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야노 히로타케(矢野 博丈, 矢野 博丈야노 히로타케일본어)는 1943년 4월 19일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나 2024년 2월 12일 80세의 나이로 사망한 일본의 기업인이자 대형 할인 소매 체인 다이소의 창립자이다. 그는 트럭을 이용한 이동 판매 사업에서 시작하여 '100엔 균일가 정책'이라는 혁신적인 비즈니스 모델을 도입, 다이소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그의 경영 철학은 겸손함과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 그리고 직관과 경험에 기반한 실행 중심의 스타일로 특징지어진다. 야노 히로타케는 일본의 디플레이션 경제를 상징하는 '백엔숍'이라는 새로운 소매업 형태를 정착시키고 전 세계로 확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공로로 '1달러숍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2. 생애
야노 히로타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며 9번의 이직과 한 번의 야반도주, 한 번의 화재를 겪었다고 스스로 이야기했다.
2.1. 출생 및 유년 시절
야노 히로타케는 본명인 구리하라 고로(栗原五郎)로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그는 8남매 중 막내인 다섯째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와 두 형제는 모두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히로시마 은행의 전신 중 하나인 야마오카 은행의 딸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반년 후, 야노의 가족은 아버지의 고향인 히가시히로시마시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히로시마 시내 중심가에서 의원을 개업했지만 가난했으며, 야노는 주오대학교 2부에 진학하면서도 빈곤으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2.2. 교육 및 초기 활동
히가시히로시마 시립 구바 초등학교를 졸업한 후 히로시마 시의 신카와바 거리에 있는 히로시마 시립 고쿠타이지 중학교를 거쳐 히로시마현립 히로시마 고쿠타이지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 그는 복싱에 열중하여 히로시마현 대표로 선발되었고, 1964년 1964년 도쿄 올림픽 밴텀급 강화 선수 훈련 캠프에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그의 상대 중 한 명은 아마추어 페더급 챔피언이자 1964년 도쿄 올림픽 출전 후보였던 가와이 데쓰로였다.
아버지는 그가 과학이나 공학 관련 학과를 공부하여 좋은 직업을 가질 경우에만 대학에 보낼 것이라고 하여 스포츠 장학금을 신청할 수 없었다. 그는 16개 대학의 입학시험에 낙방한 후 주오대학교 야간부 토목공학과에 합격했다. 1967년 주오대학교 이공학부 2부 토목공학과를 졸업하고 공학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졸업 후 취업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학생 시절 야노 가쓰요(矢野勝代)와 결혼했다. 그는 사업 거래에서 '구리하라'보다 '야노'가 더 듣기 좋다고 생각하여 아내의 성씨를 따랐고, '히로타케'라는 이름은 성명학에 따라 개명한 것이다.
2.3. 사업 실패와 재기
졸업 후 취업에 어려움을 겪던 야노는 아내와 함께 장인의 양식업 사업, 즉 방어 양식업을 물려받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지식 없이 사업을 운영했고, 3년 만에 사업은 파산했다. 야노는 형에게 빌린 700.00 만 JPY의 빚(2024년 화폐 가치로 약 1.00 억 JPY에 해당)을 갚지 못하고 1970년 말 어린 아들과 아내를 데리고 도쿄로 야반도주했다. 이 빚은 나중에 도쿄에서 휴지 교환업으로 성공하여 모두 갚았다.
그 후 야노는 여러 허드렛일을 전전했다. 그는 3개월 동안 백과사전을 판매했지만 소질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볼링장에서 일하기도 했고, 골판지와 종이 재활용 회사에서 일하며 빚의 일부를 갚을 수 있었다. 휴지 교환업은 당시 고수익 직업이었고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미국에서 고지가 수입되면서 휴지 교환업이 급격히 사라졌다. 가족은 히로시마로 돌아왔고, 야노는 형의 전속 운전사, 처남이 운영하는 볼링장, 도로 표지판 설치, 일용직 육체노동 등 총 9번의 이직을 거듭했다. 이 경험들이 훗날 다이소 창업의 밑거름이 되었다.
