보름 만에 종결되었다(오우치 데루히로의 난). 반란을 진압한 모리군은 12월 23일 조후에 있던 진을 철수하고 거성인 요시다 고리야마성으로 귀환했다.
에이로쿠 13년(1570년) 1월 6일, 모리 데루모토,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은 아마고 재흥군을 진압하기 위해 요시다 고리야마성에서 대군을 이끌고 출진했다. 모리군은 북상하여 이즈모국에 입국한 후 아마고 측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공략하며 갓산토다성으로 진군했다.
한편 아마고 재흥군은 앞선 하라테 전투나 오키 다메키요의 반란(미호노세키 전투) 등으로 시간을 지체하여 이즈모국의 거점인 갓산토다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아마고 재흥군은 모리군의 진군을 막기 위해 후베(현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초 후베)에 진을 치고 결전을 준비했다.
2월 14일, 아마고 재흥군은 후베에서 모리군과 싸워 패배했다(후베야마 전투). 유키모리는 아군이 패주하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후미에 남아 군의 붕괴를 막은 후 거성인 스에쓰구성으로 귀환했다. 전투에서 승리한 모리군은 이튿날 2월 15일 갓산토다성에 입성하여 아마고 재흥군의 포위에서 성을 해방시켰다. 반면 아마고 재흥군은 이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이후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6월, 후베 전투의 패배로 이즈모에서의 아마고 재흥군의 세력은 신야마성과 다카세성 두 성만이 남을 정도로 궁지에 몰렸다. 7월에서 8월에는 양 성 아래에서 모리군에 의한 보리 베기 약탈이 벌어지는 등 위험한 상태였으나, 9월 5일, 아키국에서 모토나리가 중병에 걸려 깃카와 모토하루를 남기고 모리 데루모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의 군대가 본국으로 귀환하자 상황이 일변했다. 산인 지방의 모리군이 약해지자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다시 세력을 회복했다.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나카우미 해운의 중요 거점인 주진산성과 스에요시성 등 이즈모와 호키의 국경에 있는 성들을 차례로 탈환함과 동시에, 한때 시미즈야마 요새를 공략하여 다시 갓산토다성으로 육박했다. 또한 다카세성에 농성하던 요네하라 쓰나히로와의 연계를 도모하기 위해 신지호 북안의 만간지성을 빼앗아 증축했다. 깃카와 모토하루를 궁지에 몰아넣고 그의 거성 데자키성(히라타성)으로 공격해 들어가는 등 공세를 강화했다. 더 나아가 오키국의 고쿠진 오키 단조자에몬노조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동해 쪽의 제해권도 획득하며 시마네반도 전역으로 세력을 다시 확대했다.
겐키 원년(1570년) 10월 6일, 이즈모국에서 모리군이 열세라는 소식을 들은 모토나리는 모리군을 원호하고 동해 쪽 제해권을 탈환하기 위해 직속 수군 부대인 고다마 나리히데를 파견했다. 이 원군으로 인해 이후의 전투는 점차 모리군이 우세하게 되었고, 10월 하순경에는 주진산성이, 12월에는 만간지성이 함락되는 등 아마고 재흥군의 세력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리고 겐키 2년(1571년) 8월 20일경에는 마지막 거점이었던 신야마성이 함락되었다. 농성하던 아마고 가쓰히사는 함락 전에 탈출하여 오키로 도주했다.
같은 시기 스에요시성에 농성하며 싸우던 유키모리도 패배하여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사로잡혔다. 사로잡힌 유키모리는 오다카성으로 유폐되었으나, 시시도 다카이에와 구치바 미치요시의 구명 탄원으로 스오국 사바군 도쿠치와 호키국 아니리군 다이센정에 각각 1,000관의 영지를 주는 약속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그 후 틈을 타 탈출했다. 이로써 산인 지역에서 아마고 재흥군은 일소되었고, 첫 번째 재흥 운동은 실패로 끝났다.
2.4.2. 제2차 재흥 운동
오다카성에서 탈출한 유키모리는 바다를 건너 오키국으로 도주했다. 겐키 3년(1572년) 3월에서 4월경에는 다시 바다를 건너 본토로 돌아와 다지마국에 잠복했다. 그리고 세토 내해의 해적 무라카미 다케요시와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의 중신 마키 나오하루 등과 연락을 취하며 다시 아마고 가문 재흥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때 유키모리는 가메이 성을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겐키 4년(1573년) 초, 유키모리는 다지마국에서 이나바국으로 공격해 들어가 기리야마성을 공략하여 거점으로 삼고 다양한 군사 활동을 시작했다. 유키모리는 이나바국을 발판 삼아 호키, 이즈모 방면으로 세력 확대를 계획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이나바국의 실질적인 영주는 모리 측 고쿠진 다케다 다카노부였다. 다카노부는 에이로쿠 6년(1563년) 당시 이나바 국주 야마나 도요카즈와 싸워 승리한 후, 모리 가문과 연계하여 이나바 땅에서 세력을 확대해 온 인물이다.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도요카즈의 동생이자 야마나 가문 재기를 목표로 하는 야마나 도요쿠니를 아군으로 삼아 이나바국 각지에서 전전하며 승리를 거두고 세력을 확대했다. 그리고 덴쇼 원년(1573년) 8월 1일, 고시키야마성 전투에서 다케다군에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돗토리의 다노모 무너짐), 다카노부의 거성 돗토리성 공격을 본격화했다.
아마고 재흥군은 약 1,000명의 병사로 다케다군 5,000명이 농성하던 돗토리성으로 공격해 들어갔고, 그 후에도 공세를 계속하여 같은 해 9월 하순 돗토리성을 공략했다(아마고 재흥군에 의한 돗토리성 전투). 성에 농성하던 다케다 가신들은 아마고 재흥군에 인질을 바치고 항복했다. 돗토리성에는 야마나 도요쿠니가 입성했고, 아마고 재흥군은 시베성에 본거지를 두었다.
