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알브레히트의 출생과 성장은 그의 가계 배경, 특히 호엔촐레른가와 야기에우워 왕조의 복잡한 혈통적 연결을 통해 형성되었다.
1.1. 출생 및 가계
알브레히트는 1490년 5월 17일 프랑켄의 안스바흐에서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후작 프리드리히 1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로,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와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의 딸이었다. 이를 통해 알브레히트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에서 튜턴 기사단을 격파한 유럽 최후의 이교도 통치자이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왕이었던 요가일라의 증손자가 된다. 그의 어머니를 통해서 그는 폴란드계 혼혈 독일인이기도 했다.
알브레히트는 태어날 때 브란덴부르크 후작이라는 직위를 받았으나, 곧 수도원에 입회하여 이 직위는 명목상에 그쳤다. 더구나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알브레히트의 두 형 카지미르 폰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와 게오르크 경건공에 의해 폐위되면서, 알브레히트는 어떠한 영지도 상속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는 호엔촐레른가의 분가인 호엔촐레른-안스바흐 가문의 일원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이자 안스바흐 백작이었으며, 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는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가 작센의 안나와 재혼하여 얻은 첫 아들이었다.
알브레히트 가문의 복잡한 상속 역사는 그의 고조할아버지인 뉘른베르크 변경백 프리드리히 1세에게서 시작된다. 1398년 프리드리히 1세는 사망하면서 아들 요한 3세에게 뉘른베르크 변경백 직위를 물려주고, 영토를 나누어 브란덴부르크-쿨름바흐 백작직을 신설했다. 다른 아들인 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를 위해서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백작직을 신설했다. 그러나 요한 3세가 아들 없이 사망하자,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1세(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뉘른베르크 변경백 작위를 승계했다. 프리드리히 1세는 1440년에 사망하면서 다시 아들 프리드리히 2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에게 선제후직을, 다른 아들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에게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백작직을 물려주었다. 이후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는 형 프리드리히 2세가 1471년에 아들 없이 사망하자 선제후직을 차지했다.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는 안스바흐 변경백 작위는 알브레히트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에게,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작위는 큰아버지 요한 치체로에게 물려주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아버지 프리드리히 1세가 다른 형제들의 쿠데타로 축출되면서 아버지로부터 영지를 상속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튜턴 기사단의 단장직에 전념하게 되었다.
알브레히트의 재혼한 부인 안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는 그의 5촌 조카딸의 딸이었다. 안나 마리아의 부모 또한 근친혼 관계였는데, 그녀의 친아버지 에리히 1세는 알브레히트의 증조부인 선제후 프리드리히 1세의 딸 세실의 친손자였다. 이로 인해 장인 에리히 1세는 알브레히트의 6촌 형이 된다. 장모가 되는 엘리자베트 폰 브란덴부르크는 알브레히트의 4촌 형 요아힘 1세 네스토르의 딸로, 알브레히트보다 20살 연하인 5촌 조카딸이었다.
1.2. 조상
알브레히트의 조상은 다음과 같다.
| 1. 알브레히트, 프로이센 공작 (1490-1568) | |
|---|---|
| 부계 | |
| 2. 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 (1460-1536) | 3. 폴란드의 소피아 야기에우워 (1464-1512) |
| 4. 알브레히트 3세 아킬레스 (1414-1486) | 5. 작센의 안나 (1437-1512) |
| 모계 | |
| 6. 카지미에시 4세 야기에우워 (1427-1492) | 7.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트 (1435-1505) |
| 8. 프리드리히 1세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1371-1440) | 9. 바이에른의 엘리자베트 (1383-1442) |
| 10. 프리드리히 2세 (작센 선제후) (1412-1464) | 11.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레테 (1416-1486) |
| 12. 요가일라 (1362-1434) | 13. 할샤니의 소피아 (1405-1461) |
| 14. 알브레히트 2세 (신성 로마 제국) (1397-1439) | 15. 룩셈부르크의 엘리자베트 (1409-1442) |
1.3. 교육
알브레히트는 성직자로서의 경력을 위해 양육되었으며, 청소년기에는 쾰른 대성당에서 기독교적 규범을 배웠고 주로 쾰른 선제후 헤세의 헤르만 4세의 궁정에서 시간을 보냈다. 헤르만 4세는 그를 쾰른 대성당의 캐논으로 임명했다.