3. 다이소 창업 및 성장
야노 히로타케는 이동 판매 사업에서 시작하여 100엔 균일가 정책을 도입하며 다이소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다.
3.1. 이동 판매 사업
1970년대 초, 야노는 우연히 오사카부의 한 업자가 히로시마현 가와지리정(현 구레시)에서 이동 판매를 하는 것을 보고 관심을 가졌다. 당시 '서킷 상업'이라 불리던 이 이동 판매는 아직 물류 기능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시대에 각지를 돌며 일용 잡화를 판매하는 방식으로 수요가 높았다. 이 사업에는 도제 제도가 있어, 스승에게서 상품 조달 및 판매 방식을 어깨너머로 배웠다.
1972년 3월, 28세의 야노는 히로시마에서 트럭으로 잡화를 이동 판매하는 '야노 상점'을 아내와 함께 창업했다. 히로시마의 자택 겸 창고에서 트럭 한 대를 가지고 부부가 함께 사업을 시작했다. 아내는 훗날 다이소의 조달 책임자가 되었고, 남편 이상으로 유능하며 '사장 그릇'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이동 판매는 이른바 '바타야'(バッタ屋)라고 불리는 판매 방식으로, 도산했거나 자금난을 겪는 기업의 재고품을 싸게 사들여 저가에 판매하는 것이었다. 상품 조달은 도매상에서 현금으로 구매했으며, 때로는 견본품이나 회사 창립 기념품으로 대량 주문 후 남은 '하자 있는 상품'도 취급했다.
야노는 오사카 이쿠노구 쓰루하시 등에 있는 노점상 전문 도매상에서 트럭 가득 상품을 사들여 히로시마에서 판매했다. 상품은 흠집이 있는 B급품이었지만, 언뜻 보기에는 티가 나지 않았다. 수백 엔에 사들인 물건을 1,000~2,000엔에 팔았다. 신사나 농업협동조합, 개인 상점 앞, 공민관 앞 공터 등에서 맥주 상자에 베니야판을 얹거나 파란색 방수포 위에 상품을 담은 바구니를 진열하고 보충했으며, 양동이 또는 금전등록기 대신 못 등을 넣는 공구 상자를 금고 삼아 계산했다. 밤에는 파란색 방수포를 덮고 돌아가는 노점상과 같은 방식의 사업이었다.
미리 전날에 출점할 지역 일대의 각 가정을 한 집씩 방문하여 전단을 우편함에 투입했다. 다음 날 가게를 열어 모여든 손님들에게 수세미, 빗자루, 바구니, 냄비, 일용 잡화 등 생활 필수품을 판매했다. 판매 기간은 길어야 일주일, 짧으면 1~2일이었다. 각지의 장소를 이동하며 이 방식을 계속했다. 동종 업자들은 2년 주기로 서일본을 돌았지만, 야노는 처자식이 있었기 때문에 당일치기가 가능한 히로시마현 내를 주로 돌았고, 이 때문에 같은 장소에 연 4회 방문하기도 했다. 당시 '100엔숍'이라는 개념은 없었지만, 100엔 등 균일가로 판매하는 사업은 이미 존재했다. 야노는 원래 100엔 외의 가격도 매겼지만, 바빠서 라벨을 붙일 시간이 부족해 100엔 균일가로 판매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창고가 비좁아지자 자택 겸 창고를 당시로서는 외곽 지역인 히로시마시 사에키구로 옮겼다.