유키모리는 그 후 10일 만에 15개의 성을 공략하는 등 세력을 3,000명 이상으로 확대하여 히가시 이나바 전역을 지배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11월 초순, 야마나 도요쿠니가 다가미 다카쓰구 등의 회유로 모리 측으로 돌아섰다. 아마고 재흥군은 불과 한 달여 만에 모리 가문에 돗토리성을 빼앗기고 말았다. 돗토리성을 빼앗겨 세력이 불안정해진 유키모리는 그 후 이나바 각지에서 다양한 군사 활동과 책략을 펼치며 이나바 평정을 위해 힘썼다.
이나바국 내에서 모리군과 교전하는 한편,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이나 비젠국의 우라카미 가문, 부젠국의 오토모 가문 등 반모리 세력과 연계를 도모함과 동시에, 은밀히 오다 노부나가 휘하의 시바타 가쓰이에와 연락을 취하며 체제 정비를 꾀했다. 이들 전투 중 유키모리는 덴쇼 2년(1574년) 11월,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의 거성 다카다성에서 우키타 나오이에군을 격퇴하여 공적을 세웠고, 오토모 소린으로부터 화약 원료인 초석 한 항아리를 받기도 했다.
덴쇼 3년(1575년) 5월, 다지마국의 야마나 유토요가 모리 가문과 '게이탄 화목'이라 불리는 평화 협상을 성립시켰다. 한때 모리 가문과 적대하며 아마고 재흥군을 지원했던 유토요였으나, 이 무렵 노부나가에게 다지마의 지배권과 이쿠노 은광에 대한 권익을 위협받고 있었기에 모리 가문과 손을 잡는 것이 중요했다.
다지마 야마나 가문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된 유키모리는 덴쇼 3년(1575년) 6월 14일부터 15일까지 이나바국의 와카사 오니가성을 공략하고 거점을 이곳으로 옮겼다. 원래의 거성 시베성에는 가메이 고레노리가 입성했다고 전해진다. 이 와카사 오니가성은 이나바국에서 다지마, 하리마국으로 향하는 산간 교통로의 요충지에 위치하여, 적대하는 야마나 가문의 본거지인 다지마를 피하면서 하리마에서 교토로 향하는 루트를 확보하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월, 깃카와 모토하루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약 47,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이나바국으로 진군하여 아마고 재흥군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했다. 모토하루 등 모리군은 아마고 재흥군의 여러 성들을 차례로 공략함과 동시에, 8월 29일에는 유키모리가 농성하던 와카사 오니가성으로 공격을 개시했다. 아마고 재흥군은 모리군의 공격을 막아 격퇴하는 데 성공했으나, 10월 초순경에는 시베성이 함락되어 이나바에서의 아마고 재흥군의 거점은 이 와카사 오니가성 하나만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 아마고 재흥군의 분전과 산요 지방에서 오다 가문과 모리 가문 간의 긴장이 고조된 것 등으로 인해 10월 21일, 모리군은 와카사 오니가성 주변에 다수의 부성을 쌓고 이나바에서 철수했다.
그러나 반모리 세력인 미무라 가문의 멸망, 우라카미 가문의 쇠퇴, 그리고 지원을 받던 미마사카 미우라 가문이 모리 가문에 항복하는 등 아마고 재흥군은 이나바국에서 완전히 고립되었다. 더 나아가 모토하루 등 모리군 주력의 철수 후에도 이나바의 모리 세력으로부터 계속 압력을 받자, 덴쇼 4년(1576년) 5월경 아마고 재흥군은 와카사 오니가성을 떠나 이나바국에서 철수했다. 이로써 두 번째 아마고 재흥 운동도 실패로 끝났다.
2.4.3. 제3차 재흥 운동 및 죽음
이나바국에서 철수한 유키모리는 오다 노부나가를 의지하여 교토로 올라갔다. 교토에서 노부나가를 만난 유키모리는 노부나가에게 "훌륭한 남자"라는 칭찬을 들으며 '시주리 카게'(四十里鹿毛일본어)라는 준마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그 후 유키모리는 오다군의 휘하에서 아마고 가문 재흥을 목표로 하게 된다.
덴쇼 4년(1576년),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아케치 미쓰히데의 군에 가담하여 다지마 야기성, 단바국 모미이성 공격에 참가했다. 11월, 아케치군이 모미이성을 공격하다 패배하자,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아케치군의 후미를 맡아 추격하는 하타노·아카이군을 맞아 격파하며 군의 붕괴를 막아 미쓰히데로부터 포상을 받았다. 그 외에도 단바 공격 시 두 차례 비할 데 없는 활약을 했다.
덴쇼 5년(1577년), 유키모리는 노부나가의 적자 오다 노부타다를 따라 가타오카성 공격과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농성하는 시기산성 공격에 참가했다(시기산성 전투). 유키모리는 이때 가타오카성 공격에서 선봉을, 시기산성 공격에서 두 번째로 성벽을 넘는 공적을 세웠다. 또한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히사히데 휘하의 장수 가와이 쇼겐을 일기토로 쓰러뜨렸다.
10월,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은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로 진군을 시작하자, 유키모리 등 아마고 재흥군은 아케치군을 떠나 히데요시군 휘하에서 싸우게 된다. 12월(1578년 1월), 히데요시가 하리마 서부의 모리 측 거점인 고즈키성을 공략하자, 유키모리는 주군 아마고 가쓰히사와 함께 그 성에 입성했다. 아마고 재흥군은 이 성을 거점으로 마지막 아마고 가문 재흥을 도모하게 된다. 고즈키성은 작은 성이었지만, 비젠, 미마사카, 하리마의 국경에 위치하여 이 지역을 다스리는 데 중요한 거점이었다. 성주가 된 유키모리는 이 구역의 수비를 담당함과 동시에 오다 가문과 미마사카 에미 가문 사이의 중개를 하는 등 미마사카 고쿠진들을 회유하고 책략을 펼쳤다.