그는 독실한 신앙심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수학과 과학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는 때때로 과학적 이론을 옹호하며 교회의 가르침에 반대하는 주장을 펼쳤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성직자로서의 경력은 교회를 통해 발전했으며, 가톨릭 성직자 기관들은 그의 초기 승진을 지원했다.
보다 활동적인 삶을 추구한 알브레히트는 1508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를 따라 이탈리아를 방문했고, 귀국 후 한동안 헝가리 왕국에서 지냈다.
2. 튜턴 기사단 총장
알브레히트는 튜턴 기사단 총장으로서 기사단의 위상 변화와 폴란드와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해야 하는 도전에 직면했다.

2.1. 총장 선출 및 임기
튜턴 기사단의 총장이었던 작센 공작 프리드리히가 1510년 12월에 사망하자, 알브레히트는 1511년 초 그의 후계자로 선출되었다. 이는 그의 외숙부이자 리투아니아 대공이자 폴란드 국왕이었던 지그문트 1세와의 관계가 1466년 제2차 토룬 조약 이래 폴란드 종주권 아래 있던 동프로이센에 대한 분쟁을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희망 때문이었다.
새로운 총장 알브레히트는 제국과 교황에 대한 자신의 의무를 인식하고 폴란드 왕실에 복종하기를 거부했다. 기사단의 존립을 둘러싼 전쟁이 불가피해 보이자, 알브레히트는 동맹을 확보하기 위해 강력히 노력했고 황제 막시밀리안 1세와 장기간 협상을 벌였다. 폴란드 내 기사단원들의 약탈 행위로 인해 악감정은 1519년 12월 시작되어 프로이센을 황폐화시킨 전쟁으로 절정에 달했다. 알브레히트는 1521년 초 4년간의 휴전 협정을 체결했다.
이 분쟁은 황제 카를 5세와 다른 제후들에게 회부되었으나 해결책을 찾지 못했고, 알브레히트는 전쟁 재개를 대비하여 계속해서 도움을 얻으려 노력했다. 이를 위해 1522년 뉘른베르크 의회를 방문했는데, 그곳에서 종교개혁가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만나 그의 영향으로 프로테스탄티즘에 감화되었다.
알브레히트는 이후 비텐베르크로 가서 마르틴 루터로부터 기사단의 규율을 포기하고 결혼하며, 프로이센을 자신을 위한 세습 공국으로 전환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이 제안은 알브레히트에게 매우 매력적이었고, 이미 그의 일부 친척들 사이에서도 논의되었던 내용이었다. 그러나 신중하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기에, 그는 교황 하드리아노 6세에게 기사단을 개혁하고 루터교 교리를 채택한 기사들을 처벌하고자 한다고 확신시켰다. 루터 또한 이 제안에 그치지 않고,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프로이센인들 사이에 자신의 가르침을 전파하는 데 특별한 노력을 기울였으며, 한편 알브레히트의 형인 게오르크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변경백)는 이 계획을 외숙부인 폴란드의 지그문트 1세에게 제안했다.
2.2. 폴란드와의 관계 및 갈등
튜턴 기사단의 총장이 된 알브레히트에게 주어진 조건 중 하나는 폴란드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튜턴 기사단의 영지가 폴란드 국경에 인접해 있었기에, 기사단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인 그의 외숙부 지그문트 1세 간의 충돌을 해결하려는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폴란드 왕실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면서 폴란드와의 갈등은 심화되었다.
튜턴 기사단원들의 폴란드 내 약탈 행위로 인해 감정이 격화되었고, 결국 1519년 12월 폴란드-튜턴 전쟁이 발발하여 프로이센은 황폐화되었다. 알브레히트는 1521년 초에 4년 기한의 휴전 협정을 얻어냈다. 이 분쟁은 황제 카를 5세와 다른 제후들에게 회부되었으나 해결에 이르지 못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마르틴 루터는 알브레히트에게 기사단을 포기하고 결혼하여 프로이센을 세습 공국으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이는 기사단과 폴란드 왕국 사이의 긴장 관계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알브레히트가 새로운 정치적 지위를 확보할 수 있는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3. 프로테스탄트 개종 및 프로이센 공국 건국
알브레히트의 프로테스탄트 개종과 프로이센 공국 건국은 중세 기사단 국가의 종말이자 근대 세속 국가의 시작을 알리는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3.1. 루터교로의 개종
1522년 뉘른베르크 의회에서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만나 그의 설득으로 알브레히트는 루터교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해 하순, 알브레히트는 비텐베르크를 방문하여 마르틴 루터와 담론했다. 루터는 그에게 가톨릭 교리에 얽매이지 말고 결혼할 것을 권고했으며, 튜턴 기사단국을 세속화하여 자신을 위한 새로운 세습 공국을 건설할 것을 호소했다. 알브레히트는 루터의 제안을 자신의 친척들과 논의했으나 즉각적인 동의를 얻지는 못했다. 루터는 새로운 세속 국가 건설은 신중하게 진행되어야 하며, 만약 프로테스탄트 교리를 채택한 기사는 교황 하드리아노 6세로부터 처벌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알브레히트는 1525년 2월 10일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면서 기사이자 사제 신분에서 벗어나 결혼하여 자녀를 둘 수 있게 되었다.
