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오를레앙의 안 마리 루이즈(Anne Marie Louise d'Orléans프랑스어, an maʁi lwiz dɔʁleɑ프랑스어, 1627년 5월 29일 ~ 1693년 4월 5일)는 프랑스의 왕족이자 역사상 가장 부유한 상속녀 중 한 명으로, '위대한 아가씨'라는 뜻의 라 그랑 마드무아젤(La Grande Mademoiselle프랑스어, la ɡʁɑd madmwazɛl프랑스어)이라는 별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녀는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그의 첫 번째 아내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의 외동딸로 태어났다.
안 마리 루이즈는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아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미혼 공주로 불렸으며, 이는 그녀의 삶과 정치적, 사회적 선택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어린 시절부터 루이 14세를 비롯한 유럽 각국의 유력 왕족들로부터 수많은 구혼을 받았으나, 결국 미혼으로 사망하며 방대한 재산을 사촌인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에게 남겼다. 그녀는 특히 프랑스 내전인 프롱드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바스티유 감옥에서 직접 포격을 지시하는 등 대담한 행동을 보여 왕실과의 관계가 악화되기도 했다. 또한 궁정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귀족인 로즌 공작 앙투안 드 코몽과 사랑에 빠져 결혼을 추진하며 당시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기록한 방대한 양의 『회고록』을 남겨 후대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했다.
2. 초기 생애 및 배경
안 마리 루이즈는 프랑스 왕족으로서의 독특한 지위와 막대한 유산이라는 배경 속에서 성장했으며, 이는 그녀의 성격과 삶의 방향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2.1. 출생 및 가족
안 마리 루이즈는 1627년 5월 29일 파리의 루브르 궁전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프랑스 국왕 루이 13세의 살아남은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오를레앙 공 가스통으로, 궁정에서는 전통적인 경칭인 '무슈'로 불렸다. 어머니는 21세의 몽팡시에 여공작 마리 드 부르봉으로, 부르봉가의 몽팡시에 분가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상속녀였다. 마리 드 부르봉은 딸을 낳은 지 5일 만에 사망했으며, 신생아 안 마리 루이즈는 새로운 몽팡시에 여공작으로서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게 되었다. 이 유산에는 다섯 개의 공작령, 오베르뉴 도피네의 영지, 그리고 역사적인 부르고뉴 지방에 위치한 주권 공국인 동브 공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가스통 공작의 장녀였던 안 마리 루이즈는 태어날 때부터 공식적으로 '마드무아젤'이라는 호칭으로 불렸다. 또한 그녀는 프랑스 국왕 앙리 4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숙부인 루이 13세는 그녀를 위해 '프랑스의 손녀'라는 새로운 칭호인 '프티트-피유 드 프랑스'(Petite-Fille de France프랑스어)를 부여했다.
2.2. 유년 시절과 교육
마드무아젤은 루브르 궁전에서 튈르리 궁전으로 옮겨져 왕실 자녀들의 가정교사였던 잔 드 할레의 보살핌을 받으며 읽고 쓰는 법을 배웠다. 그녀는 항상 강한 자존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번은 친할머니인 앙리에트 카트린 드 조아유즈에 대해 묻자 "그분은 나의 할머니가 아니다. 나의 할머니는 여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한다. 그녀는 마리 드 느무르와 앙투안 3세 드 그라몽 원수의 자매들과 함께 성장했다.

마드무아젤은 아버지 가스통 공작과 매우 가까웠다. 가스통은 루이 13세와 그의 수석 고문인 리슐리외 추기경에 대항하는 여러 음모에 연루되어 있었고, 일반적으로 궁정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가스통이 로렌의 마르그리트와 사랑에 빠졌을 때, 루이 13세는 동생에게 결혼 허락을 거부했다. 프랑스와 로렌은 적대 관계였고,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족은 국왕의 허락 없이는 법적으로 결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스통은 1632년 1월 마르그리트와 비밀리에 결혼했다. 루이 13세는 이 사실을 알고 결혼을 무효화하고 두 사람을 궁정에서 추방했다.
어린 시절 마드무아젤은 가정교사와 함께 튈르리 궁전에 살았고, 가스통은 블루아 성에 거주하며 마드무아젤은 그를 자주 방문했다. 아버지의 비밀 결혼 이후 마드무아젤은 2년 동안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1634년 10월 마침내 다시 만났을 때, 7살의 마드무아젤은 "아버지의 품에 몸을 던졌다". 그녀의 대부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아버지의 추방 배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후, 마드무아젤은 추기경 앞에서 거리의 노래와 풍자시를 불렀고, 이로 인해 추기경에게 꾸중을 들었다.