3.2. 100엔 가격 정책
오늘날 도시 풍경으로 자리 잡은 100엔숍의 대성공적인 비즈니스 모델은 치밀한 계산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1972년 '야노 상점'을 막 창업했을 무렵, 야노는 평소처럼 노점 이동 판매를 나가려 했지만, 날씨가 심상치 않아 비가 올 것 같았다. 비가 오면 노점 장사를 할 수 없기에 "오늘은 그만두자"고 생각했는데, 예상과 달리 날씨가 맑아졌다. 서둘러 트럭에 상품을 싣고 현장에 도착하니, 이미 많은 손님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전단을 뿌려 홍보했기 때문이었다. 손님들이 "빨리 해줘!"라며 재촉하자, 야노는 허둥지둥 짐을 내리고 개점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자 기다리지 못한 손님들이 멋대로 골판지 상자를 열고 상품을 손에 들고 물었다. "이거 얼마야?". 급히 전표를 찾았지만, 상품 수가 너무 많아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그때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온 말이, 훗날 야노의 운명을 결정짓는 한마디가 되었다. "100엔이면 돼!". 그 말을 들은 다른 손님들도 연달아 "이거 얼마야?", "이거 얼마야?"라고 물었다. 확인이 늦어지자 궁지에 몰린 야노가 내뱉은 말이 "이제 전부 100엔이면 돼!"였다. 그 순간부터 손님들의 눈빛이 달라졌고, 상품이 불티나게 팔렸다. '100엔 균일가'에 이토록 큰 흡인력이 있다는 것은 야노에게도 큰 발견이었다. 이후 모든 상품은 100엔이 되었고, 거기서부터 다이소 산업의 100엔 균일가 역사가 시작되었다.
은행과 경영 컨설턴트들은 "이런 장사는 오래가지 못한다. 그만두는 게 좋다"고 충고했다. 야노 자신도 "그렇지"라고 생각했지만, 그날그날 먹고살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장사를 계속했다. 잘 팔리는 상품에 집중하여 상품을 조달하고, 매장 내 품종 수와 창고 재고량을 줄여 효율적으로 판매하는 소매업의 상식에도 일부러 등을 돌렸다. 창업 초기부터 자금난에 시달렸고, 망할 뻔한 적도 있었다。1999년에는 "싼 상품으로는 돈을 벌 수 없는데, 점포를 많이 내는 것은 이상하다. 다이소는 망할 것이다"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은행 지점장에게서 문의가 왔고, 제조업체에서는 현금 결제를 요구하기도 했다.
1970년대 오일 쇼크와 다나카 가쿠에이 내각의 일본 열도 개조론으로 물가가 상승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원가가 계속 오르고, 경유와 같은 차량 연료는 물론, 석유를 원료로 하는 플라스틱이나 스테인리스강 제품의 매입 가격이 10% 상승했다. 전 품목 100엔으로 정한 이상 가격 인상은 불가능했다. 일본 소매업의 변화와 맞물려 동료들은 차례차례 그만두었지만, 야노는 "운도 실력도 없는 나에게는 계속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그날그날 먹고살 수 있으면 된다", "1엔이라도 이익이 나면 된다. 100개를 팔면 100엔이 된다"는 마음으로 이 장사에 매달렸다. 야노와 친했던 와타나베 미키는 "이것은 '바닥'을 경험한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발상으로, 경영 컨설턴트에게는 없는 발상"이라고 말했다.
손님들에게서 듣는 "싸구려 사서 돈 낭비한다"는 말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고, 하루에 세 번이나 들은 적도 있었다. "젠장! 어차피 돈도 못 벌 거면 좋은 물건을 팔아주겠다!"며 이익을 도외시하고 원가를 과감히 올려, 때로는 98 JPY에 사들인 물건을 100 JPY에 팔기도 했다. 그러자마자 손님들의 눈빛이 바뀌어 "와, 이것도 100엔! 이것도 100엔!"이라고 말하기 시작했고, 손님들이 놀라는 모습이 장사를 계속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3.3. 다이소 산업의 확장
1977년 12월, 야노는 "큰 회사를 만들고 싶다, 적어도 사명이라도 훌륭하게"라는 생각으로 '야노 상점'을 계승하는 형태로 '다이소 산업'으로 법인화했다. 직원을 고용하고 트럭도 늘렸지만, 당시에는 전형적인 3K 노동이었다. 창업 초기의 100엔숍은 '싸구려 장사'로 여겨져 사회적 평가가 낮았고, 다이소에는 대졸 신입사원이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 잘 팔리는 장소를 놓고 동종 업자들과의 경쟁이 치열해졌고, 트럭 주차 공간 확보에도 어려움을 겪었다.