3.2. 튜턴 기사단 국가의 세속화
1525년 4월 10일, 알브레히트는 외숙부인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로부터 새로운 영지인 프로이센을 창설하고 프로이센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초기에는 지그문트 1세가 공작 작위 수여를 거부했으나, 마르틴 루터의 막후 설득으로 수여식이 거행되었다. 그의 영지는 독일령인 서부 프로이센과 폴란드의 영향력 아래 있던 동부 프로이센이었다.
q=Königsberg|position=right
알브레히트는 자신의 신설 공국에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 '왕의 도시'라는 뜻)라는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프로이센의 수도로 삼았다. 그는 루터교를 국교로 삼았으며, 쾨니히스베르크로 돌아온 뒤 프로테스탄트 개종을 공식 선언했다. 그가 재직했던 튜턴 기사단은 충격을 받았고, 기사들은 노골적인 반대 입장과 개종 철회를 요구했다. 그러나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얻었으며, 개종을 거부하는 동시에 튜턴 기사단의 프로이센 지부 단원들에게 루터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했다. 메멜의 사령관 에리히 폰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등 소수는 끝까지 로마 가톨릭을 유지하며 개종 반대 입장을 고수했다.
알브레히트의 개신교 개종 선언과 폴란드 왕국 제후 임명을 계기로, 튜턴 기사단장 퇴임 후에도 그에게 충성을 맹세했던 튜턴 기사단의 대군행관(Großkomtur), 의무총감(Großspittler), 기사단 재무총감(Ordenstressler), 기사단 의복감(Ordenstrappier) 등 고위 지휘관들을 비롯한 많은 기사들이 신앙을 지키겠다며 알브레히트의 곁을 떠났다. 알브레히트가 사망할 당시 튜턴 기사단에는 55명의 기사만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던 기사들도 알브레히트의 개종에 혐오감을 느끼고 후임 총장인 발터 폰 크론베르크에게 프로이센은 실패한 국가라며 불만을 토로했다.
그는 프로이센 공국을 종교국이 아닌 철저한 세속 국가로 운영했다. 당시 프로이센의 일부 지역에 남아있던 프로이센 토속 신앙 등에 대해서도 허용했다. 이는 기존 유럽의 황제, 국왕, 제후들이 독실한 신앙심에 의해서든 형식적으로나마 로마 가톨릭을 국교로 삼은 관례를 깬 것이었다. 그의 영향을 받아 1526년 튜턴 기사단의 리보니아 지부장이었던 고트하르트 케틀러 역시 쿠를란트 공작이 되면서 자신의 영지를 세속 국가로 운영하게 된다.
알브레히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사법 재판소에 소환되었으나 출두를 거부하여 법적으로 추방되었고, 튜턴 기사단은 새로운 총장으로 발터 폰 크론베르크를 선출했으며 그는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프로이센을 봉토로 받았다. 그러나 당시 독일 제후들이 종교개혁의 혼란, 독일 농민 전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알브레히트에 대한 금지령은 시행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반대 움직임은 곧 사그라들었다.
3.3. 폴란드 왕국에 대한 봉신 서약
지그문트 1세는 프로이센이 폴란드의 봉토가 되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알브레히트의 제안에 동의했다. 1525년 4월 8일 크라쿠프 조약으로 이 합의가 확정된 후, 알브레히트는 2월 10일 지그문트 1세에게 개인적으로 충성 서약을 하고 자신과 후손을 위한 공국을 수여받았다.
알브레히트는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왕국의 봉신이 되는 조건으로 자치권을 요구했다. 그는 자체적인 군대 양성 허용, 폴란드 굴덴 외에 프로이센의 자체적인 화폐 주조권, 그리고 폴란드의 속국이지만 독자적인 외교 활동 수용을 지그문트 1세에게 요구하여 허락받았다. 또한 프로이센의 지역 의회를 설치하여 주민 자치권을 허용했다.
