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앨리스 마리 코치먼 데이비스(Alice Marie Coachman Davis, Alice Marie Coachman Davis앨리스 마리 코치먼 데이비스영어, 1923년 11월 9일 ~ 2014년 7월 14일)는 미국의 육상 선수로, 높이뛰기를 전문으로 활약하며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녀는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높이뛰기 금메달을 획득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코치먼의 업적은 당시 만연했던 인종 차별과 성별 제약을 극복하고 후대의 흑인 여성 선수들에게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깊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2. 어린 시절과 교육
앨리스 코치먼은 1923년 조지아주 올버니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인종과 성별로 인한 제약 속에서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키웠다. 그녀는 정식 훈련 시설이나 조직적인 스포츠 활동에 접근하기 어려웠지만, 자신만의 방식으로 훈련하며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2.1. 어린 시절과 가정 환경
앨리스 코치먼은 1923년 11월 9일, 미국 조지아주 올버니에서 프레드와 에블린 코치먼 부부의 열 자녀 중 다섯째로 태어났다. 그녀가 성장하던 시기 조지아주는 인종 차별이 매우 심했던 곳으로, 코치먼은 피부색 때문에 정식 육상 훈련 시설을 이용하거나 조직적인 스포츠 활동에 참여할 수 없었다. 또한, 당시 여성의 스포츠 참여에 대한 광범위한 반대 역시 그녀의 훈련에 큰 장벽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코치먼은 좌절하지 않고 집 근처의 흙길을 맨발로 달리거나 직접 만든 장비를 사용하여 점프 연습을 하는 등 독자적인 방식으로 훈련하며 기량을 갈고닦았다.
2.2. 교육 과정
코치먼은 먼로 스트리트 초등학교에 다녔으며, 5학년 담임 교사인 코라 베일리와 이모 캐리 스프리의 격려를 받으며 스포츠에 대한 열정을 이어갔다. 부모님은 스포츠 활동에 대해 다소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녀의 재능은 점차 빛을 발했다. 1938년 매디슨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육상팀에 합류했고, 해리 E. 래시 코치의 지도를 받으며 선수로서의 기량을 더욱 발전시켰다. 1년 만에 그녀의 재능은 앨라배마주 터스키기 연구소의 주목을 받기에 이르렀다.
1939년, 16세의 나이에 코치먼은 장학금을 받고 터스키기 예비학교에 입학했다. 장학금 수혜 조건에는 학업과 훈련 외에 스포츠 시설 청소 및 유지 보수, 유니폼 수선 등의 업무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6년 터스키기 연구소에서 양재학 학위를 취득한 후, 이듬해 올버니 주립대학교로 편입하여 학업을 계속했다. 1949년 올버니 주립대학교에서 가정 경제학 학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과학을 부전공했다. 졸업 후에는 교사이자 육상 강사로 활동하며 교육 분야에 헌신했다.
3. 육상 경력
앨리스 코치먼은 공식적인 훈련 환경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재능과 노력으로 국내외 대회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거두었다. 특히 그녀의 독특한 점프 스타일은 많은 이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3.1. 초기 경력 및 AAU 대회
터스키기 예비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코치먼은 아마추어 육상 연맹(AAU) 주최 전국 여자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대학 및 전국 높이뛰기 기록을 경신했다. 당시 그녀는 맨발로 경기에 임하며 놀라운 기량을 선보였다. 그녀의 독특한 점프 스타일은 직선 점프와 서부 롤 기술을 결합한 형태였다.
코치먼은 1939년부터 1948년까지 AAU 실외 높이뛰기 선수권 대회를 지배하며 10년 연속 전국 챔피언십 우승을 차지했다. 높이뛰기 외에도 50m 달리기, 100m 달리기, 400m 계주에서도 전국 챔피언십을 획득했다. 또한, 터스키기 대학교 여자 농구팀의 가드로서 3차례 컨퍼런스 챔피언십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그녀는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1940년과 1944년 올림픽 경기가 취소되면서 국제 무대에서 기량을 펼칠 기회를 얻지 못했다. 스포츠 기자 에릭 윌리엄스는 "만약 그녀가 취소된 올림픽에 참가했더라면, 우리는 아마 그녀를 역대 최고의 여성 선수로 이야기했을 것"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3.2. 올림픽 출전 및 금메달 획득
코치먼이 국제 무대에서 경쟁할 첫 기회는 1948년 런던에서 열린 1948년 하계 올림픽이었다. 그녀는 높이뛰기에서 0.1 m (5 in)를 뛰어넘어 16년 묵은 기존 기록을 NaN 경 m (NaN 경 in) 경신하며 미국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높이뛰기 결승전에서 코치먼은 첫 시도에서 1.68 m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그녀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던 영국의 도로시 타일러는 코치먼과 같은 기록을 냈지만, 두 번째 시도에서야 성공했다. 이로써 앨리스 코치먼은 1948년 올림픽 육상 종목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유일한 미국인 여성이 되었다. 그녀의 금메달은 당시 영국의 조지 6세 국왕에 의해 직접 수여되었다. 이 금메달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한 역사적인 순간으로 기록되었다.