덴쇼 6년(1578년) 2월 1일, 우키타 가문의 장수 마카베 지로시로가 약 3,000명의 병사로 고즈키성을 공격했다. 이 전투는 유키모리가 약 8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우키타군을 야습하여 지로시로를 죽이고 아마고 재흥군이 승리했다.
2월 중순, 미키성의 벳쇼 나가하루가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고 모리 가문에 가담했다. 오다 가문과 교전 중이던 모리 가문은 이를 호기로 삼아 4월, 깃카와 모토하루,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등이 이끄는 30,000명 이상의 병력으로 하리마로 진군했다. 그리고 4월 18일, 아마고 재흥군이 농성하던 고즈키성을 포위했다.
5월 4일, 모리군의 고즈키성 포위 소식을 들은 히데요시는 아라키 무라시게 등과 함께 10,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고즈키성 구원에 나서 다카쿠라산에 진을 쳤다. 그러나 히데요시군은 노부나가로부터 미키성 공격을 우선하라는 명령을 받았고, 6월 21일 다카쿠라산 전투에서 모리군에 패배한 것도 있어, 6월 26일 진을 철수하고 쇼샤산으로 퇴각했다. 그 결과 고즈키성은 고립무원 상태가 되었고, 식량이 바닥나고 성을 떠나는 자들도 끊이지 않아, 7월 5일, 아마고 재흥군은 모리군에 항복했다(고즈키성 전투).
항복 조건으로 아마고 가쓰히사와 그의 동생 아마고 스케시로는 할복하고, 유키모리와 다치하라 히사쓰나는 생포되어 인질이 되었다. 그 외 모리 가문에 적대했던 많은 자들은 처형되었고, 나머지는 용서받아 풀려났다.
인질이 된 유키모리는 빗추 마쓰야마성에 주둔하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연행되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 빗추국 아이노와타리(현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에서 모리 가신 후쿠마 모토아키에게 모살되었다. 향년 34세 또는 39세였다.
3. 죽음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덴쇼 6년(1578년) 7월 17일(1578년 8월 20일), 빗추국 아이노와타리에서 모리 가문의 병사 후쿠마 모토아키에 의해 암살되었다. 고즈키성 함락 후 모리 데루모토에게 연행되던 도중이었다.
4. 사후 영향 및 가문의 변화
유키모리의 죽음은 아마고 재흥 운동의 종막을 알리는 것이었으나, 고즈키성 함락 시 아마고 가문의 서가 가메이 고레노리가 이끄는 부대가 히데요시를 따르며 난을 피했기 때문에 아마고 유신단이 완전히 해체된 것은 아니었다. 아마고 유신단의 일부는 서가인 가메이 가문의 가신단으로 재편성되어 근세 다이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메이 고레노리의 부대는 "이즈모 반국"이라는 은상 약속을 받고 히데요시 휘하에서 전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혼노지의 변 이후 히데요시의 주고쿠 오가에시 과정에서 모리 가문과의 강화를 따르면서 그 약속은 파기되었다. 이후 고레노리는 관직명 "류큐노카미"를 자칭하며 류큐를 원했으나, 시마즈 가문의 류큐 침공에 의해 좌절되었다. 조선 출병에도 참전했으며, 히데요시 사후에는 도쿠가와의 동군에 속하여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선봉 부대로 참전하여 사이무라 마사히로의 배신 수락, 돗토리성 아래 방화, 오미 미나쿠치 성주 나쓰카 마사이에의 추격 포위 개성 등에 참여했고, 이후 도쿠가와 막번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즈모에 인접한 이나바국 가노정을 영지로 받아 가노번을 열었으며, 슈인선 무역을 통해 샴에 슈인선을 파견하기도 했다. 그리고 센히메 사건 이후 조슈 모리 가문과 가까운 이와미국 쓰와노정으로 전봉되어 쓰와노번 4만 3천 석으로 에도 시대 말기를 맞이했다.
유키모리의 장남으로 알려진 야마나카 유키모토(고노이케 신로쿠)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 무사를 폐하고 셋쓰국 가와베군 고노이케촌(현 효고현 이타미시)에서 술 제조업을 시작하여 재산을 모았고, 후에 오사카로 이주하여 에도 시대 이후의 거상 고노이케 재벌의 시조가 되었다. 다만, 고노이케 신로쿠를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아들로 보는 고노이케 가문의 가전은 의심하는 견해도 있다.
쇠퇴한 주가에 충성을 다해 싸웠던 그의 모습은 후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 강담 등을 통해 윤색의 바탕이 되었다. 특히 에도 시대에는 충의로운 무장으로서, 비운의 영웅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의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이는 세상에 널리 알려져 무사도를 정신적 지주로 삼은 메이지 시대 이후의 국민 교육의 소재로, 달에 칠난팔고를 기도한 이야기가 교과서에 채택되기도 했다.
5. 평가 및 영향
5.1. 역사적 평가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동시대 인물들과 후대 역사학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의 삶은 불가능에 가까운 주가 재흥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충의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깃카와 모토나가: "시카노스케는 진정으로 천하무쌍의 무장이다." (덴쇼 6년(1578년) 5월 또는 6월)
- 라이 산요: "우뚝 솟은 용맹한 이름, 누가 사슴이라 부르랴, 호랑이와 이리 같은 세상에서 기린을 본다." (시카노스케를 '산인의 기린아'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 한시의 구절)
- 가쓰 가이슈: "지난 수백 년 역사를 돌이켜봐도, 진정한 역경에 처하여 침착하게 일을 처리한 자는 거의 없다. 굳이 꼽자면 야마나카 시카노스케와 오이시 요시오 정도일 것이다."