2.3. 초기 결혼 희망과 구혼
1638년 9월 미래의 루이 14세가 태어나자, 마드무아젤은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고 그를 "나의 작은 남편"이라고 불렀다. 이는 루이 13세에게 즐거움을 주었지만, 리슐리외는 그녀의 발언에 대해 질책했다. 반면에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그의 오랜 공모자 중 한 명인 방돔 공작 샤를의 후손인 수아송 백작 루이와 결혼하기를 원했지만,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1643년 마드무아젤의 가정교사 마담 드 생 조르주가 사망하자, 마드무아젤의 아버지는 마담 드 피에스크를 후임으로 선택했다. 마드무아젤은 이전 가정교사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새로운 가정교사를 원치 않아 어색한 학생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마담 드 피에스크를 자신의 방에, 마담 드 피에스크의 손자를 다른 방에 가두었다고 회상했다.
1643년 5월, 루이 13세는 임종 자리에서 마침내 가스통의 용서 요청을 받아들이고 마르그리트와의 결혼을 승인했다. 두 사람은 1643년 7월 파리 대주교 앞에서 결혼했고, 오를레앙 공작 부부로서 마침내 궁정에 영접되었다.
루이 13세의 죽음으로 루이 14세(당시 4세)가 프랑스 국왕이 되었고, 루이 13세의 미망인 안 왕비가 아들의 미성년 기간 동안 섭정을 맡았다. 1646년 5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3세의 아내가 사망하자, 마드무아젤은 페르디난트와의 결혼을 고려했지만, 마자랭 추기경의 영향 아래 있던 안 왕비는 마드무아젤의 간청을 무시했다. 루이 14세(당시 8세)와 그의 남동생 앙주 공작 필리프(당시 6세)은 결혼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안 왕비는 그녀의 오빠인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추기경을 제안했지만, 마드무아젤은 거절했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미혼 공주"는 적절한 결혼 상대를 찾지 못했다.
3. 프롱드의 난 참여
마드무아젤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 중 하나는 프랑스 역사에서 '프롱드의 난'으로 알려진 시기에 그녀가 개입한 것이었다. 이는 '의회 프롱드'(1648년~1649년)와 '귀족 프롱드'(1650년~1653년)라는 두 가지 뚜렷한 단계로 특징지어지는 프랑스 내전이었다.
3.1. 프롱드에서의 역할
의회 프롱드는 파리 고등법원의 사법 관리들에게 부과된 세금에서 비롯되었으며, 이는 납세 거부와 함께 콩데 공 루이 2세 (미래의 '대 콩데')가 파리를 포위하는 반란 인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마자랭 추기경의 영향력 또한 반대 세력의 표적이었다.
1649년 4월 1일 뤼에유 평화 조약으로 의회 프롱드가 끝나고, 궁정은 8월에 성대한 축하 속에 파리로 돌아왔다. 마드무아젤은 천연두에 걸렸지만 병에서 살아남았다. 회복 후 마드무아젤은 '대 콩데'의 원치 않는 아내였던 클레르 클레망스 드 마이에와 친구가 되었다. 두 사람은 보르도에서 함께 지냈고, 마드무아젤은 1650년 10월 도시 포위를 끝낸 평화 협정에 관여했다. 이 일에서의 그녀의 역할은 안 왕비의 눈에 그녀를 '프롱드파'로 보이게 했다.
불확실한 시기에도 불구하고, 클레르 클레망스가 단독(피부병)으로 위독해지자 마드무아젤과 콩데 공 간의 결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마드무아젤은 이 제안을 고려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전히 궁정에서 가장 중요한 여성 중 한 명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고, 그녀의 아버지 또한 콩데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클레르 클레망스가 회복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었다.

1652년에는 또 다른 프롱드, 이번에는 왕족들이 관련된 프롱드가 발생했다. 마자랭은 망명 중이었고 1653년 10월이 되어서야 소환되었다. 마드무아젤의 이름이 붙여진 도시이자 그녀의 아버지 공작령의 수도인 오를레앙은 내전에서 중립을 유지하기를 원했다. 도시의 행정관들은 전쟁이 인근 블레종 지역에 미친 영향을 보았고 같은 운명을 피하고 싶어 했다. 도시는 약탈을 피하기 위해 마드무아젤의 아버지의 의견을 구했다. 가스통은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마드무아젤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오를레앙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하기로 결심했다. 아르트네를 통해 여행하던 중, 마드무아젤은 자신과 국왕이 다른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도시가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라는 통보를 받았다. 이는 마드무아젤이 마자랭을 싫어했기 때문이었다.
