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앙리 무아상의 생애는 어린 시절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화학 분야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과정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의 교육과 경력은 식물 생리학에서 시작하여 무기화학으로 전환되었으며, 이는 플루오린의 분리라는 위대한 업적으로 이어졌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무아상은 1852년 9월 28일 파리에서 동부 철도회사의 하급 직원인 프랑시스 페르디낭 무아상과 재봉사인 조세핀 아메랄딘 미텔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유대인 혈통이었고, 아버지는 아니었다. 1864년, 그의 가족은 모로 이사했으며, 그는 그곳의 지역 학교에 다녔다. 이 시기에 무아상은 견습 시계공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1870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으로 인해 무아상 가족은 다시 파리로 돌아왔다.
무아상은 대학 진학에 필요한 정식 학위(grade universitaire그라드 유니베르시테르프랑스어)를 받을 수 없었으나, 1년 동안 군 복무를 마친 후 파리 고등 약학 학교에 입학했다. 1872년 파리의 한 화학자 밑에서 일하면서 비소 중독자를 구해내는 경험을 한 후 화학 연구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처음에는 국립 자연사 박물관의 에드몽 프레미 연구실에서, 이후 고등연구실습원의 피에르 폴 데에랭 연구실에서 공부했다. 특히 데에랭은 그에게 학문적 경력을 추구하도록 설득했다. 그는 몇 차례의 실패 끝에 1874년에 대학 진학에 필수적인 바칼로레아 시험에 합격했다. 또한 1879년에는 고등 약학 학교에서 1급 약사 자격을 취득했고, 1880년에는 박사 학위를 받았다.
1.2. 학문적 경력
무아상은 고등 약학 학교에서 빠르게 승진하여 조교수, 선임 시연 강사를 거쳐 1886년에는 독성학 교수가 되었다. 1899년에는 무기화학 학과장으로 임명되었고, 이듬해에는 루이 조제프 트루스트의 뒤를 이어 파리 대학교의 소르본 무기화학 교수가 되었다. 파리에서 활동하는 동안 그는 화학자 알렉상드르 에타르와 식물학자 바스크와 친분을 쌓았다.
무아상은 1903년에 동위원소 풍부도 및 원자량 위원회의 위원으로 선출되어 사망할 때까지 재직했다. 그의 광범위한 경력 동안 300편이 넘는 논문을 발표했으며, 1906년 플루오린 최초 분리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2. 주요 연구 및 업적
앙리 무아상의 주요 연구와 업적은 화학의 여러 분야에 걸쳐 혁신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플루오린 원소의 분리와 고온 연구를 위한 전기 아크로 개발은 그의 과학적 유산의 핵심이다.

2.1. 플루오린의 분리
1880년대에 무아상은 플루오린 화학, 특히 플루오린 자체의 생산에 집중했다. 플루오린 원소의 존재는 수년 동안 알려져 있었지만, 당시까지 이 원소를 분리하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으며, 일부 실험자들은 심지어 시도 중에 목숨을 잃기도 했다. 플루오린은 유리나 귀금속과도 반응할 정도로 활성이 강하고 독성이 맹렬하여 단리(순수한 플루오린 단체를 얻는 것)가 극히 어려웠다. 많은 화학자들이 단리에 도전했지만 실패했으며, 이 과정에서 한쪽 눈을 실명한 무아상을 포함하여 여러 과학자들이 사고를 겪거나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무아상은 자체 실험실이 없어 샤를 프리델 등 다른 화학자들의 실험실 공간을 빌려 사용했다. 그는 그곳에서 90개의 분젠 전지로 구성된 강력한 전지를 이용하여 녹은 삼염화 비소의 전기분해로 생성된 기체를 관찰할 수 있었으나, 이 기체는 삼염화 비소에 다시 흡수되었다.
결국 무아상은 1886년 6월 26일에 플루오린화 수소(HF) 액체에 이플루오린화 수소 칼륨(KHF₂)을 녹인 용액을 전기분해하여 플루오린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플루오린화 수소는 비전도체이므로 이플루오린화 수소 칼륨을 용해하여 혼합물이 전도성을 띠게 한 것이 중요했다. 그는 백금-이리듐 전극을 백금 용기에 넣고 장치를 -50 °C까지 냉각했다. 이로써 음극에서 생성된 수소 기체와 양극에서 생성된 플루오린 기체가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 방법은 현재까지 상업적인 플루오린 생산의 표준 방식으로 남아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는 마르슬랭 베르틀로, 앙리 드브레, 에드몽 프레미 세 명의 대표를 보내 무아상의 결과를 확인하게 했다. 그러나 무아상은 플루오린화 수소에 이전 실험에서 존재했던 미량의 플루오린화 칼륨 불순물이 없었기 때문에 실험을 재현할 수 없었다. 문제를 해결하고 플루오린 생산을 여러 차례 시연한 후, 그는 1.00 만 FRF의 상금을 받았다. 1906년 플루오린을 성공적으로 단리한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수상했다. 이 위대한 업적 이후 그의 연구는 플루오린 화학의 특성 규명에 집중되었다. 그는 폴 르보와 함께 1901년 육플루오린화 황과 같은 수많은 플루오린 화합물을 발견했다.