- 이타가키 다이스케: "나는 항상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라는 인물을 사랑한다. 그는 아마고 가문의 충신이며, 아마고 가문의 쇠락이 회복 불가능할 때에도 몸을 아끼지 않은 남자이다." (메이지 26년(1893년) 12월 29일, 자유당 당수로서 의회 해산 전 당원들을 격려하며) 그는 또한 시카노스케가 "원하건대 내게 칠난팔고를 주소서"라고 초승달에 기도한 일화와 "괴로움이여, 그 위에 더욱 쌓여라. 한계 있는 몸의 힘을 시험하리라"라고 읊은 회한의 시를 언급하며 그의 불굴의 정신을 칭송했다.
- 『인토쿠 태평기』: "아마고 재흥군의 대장은 아마고 가쓰히사였으나, 모든 군사 계략은 유키모리의 머리에서 나왔다. 수년간 산인산요에 무위를 떨치며, 소수의 병력으로 대군을 이긴 것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무명은 천하에 울려 퍼져 나무꾼 아이나 사냥꾼 노인까지도 일상 대화로 삼을 정도였다. 그러나 과보에도 한계가 있듯이, 천운을 다하고 무의미하게 주살당한 것은 비참했다."
- 『주고쿠 병란기』: "무용의 달인으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으나, 천명을 다하지 못하고 39세에 토벌당하여 이름을 후세에 남겼다. 애석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 『기잔고가쿠』: "유키모리의 용력은 발군이었고, 재치도 뛰어났다. 당시 사람들은 유키모리를 '구스노키 마사시게보다 낫다'고 칭찬했다. 그래서 겹겹이 에워싼 적들도 유키모리의 모습을 보면 모두 퇴각했다. 또한 유키모리가 성에 농성하면 적은 화친을 맺고 싸움을 피했다."
- 『명장언행록』: "주가 재흥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 각지를 떠돌면서도 수많은 고난을 극복하고 병사를 일으켜 싸움을 계속했다. 그 길은 험난하여 100번 좌절하고 1,000번 실패를 맛보았으나, 전진할지언정 후퇴하는 일은 없었다. 마지막에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지만, 그 의용의 이름은 한때 천하에 울려 퍼졌다."
5.2. 대중문화 속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는 그의 비극적인 삶과 충성심으로 인해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재해석되고 있다.
- 게임:
- 『사무라이 무쌍 5』: '사무라이 무쌍' 시리즈의 다섯 번째 게임으로, 시카노스케는 주요 플레이어블 캐릭터 중 한 명이다. 게임 속에서 그는 아마고 가문에 충성하는 장수로, 뛰어난 용기와 매력적인 외모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 『전국 바사라 4』: 시카노스케는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등장하며, 뛰어난 무예가이자 아마고 하루히사(이전 작에서는 비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충실한 가신으로 그려진다.
- 가부키:
- 『고노토리』(神の鳥일본어, '신성한 새'): 시카노스케는 강력한 아라가토(荒事일본어, 가부키의 거친 연기 스타일) 영웅으로 묘사되며, 그의 외모는 가마쿠라 곤고로 가게마사(鎌倉権五郎景政일본어, 『시바라쿠』의 주인공)와 매우 유사하다. 이 연극에서 시카노스케는 사악한 군벌 아카마쓰 만유로부터 일본 황새 가족을 구해야 한다. 이 연극이 공연될 때마다 시카노스케는 인기 가부키 배우 가타오카 아이노스케 6세가 연기한다.
- 소설: 이케나미 쇼타로의 『영웅 일본 소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난조 노리오의 『이즈모의 매』, 나카야마 요시히데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등 다수의 소설에서 그의 삶이 다루어졌다.
- 만화: 이와타 렌타로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 오야마다 미무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이야기 - 아마고 재흥기』 등이 있다.
- TV 드라마: 『질실강건 이키자마』(2017년, 산인 케이블 비전)에서 고바야시 나오키가 시카노스케 역을 맡았다.
- 무대: 운난시 창작 시민 연극 『KIRINJI 신설·야마나카 시카노스케』(2019년)가 공연되었다.
5.3. 상징성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일본 역사에서 충성심, 불굴의 의지, 그리고 비극적인 영웅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특히 "원하건대 내게 칠난팔고를 주소서"라는 초승달 기도 일화는 그의 고난을 자처하는 강인한 정신을 대표하며,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교육하는 데 중요한 소재로 활용되었다.
그는 주군 아마고 가문의 재흥이라는 불가능에 가까운 목표를 위해 평생을 바쳤으며, 수많은 전투에서 용맹함을 떨치고 지략을 발휘했다. 그의 이러한 헌신적인 삶은 후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 에도 시대에는 충의로운 무장으로서,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교과서에 실릴 정도로 널리 알려진 비운의 영웅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라는 이미지를 형성했다. '산인의 기린아'라는 별명은 그의 뛰어난 재능과 용맹함을 상징하며, 오늘날까지도 그의 이름은 고난 속에서도 굴하지 않는 끈기와 충절의 대명사로 기억되고 있다.
6. 인물 및 일화
야마나카 유키모리는 그의 용맹함과 충성심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화와 독특한 특징들로 인해 더욱 풍부한 인물로 기억된다.
6.1. 외모
유키모리는 용맹한 미남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용모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 『다이코키』 (유년기):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용모로, 눈빛이 뛰어나고 손발도 굵고 튼튼했다. 어리면서도 그 태도는 매우 단호하여 불적스러울 정도였다."
- 『운요군실기』 (19세, 시나가와 쇼인과의 일기토 당시): "키는 5척 남짓으로 보이며 중간 체격에 피부가 희고 용모가 뛰어난 남자였다."
- 『명장언행록』 (34세, 사망 당시): "유키모리는 토벌당했을 때 매우 훌륭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그 수염은 바늘처럼 날카롭고 매우 단단하여, 창호지를 찌르면 쉽게 뚫을 정도였다."