마드무아젤이 오를레앙에 도착했을 때, 도시의 성문은 잠겨 있었고 도시는 문을 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문을 열라고 소리쳤지만 무시당했다. 다가오던 뱃사공이 강가에 있는 포르트 드 라 포(Porte de La Faux) 문까지 노를 저어 데려다주겠다고 제안했다. 마드무아젤은 "고양이처럼 기어 올라가" "울타리를 뛰어넘어" 다치지 않도록 배에 올랐고, 문 틈새를 통해 도시로 들어갔다. 그녀는 도시로 들어섰고 승리감에 휩싸여 의자에 실려 오를레앙 거리를 행진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이 "그토록 매혹적인 상황에 처한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5주 동안 머물면서 그녀는 오를레앙에 애착을 갖게 되어 "나의 도시"라고 불렀다. 1652년 5월 파리로 돌아왔다. 파리는 포부르 생탕투안 전투 전야에 다시금 공황 상태에 빠졌다. 마드무아젤은 튀렌이 통제하던 도시에 콩데 공작이 들어갈 수 있도록 1652년 7월 2일 바스티유 감옥에서 튀렌의 군대에 포격을 가했다. 마자랭은 "그 대포로 마드무아젤은 자신의 남편을 쏘았다"고 말했다.
3.2. 정치적 결과와 추방
자신의 생명을 걱정한 마드무아젤은 파리를 떠나 자신의 영지인 생파르조로 피신했다. 그녀는 1657년 다시 궁정에 환영받을 때까지 망명 생활을 했다. 그녀는 마담 드 피에스크와 미래의 누벨프랑스 총독 루이 드 뷔아드 드 프롱트나크의 아내인 마담 드 프롱트나크와 함께 갔다.
4. 궁정 복귀와 후기 생애
정치적 시련 이후 궁정으로 복귀하는 과정, 개인적인 관계, 그리고 후기 생애의 주요 사건들이 그녀의 삶을 형성했다.
4.1. 추방 생활과 재산 관리

생파르조에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는 건물의 상태를 알지 못했고, 따라서 영지의 집사에게 영접받은 후 단느리(Dannery)의 작은 거주지에서 머물렀다. 생파르조로 돌아가기로 결심한 그녀는 다음 4년 동안 그곳에 정착했고, 유명한 건축가 루이 르 보의 형제인 프랑수아 르 보의 지휘 아래 건물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르 보는 생파르조의 외관을 20만 리브르의 비용으로 개조했다. 이 건물은 1752년 화재로 소실되었고 1850년에도 추가적인 피해를 입어, 마드무아젤의 거주지 외관에 대한 모든 증거가 사라졌다. 망명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여전히 블루아 성에 있는 아버지를 방문했다. 생파르조에 머무는 동안, 그녀는 글쓰기에 몰두하여 철자와 문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담 드 푸케롤』(Madame de Fouquerolles프랑스어)이라는 제목의 짧은 전기를 썼다. 마드무아젤은 아버지의 관리 하에 있던 자신의 재정 문제를 살펴보았다. 1652년 성년이 되었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재정 관리에 완전히 정직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그녀의 80만 리브르 부채의 원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동시에 그녀의 할머니인 앙리에트 카트린 드 조아유즈는 마드무아젤을 속여 거짓 명목으로 돈을 서명하게 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이 일에 연루되어 가스통과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1656년, 아버지가 여러 스캔들에서 용서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마드무아젤 자신은 재정적 비행으로 인한 앙금을 잊고 아버지와의 친밀한 관계를 재개했다고 말했다.
4.2. 궁정 복귀와 가족 관계
아버지가 궁정에 다시 환영받으면서 마드무아젤에게도 길이 열렸다. 그녀는 1657년 7월 궁정이 세워진 스당으로 떠났다. 약 5년 동안 가족을 보지 못했던 그녀는 용서와 함께 안 왕비에 따르면 "외모가 좋아졌다"는 칭찬을 받았다.
