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압둘케림 아바스는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활약하며 복잡한 시대에 신장 지역의 미래에 깊이 관여했다. 그의 삶은 이 지역의 정치적 격동기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1.1. 어린 시절과 교육
압둘케림 아바스는 1921년 소련의 프르제발스크(현 키르기스스탄 카라콜)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서신장 아투스 출신이었으나, 1926년 굴자(이닝)로 이주했다. 아바스는 신장 남부의 우치투르판(우시)에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936년 성도인 디화(현 우루무치)에 위치한 신장성 제1중학교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이 지역 최초의 현대적이고 다민족적인 학교 중 하나였다.
아바스는 이곳에서 중국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중국 공산당 당원들이 조직한 반제국주의 단체에 가입했다. 1937년에는 소련에서 망명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사이푸딘 아지지를 만나 그로부터 마르크스-레닌주의 서적을 받았다. 1938년 8월, 아바스는 신장 아카데미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중국 공산주의자인 린지루(Lin Jilu) 정치학 교사 아래에서 공부했다. 린은 아바스에게 중국어와 마오쩌둥의 저작을 가르쳤으며, 아바스는 또한 중국 홍군의 유격전 전술과 대장정에 대해서도 배웠다. 1939년, 그는 아카데미 총장 두충위안이 조직한 이리 여름 견학단에 참여하여 중국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고향 지역을 둘러보았다.
1.2. 초기 활동 및 정치적 성향
당시 신장을 통치하던 소련 친화적인 중국의 성스차이 군벌은 중국 국민정부로 정치적 충성심을 바꾸고, 공산주의 및 친소 활동에 대한 탄압을 시작했다. 이로 인해 아바스의 아버지는 체포되었고, 아바스 본인도 학교에서 쫓겨나 신장 북부 준가르 분지의 사완 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사완에서 그는 마오쩌둥의 에세이 『지구전론』을 위구르어로 번역했다. 1942년, 그는 고향 굴자로 돌아올 수 있게 허락받아 처음에는 이리 여자 고등학교에서 가르쳤고, 이후에는 지방 정부의 통역사로 일했다.
2. 이리 반란 및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압둘케림 아바스는 이리 반란의 핵심 인물로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지도력은 반란의 방향과 공화국 초기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다.
2.1. 반란 조직 및 동기

1944년 4월, 아바스는 영향력 있는 굴자 이맘 엘리한 토레와 라힘잔 사비르 코자와 함께 중국 국민당의 통치로부터 이 지역을 해방시키기 위해 12인으로 구성된 굴자 해방 조직을 결성했다.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아바스는 코르가스로 거처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소련으로부터 지원과 물자를 받았다. 1944년 9월, 성스차이는 다시 소련의 환심을 사려 했으나 중국 국민정부에 의해 신장에서 소환되었다. 성스차이의 소환은 권력 공백을 초래했고, 신장 북부에서는 여러 반란이 일어났다.
1944년 10월, 아바스는 게릴라 부대를 이끌고 굴자로 돌아왔고, 1944년 11월 7일 이리 반란을 일으켰다. 아바스와 소련 고문 피터 로마노비치 알렉산드로프는 6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이리 강의 다리를 점령했다. 다리를 되찾으러 파견된 중국 국민당 군대는 매복 공격을 받았고, 도시와 국민당 증원군 사이의 연결은 효과적으로 차단되었다. 닐카에서 온 다른 반군 병력들도 도시로 진입하여 빠르게 통제권을 장악했다. 소련 공군기와 포병의 지원을 받아 국민당의 거점들이 점령되었다. 굴자를 점령한 후, 혁명군은 다수의 중국 국민당 포로와 한족 주민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2.2.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내 역할
이 혁명은 이슬람주의자, 범튀르크주의 민족주의자,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지지를 받았고, 이리, 타르바가타이(타청), 아산(아러타이)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944년 11월 11일, 혁명가들은 굴자에 동투르키스탄 공화국(ETR)을 설립하고 엘리한 토레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압둘케림 아바스는 내무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장에 범튀르크 정권을 수립하려 했던 이슬람주의자 및 튀르크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아바스는 이 혁명을 모든 민족의 노동 계급에 대한 중국 국민당의 억압과 자본주의적 착취에 맞서는 투쟁으로 간주했다. 그는 굴자에 거주하는 모든 한족을 쿠네스 현의 수용소로 강제 이주시킬 것을 제안한 것에 반대했다. 그는 이리 지역의 한족 주민들을 보호하기 위한 명령을 내렸고, 한족 친구 및 동료들의 가족을 자신의 집으로 옮겨 보호했다. 굴자에서 전투가 중단된 후, 그의 지시에 따라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는 한족 주민들을 지원하기 위한 한족 사무실을 설립하고, 중국어 신문을 발행했으며, 한족 초등학교를 재개하고, 한족 어린이들을 위한 고아원을 설립했다.