신성 로마 제국 북동부의 서부 프로이센은 제국의 영토였으나, 알브레히트가 공작 작위를 수여받는 대신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봉신임을 공개 선언함으로써 가톨릭을 지지하던 합스부르크가로부터 자신의 영토를 지킬 수 있었다. 지그문트 1세는 자신은 가톨릭 신자이자 가톨릭 국가의 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한 조카 알브레히트를 옹호했다. 그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아닌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봉신이 된 것에는 외숙부-조카간의 개인적인 인연 외에 마르틴 루터의 설득도 크게 작용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를 두고 '크라쿠프의 젖소 거래'라며 비웃었다.
4. 프로이센 공작 통치
프로이센 공작으로서 알브레히트는 행정, 교육, 종교 정책에서 중요한 개혁을 추진하며 공국의 기반을 다졌다.

4.1. 행정 및 통치
알브레히트의 프로이센 통치 초기 몇 년은 비교적 번성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농노들을 해방시켜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켰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지역 귀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무마시켰고, 한동안 궁정 경비도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시안더파와의 종교 분쟁 이후 알브레히트의 통치는 점점 인기가 없어졌다. 더 이상 귀족들을 회유할 교회 토지가 남아있지 않았고, 세금 부담은 무거워졌다.
4.2. 교육 및 학문 진흥
알브레히트는 학문 진흥에도 힘썼다. 그는 칙령을 내려 모든 마을에 학교를 설립하게 하여 해방된 농노와 농노 출신 자녀들에게도 학업의 기회를 부여했다. 1544년에는 일부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재를 투자하여 쾨니히스베르크에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를 설립했다. 이는 신성 로마 제국 내 가톨릭 명문 대학인 크라쿠프 아카데미에 대항하기 위해 설립된 것이며,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이어 독일 내에서 두 번째 루터교 대학교였다.
그는 독일어 교재와 프로테스탄트 교리 문답집의 인쇄 비용을 직접 부담했다. 1549년에는 그의 친구 안드레아스 오시안더를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의 교수로 임명했다. 같은 해에는 천문학 서적의 번역과 발간에도 투자했다. 알브레히트는 천문학자 에라스무스 라인홀트가 편찬한 천문학 저서 "프로이센 표"의 인쇄 비용을 지불했으며, 카스파르 헤넨베르거가 제작한 최초의 프로이센 지도 제작을 후원했다. 또한 1551년에는 안드레아스 헤스를 초빙하여 크리스토프 뢰머의 계획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성 남쪽 성벽을 건설했다. 그는 폴란드에서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공식 지지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코페르니쿠스는 폴란드 본국의 외교관이자 의사로서 알브레히트의 측근들을 직접 진료하기도 했다. 알브레히트는 새로운 달력 제정을 염두에 두고 프로이센 내의 루터교도 천문학자들을 동원하여 코페르니쿠스 체계를 이용한 천문 계산을 작성하도록 지원했으며, 이 계산표는 로마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달력 개혁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쾨니히스베르크 공립 도서관을 설립했다.
4.3. 종교 정책 및 사회 개혁
알브레히트는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고 시민들에게 루터교적 가르침을 교육했다. 알브레히트의 이러한 정책은 1510년 이후 60년간 프로테스탄트 확산의 중요한 원인을 제공했다. 그러나 가톨릭교도와 이교도들에게는 더 많은 세금을 부과했다. 신성 로마 제국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알브레히트가 불법 행위를 자행한다며 비판했다. 알브레히트는 프로이센 지역 가톨릭 교회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지역 귀족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무마시켰다.
그는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 후작인 형 게오르크 경건공의 도움을 받아 프랑켄과 상부 실레시아에 루터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브란덴부르크와 뉘른베르크에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설립을 추진하며 각각 개신교 교구 관리자를 두었다.
4.4. 정치적 활동 및 외교
알브레히트는 제국 정치에서 상당히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1526년 토르가우 연맹에 가입했으며, 1548년 5월 아우크스부르크 잠정령이 발표된 후에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를 전복하려는 프로테스탄트 제후들과 함께 음모를 꾸미는 데 가담했다. 그러나 그는 가난과 개인적인 성향 등 여러 이유로 이 시기의 군사 작전에는 두드러지게 참여하지 않았다.
