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및 배경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는 1798년 11월 27일 케이프 식민지의 그라프-레이네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생애 초기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그는 그라프-레이네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40 km 떨어진 부친의 농장인 드리코펜에서 성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프레토리우스는 1798년 11월 27일 케이프 식민지의 그라프-레이네트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린 시절은 케이프 식민지 동부 변경 지역의 전형적인 농업 환경에서 보냈다.
1.2. 교육
그는 정규 학교 교육을 받지 않고 가정에서 교육을 받았다. 당시 케이프 식민지 동부 변경 지역에서는 학교 교육이 우선순위가 아니었으나, 그는 성경을 읽고 자신의 생각을 글로 쓸 수 있을 만큼 충분히 문학적 소양을 갖추고 있었다.
1.3. 가계 및 혈통
프레토리우스는 케이프 식민지에 처음 정착한 네덜란드 이주민들의 후손이다. 그는 네덜란드 출신의 목사 베셀 슐테의 아들인 요하네스 프레토리우스의 5대손이다. 베셀 슐테는 레이던 대학교의 신학 학생 시절 자신의 이름을 라틴어 형태인 베셀리우스 프라에토리우스(이후 프레토리우스)로 변경했다.
2. 주요 활동 및 업적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는 보어인의 지도자로서 케이프 식민지를 떠나 새로운 정착지를 개척하고, 줄루족과의 충돌에서 승리하며, 영국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보어인의 독립을 쟁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2.1. 나탈 정착과 줄루족과의 충돌
1837년 10월, 프레토리우스는 트레커들을 방문하기 위한 정찰 원정을 떠났고, 결국 케이프 식민지를 영구적으로 떠났다. 그는 모더르피비어 방향으로 향하던 트레킹을 중단하고 나탈의 클라인-투겔라 강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당시 나탈의 보어인들은 헤릿 마리츠가 병으로 사망하고 안드리에스 포트기터가 내륙으로 이동하면서 지도자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
1838년 2월, 줄루족의 왕 딩가네의 명령으로 피에트 레티프와 그의 일행은 협상을 위해 방문한 움궁군들로부의 줄루 크랄에서 무장하지 않은 채 살해당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보어인들은 큰 충격에 빠졌다. 프레토리우스는 1838년 11월 22일 절망에 빠진 트레커들의 주 캠프에 도착했고, 그의 근면함과 철저한 행동은 즉시 신뢰를 얻어 딩가네에 대한 징벌 코만도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838년 12월 16일 새벽, 프레토리우스는 64대의 마차와 함께 470명의 병력을 이끌고 딩가네의 영토로 진격했다. 그들은 은코메 강 옆에서 10,000명에서 15,000명에 달하는 줄루 전사들의 공격에 맞서 승리를 거두었다. 보어인들은 머스킷 소총과 두 문의 소형 대포를 사용했다. 이 블러드 리버 전투에서 줄루족은 약 3,000명의 전사들이 사망한 반면, 보어인들은 사상자가 없었으며,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가 아세가이에 손을 다치는 등 세 명만이 부상을 입었다. 보어인들은 이 승리가 신의 은총으로 이루어졌다고 믿었으며, 그날을 후손들과 함께 기념할 것을 맹세했다. 이 날은 1910년까지 "딩가네의 날"로 기념되었고, 이후 "맹세의 날"로 개칭되었다가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된 1994년 이후에는 보어인들과의 화해를 위한 공휴일로 "화해의 날"로 다시 명명되었다.
2.2. 마판데(Mpande)와의 동맹
1840년 1월, 프레토리우스는 400명의 시민군을 이끌고 딩가네의 이복형제인 마판데가 딩가네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것을 도왔다. 마판데와 프레토리우스는 마콩고 전투에서 딩가네의 군대를 격파했고, 이로 인해 딩가네와 그에게 충성하는 이들은 망명길에 올랐으며, 딩가네는 곧 살해당했다. 이 승리 직후, 프레토리우스는 마판데와의 협력 조건에 따라 나탈 지역의 보어인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음을 선언했다.
2.3. 영국과의 관계 및 갈등
프레토리우스는 영국이 이미 보어인들이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던 나탈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시도에 반대하는 나탈 보어인 파벌의 지도자였다. 1842년, 프레토리우스는 더반에 주둔한 소규모 영국 수비대를 포위했으나, 조시아스 클루트 대령이 이끄는 증원군이 도착하자 피터마리츠버그로 후퇴했다. 이후 그는 보어인들에게 영국 당국과의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결국 영국은 나탈리아를 합병했다.
영국 신민으로 나탈에 남아있던 프레토리우스는 1847년 보어인 농부들에 의해 케이프 식민지 총독에게 그들의 불만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되었다. 그들은 원주민들이 보어인의 토지 소유권에 해가 되는 지역으로 지속적으로 이주하는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었다. 프레토리우스는 총독 헨리 포팅어 경을 만나기 위해 그레이엄스타운으로 갔으나, 포팅어는 프레토리우스를 만나거나 그로부터 어떠한 서신도 받기를 거부했다. 이에 프레토리우스는 자신의 농장을 버리고 영국 당국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심하고 나탈로 돌아왔다.