같은 해 작성된 자화상에서 그녀는 자신이 "뚱뚱하지도 마르지도 않았고" "건강해 보였다. 가슴은 상당히 잘 형성되었고, 손과 팔은 아름답지 않지만 피부는 좋았다..."고 기록했다. 같은 해, 그녀는 1656년 7월 프랑스에 도착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를 만났다. 두 여성은 에손에서 만나 함께 발레를 관람했다. 마드무아젤은 나중에 크리스티나가 "나를 매우 놀라게 했다. [...] 그녀는 모든 면에서 가장 특별한 존재였다"고 말했다.
궁정에서 그녀의 사촌들인 루이 14세와 앙주 공작 필리프는 각각 19세와 17세였다. 마드무아젤이 프롱드에 참여한 것은 루이의 왕비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을 망쳤지만, 앙주 공작은 잠시 그녀에게 구애했다. 마드무아젤은 이 아이디어를 가지고 놀았지만, 공작의 미성숙함에 실망하여 그가 "어린아이처럼" 항상 어머니 곁에 머물렀다고 말했다.
마드무아젤은 1657년 9월 파리에서 병에 걸렸고, 병이 끝날 무렵 기즈 여공작 마리 드 로렌(그녀의 외숙모)으로부터 으 성을 구입한 후 사랑하는 생파르조로 돌아와 크리스마스를 보냈다.
1660년 2월, 가스통은 블루아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그의 장녀로서 마드무아젤은 그의 주요 상속녀였으며, 가스통은 그녀에게 이미 방대한 개인 재산에 더해 상당한 재산을 남겼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한 결과, 마드무아젤은 루이와 그의 새로운 배우자 스페인의 마리 테레즈의 공식 결혼식에만 참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드무아젤은 변장하여 대리 결혼식에 참석했고, 아무도 속이지 못했다. 궁정의 다음 결혼식은 1661년 3월 31일 '무슈'로 알려진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와 잉글랜드의 헨리에타 공주(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와 사망한 잉글랜드 국왕 찰스 1세의 막내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마드무아젤은 궁정의 다른 여러 구성원들과 함께 참석했다.
필리프와 헨리에타는 폭풍 같은 부부 관계를 형성했다. 필리프는 공공연한 양성애자였고 팔레 루아얄에서 남성 연인들과 공개적으로 살았으며, 이는 헨리에타의 불만을 샀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그녀는 루이 14세와 공개적으로 시시덕거렸고 필리프 자신의 연인인 기슈 백작 아르망 드 그라몽을 유혹하기도 했다. 마드무아젤은 1670년에 태어난 필리프와 헨리에타의 막내딸 오를레앙의 안 마리의 대모였다. 1670년 헨리에타가 사망하자, 루이 14세는 마드무아젤에게 헨리에타가 남긴 "빈자리"를 채울 의향이 있는지 물었지만, 그녀는 거절했다.

마드무아젤과 그녀의 이복 여동생 오를레앙의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두 사람은 극장에 가고 마드무아젤의 살롱에 참석하곤 했다.
마르그리트 루이즈는 나중에 1658년 토스카나 대공 코시모 3세 데 메디치가 동맹을 제안했을 때 언니에게 준비를 부탁했다. 마드무아젤은 이 결혼이 성사되도록 도왔는데, 이전의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의 제안은 실패했었다.
처음에는 결혼 전망에 매우 기뻐했던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활기찬 태도는 마드무아젤이 더 이상 토스카나와의 결혼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 후 마르그리트 루이즈의 행동은 예측 불가능해졌는데, 그녀는 사촌인 로렌 공작 샤를 5세와 동반자 없이 외출하여 궁정을 충격에 빠뜨렸고, 샤를은 곧 그녀의 연인이 되었다. 그녀의 대리 결혼은 그녀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고, 그녀는 도망쳐 사냥을 가려 했지만 마드무아젤 자신이 막았다.
1663년, 루이 14세는 다시 마드무아젤에게 결혼 상대를 제안했다. 의도된 신랑은 1656년 포르투갈 왕위에 오른 포르투갈 국왕 아폰수 6세였다. 자존심 강한 마드무아젤은 이 제안을 무시하며, 막대한 수입과 영지를 가진 프랑스에 머물고 싶으며, 알코올 중독자, 발기부전, 마비 환자라는 소문이 있는 남편을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아폰수는 대신 사보이의 마리아 프란시스카와 결혼했다.