1945년 4월 8일, 혁명의 다양한 게릴라 및 파르티잔 부대들이 동투르키스탄 민족군(ETNA)으로 조직되었고, 아바스는 그 정치국장이 되었다.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은 위구르인,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러시아인이 이끌고 회족, 몽골인, 시버족 기병 여단과 일부 한족 신병들로 구성된 다민족 군대였다. 소련 고문과 군인들의 지원을 받아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은 이리 계곡을 넘어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통제권을 확장하기 위한 일련의 공세를 시작했다.
2.3. 남부 공세와 아크수 전투
1945년 7월, 아바스는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의 돌파 작전 중 남부 전선을 이끌고 아크수 방면으로 진격했다. 8월에 아바스의 병력은 이리 계곡과 타림 분지를 연결하는 톈산 산맥의 고개들을 점령했으며, 9월 2일 바이청을, 9월 6일 원쑤를 점령했다.
1945년 8월 14일 중국 국민정부와 소련이 중소 우호 동맹 조약을 체결한 후, 소련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과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에 대한 지원을 중단했다.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정치적 협상력을 높이기 위해 엘리한 토레는 9월 초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에 공격을 가속화할 것을 명령했다.
아바스는 9월 7일 아크수를 포위했지만, 자오한치가 이끄는 중국 국민당 수비대는 맹렬히 저항하여 9월 13일 포위를 뚫어냈다. 아크수 내부에 수감되어 있던 아바스의 동생인 시이티 아바스(Siyiti Abbas)와 다른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치 운동가들은 중국 국민당 당국에 의해 처형되었다. 9월 중순, 아바스는 소련 고문 나시로프(Nasyrov)와 토레의 아들로부터 증원군을 받아 포위를 재개했지만, 몇 주간의 필사적인 전투 끝에 10월 6일 작전을 포기해야 했다. 6일 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과 중국 국민주의자들은 디화에서 평화 회담을 시작했다. 1946년 2월, 그들은 평화 협정에 도달했다.
3. 연합 정부 참여 및 공산당과의 연대
아바스의 정치 경력은 국민당과의 연합 정부 참여, 그리고 궁극적으로 중국 공산당과의 연대 강화로 이어졌다. 이는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신념과 신장 지역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반영한다.
3.1. 신장성 연합 정부 구성
1946년 7월, 중국 국민정부의 장즈중과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에메트잔 카심 간의 추가 협상 끝에 양측은 성 연합 정부를 구성하기로 합의했으며, 장즈중이 주석을, 카심이 부주석을 맡았다. 압둘케림 아바스는 부사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아바스와 카심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의 독립 주장을 유보하기로 합의했다. 엘리한 토레는 신장에서 추방되어 강제로 소련으로 이주되었다. 1946년 12월, 아바스는 난징에서 열린 중국 국회에 신장 대표로 참석했다.


