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앨런 존스 게텔(Allen Jones Gettel영어, 1917년 9월 17일 ~ 2005년 4월 8일)은 "투 건"(Two Gun영어)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미국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배우이다. 그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MLB)에서 뉴욕 양키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시카고 화이트삭스, 워싱턴 세너터스, 뉴욕 자이언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으로 투수로 활약했다. 야구 경력 외에도 서부극 영화에 출연하는 등 짧은 연기 활동을 병행했으며, 은퇴 후에는 농업과 건설 장비 운전사로 일했다. 특히 1951년 뉴욕 자이언츠 선수 시절 사인 훔치기를 인정하여 논란이 되기도 했다.
2. 생애
앨런 게텔은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태어나 켐프빌의 가족 농장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학업을 마친 후 프로 야구 선수로 활동했다.
2.1. 출생 및 유년 시절
앨런 존스 게텔은 1917년 9월 17일 미국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에드워드 게텔과 사라 게텔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버지니아주 켐프빌에 있는 가족 농장에서 성장했다. 그의 아버지는 말을 훈련시키는 일을 했으며, 게텔은 농장에서 말을 길들이는 경험을 쌓았다.
2.2. 학력
게텔은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에 위치한 켐프빌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3. 야구 경력
앨런 게텔은 고등학교 졸업 후 뉴욕 양키스와 계약하며 프로 야구 경력을 시작했고, 여러 마이너 리그 팀과 메이저 리그 팀을 거치며 투수로 활약했다.
3.1. 마이너 리그 경력
1936년 고등학교를 졸업한 앨런 게텔은 뉴욕 양키스와 자유 계약으로 입단 계약을 맺고 양키스의 팜 팀에서 마이너 리그 투수로 뛰었다. 그는 클래스 B 피드몬트 리그 소속의 노퍽 타스에서 프로 데뷔를 했다.
1937년에는 클래스 D 펜실베이니아 주립 협회 소속의 버틀러 양키스에서 24경기에 출전하여 7승 5패, 평균자책점 3.99를 기록했으며, 클래스 D 바이-스테이트 리그 소속의 바셋 퍼니처메이커스에서 4경기에 출전하여 1승 1패, 평균자책점 4.09를 기록했다. 1938년에는 클래스 D 코스탈 플레인 리그 소속의 스노우 힐 빌리스에서 16승 7패를 기록했다. 1939년에는 클래스 B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 소속의 오거스타 타이거스에서 14승 8패, 평균자책점 3.46을 기록했다.
1940년과 1941년에는 클래스 AA 인터내셔널 리그 소속의 뉴어크 베어스에서 뛰었는데, 1940년에는 3승 3패, 평균자책점 3.43을, 1941년에는 12승 9패, 평균자책점 2.98을 기록했다. 1942년에는 클래스 AA 아메리칸 어소시에이션 소속의 캔자스시티 블루스에서 12승 11패, 평균자책점 3.62를 기록했다.
1943년과 1944년에는 노퍽 타스에서 다시 뛰었으며, 1943년에는 11승 11패, 평균자책점 1.38을, 1944년에는 17승 7패, 평균자책점 1.81을 기록했다. 1949년 8월, 워싱턴 세너터스에서 퍼시픽 코스트 리그(PCL) 소속의 오클랜드 오크스로 이적한 후 12경기에서 4승 0패, 평균자책점 3.60을 기록했다. 그는 1950년 시즌에도 오크스와 재계약하여 23승 7패, 평균자책점 3.62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PCL 올스타에 선정되었다.
1951년 7월 27일 뉴욕 자이언츠에서 다시 오클랜드 오크스로 복귀한 후에도 활약했으며, 1953년에는 24승 14패,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하며 오클랜드 오크스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3시즌 연속 PCL에서 이닝 부문 선두를 기록했다. 1956년에는 PCL 소속의 샌디에이고 파드리스에서 뛰었다. 1957년에는 PCL 소속의 할리우드 스타스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팀에 합류하지는 못했다. 1959년에는 사우스 애틀랜틱 리그 소속의 애슈빌 투어리스츠에서 5경기에 출전했다.
3.2. 메이저 리그 경력
앨런 게텔은 1945년 뉴욕 양키스 소속으로 메이저 리그에 데뷔했다. 그는 1945년과 1946년 두 시즌 동안 양키스에서 뛰며 총 15승 15패, 평균자책점 3.84를 기록했다. 1945년에는 아메리칸 리그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11개의 홈런을 허용했다. 1946년 12월 6일, 양키스는 게텔과 할 펙, 진 비어든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보내고, 셔먼 롤러와 레이 맥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1947년, 게텔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1승 10패,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하며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48년 시즌 초반에는 5경기에 출전하여 0승 1패, 평균자책점 17.61로 부진했다. 1948년 6월 2일, 인디언스는 게텔과 팻 시어리를 시카고 화이트삭스로 보내고 밥 케네디를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했다. 시카고로 이적한 후 그는 8승 10패, 평균자책점 4.01을 기록했다. 1949년에는 화이트삭스에서 2승 5패, 평균자책점 6.43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1949년 7월 12일, 워싱턴 세너터스는 화이트삭스로부터 게텔을 웨이버 금액인 1.00 만 USD에 영입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0승 2패, 평균자책점 5.45를 기록했다. 1949년 8월, 세너터스는 이전에 로이드 히틀을 영입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게텔을 퍼시픽 코스트 리그(PCL) 소속의 오클랜드 오크스로 매각했다.