6.2. 갑옷과 투구
유키모리는 초승달 앞장식에 사슴 뿔 옆장식이 달린 투구를 한 모습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담이나 소설 등에서도 이 모습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갓산토다성터에 세워진 유키모리의 동상도 이 모습으로 제작되었다. 통설에 따르면, 이 투구는 야마나카 가문에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것으로, 유키모리가 가독을 이을 때 물려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다이코키』나 『운요군실기』 등의 군기 사료에 따르면, 그 투구의 모습은 다소 다르다.
- 『다이코키』: "16세 봄, 반달 앞장식이 있는 투구를 쓰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슴 뿔 옆장식에 대한 묘사는 없고, 앞장식도 초승달이 아닌 반달이었다.
- 『운요군실기』』・『인토쿠 태평기』: "붉은 실로 엮은 갑옷에 수사슴 뿔을 갖춘 투구를 쓰고 있었다. 그 수사슴 뿔은 은가루로 장식되어 5마디로 나뉘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슴 뿔 장식은 있지만 초승달 앞장식에 대한 기록은 없다.
- 『명장언행록』: 『다이코키』에 기록된 "반달 앞장식이 있는 투구" 외에, 유키모리가 병약했던 형으로부터 투구를 물려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투구는 "길이 6척의 사슴 쌍각을 앞장식으로 꽂고 있었다"고 하여, 투구에 달린 사슴 뿔이 옆장식이 아닌 앞장식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6.3. 무용과 용맹
유키모리는 뛰어난 무용과 용맹함으로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 그는 '아마고 10용사'의 필두로 꼽히며, 아마고 무장 중 특히 지용과 충의가 뛰어난 세 명, 즉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다치하라 겐타효에, 구마가이 신에몬을 일컫는 '아마고 3걸' 중 한 명으로도 알려져 있다.
- 야마나 군의 맹장으로 알려진 기쿠치 오토하치, 고노 감물, 유명한 시나가와 쇼인, 그리고 마쓰나가 히사히데 휘하의 가와이 쇼겐을 모두 일기토로 쓰러뜨렸다.
- 그는 생애 두 번의 수급 공양을 행했다. 수급 공양은 33개의 수급을 올릴 때마다 한 번씩 행하는 것이므로, 그는 생애 66개 이상의 수급을 올린 셈이다.
- 유키모리는 태어난 지 몇 달 만에 4, 5세 아이처럼 보였고, 2, 3세경에는 무용과 지략이 뛰어나 놀이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8세 때 사람을 죽였다. 10세경부터 기마와 군법을 배웠고, 13세에 적을 죽여 공을 세웠다. 성장하면서 그의 기량은 세상을 뛰어넘었고, 마음은 강하고 깊은 지략을 가졌으며, 사람을 칭찬할 때 편애가 없었다.
- 16세의 어느 봄날, 유키모리는 "오늘부터 30일 이내에 무용의 명예(전공)를 세우고 싶다"고 초승달에 기도했다. 얼마 후 주군 아마고 요시히사가 야마나 가문의 호키 오다카성을 공격했고, 유키모리도 이에 동행했다. 이 전투에서 유키모리는 인바(현 돗토리현)에 이름을 떨치던 호걸 기쿠치 오토하치를 일기토로 쓰러뜨려 전공을 세웠다. 이로 인해 유키모리는 이후 평생 동안 초승달을 신앙했다고 한다.
- 에이로쿠 5년(1562년), 모리군이 이즈모국으로 공격해 들어와 아마고군 거점 갓산토다성을 포위했다. 유키모리가 홀로 성 아래 민가에서 휴식하고 있을 때, 모리군 병사 30~40여 기가 공격해 왔다. 유키모리는 민가에서 나와 가장 먼저 달려든 병사 두 명을 베어 쓰러뜨리고, 이어서 달려든 병사들과 난전하여 16~17명을 죽였다. 남은 병사들도 유키모리 혼자서 베어 격퇴했다. 격퇴 후 유키모리는 민가의 늙은 비구니에게 "밥이 없느냐"고 물어, 내어준 참나무 잎에 담긴 밥을 먹고 갓산토다성으로 돌아갔다.
- 아마고 가문이 멸망하고 여러 나라를 방랑하던 유키모리가 하룻밤 묵을 곳을 빌려 절에 머물고 있을 때, 도적 14명이 절을 습격했다. 유키모리는 모략을 사용하여 혼자서 도적 모두를 생포했다. 도적들은 "지금까지 도둑질을 약 100번, 싸움도 70번 넘게 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입니다. 이름을 알려주십시오"라고 물었으나, 유키모리는 "무슨 소리냐, 어서 가라"고 말하며 이름을 밝히지 않고 떠났다. 그는 신불이 보시는 앞에서 살생은 좋지 않다고 생각하여 절의 주지스님과 상의하여 도적들을 풀어주기로 했다.
- 시나가와 다이젠과의 일기토에 대해서는 사료마다 이견이 있다. 아마고 측 기록인 『운요군실기』와 『다이코키』에서는 시나가와가 활을 사용하여 시카노스케를 공격하려 했으나, 아마고 가문의 무장이 활로 방해하여 실패했고, 시카노스케와 시나가와는 근접전을 벌여 일진일퇴의 공방 끝에 시카노스케가 시나가와를 멋지게 쓰러뜨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모리 측 자료인 『인토쿠 태평기』에서는 시나가와가 우세하게 승부를 이끌어 시카노스케가 궁지에 몰렸으나 동료 아키카미 무네노부의 도움으로 이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료마다 이견이 있어 사실은 불분명하지만, 사료의 성립 시기로는 『운요군실기』가 『인토쿠 태평기』보다 100년 정도 빠르고, 『다이코키』는 『인토쿠 태평기』보다 수십 년 먼저 집필되었다.