슈퍼마켓 처마 밑에서 장사하는 것이 가장 잘 팔렸기 때문에, 야노는 결심하고 히로시마를 기반으로 하는 슈퍼마켓 '이즈미' 본사를 찾아가 직접 매장 판매를 허락해달라고 담판을 지었다. 이것이 성사되어 하루에 100.00 만 JPY의 매출을 올리게 되었다. 예상치 못한 매출액에 이즈미도 놀라 "우리 전속이 되어라"고 제안했다. 간신히 사업이 궤도에 오르려던 때, 히로시마의 자택 겸 상품 창고가 방화로 전소되어 사업을 그만둘까도 생각했지만, 형제들의 지원으로 사업을 재개했다. 1980년, 전국 확장을 염두에 두고 도쿄를 시작으로 각지에 영업소를 설립했다.
이후 이토요카도 기타센주점에도 진출했다. 처음에는 점장에게 "그런 건 팔릴 리 없다, 짐을 도로 가져가라!"는 꾸중을 들었지만, 결국 이 기타센주점에서 하루 130.00 만 JPY의 매출을 올렸고, 이 소문은 이토요카도 본사까지 전해졌다고 한다. 야노는 자신의 가게가 성공한 이유에 대해 "나는 말을 잘 못하니, 상품을 많이 놓아서 상품이 대신 말하게 하자고 생각했습니다. 가게 안에 상품이 넘쳐나면 손님에게 말을 걸지 않아도 손님들이 알아서 상품을 찾아 움직여줍니다. 말을 못 하는 내가 말을 걸어 판매할 필요도 없고, 손님들도 기뻐하니, 편리한 겁니다"라고 말했다. 이동 판매 시절부터 야노가 트럭에 싣는 상품은 다른 업자들의 두세 배나 많았다.
그 후 마이칼(현 이온)이나 다이에이, 유니 등 전국적인 체인점에서도 매장 판매에서 잇따라 실적을 올리면서, 대형 소매점 경영자들 사이에서 다이소와 야노 히로타케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당시 에피소드 중 하나는 슈퍼마켓 매장을 빌려 상품을 진열할 때, 도와주던 슈퍼마켓 직원이 "이거 100엔 아니죠?"라고 몇 번을 설명해도 듣지 않았다는 것이다. 도쿄나 오사카의 이동 판매에서는 원가 20 JPY~30 JPY짜리 물건을 100엔 균일가 상품에 섞어 팔았기 때문에, 상품에 익숙한 직원이나 단골 손님들은 그 차이를 금방 알아챘다. 또한 아이치현의 유니 고난점에서는 "4층 행사장에 당신네 상품만 놓고 가라. 계산은 다른 가게와 함께 우리 쪽에서 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4층까지 손님이 올라올 리 없다고 생각해 정중히 거절했지만, "우리와 거래를 전부 끊겠다"는 협박에 어쩔 수 없이 상품만 놓고 돌아왔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다시 그 가게를 방문하니 점장이 "당신네 100엔 균일가 상품 때문에 손님들이 4층까지 올라옵니다. 역시 당신네 상품이 좋네요"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고 한다. 이렇게 각지의 슈퍼마켓 매장이나 행사장에서도 장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큰 전환점이 찾아왔다. 당시 다이소 산업은 다이에이에 상품의 60%를 납품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카우치 이사오 오너에게 불려가 "앞으로의 신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행사장이 지저분해지니, 다이에이 그룹은 100엔 균일가 행사를 중단한다"는 말을 직접 들었다. 이에 야노는 회사가 망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한 결과, 다이에이 고객이 몰리는 곳에 100엔숍을 만들었다. 이것이 상설 점포 형태의 오늘날 100엔숍의 시작이다. 