이에 분노한 루이는 그녀에게 자신을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생파르조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다. 이 "추방"은 약 1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으 성을 수리하기 시작했으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건강 문제로 루이에게 호소하여 궁정으로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었고, 루이는 그녀에게 이전에 마드무아젤의 이복 여동생 오를레앙의 프랑수아즈 마들렌과 결혼했던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마드무아젤은 이 결혼에 매우 적극적인 듯 보였지만, 카를로 에마누엘레 2세는 그렇지 않았고, 그는 이를 피하기 위해 여러 변명을 했다. 이 제안은 '라 그랑 마드무아젤'에게 마지막 결혼 제안이 되었다.
4.3. 결혼 제안들과 로즌 공작과의 관계
1666년 궁정을 떠나 있던 마드무아젤은 그해 여름 퐁텐블로 궁전에서 마리 테레즈 왕비를 기리기 위해 열린 오락 행사에 참석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 그 오락 행사에는 나중에 로즌 공작 앙투안 드 코몽이 된 기옌 출신의 가난한 귀족이 있었다. 국왕과 가까웠던 그는 "하느님이 만든 가장 작은 남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치와 분명한 "성적 매력"으로 유명했다. 그는 또한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루이 14세와 마리 테레즈 왕비 사이의 결혼 협상에 참여하기도 했다. 매우 고집이 세고 방탕했던 로즌은 마드무아젤이 머리에 붉은 리본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너무 "젊다"고 말했고, 이에 자존심 강한 마드무아젤은 "나의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젊다"고 답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드무아젤은 로즌과 절망적으로 사랑에 빠졌다. 1670년 12월, 그녀는 궁정에서 가장 높은 지위의 여성(루이 14세의 유일한 적법한 딸인 마담 루아얄 다음)으로서 루이 14세에게 로즌과의 결혼 허락을 요청했다. 루이는 궁정의 경악에도 불구하고 허락했으며, 마리 테레즈 왕비, 무슈 그리고 궁정의 여러 구성원들의 불만을 샀다. 왕비와 무슈는 결혼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결혼식 날짜는 1670년 12월 21일 일요일 루브르에서 열리기로 정해졌다. 로즌은 심지어 루이의 정부인 몽테스팡 후작 부인 프랑수아즈 아테나이스에게 왕이 결혼을 승인하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마드무아젤은 나중에 1670년 12월 15일부터 18일까지의 날들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행복한 날들이었다고 말하며 기뻐했다. 그녀는 친구들에게 로즌을 "몽팡시에 공작님"이라고 불렀다.
4.4. 로즌 공작과의 결혼과 별거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반대하는 궁정의 압력으로 루이 14세는 자신의 결정을 번복했고, 12월 18일 약혼은 취소되었으며 이는 자신의 명성을 손상시킬 것이라고 밝혔다. 마드무아젤은 국왕과 마담 드 몽테스팡과의 면담을 요청받았다. 국왕은 그녀에게 자신의 결정을 알렸고, 그녀는 "이 무슨 잔인함인가..!"라고 답했다. 루이는 "왕은 대중을 기쁘게 해야 한다"고 답했고, 그녀가 나중에 "불행한 목요일"이라고 불렀던 그날 마드무아젤의 결혼 희망을 무너뜨렸다.
마드무아젤은 자신의 아파트에 은둔했고, 1671년 초에 로즌이 공식적인 이유 없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다시 나타났다. 그는 바스티유 감옥으로, 그 다음에는 피네롤 요새로 끌려갔으며, 여러 차례 탈출 시도에도 불구하고 1681년까지 그곳에 남아 있었다.
로즌을 석방시키기로 결심한 마드무아젤은 그의 이익에 전념했고, 마담 드 몽테스팡에게 접근하여 왕이 그를 석방하도록 설득하려 했다. 석방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녀는 가장 수익성이 좋은 두 영지인 동브 공국과 으 백작령을 팔아야 했다. 이 작위들은 루이와 몽테스팡의 장남이자 총애받는 아들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에게 주어질 것이었다. 1681년 2월 2일 마드무아젤은 항복하여 두 영지를 팔았는데, 이 두 영지는 그녀에게 개인적으로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마드무아젤은 자신이 로즌의 석방과 그가 자신의 영지에 망명자로서 살 권리만을 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로즌은 1681년 4월 22일 석방되었고, 부르봉 라르샹보에서 조용히 살아야 했지만, 1682년 3월에는 궁정이 아닌 파리의 오텔 드 로즌으로 돌아왔다. 1683년 7월 마리 테레즈 왕비가 사망하기 전까지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슬픔 속에서 일시적으로 다시 함께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마지막 면담을 가졌고, 마드무아젤은 자신의 파리 거주지인 뤽상부르 궁전으로 은퇴하기 전까지 다시는 서로를 보지 못했다.