6.4. 어머니의 영향과 가르침
유키모리의 어머니 야마나카 나미는 매우 현명한 어머니였다고 전해진다. 유키모리의 아버지가 일찍 사망하여 나미 홀로 유키모리를 키웠다. 생계를 책임질 사람이 없어 집은 가난했고, 옷을 살 돈조차 부족할 정도였다. 그래서 나미는 직접 밭에서 삼을 길러 유키모리의 옷을 만들었지만, 자신은 낡은 옷을 입고 살았다. 또한, 자신처럼 가난한 아이들이 있으면 옷을 주고 숙식을 제공했다. 보살핌을 받은 아이들은 모두 감동하여 성장한 후 유키모리를 돕게 되었다고 한다.
나미는 유키모리에게 "너를 따르는 사람들과 고락을 함께 나누어라. 전투에서 패배했을 때 동료를 죽게 내버려 두거나, 공적을 독차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유키모리도 항상 그 말을 잊지 않고 가르침에 따랐다고 한다.
6.5. 인간관계와 처신
유키모리는 동료, 주군, 부하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그의 뛰어난 인품과 처신을 보여주는 일화들을 남겼다.
- 오키 다메키요 등이 미호노세키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미호노세키 전투), 유키모리 등은 이를 제압하기 위해 공격했지만, 다메키요의 반격으로 궁지에 몰렸다. 그 후 요코미치 형제(요코미치 다카미쓰, 요코미치 다카무네)와 마쓰다 시게야스 등이 구원하러 달려와 분전하여 결국 다메키요를 사로잡고 이 전투에서 승리했다. 이때 아마고 가쓰히사는 유키모리 등을 배려하여 요코미치 등에게 감상(감사 편지)을 주는 것을 삼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키모리는 "이 합전에서 그들의 가세가 없었다면 저의 목숨은 없었을 것입니다. 첫 전투에서 패한 저희를 배려할 필요는 없습니다. 상벌은 명확히 하고, 정사에 편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가쓰히사를 간언하며 즉시 감상을 전달하도록 요청했다. 가쓰히사는 이를 기뻐하며 즉시 요코미치 등에게 감상을 전달했다고 한다.
- 아케치 미쓰히데의 가신이었던 노노구치 단바가 유키모리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후, 미쓰히데도 "목욕물을 데웠으니 집으로 오지 않겠는가"라고 초대했다. 노노구치의 집은 허름한 집이었지만, 유키모리는 "노노구치와 선약이 있어서 갈 수 없습니다"라고 웃으며 미쓰히데에게 답했다. 미쓰히데도 웃으며 "유키모리를 이것으로 초대해 주어라"라고 노노구치에게 말하며 기러기 한 마리와 연어 한 마리를 주었다.
- 유키모리가 부하인 신도 간스케에게 보낸 서신이 남아있다. 사로잡혀 아이노와타리에서 살해되기 전까지 쓰인, 유키모리의 마지막 서신이라고 한다. 오랜 낭인 생활을 위로하고 고즈키성에서의 싸움을 "평생 잊지 않겠다"고 칭찬하며, 앞으로 어디든 봉사하도록(자신과의 주종 관계는 해제한다) 하는 내용이었다.
6.6. "시카노스케"라는 이름
유키모리의 통칭인 '시카노스케'(鹿介일본어)의 명명에 대한 일화가 있다. 유키모리의 아명은 진지로였고, 병약한 형을 대신하여 가독을 이을 때 개명하여 시카노스케라고 칭했다. 일반적으로는 이때 물려받은 투구에 초승달 앞장식과 사슴 뿔 옆장식이 달려 있었기 때문에, 투구에 빗대어 이름을 시카노스케로 바꾸었다고 한다. 그 외에는 산 속에서 사슴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고 이름을 시카노스케로 지었다는 설도 있지만, 군기 사료에 남아있는 개명 이유는 다음과 같다.
- 『다이코키』: "나가쓰키(9월)의 어느 날, 진지로(유키모리)는 동료인 아키타쿠 진스케와 데라모토 한시로와 함께 야간 경비를 서고 있었다. 진지로는 심심해서 '성씨에 빗대어 이름을 바꿔보는 것은 어떻겠는가'라고 두 친구에게 제안했다. 두 사람도 '과연, 좋은 생각이다'라고 말하며 동의하여, 세 사람은 각각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아키타쿠 안노스케, 데라모토 쇼지노스케라고 자칭하게 되었다."
- 『기잔고가쿠』: "유키모리는 아마고 하루히사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나, 2세가 되었을 때 모리 모토나리에 의해 하루히사(아마고 가문)가 멸망하여, 유모에게 안겨 '야마나카'라는 곳으로 도망쳐 숨어 살았다. 그곳에서 16, 17세까지 성장한 유키모리는 인품과 골격이 뛰어나고 손발 마디마디에 한 움큼의 털이 나 있어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라고 자칭했다."
- 『명장언행록』: "어느 날, 진지로(유키모리)는 형 진타로로부터 길이 6척의 사슴 쌍각을 앞장식으로 갖춘 투구를 물려받았다. 진지로는 그 투구를 쓰고 전장에 나가자, 사람들은 그 위풍당당한 모습을 보고 순식간에 두려워 복종했다. 이로써 유키모리는 스스로를 시카노스케라고 칭하게 되었다."
6.7. 소지품
- 총 길이 약 264 cm(칼날 길이 172 cm, 휨 3 cm, 칼자루 길이 92 cm)의 이시슈 오다치 (이시슈 와사다 작)를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오야마즈미 신사에 이 칼을 봉납했다. 현재도 이 칼은 오야마즈미 신사에 전시되어 관람할 수 있다.
- 고즈키성 함락 후, 깃카와 모토하루에게 투항할 때 소지하고 있었다고 전해지는 투구 '테쓰사비 주니켄 스지카부토'(鉄錆十二間筋兜일본어)가 현존한다. 부적을 투구 안에 넣어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현재는 깃카와 사료관에 전시되어 있다.