1848년 1월, 프레토리우스는 상당한 추종자들과 함께 드라켄스버그 산맥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새로 임명된 케이프 총독 해리 스미스 경이 투겔라 강에 있는 이주민 캠프에 도착했다. 스미스는 농부들에게 원주민으로부터의 보호를 약속하며 많은 이주민들이 그곳에 머물도록 설득했다. 프레토리우스는 그곳을 떠났고, 파알 강까지 영국 주권이 선포되자 파알 강 북쪽의 마할리스버그에 거주지를 정했다. 그는 파알 강 양안에 거주하는 시민군들에 의해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다. 윈버그의 보어인들의 요청에 따라 프레토리우스는 7월에 파알 강을 건너 반영국 세력을 이끌고 짧은 반란을 일으켜 7월 20일 블룸폰테인을 점령했다. 8월, 그는 스미스에 의해 붐플라츠 전투에서 패배하고 파알 강 북쪽으로 후퇴했다. 그는 이후 트란스발 공화국 보어인들이 분열된 여러 파벌 중 가장 큰 파벌의 지도자가 되었으며, 포체프스트룸과 루스텐버그의 총사령관이 되었다. 그의 주요 경쟁자는 자우트판스버그의 총사령관인 A. H. 포트기터였다.
2.4. 트란스발 공화국 독립 쟁취
1851년, 오렌지 강 주권 지역의 불만을 품은 보어인들과 바소토족의 족장 모쇼에쇼에 1세는 프레토리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레토리우스는 주권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파알 강을 건너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의 목표는 영국으로부터 트란스발 보어인들의 독립을 인정받는 것이었다. 포기 정책을 결정한 영국 내각은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영국 정부는 붐플라츠 전투 이후 그의 체포에 현상금으로 내걸었던 2000 GBP를 철회했다. 프레토리우스는 샌드 강 근처에서 영국 위원들을 만났다. 1852년 1월 17일, 그들은 샌드 강 협약을 체결하여 영국이 트란스발 보어인들의 독립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2.5. 후기 활동 및 화해
프레토리우스는 파알 강을 다시 건너 3월 16일 루스텐버그에서 포트기터와 화해했다. 포트기터 파벌은 대표되지 않았지만, 두 지도자의 추종자들은 협약을 승인했다. 같은 해, 프레토리우스는 나탈과 새로운 공화국 간의 무역을 개방하기 위해 더반을 방문했다. 1852년에는 베추아날란드를 통한 내륙 도로를 폐쇄하려 시도했으며, 세첼레에 대항하여 서부 국경으로 코만도 병력을 파견했다.
3. 사상 및 이념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의 핵심 사상과 이념은 보어인의 자치와 독립 추구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는 백인 정착민의 권리와 영토 확장을 강력히 옹호했으며, 이는 종종 원주민 부족과의 갈등으로 이어졌다. 특히 블러드 리버 전투에서의 승리는 신의 은총으로 여겨졌고, 이는 보어인 공동체의 종교적 신념과 결합되어 그들의 영토 주장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의 정치적 신념은 영국 통치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목표로 했으며, 보어인들이 자신들의 방식으로 삶을 영위하고 영토를 통제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이념은 남아프리카의 초기 백인 정착 역사와 이후의 인종 분리 정책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4. 개인적인 삶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는 다섯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의 장남인 마르티누스 베셀 프레토리우스는 훗날 트란스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보어인 사회 내에서 그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5. 사망
프레토리우스는 1853년 7월 마할리스버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사망했다. 역사학자 조지 매콜 시얼은 그를 "이주 농부들 중 가장 유능한 지도자이자 가장 완벽한 대표자"로 묘사했다.
6. 유산 및 평가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에서 지울 수 없는 발자취를 남겼으며, 그의 유산은 긍정적 평가와 비판적 관점을 동시에 포함한다.
6.1. 긍정적 평가
프레토리우스는 나탈리아 공화국과 트란스발 공화국(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나탈과 트란스발 지역에서 군사적, 정치적으로 지배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블러드 리버 전투에서 줄루족에 대한 보어인의 승리를 이끌어, 보어인 공동체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855년, 그의 아들 마르티누스 베셀 프레토리우스는 고인이 된 총사령관을 기리기 위해 포체프스트룸과 루스텐버그 지역에서 새로운 행정 구역과 도시를 만들고, 그 도시를 프리토리아라고 명명했다. 이는 그의 역사적 중요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유산으로 남아있다.
6.2. 비판 및 논란
프레토리우스의 활동은 남아프리카에서 백인 정착민의 영토 확장을 주도하는 과정의 일부였다. 마콩고 전투 이후 프레토리우스가 보어인 영토가 크게 확장되었다고 선언한 것은 원주민들의 토지 소유권을 침해하고 그들을 이주시킨 결과였다. 이는 보어인의 토지 요구가 원주민의 토지 분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시사한다. 또한, 그가 베추아날란드를 통한 내륙 도로를 폐쇄하고 세첼레에 대항하여 코만도 병력을 파견하려 시도한 것은 원주민의 자치와 이동의 자유를 제한하려는 시도로 해석될 수 있다. 블러드 리버 전투의 기념일인 "맹세의 날"이 아파르트헤이트 종식 후 "화해의 날"로 개칭된 것은, 과거 보어인 중심의 배타적인 역사 해석에 대한 사회적 비판과 화합을 추구하는 남아프리카의 변화된 인식을 반영한다.
7. 영향
안드리에스 프레토리우스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7.1. 후대에 미친 영향
그의 지도력과 군사적 승리는 남아프리카 초기 백인 정착 역사와 보어인 공화국들의 형성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트란스발 공화국의 설립에 기여했으며, 이 공화국은 훗날 현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핵심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의 유산은 남아프리카의 복잡한 식민주의, 토지 수탈, 그리고 인종 관계의 역사와 밀접하게 얽혀 있으며, 이는 궁극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기반을 다지는 데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8. 관련 항목
- 블러드 리버 전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