3.3. 기타 종목에서의 성과
코치먼은 높이뛰기 외에도 다양한 육상 종목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다. 그녀는 실내외 50m 달리기와 실외 100m 달리기에서 강한 모습을 보였다. 특히 터스키기 대학교를 대표하여 1941년과 1942년에는 400m 계주에서 전국 선수권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다. 육상 외에도 농구 선수로서 터스키기 대학교 여자 농구팀에서 가드로 활약하며 팀의 3차례 컨퍼런스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다. 이는 그녀가 단순히 높이뛰기뿐만 아니라 여러 스포츠 분야에서 다재다능한 재능을 지녔음을 보여준다.
4. 올림픽 이후의 활동 및 인정
올림픽 금메달 획득 후 미국으로 돌아온 코치먼은 곧바로 유명인사가 되었다. 그녀는 해리 S. 트루먼 대통령과 영부인 엘리너 루스벨트를 만났으며, 애틀랜타에서 올버니까지 이어지는 대규모 환영 퍼레이드를 받았다. 또한, 유명 재즈 음악가 카운트 베이시가 그녀를 위한 파티를 열어주기도 했다.
1952년, 코치먼은 코카콜라 컴퍼니의 광고 모델로 계약하며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최초로 국제적인 제품을 홍보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193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 제시 오언스와 함께 빌보드 광고에 등장하며 큰 주목을 받았다. 그녀의 고향 올버니에서는 그녀를 기리기 위해 앨리스 애비뉴(Alice Avenue)와 코치먼 초등학교(Coachman Elementary School)가 명명되었다.
5. 후기 삶과 사망
코치먼의 선수 경력은 24세에 막을 내렸지만, 그녀는 이후 교육과 직업 훈련 프로그램에 헌신하며 사회에 기여했다.
5.1. 후기 활동
선수 경력이 24세에 종료된 후, 앨리스 코치먼은 남은 생애를 교육 분야와 직업 훈련 프로그램(Job Corps)에 헌신했다. 그녀는 교사이자 육상 강사로서 활동하며 젊은 세대에게 지식과 스포츠 정신을 전달하는 데 힘썼다. 특히 직업 훈련 프로그램을 통해 소외 계층의 청소년들이 기술을 배우고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데 주력하며, 교육을 통한 사회 발전이라는 가치를 실현하고자 했다.
5.2. 사망
앨리스 코치먼은 2014년 7월 14일, 고향인 조지아주 올버니에서 심정지로 사망했다. 사망 몇 달 전부터 호흡기 문제로 고통받았으며,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던 중 뇌졸중을 겪기도 했다. 그녀는 첫 번째 남편 N. F. 데이비스와의 결혼에서 두 자녀를 두었으나 이혼했으며, 두 번째 남편 프랭크 데이비스는 그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6. 유산 및 평가
앨리스 코치먼은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넘어, 스포츠계와 사회 전반에 걸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인종과 성별의 장벽을 허물고 후대 흑인 여성 선수들에게 영감을 준 선구자로서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6.1. 명예 및 수상
앨리스 코치먼은 그녀의 뛰어난 업적과 선구자적 역할로 인해 수많은 명예와 상을 받았다. 주요 수상 및 명예 헌액 내역은 다음과 같다.
- 1975년: 미국 육상 명예의 전당 헌액
- 1979년: 조지아 스포츠 명예의 전당 헌액
- 1996년: 애틀랜타에서 열린 1996년 하계 올림픽 기간 중 '가장 위대한 올림피언 100인' 중 한 명으로 선정
- 1998년: 알파 카파 알파 여성 사교 클럽 명예 회원으로 헌액
- 2002년: 전미 여성 역사 프로젝트 선정 '여성 역사의 달' 명예 수상자
- 2004년: 미국 올림픽 명예의 전당 헌액
6.2. 사회적 영향 및 평가
앨리스 코치먼은 인종 및 성별 장벽을 극복하고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으로서 최초로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함으로써 스포츠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그녀는 에블린 애시포드, 플로렌스 그리피스 조이너, 재키 조이너-커시와 같은 후대 아프리카계 미국인 육상 스타들에게 길을 열어준 선구자로 인정받고 있다. 실제로 그녀가 올림픽에서 뛰어난 기량을 선보인 이후, 미국 여자 올림픽 육상팀의 대다수를 흑인 여성 선수들이 차지하게 되었다. 코치먼은 이에 대해 "나는 그들 모두에게 문을 열어주었다고 생각한다"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든 아니든, 흑인으로서 이러한 일들을 해낼 수 있었던 누군가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녀의 삶과 업적은 단순히 스포츠 기록을 넘어, 사회적 불평등에 맞서 싸우고 변화를 이끌어낸 인권 운동의 중요한 상징으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