- '아라미 쿠니유키의 다치'(荒身国行の太刀일본어)를 소지하고 있었다. 아이노와타리에서 살해당할 때 지참하고 있었으며, 그 후에는 모리 데루모토가 소지했다. 나중에 데루모토로부터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되었다고 전해진다.
- 『교호 메이부쓰초』에 따르면, 천하 5검 중 하나인 '미카즈키 무네치카'를 한때 소지했다고 한다.
- '후도 쿠니유키의 다치'(不動国行の太刀일본어)를 소지하고 있었다.
7. 출신지의 수수께끼
유키모리의 전반생은 확실한 사료가 남아있지 않아 불분명한 점이 많다. 군기 사료들도 태어난 장소나 연도 등 기록에 차이가 있다.
7.1. 출생 연도
일반적으로 출생일은 『다이코키』와 『고태평기』에 기록된 덴분 14년 8월 15일(1545년 9월 20일)로 알려져 있다. 『명장언행록』에 따르면 "덴쇼 6년 7월 2일(1578년 8월 5일)에 34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어, 역산하면 덴분 14년에 태어난 것이 되어 『다이코키』와 『고태평기』에 기록된 연도와 일치한다.
그러나 가장 오래된 『운요군실기』에서는 덴쇼 6년 7월 13일(1578년 8월 16일)에 39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역산하면 태어난 해는 덴분 9년(1540년)이 된다. 또한 『인토쿠 태평기』와 『주고쿠 병란기』에서도 덴쇼 6년에 39세로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출생 연도를 덴분 9년으로 보는 설도 있다.
한편, 통설에서는 사망일이 덴쇼 6년 7월 17일(1578년 8월 20일)이라고 한다. 이는 『야마나카 계도 초안』과 『가타요세 가보』에 따른 것이다.
7.2. 출생지
출생지 또한 불분명하다. 일반적으로는 갓산토다성 기슭(현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초)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이는 『다이코키』에 기록되어 있으며, 현재도 저택 터가 존재한다. 『운요군실기』와 『고태평기』에서는 와니부치지 기슭(현 시마네현 이즈모시 벳쇼초)에서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저택이 있던 곳이 전해지고 있다.
그 외에 시나노국 미카미성에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으며, 나가노현 미나미아이키촌에는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 공 탄생지 자료관'이 있다.
8. 가계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아버지: 야마나카 미쓰유키 (미카와노카미)
- 어머니: 나미 (낭), 다치하라 쓰나시게의 딸
- 할아버지: 야마나카 사다유키
- 숙부: 다치하라 히사쓰나
- 숙부: 야마나카 노부나오
- 정실: 지아키 (다카마쓰인), 가메이 히데쓰나의 장녀
- 장남: 야마나카 유키모토
- 차남: 야마나카 유키노리
- 양녀: 도키코 (에이주인, 에이주인) (가메이 고레노리의 부인)
- 가메이 히데쓰나의 차녀
- 차녀: 야에히메 (모리에), 요시와 요시카네의 부인
- 후손: 고노이케 젠에몬
- 후손: 야마나카 도요코
- 후손: 라피스 라줄리 (가수)
9. 묘소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묘소는 일본 각지에 여러 곳 존재하며, 이는 그의 비극적인 최후와 후대의 추모를 반영한다.
- 아이노와타리의 묘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 오치아이초 아베)
유키모리는 빗추 마쓰야마에 주둔하던 모리 데루모토에게 보내지던 도중 아이노와타리에서 살해되었다. 쇼토쿠 3년(1713년) 10월, 유키모리의 죽음을 애도한 마쓰야마 번사 마에다 이치노신 도키무네와 사사키 군로쿠가 이 땅에 묘비를 건립했다. 비문에는 "아마고 10용사, 동료 중 가장 뛰어났으나 뜻을 펼치지 못하고 시대를 만나지 못했다. 충성스러운 간과 의로운 담, 여기에 세우고 여기에 봉한다. 특별한 공훈과 위대한 업적은 천 년에 걸쳐 향기롭게 전해지리라. 마에다 도키무네 삼가 새기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간센지 경내의 묘 (오카야마현 다카하시시 오치아이초 아베)
유키모리의 유해는 조동종 간센지의 주지 산규 화상이 거두어 이시가네도(세이코도)에 매장되었다고 전해진다. 절 안에는 유키모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그의 법명은 '고쇼인 로쿠잔추테키 고지'(幸盛院鹿山中的居士일본어)이다. 또한 메이지 35년(1902년)에는 제14대 긴치 소에이 스님이 새로운 묘비를 건설했다. 법명도 추증되어 '고쇼인덴 로쿠잔추테키 다이코지'(幸盛院殿鹿山中的大居士일본어)가 되었다.
- 다이토쿠지 기타구 무라사키노 다이토쿠지초)
간포 3년(1743년) 5월 22일, 유키모리의 자손인 오사카 상인 고노이케 가문 당주를 비롯한 18명이 건립했다. 고노이케 가문은 선조의 명복을 빌기 위해 에도 시대 중기 간포 연간에 다마린인 안에 위패당을 창건했다. 이 위패당은 '난메이안'(南明庵일본어)이라 칭해지며, 유키모리의 위패도 그곳에 안치되어 있다. 이 난메이안 맞은편 묘소에 유키모리의 묘가 있다. 묘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문은 한문). "아마고 충신 야마나카 유키모리,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강하여 군대의 선봉이었다. 34세에 빗추 아베에서 전사했다. 실로 덴쇼 6년 무인 5월 22일이었다. 자손 일족, 고노이케 18인이 함께 도모하여, 자석을 무라사키노 다마린 선원에 봉헌하고, 먼저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간포 3년 계해 5월 22일. 현 주지 비구 다이류 소조 기록."