5. 저술 활동과 개인적 유산
안 마리 루이즈는 방대한 회고록을 통해 자신의 삶과 시대를 기록했으며, 막대한 재산은 그녀의 독립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상징하는 중요한 유산이 되었다.
5.1. 회고록과 개인적 기록
마드무아젤은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글쓰기에 몰두하여 『마담 드 푸케롤』이라는 짧은 전기를 썼다. 또한 그녀는 자신의 삶과 경험을 기록한 방대한 양의 『회고록』(Mémoires프랑스어)을 완성했다. 이 회고록은 그녀의 개인적인 생각과 가치관뿐만 아니라 당시 프랑스 궁정의 생활, 정치적 사건들, 그리고 그녀가 겪었던 시련과 사랑에 대한 솔직한 기록을 담고 있어 후대에 중요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받는다. 그녀는 사망하기 7년 전까지 이 회고록을 완성하는 데 매진했다.
5.2. 재산 관리와 사회적 영향
마드무아젤은 태어날 때부터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으며, 이는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미혼 공주"로 만들었다. 그녀의 재산에는 다섯 개의 공작령, 오베르뉴 도피네의 영지, 그리고 주권 공국인 동브 공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이 재산을 통해 상당한 재정적 독립성을 누렸으며, 이는 그녀가 왕실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프롱드의 난에 참여하거나 로즌 공작과의 결혼을 추진하는 등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의 재산은 때때로 복잡한 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그녀의 재산을 정직하게 관리하지 않아 80만 리브르의 빚을 지게 만들었고, 할머니에게 속아 돈을 양도하기도 했다. 로즌 공작을 석방시키기 위해 가장 수익성이 좋은 영지인 동브 공국과 으 백작령을 팔아야 했던 사건은 그녀의 재산이 정치적 협상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재정적 독립성은 당시 사회 구조 내에서 여성 왕족이 가질 수 있는 특별한 의미를 지녔으며, 그녀의 삶과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6. 사망 및 유산
안 마리 루이즈의 마지막 순간과 장례식은 그녀의 독특한 삶만큼이나 극적이었으며, 그녀의 유산은 후대에 걸쳐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6.1. 사망 및 장례
마드무아젤은 1693년 3월 15일 방광 정지 증상으로 보이는 병에 걸렸다. 로즌은 그녀를 만나기를 요청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마드무아젤은 그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그녀는 1693년 4월 5일 일요일 파리의 뤽상부르 궁전에서 사망했다. 그녀가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프랑스의 손녀'라는 칭호에 따라, 그녀는 4월 19일 파리 외곽의 생드니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생시몽 공작 루이 드 루브루아에 따르면, 그녀의 장례식에서 그녀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미혼 공주"로 언급되었다. 영구차에 안치된 채, 그녀의 내장이 담긴 항아리가 의식 도중 폭발하여 사람들이 냄새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면서 혼란이 발생했다. 결국 의식은 계속되었고, 그 결론은 "[...] 마드무아젤을 희생시킨 또 다른 농담"이었다고 한다.
6.2. 유산 및 역사적 평가
자녀가 없었던 마드무아젤의 막대한 영지는 그녀의 사후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와 그의 아내 팔츠의 엘리자베트 샤를로트, 루이 14세의 서자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 그리고 콩티 공작 루이 아르망 1세 등에게 상속되었다. 특히 동브 공국과 으 백작령은 루이 14세의 서자인 멘 공작 루이 오귀스트 드 부르봉에게 넘어갔다.
안 마리 루이즈는 프롱드의 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왕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로즌 공작과의 사랑을 추구하는 등 당시 여성 왕족으로서는 보기 드문 독립적이고 대담한 행보를 보였다. 그녀의 『회고록』은 17세기 프랑스 궁정 생활과 정치적 격동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일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그녀의 삶은 막대한 부와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던 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그녀는 때로는 변덕스럽고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의 신념과 사랑을 위해 사회적 통념과 왕실 권위에 도전했던 강인한 여성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