5. 개인 생활
알브레히트의 개인 생활은 두 차례의 결혼과 그로 인한 자녀들로 특징지어진다.

5.1. 결혼 및 자녀
알브레히트는 1526년 프리드리히 1세 국왕의 딸 도로테아(1504년 8월 1일 - 1547년 4월 11일)와 첫 번째 결혼을 했다. 이는 정치적 결혼으로, 덴마크는 스칸디나비아반도 내에서 루터교도가 많은 국가였다. 둘 사이에는 여섯 자녀가 태어났다.
- 안나 소피아 폰 프로이센 (1527년 6월 11일 - 1591년 2월 6일): 메클렌부르크-귀스트로프 공작 요한 알브레히트 1세와 결혼.
- 카타리나 (1528년 2월 24일 출생 및 사망): 태어나면서 사망.
- 프리드리히 알브레히트 (1529년 12월 5일 - 1530년 1월 1일): 요절.
- 루시아 도로테아 (1531년 4월 8일 - 1532년 2월 1일): 유아기에 사망.
- 루시아 (1537년 2월 3일 - 1539년 5월 1일): 요절.
- 알브레히트 (1539년 3월 1일 출생 및 사망): 태어나면서 사망.
1550년에는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공작 에리히 1세의 딸 안나 마리아 (1532년 - 1568년 3월 20일)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이들은 두 자녀를 두었다.
- 엘리자베트 (1551년 5월 20일 - 1596년 2월 19일): 미혼으로 자녀 없이 사망.
-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 (1553년 4월 29일 - 1618년 8월 18일): 프로이센 공작.
6. 말년과 논란
알브레히트의 통치 후반기는 심각한 종교적, 정치적 분쟁과 재정적 문제로 얼룩졌다.

6.1. 종교 및 정치적 분쟁
알브레히트의 치세 후반기에는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의 칭의론에 대한 신학적 견해가 필리프 멜란히톤의 견해와 달라지면서 쾨니히스베르크 내 추종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곧 도시 전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공작은 오시안더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분쟁의 범위는 곧 확대되었다. 더 이상 귀족들을 회유할 교회 토지가 남아있지 않았고, 세금 부담은 무거워졌으며, 알브레히트의 통치는 인기를 잃었다.
1552년 오시안더가 사망한 후, 알브레히트는 설교자 요한 펑크를 총애했는데, 그는 모험가 파울 스칼리치와 함께 알브레히트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공공 경비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또한 펑크는 알브레히트에게 오시안더의 가르침에 대한 비판을 강요하기도 했다. 이러한 종교적, 정치적 분쟁으로 인한 혼란은 알브레히트의 조기 사망 가능성과 그의 유일한 아들 알브레히트 프리드리히가 아직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섭정을 임명해야 할 필요성으로 인해 더욱 커졌다.
공작은 오시안더의 가르침에 대한 비난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절정은 1566년에 찾아왔는데, 영방 의회가 알브레히트의 사촌인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투스에게 호소했고, 지그문트 2세는 쾨니히스베르크에 위원회를 파견했다. 스칼리치는 도피하여 목숨을 건졌지만, 펑크는 1566년 10월 28일 법원 음모 사건을 계기로 처형되었다. 섭정 문제는 해결되었고, 루터교의 한 형태가 채택되어 모든 교사와 설교자들에게 구속력을 갖는다고 선포되었다.
6.2. 잠란트 반란 사건
알브레히트의 개종 선언과 세속 국가화에 대해서는 오랫동안 반발과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1525년 잠란트 지역에서 농민 시위가 발생했다. 이는 귀족들의 과도한 세금 징수와 무급 노동력 착취, 그리고 알브레히트의 갑작스러운 개종 및 신 국가의 세속화, 튜턴 기사단의 세속화 문제, 알브레히트 및 프로이센 정부의 프로테스탄트 지지 등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카이멘 출신 농부와 샤켄 출신 여관 주인을 지도자로 하는 이들 반란군은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았다.
농민군은 정부에 귀족들의 강제 세금 징수 폐지, 모든 형태의 귀족세 폐지, 세금을 2마르크로 조정, 농민들에게는 1후페의 토지를 무상으로 나눠줄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저항이 귀족들의 난폭함에 대항하는 것이며 알브레히트에게 저항하는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에 알브레히트는 농민군과 직접 회의를 개최하여 농민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현장에서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농민군의 지도자 두 명은 반역죄로 처형되었다. 이후 알브레히트가 농민군의 일부 조건을 수용하면서 농민군은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이 사건 이후 프로이센은 개신교 지역이자 파벌주의가 만연한 지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7. 사망
알브레히트는 사실상 권력을 박탈당한 채 2년을 더 살다가 1568년 3월 20일 타피아우에서 흑사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병에 걸린 지 16시간 만에 재혼한 부인 안나 마리아 폰 브라운슈바이크-뤼네부르크 또한 역병에 감염되어 같은 날 사망했다.