이러한 신규 사업은 돈이 된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대기업 자본이 진출하여 망하거나 인수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익을 내기 어려운 사업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대기업이 진출하지 않았다. 다이에이도 훗날 88엔숍을 시도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1987년 7월, 본사를 히로시마 자택에서 현재의 히가시히로시마시로 이전했다. '100엔숍 다이소'의 전개에 착수하여 1991년 4월, 첫 직영점을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마루가메마치 상점가에 출점하며 체인점 전개를 본격화했다. 임대료가 싼 유휴 시설을 찾아 빌리는 방식으로 점포를 확장했다. 다이소는 상품 수가 많기 때문에, 가게가 좁든 넓든 임기응변으로 대응할 수 있었다. 건전했던 회사나 업계 선두에 있던 회사가 기울어가는 모습을 지겹도록 봐왔기 때문에 "회사는 망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경영에 임했다. 자만을 싫어하고, 게으름을 경계해왔다.
100엔숍은 거품 경제가 터지고 장기 불황에 돌입한 1990년대 후반부터 급속도로 매출을 늘렸다. 100엔숍은 반쯤 유행이 되어, 행상인이나 사기꾼 같은 사람들도 뒤섞여 들어왔고, 경쟁자도 늘었다. 그러나 선행하는 경쟁사들이 100엔짜리 조악품을 팔 때, 다이소는 '100엔짜리 고급품'을 팔았다. 이 차이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대형 할인점에서 부진한 매장이 있으면, 그 대안으로 다이소가 먼저 후보에 오르게 되었고, 수많은 대형 할인점으로부터 출점 요청이 쇄도했다.
1995년 연매출 233.00 억 JPY, 1998년 연매출 818.00 억 JPY를 기록했다. 1994년 300개였던 점포는 1998년 1,000개를 돌파했다. 한때 한 달에 68개 점포를 출점한 시기도 있었다. 1999년에는 연매출 1000.00 억 JPY를 돌파했고, 이듬해 2000년에는 연매출 2000.00 억 JPY를 돌파했다. 같은 해 '99 벤처 오브 더 이어(비상장 부문)'를 수상했다. 또한 동종 업체의 진입으로 업계가 활성화되었고, 점포망이 전국으로 확대되어 새로운 소매업으로 인식되었다. 균일가라는 회계의 명료함과 생활 잡화 중심의 폭넓은 품목이 지지를 얻어, '햐쿠킨'(百均)이라는 디플레이션 경제를 상징하는 소매업의 새로운 형태를 구축하고 일본에 100엔숍을 정착시켰다.
야노와 친했던 와타나베 미키는 2024년 2월 야노의 서거 소식에 "야노 씨는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쇼핑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었다. 와타미 창업 당시에도 가족이 함께 와서 아버지가 '무엇이든 먹어도 좋다'는 세상을 만들고 싶었다. 큰 것을 창조하는 '다이소'(大創). 경영자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사명에 새긴 명경영자였다"며 애도했다. 2001년 3월 30일에는 NHK-BS1에서 '100엔의 남자 - 유통의 혁명가 야노 히로타케'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되는 등, 대중 매체에 자주 보도되면서 다이소 산업도 급성장했다. 『닛케이 비즈니스』는 야노를 '100엔숍의 혁신가'로 평가했다.