3.2. 중국 공산당과의 접촉 및 조직 통합
난징에 있는 동안 아바스는 옌안 출신의 중국 공산당 대표 둥 비우와 비밀리에 만났고, 중국 공산당의 지원을 요청했다. 그는 신장 공산주의자 동맹이 15,000명의 회원을 가지고 있으며, 그 지도부가 소련 공산당에 가입하려고 했으나 허가를 받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둥 비우는 즉시 저우언라이에게 전보를 보냈고, 저우언라이는 중국 공산당이 신장 공산주의자 동맹과의 협력을 환영하며, 동맹 지도자들의 중국 공산당 가입에 원칙적으로 동의할 것이라고 회신했다. 아바스는 중국 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 문건과 중국 공산당과 연락할 수 있는 무선 장비를 가지고 신장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무선 장비는 신장에서 옌안까지 도달할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여 두 공산주의 집단은 정기적인 통신을 확립할 수 없었다. 신장으로 돌아온 아바스의 지도 아래, 동투르키스탄 혁명당과 신장 공산주의자 동맹이라는 두 마르크스주의 조직은 합병하여 민주혁명당을 결성했다. 아바스는 민주혁명당 중앙위원회의 주석이 되었다.
3.3. 중국 공산당 지지 강화
1947년, 장즈중이 신장성 연합 정부를 떠난 후,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지도자들이 반소적이라고 간주했던 마쑤드 사브리의 주석직 수행으로 동투르키스탄 공화국과 중국 국민주의자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중국 본토에서 중국 국민주의자와 중국 공산주의자 간에 전면적인 내전이 발발하고, 중국 국민주의자들이 오스만 바투르라는 카자흐 군사 지도자를 설득하여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에서 이탈하게 만들었다. 이후, 아바스와 카심은 디화에서 굴자로 돌아와 공개적으로 중국 공산주의자들을 지지했다. 1947년 8월 1일, 그들은 민주혁명당과 굴자의 다른 좌파 단체들을 통합한 신장 평화민주수호동맹(新疆保衛和平民主同盟중국어 (한자))을 설립했다. 카심이 이 단체의 주석을 맡았고 아바스는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2월, 아바스는 마오쩌둥의 인민해방군 포고령과 징계 강령을 위구르어로 동투르키스탄 민족군에 전파했다.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국민주의자에 대한 내전의 전세를 뒤집음에 따라, 아바스는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를 중국 공산당에 더 가깝게 만들었다. 1949년 5월, 그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인민해방군의 성공만이 우리 운동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음을 단호히 주장합니다. 오직 전체 중국 인민의 민족 해방 투쟁의 승리만이 신장 인민의 완전한 자유로 이어질 수 있으며, 그때에야 신장 민족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결책이 도달될 것입니다."
1949년 여름 후반, 류 사오치가 6월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소련 지도자 이오시프 스탈린이 신장을 정치적 수단으로 중국 공산당에 양도하는 것을 돕도록 설득한 후, 덩리췬이 8월 17일 굴자에 도착하여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지도부와 접촉했다. 덩리췬은 아바스와 카심을 만나 마오쩌둥이 베이핑(베이징)에서 열리는 정치 협상 회의에 초대한 사실을 전달했고,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지도자들은 이를 수락했다.
4. 개인사
압둘케림 아바스의 개인사는 그의 정치적, 혁명적 삶과 깊이 얽혀 있으며, 그의 인간적인 면모와 신념을 엿볼 수 있게 한다.
4.1. 첫 번째 결혼과 비극
아바스가 굴자 여자 고등학교에서 근무하던 중, 그는 동료인 양펑이(楊鳳儀중국어 (한자))와 사랑에 빠졌다. 당시 위구르족의 이슬람 신앙 외부 관계에 대한 전통적인 반대와 지역 한족 상인 협회장이었던 양펑이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관계는 이어졌다. 이리 반란 중 아바스는 양펑이의 가족을 자신의 집에서 피신시켰다. 아바스가 병에 걸렸을 때, 양펑이는 40일 동안 그를 간호하여 건강을 회복시켰다.