2.2. 전기 아크로 개발 및 활용
무아상은 전기 아크로의 개발에 크게 기여했으며, 이는 새로운 화합물을 개발하고 제조하는 여러 길을 열었다. 그는 1900년까지 220 암페어와 80 볼트의 대전력으로 3500 °C의 온도에 도달하는 전기 아크로를 개발했다。

무아상은 또한 이 전기 아크로를 이용하여 다양한 원소의 붕화물과 탄화물을 합성했다. 특히 탄화 칼슘의 합성은 아세틸렌 화학의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1897년에 자신의 연구를 담은 저서 Le Four électrique전기 아크로프랑스어를 출판했다.
2.3. 기타 연구 및 발견
무아상은 1874년 데에랭과 함께 식물에서 이산화 탄소와 산소 대사에 관한 첫 과학 논문을 발표했다。이후 식물 생리학을 떠나 무기화학으로 전환했으며, 그의 자연발화성 철에 대한 연구는 당시 프랑스의 가장 저명한 두 무기화학자인 앙리 에티엔 생클레르 드빌과 쥘 앙리 드브레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1880년 사이아노젠과 그 반응을 통한 사이안화물 형성에 대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그의 친구 랑드린이 분석 실험실에서 일자리를 제안했다.
그는 전기 아크로를 사용하여 탄소의 흔한 형태로부터 압력을 가해 합성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려 시도했다. 1893년에 합성 성공을 발표하기도 했지만, 무아상 사후 그의 조수가 무아상을 기쁘게 하기 위해 생성물에 천연 다이아몬드를 몰래 넣었다고 고백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1893년, 무아상은 애리조나주 캐니언 디아블로 근처 운석 분화구에서 발견된 운석 파편 연구를 시작했다. 이 파편들에서 미량의 새로운 광물을 발견했고, 광범위한 연구 끝에 무아상은 이 광물이 탄화 규소로 이루어졌다고 결론지었다. 1905년, 이 광물은 그의 이름을 따서 모아싸이나이트라고 명명되었다.
3. 개인 생활
무아상은 1882년 레오니 루강과 결혼했으며, 1885년에는 아들 루이 페르디낭 앙리를 두었다.
4. 수상 및 영예
앙리 무아상은 그의 과학적 업적을 인정받아 여러 중요한 상과 영예를 얻었다.
- 1896년: 데비 메달
- 1898년: 엘리엇 크레슨 메달
- 1903년: 호프만 메달
- 1906년: 노벨 화학상
노벨 화학상 수상 당시 그는 러시아의 드미트리 멘델레예프와 후보로 경합했는데, 단 한 표 차이로 무아상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그는 왕립학회와 런던 화학회의 특별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코망되르를 수훈했다.
5. 사망
무아상은 1907년 2월 20일, 스톡홀름에서 노벨상을 수상하고 돌아온 직후 파리에서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그의 죽음은 급성 충수염 때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플루오린과 일산화 탄소에 반복적으로 노출된 것이 그의 죽음에 기여했다는 추측도 있다. 그는 사망 당시 54세였다.
6. 영향 및 평가
앙리 무아상은 플루오린 원소의 성공적인 분리라는 역사적인 업적을 통해 화학 분야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의 플루오린 분리 방법은 오늘날에도 상업적 생산의 표준으로 사용될 만큼 획기적이었다. 또한 그가 개발한 전기 아크로는 고온 화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이를 통해 다양한 붕화물과 탄화물의 합성이 가능해졌다. 특히 탄화 칼슘의 합성은 아세틸렌 화학의 발전에 중요한 기반을 마련했다.
무아싸이나이트의 발견과 같은 기타 연구 성과들은 그의 다재다능한 과학적 재능을 보여준다. 그는 총 300편 이상의 논문을 발표하며 왕성한 연구 활동을 펼쳤다. 그의 연구는 단순히 이론적인 것에 그치지 않고, 산업적 응용 가능성을 제시하며 현대 화학 발전에 실질적인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