또한 나오키상 작가이자 경제 평론가이기도 한 구 에이칸이 매달 본사가 있는 히로시마에 찾아와 "고향 대만에서도 100엔숍은 인기를 끌 것이 틀림없다. 꼭 하고 싶다"며 적극적으로 제안하여, 2001년 대만 타오위안시에 해외 첫 점포를 열었다. 2017년에는 국내 3,150개, 해외 1,800개 점포를 보유했고, 2023년에는 국내 4,360개, 해외 25개 국가 및 지역에 990개 점포를 가진 업계 최대 기업으로 성장했다. 2023년 2월기 매출액은 5891.00 억 JPY에 달했다. 취급 상품은 약 7만 6,000개 품목에 이른다. 창업 초기 "죽기 전에 연매출 1.00 억 JPY를 달성하고 싶다"고 바랐던 야노의 꿈은 오늘날 다이소 전 점포 합산으로 1시간 만에 달성되고 있다.
4. 경영 철학 및 어록
야노 히로타케는 성공한 기업의 사장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부정적인 발언을 전면에 내세운 독자적인 경영 철학으로 유명하며, 그 독특함이 인터넷 등에서 자주 화제가 되었다. 그가 좋아하는 말은 "축복받지 못한 행복", "어쩔 수 없다", "분수에 맞게", "자기 부정"이다. 특히 '자기 부정'이라는 말을 매우 좋아해서 자주 입에 담았고, 손바닥에 '나는 안 돼'라고 쓴 적도 있다. 기자들이 붙인 별명은 '불행이라는 옷이 몸에 들러붙은 억만장자'였다.
4.1. 경영 방식
야노는 자신의 경영 방식에 대해 "나는 재능이 없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겸손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직관과 경험에 기반한 경영을 중시했으며, 계획보다는 실행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스타일이었다. 2001년 그는 "나는 여러 번 실패했고, 무엇을 시도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 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계속했다"고 말했다. 또한 "나는 똑똑한 사람이 아니다. 재능도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제품을 팔려고 노력할 뿐이다"라고 언급했다. 2016년에는 자신을 "멋지거나 현대적인 경영자"로 보지 않는다고 말하며, "뚜렷한 비전이나 전략이 없고, 그저 시도해보고 직감에 따라 결정을 내리는 것을 좋아한다"고 밝혔다.
그의 바쁜 생활 방식은 2018년 뇌졸중 발병으로 이어졌다. 2018년 야노는 자신의 젊은 아들 야노 세이지를 다이소 사장으로 임명하며, 자신이 너무 늙었고 "시대와 내가 맞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소매 산업이 기술과 컴퓨터를 많이 활용하지만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른바 경제 단체에 참여하지 않았고, 1990년대 무렵까지는 신문이나 경제지 등 잡지 인터뷰도 거의 받지 않아 대중 매체에 잘 등장하지 않았으며, 그의 인물상은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다. 2000년경부터 '시대의 총아' 등으로 언론에 보도되는 일이 늘었고, 2010년대부터는 대중 매체의 취재를 받기 시작하며 각지에서 강연이나 신문·잡지 인터뷰 등도 많아졌다.
그는 창업 이래 일관되게 본사를 히로시마에 두었으며, 도쿄의 경영자들로부터 "도쿄로 나오라"는 말을 자주 들었지만, 본사를 옮길 생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4.2. 주요 어록
- "나는 재능도 운도 없는 인간이라, 신이 열심히 일하는 것 외에 인생의 선택권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 "나는 머리도 나쁘고, 얼굴도 못생겼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나 자신으로는 태어나고 싶지 않다."
- "취재에서도 되도록 말을 많이 하지 않으려 한다."
- "나는 인터넷도 모르고,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다."
- "조달은 격투기다."
- "손님들은 잘 모른다."
- "점포가 늘어나는 것이 무서워서 '내지 마, 내지 마'라고 말해왔다."
- "6년 전까지 '다이소는 망할 것이다'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 "내가 해온 일이 좋았는지 나빴는지는 다이소가 망할 때가 되어야 알 수 있다."