- 혼만지 지쓰센인 내 묘 (교토시 가미교구 데라마치도리)
호레키 14년(1764년) 5월 22일, 유키모리의 자손인 야마나카 에이신과 야마나카 잇신이 건립했다. 유키모리의 묘는 본당 옆 묘소 중앙에 위치하며, 주위에 야마나카 일족의 묘비가 있다. 묘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원문은 한문). "아마고 충신 야마나카 유키모리, 어려서부터 용맹하고 강하여 군대의 선봉이었다. 34세에 빗추 아베에서 전사했다. 실로 덴쇼 6년 무인 5월 22일이었다. 자손 야마나카 에이신, 동 잇신이 함께 도모하여, 자석을 광선 유포 야마모토 혼간만조지에 봉헌하고, 먼저 근본에 보답하고, 영원히 보여주기 위함이다. 호레키 14년 갑신 5월 22일. 당산 37세 일시 기록."
- 곤카이코묘지 곤코인 내 묘 (교토시 사쿄구 구로타니초)
곤코인 안쪽 묘소 중앙, 몬주도(문수당)로 통하는 돌계단 입구에 유키모리의 고린토(오륜탑)가 건립되어 있다. 옆에는 가메이 고레노리와 고레노리의 아내(유키모리의 양녀)의 고린토 두 기가 있다. 유키모리의 고린토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운슈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준린인덴 다이요 조료 다이젠조몬, 덴쇼 6년 7월 17일."
- 고쇼지 내 묘 (돗토리현 돗토리시 가노초 가노)
원래는 메이쇼잔 지사이지를 칭하며, 호토쿠 연간(1449년~1452년)에 교아 쇼닌에 의해 개창된 절이다. 위치도 지금의 장소가 아니라 가노 북서쪽 산기슭에 있었다. 분로쿠 원년(1592년), 가노 성주였던 가메이 고레노리가 유키모리의 명복을 빌기 위해 메이쇼잔 지사이지의 주지 쇼요에게 명하여 절을 현재의 장소로 옮기고, 이름도 가노잔 고쇼지로 개칭하여 건설했다. 게이초 13년(1608년)에는 고레노리에 의해 빗추의 조난지에서 유키모리의 유골 몇 조각이 모여져 경내에 유키모리의 묘가 건설되었다. 묘비명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덴쇼 11년 계미 7월 2일, 고쇼지덴 준린 조료 고지를 위해 사몬 렌샤 쇼요 쇼닌 건립." 절 안에는 유키모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법명은 '고쇼지덴 준린 조료 고지'이다.
- 간쿠라지 내 공양탑 (시마네현 야스기시 히로세초 도미타)
게이초 7년(1602년) 7월, 호리오 요시하루의 부인(오쿠가타)이 유키모리의 충의를 기려 간쿠라지 경내에 건립했다. 한때 제2차 세계대전 중 식량 증산의 영향으로 고구마 밭이 되어 경내의 세대 묘지 한구석으로 옮겨졌었다. 절 안에는 유키모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위패 뒷면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덴쇼 6년 무인 7월 17일, 빗추 아베와타리에서 모리 가문에 토벌당함. 간에이 20년 계미 2월, 당산 22세 간요 건립." 법명은 '고쇼지덴 준린 조료 고지'이다.
- 세이칸지 산문 앞 수총 (히로시마현 후쿠야마시 도모초 고치)
빗추 마쓰야마성에서 모리 데루모토의 수급 검시를 받은 유키모리의 수급은 이곳으로 보내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모리 가문에 몸을 의탁하고 있던 아시카가 요시아키가 이곳에 체류하고 있었기에, 그의 수급 검시에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석비는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각문은 없으며, 근처에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수총'이라는 표석이 있다. 절 안에는 유키모리의 위패도 안치되어 있다. 법명은 '고쇼인덴 다이요 조료 다이코지'이다.
10. 야마나카 유키모리를 주제로 한 작품
야마나카 유키모리의 삶은 그의 비극적인 충성심과 불굴의 정신으로 인해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소설
- 이케나미 쇼타로 『영웅 일본 소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문예춘추, 1971년)
- 난조 노리오 『이즈모의 매』 상하권 (문예춘추, 1980년)
- 나카야마 요시히데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도쿠마 문고, 1988년)
- 오타 다다히사 『초승달의 그림자』 (하베스트 출판, 1991년)
- 도몬 후유지 『소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일간공업신문사, 1997년)
- 다카하시 나오키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문예춘추, 1997년)
- 호시 료이치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모리에 도전한 불굴의 무장』 (PHP 문고, 1997년)
- 도고 류 『전국 명도전』 (분슌 문고, 2003년)
- 난바라 미키오 『명장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가도카와 쇼텐, 2007년)
- 고토 류지 『아마고 10용사전 - 붉은 선풍편』 (신일본출판사, 2010년)
- 이누이 미도리오 『오니와 미카즈키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오다!』 (아사히신문 출판, 2013년)
- 쓰루미 이누마루 『역전 격주 우주인 그 이름은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미디어 웍스 문고, 2014년)
- 마쓰모토 세이초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쇼가쿠칸, 2015년)
- 그림책
- 글: 시카노스케를 아이들에게 전하는 모임, 그림: 다마이 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하베스트 출판, 1998년)
- 만화
- 이와타 렌타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유키모리』 (히로세초 관광협회, 2003년)
- 오야마다 미무 『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이야기 - 아마고 재흥기』 (스퀘어 에닉스, 2010년)
- 텔레비전 드라마
- 『질실강건 이키자마』 (2017년, 산인 케이블 비전) - 고바야시 나오키 연기
- 무대
- 운난시 창작 시민 연극 『KIRINJI 신설·야마나카 시카노스케』 (연출: 가메오 요시히로, 2019년)
11. 관련 항목
- 우다 겐지 - 야마나카 가문의 본성
- 사사키 가문
- 교고쿠 가문 - 종가
- 아마고 가문 - 본가이자 주가
- 아마고 요시히사 - 주군
- 아마고 가쓰히사 - 주군
- 아마고 10용사 - 아마고 가신단
- 아마고 3걸 - 아마고 가신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