1945년 봄, 중국 국민주의자와 동투르키스탄 민족군 간의 전투가 격화되면서 양펑이는 극심한 가족 및 사회적 압력을 느꼈다. 4월, 양펑이는 아바스의 권총을 사용하여 자살했다. 그녀는 유서에서 자신이 민족적 경계를 초월한 사람이었지만, 주변에서 벌어지는 잔혹 행위를 견딜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그녀는 그를 위해 죽었으니, 자신의 가족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하며, "나를 위해, 혁명을 위해, 그리고 신장 내 모든 민족의 인민을 위해" 살아가라고 당부했다. 양펑이의 죽음으로 아바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고, 즉시 민간인 살해를 엄격히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4.2. 두 번째 결혼과 자녀
양펑이의 사망 후, 아바스는 1946년 2월 양펑이의 제자였던 뤼수신(呂素新중국어 (한자))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두 명의 아들과 한 명의 딸이 있었다.

5. 사망
압둘케림 아바스는 신중국 수립을 앞두고 발생한 비행기 사고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죽음은 당시 정치적 격변기의 비극을 상징한다.
중국 국가 공식 기록에 따르면, 아바스는 에메트잔 카심, 이샤크 베그 무노노프, 달렐칸 수기르바예프, 뤄즈와 함께 1949년 8월 22일 굴자를 출발하여 베이핑으로 향했다. 그들은 자동차로 알마티로 이동한 뒤, 1949년 8월 23일 노보시비르스크로 비행했으나 악천후로 인해 지연되었다. 베이핑 회의에 참석하는 것을 놓치고 싶지 않았던 대표단은 여정 지속을 고집했으며, 1949년 8월 25일 노보시비르스크를 출발했다. 그러나 1949년 8월 26일, 그들이 탑승한 비행기는 트란스바이칼 지역에서 악천후로 추락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다. 압둘케림 아바스는 당시 28세였다.
추락 소식은 1949년 9월 3일 굴자에 전해졌고, 사이푸딘 아지지는 1949년 9월 7일 또 다른 동투르키스탄 공화국 정부 대표단을 이끌고 베이핑으로 향했다. 이 대표단은 굴자에서 치타로 비행한 후, 만저우리와 선양을 거쳐 기차로 9월 15일 베이핑에 도착했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1949년 8월 25일 이르쿠츠크 근처에서 추락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다른 설은 1949년 8월 27일 모스크바의 루뱐카에서 살해당했다는 주장도 있다.
6. 유산 및 평가
압둘케림 아바스는 그의 생애와 사망에 대한 다양한 해석에도 불구하고, 신장 지역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6.1. 혁명 열사로서의 기념
중화인민공화국에서 아바스는 중국 국민당 정부에 맞선 투쟁의 순교자이자 영웅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유해는 1950년 4월 중국으로 반환되었고, 이후 굴자의 열사 기념 묘지에 재안장되었다. 이 묘지에는 마오쩌둥이 직접 쓴 휘호가 새겨진 비석이 있는데, 마오쩌둥은 아바스와 그의 동료 열사들이 중국 공산주의 혁명에 기여한 공헌을 칭송하며, 베이핑에서 열린 제1차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로 향하던 중 사망한 그들을 애도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6.2. 역사적 평가
압둘케림 아바스의 정치 사상과 신장 지역에서의 역할은 복잡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민족 해방 운동의 지도자를 넘어, 마르크스주의적 관점에서 사회 변혁과 계급 투쟁을 지향했다. 이리 반란 초기 혁명군에 의한 한족 주민 학살이 발생했을 때, 그가 한족 주민 보호 명령을 내리고 친구 가족을 보호하는 등 인도주의적 측면을 보인 것은 그의 이상이 특정 민족의 배타적 이익을 넘어섰음을 시사한다.
그의 죽음과 관련한 다양한 주장들은 신장 지역의 역사가 여전히 복잡한 정치적 해석의 대상임을 보여준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에서는 그를 공산주의 혁명의 중요한 인물로 인정하고 추앙함으로써, 신장 지역의 통합과 혁명 역사를 연결하는 상징적인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아바스의 삶과 활동은 중앙아시아의 복잡한 지정학적 변화 속에서 민족 해방, 사회주의 혁명, 그리고 다양한 민족 간의 관계가 어떻게 얽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평가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