- "아침 조회는 연 3회. 창업 이래 25년간 회의는 제로, 목표, 예산, 할당량을 세운 적이 없다. 경영 계획도 없다. 되는 대로다."
- "흉내 내서 성공한 것은 홈센터, 편의점까지다. 100엔숍에서 성공한 것도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우연은 그렇게 여러 번 일어나지 않는다."
- "인간에게는 미래를 내다보는 힘 따위는 없으니, 우리에게는 경영 계획도 전략도 아무것도 없다. 예산이나 할당량도 없고, 아침 조회조차 하지 않는다."
- "회사가 망하면 자살하려 했다. 30대 시절에는 회사가 망하면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아키타현이나 홋카이도의 한적한 온천으로 가서, 아내는 여주인, 나는 목욕탕 청소와 손님 등 밀어주는 일을 하려고 생각했는데, 45세쯤 되니 다루는 금액이 너무 커져서 이제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골프를 쳐도 '저 소나무, 목매달기 좋겠네'라고 생각할 정도였다."
- "지금은 회생법이 있지만, 우리 시대에는 회사가 망하면 사장은 죽고, 생명 보험으로 빚을 갚는 것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으니, 당시에는 나 같은 생각이 당연했다."
- "꿈은 다다미 위에서 죽는 것이다. 어차피 자살하겠지만, 가능하다면 다다미 위에서 죽고 싶다. 그것이 꿈이다."
- "이전에 미즈호 은행 총재와 식사를 함께 했을 때, '앞으로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폐를 끼칠 수도 있다'고 전했다."
- "새로운 점포는 직원들이 결정하고 만들었다. 나는 도저히 이런 가게를 만들 수 없다."
- "급성장한 세리아나 캔두 덕분에 '망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그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에 회복할 수 있었다."
5. 말년 및 평가
야노 히로타케는 말년에 건강 문제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으며, 100엔숍 산업의 혁신가로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5.1. 건강 문제 및 후계
야노는 2018년 뇌졸중을 앓았다. 같은 해 그는 자신의 젊은 아들 야노 세이지를 다이소 사장으로 임명하며 사업에서 물러났다. 그는 자신이 너무 늙었고 "시대와 내가 맞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소매 산업이 기술과 컴퓨터를 많이 활용하지만 자신은 그럴 능력이 없다고 밝혔다.
5.2. 수상 및 인정
2019년에는 EY 올해의 기업가상 일본 국가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는 '100엔숍의 혁신가'로 평가받았으며, 2001년 3월 30일에는 NHK-BS1에서 '100엔의 남자 - 유통의 혁명가 야노 히로타케'라는 제목으로 특집 방송되는 등 여러 차례 언론에 조명되었다. 2000년에는 기업가 네트워크 및 기업가 클럽 주최 '연간 우수 기업가상'을 수상했다.
5.3. 사망 및 유산
야노 히로타케는 2024년 2월 12일 심부전으로 8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소식은 같은 달 19일에 알려졌다. 사후 날짜로 정5위에 추서되었고, 욱일중수장이 추증되었다.
그는 세계적으로 사업을 확장한 공로로 '1달러숍의 선구자'로 평가받으며, CNN(미국), BBC(영국), 조선일보(대한민국) 등 해외 언론에서도 그의 부고가 보도되었다. 야노 히로타케는 "가격을 신경 쓰지 않고 쇼핑할 수 있는 문화"를 창조하며 일본 및 세계 소매 산업과 소비자 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회사명 '다이소'(大創)는 '큰 것을 창조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는 그가 경영자로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가치를 사명에 새긴 것이라고 평가받는다.
6. 개인사
야노 히로타케는 아내 야노 가쓰요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
- 장남: 야노 히사카즈(矢野寿一) - 나라현립의과대학 미생물감염증학 교수.
- 차남: 야노 세이지(矢野靖二) - 2018년 3월부터 다이소 산업 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