알브레히트는 방대한 양의 서신을 작성했으며, 당대 주요 인물들과 많은 서신을 교환했다. 그의 시신은 쾨니히스베르크 대성당 내에 안치되었다. 그의 무덤은 코르넬리스 플로리스 2세 드 프링트가 설계했다.
8. 유산 및 평가
알브레히트는 종교 개혁 시대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그의 행동은 프로이센의 미래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의 종교적, 정치적 지형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8.1. 긍정적 평가
알브레히트는 마르틴 루터의 사상을 지지한 최초의 독일 귀족이었다. 그는 1544년에 로마 가톨릭의 크라쿠프 아카데미에 대항하는 의미에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교 (알베르티나)를 설립했다. 이 대학은 마르부르크 대학교에 이어 독일 내에서 두 번째 루터교 대학이었다. 그는 모든 도시에 학교를 설립하고 학문 생활을 택한 농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학문 진흥에 기여했다. 이러한 조치는 프로테스탄티즘의 확산에 크게 기여했다. 그는 또한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천문학 계산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후원했다. 그가 세속 국가 모델을 채택하고 운영한 것은 고트하르트 케틀러와 같은 다른 통치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8.2. 비판 및 논란
통치 말년, 알브레히트는 고갈된 교회 토지 대신 세금을 인상할 수밖에 없었고, 이는 농민 반란을 초래했다. 또한 요한 펑크와 파울 스칼리치 등 측근들의 권력 남용은 심각한 종교적, 정치적 분쟁과 혼란을 야기했다. 안드레아스 오시안더의 신학적 견해 차이 또한 도시 내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의 통치 말년에는 사실상 권력을 박탈당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했다.
8.3. 영향
알브레히트의 통치와 정책은 프로이센과 더 넓은 신성 로마 제국의 종교적, 정치적 지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세속적 프로테스탄트 통치의 선례를 확립했다. 그의 교육 개혁은 미래의 학문 발전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
8.4. 기념 및 추모
1551년 안드레아스 헤스는 크리스토프 뢰머의 계획에 따라 쾨니히스베르크 성 남쪽 성벽의 르네상스 시대 정문 위에 알브레히트의 부조를 만들었다. 알베르티나의 원래 캠퍼스 벽에는 작가 미상의 또 다른 부조가 포함되었는데, 검을 어깨에 메고 있는 공작을 묘사한 이 부조는 대학의 상징인 유명한 "알베르투스"였다. 원본은 외부 요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쾨니히스베르크 공립 도서관으로 옮겨졌고, 조각가 파울 킴리츠가 벽에 복제품을 만들었다. 로타르 자우어가 만든 또 다른 버전의 "알베르투스"는 쾨니히스베르크 주립 및 왕립 도서관 입구에 설치되었다.
1880년 프리드리히 로이시는 쾨니히스베르크의 행정 건물인 레기룽스게뵈데(Regierungsgebäude)에 알브레히트의 사암 흉상을 제작했다. 1891년 5월 19일, 로이시는 쾨니히스베르크 성에서 "브란덴부르크의 알브레히트, 마지막 총장, 프로이센 최초의 공작"이라는 비문이 새겨진 유명한 알브레히트 동상을 공개했다. 알베르트 볼프 또한 알베르티나의 새 캠퍼스에 알브레히트의 기마상을 설계했다. 쾨니히스베르크 왕의 문에는 알브레히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알브레히트는 쾨니히스베르크 북부의 마라우넨호프 지역에서 자주 추앙받았다. 1906년에는 그 지역의 주요 도로가 헤르초크-알브레히트-알레(Herzog-Albrecht-Allee)로 명명되었다. 1934년에는 도시 광장인 쾨니히-오토카르-플라츠(König-Ottokar-Platz)가 헤르초크-알브레히트-게데히트니스키르헤(Herzog-Albrecht-Gedächtniskirche, 알브레히트 공작 기념 교회)와 일치하도록 헤르초크-알브레히트-플라츠(Herzog-Albrecht-Platz)로 개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