1950년 시즌이 끝난 후, 오클랜드 오크스는 게텔과 레이 노블, 아티 윌슨을 뉴욕 자이언츠로 보내고, 빌 에이어스, 버트 하스, 조 라파타, 웨스 베일리 그리고 12.50 만 USD를 받는 트레이드를 했다. 1951년 자이언츠에서 그는 29경기에 구원 등판하고 1경기에 선발 등판하여 1승 2패, 평균자책점 4.87을 기록했다. 1951년 7월 27일, 자이언츠는 게텔을 다시 오클랜드로 매각했다.
1955년 8월 20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는 오클랜드로부터 게텔을 영입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에서 8경기에 출전하여 1승 0패, 평균자책점 9.00을 기록했다. 게텔은 메이저 리그에서 통산 38승 45패, 평균자책점 4.28을 기록하고 야구계에서 은퇴했다.
3.3. 주요 트레이드 및 논란
앨런 게텔의 야구 경력 중에는 몇 차례의 중요한 트레이드와 논란이 있었다. 특히 1943년 필라델피아 필리스와의 트레이드 분쟁이 대표적이다.
1943년 1월 22일, 뉴욕 양키스는 게텔과 에드 레비를 1.00 만 USD와 함께 필라델피아 필리스로 보내고, 닉 에튼을 영입하는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그러나 게텔은 1943년 시즌 동안 자신의 가족 농장에 머무를 것이라고 밝혔다. 당시 농업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징병이 면제되는 '예비 직업'으로 분류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에드 레비는 미국 선발징병제도에 의해 1-A 등급으로 재분류되어 징집 대상이 되었다. 이에 필리스는 야구 커미셔너인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에게 이 트레이드를 무효화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분쟁은 3월 26일에 해결되었다. 게텔과 레비는 양키스로 복귀했으며, 양키스는 트레이드를 완료하기 위해 톰 패든과 앨 거하우저를 필리스로 보냈다.
3.4. 통산 기록 및 수상
앨런 게텔은 메이저 리그에서 통산 38승 45패, 평균자책점 4.28을 기록하며 은퇴했다. 마이너 리그 경력 중에는 1950년 퍼시픽 코스트 리그(PCL) 올스타에 선정되었으며, 1953년에는 오클랜드 오크스 소속으로 24승 14패, 평균자책점 3.20을 기록하여 구단 역사상 단일 시즌 최다 승리 기록을 세웠다. 또한 그는 PCL에서 3시즌 연속 이닝 부문 선두를 차지하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4. 연기 경력
앨런 게텔은 야구 선수 활동과 병행하여 배우로서도 짧은 경력을 가졌으며, 이는 그의 독특한 별명 "투 건"의 유래가 되었다.
4.1. 별명 "투 건"과 영화 출연
앨런 게텔은 오클랜드 오크스에서 뛰던 시절, 1953년 파라마운트 픽처스에서 스크린 테스트를 받은 후 서부극 배우 활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투 건"(Two Gun영어)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이 별명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경기장에 두 자루의 리볼버를 찬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기도 했다. 1953년 '앨 게텔의 날' 행사에서는 좌익수 위치에서 홈 플레이트까지 말을 타고 서부극 의상을 입은 채 등장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게텔은 진 오트리와 영화 제작 계약을 맺었으며, 1957년 영화 틴 스타에서 작은 역할을 맡았다.
5. 말년 및 은퇴 후
앨런 게텔은 야구와 연기 활동에서 은퇴한 후에도 다양한 직업을 가졌으며, 과거의 논란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야구에서 은퇴한 후 그는 농업을 계속했으며, 버지니아주 버지니아 비치에서 건설 장비 운전사로 일했다. 2001년, 게텔은 1951년 뉴욕 자이언츠의 다른 선수들과 함께 당시 포스트시즌 진출 과정에서 사인 훔치기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게텔은 "모든 타자가 (상대 투수가 던질 공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며, 이것이 자이언츠에게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6. 개인사
앨런 게텔은 결혼하여 세 자녀를 두었다.
7. 사망
앨런 게텔은 2005년 4월 8일 버지니아주 노퍽에서 8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