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배경
터너의 어린 시절은 음악적 재능의 형성뿐만 아니라, 그가 겪었던 개인적인 트라우마와도 깊이 연관되어 있다.
1.1. 출생 및 유년 시절

아이즈이어 러스터 터너 주니어는 1931년 11월 5일 미시시피주 클락스데일에서 재봉사인 베아트리스 커션베리와 침례교 목사인 아이즈이어 러스터 터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크리올인이었다. 터너는 두 자녀 중 막내였으며, 누나인 리 에델 나이트는 그보다 약 10살 연상이었다. 1960년대에 첫 여권을 신청했을 때, 터너는 자신의 이름이 아이크 위스터 터너로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당시 그의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이름의 유래를 확인할 수 없었다.
블루스 역사가 테드 드로즈도프스키는 터너의 아버지가 산업재해로 사망했다고 주장했지만, 터너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가 백인 남성에게 폭행당해 죽은 채로 방치되는 것을 목격했다고 한다. 터너가 전한 또 다른 이야기에 따르면, "카키색 바지와 카키색 셔츠를 입은 백인 몇 명이 픽업트럭에 가득 실려" 그의 아버지를 끌고 갔고, "배에 구멍이 날 정도로 발로 차서"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나중에 이 폭행이 아버지의 외도에 대한 보복 행위였다는 말을 들었으며, 아버지는 터너가 약 5살 때 부상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보건국이 집 마당에 세운 천막에서 2~3년간 병자로 살았다고 주장했다. 도널드 브래킷은 저서 《티나 터너의 믿을 수 없는 삶》에서 터너가 이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지만, 대부분의 아이크 이야기처럼 한 움큼의 소금과 함께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고 언급했다.
그의 어머니는 필립 리스라는 예술가와 재혼했는데, 터너는 그를 폭력적인 알코올 중독자라고 묘사했다. 어느 날 리스가 자신을 채찍질하자, 터너는 목재로 그를 때려눕히고 며칠 동안 테네시주 멤피스로 도망쳤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이들의 험난한 관계에도 불구하고, 터너는 1959년 어머니가 사망한 후 의붓아버지를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자신의 집 중 한 곳으로 모셔왔고, 1961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돌보았다.
터너는 6살 때 미스 부지라는 여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학교에 가는 길에 그녀의 집 앞을 지나갈 때마다 그녀는 그를 닭 모이를 주는 것을 돕도록 초대했고, 그 후 그를 침대로 데려갔다. 이러한 일은 한동안 매일 계속되었다. 터너는 또한 12살이 되기 전 미스 리디라는 또 다른 중년 여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이러한 경험을 회고하며 그는 "아마도 제가 겪었던 모든 관계가 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던 이유일 겁니다. 성은 저에게 힘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1.2. 교육 및 초기 영향
터너는 부커 T. 워싱턴 초등학교에 다녔고, 6학년 때 미르틀 홀로 진급했다. 그는 8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클락스데일 시내의 알카자르 호텔에서 엘리베이터 운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쉬는 시간에는 호텔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 WROX에서 DJ 존 프리스킬로가 레코드를 트는 것을 지켜보았다. WROX는 미시시피에서 최초로 흑인 DJ인 얼리 라이트를 고용한 라디오 방송국으로 유명하다. 어느 날, 프리스킬로는 터너가 지켜보는 것을 발견하고 그에게 일을 시키며 조정실의 모든 것을 가르쳐주었다. 곧 프리스킬로가 커피를 마시러 갈 동안 터너가 레코드를 틀도록 맡겨졌다. 이는 터너가 방송국 매니저로부터 늦은 오후 시간대 DJ로 일할 것을 제안받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쇼 "자이브 틸 파이브"에서는 로이 밀턴과 루이스 조던 같은 다양한 음악과 초기 로커빌리 레코드를 틀었다.
터너는 친구 어니스트 레인의 집에서 블루스 피아니스트 파인톱 퍼킨스가 연주하는 것을 듣고 피아노를 배우기로 결심했다. 터너는 어머니를 설득하여 피아노 레슨비를 받았지만, 정식 연주 스타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대신 그는 그 돈을 당구장에서 쓰고 퍼킨스에게서 부기우기를 배웠다. 1940년대 어느 시점에 터너는 클락스데일의 리버사이드 호텔로 이사했다. 리버사이드 호텔은 소니 보이 윌리엄슨 2세와 듀크 엘링턴을 포함한 순회 음악가들의 숙소였다. 터너는 이들 음악가들과 교류했으며, 13세에는 소니 보이 윌리엄슨 2세의 피아노 반주를 맡기도 했다.
2. 음악 경력
터너의 음악 경력은 킹스 오브 리듬의 결성부터 아이크 & 티나 터너 레뷔의 성공, 그리고 후기 솔로 활동에 이르기까지 혁신과 도전을 거듭하며 로큰롤과 R&B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2.1. 킹스 오브 리듬 결성
10대 시절, 터너는 클락스데일 주변에서 연주하는 로컬 리듬 앙상블인 토프해터스에 합류했다. 밴드 멤버들은 클락스데일 출신 음악가들로, 터너의 학교 친구인 레이먼드 힐, 유진 폭스, 클레이턴 러브가 포함되었다. 토프해터스는 악보에 있는 빅 밴드 편곡을 연주했다. 귀로 훈련받아 초견을 할 수 없었던 터너는 집에서 녹음된 버전을 들으며 곡을 익혔고, 리허설 중에는 악보를 읽는 척했다. 토프해터스는 30명 이상의 멤버를 가지고 있었지만, 6개월에서 1년 후 두 그룹으로 나뉘었다. 한쪽은 재즈를 연주하기를 원하여 듀크스 오브 스윙이 되었다. 터너가 이끄는 다른 밴드는 킹스 오브 리듬이 되었다. 터너는 "우리는 블루스, 부기우기, 로이 브라운, 지미 리긴스, 로이 밀턴을 연주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터너는 경력 내내 이 이름을 유지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라인업이 바뀌었다. 그들의 초기 무대 공연은 주로 인기 있는 주크박스 히트곡들의 커버로 구성되었다. B.B. 킹은 그들이 주말마다 고정 공연을 얻도록 도왔고, 멤피스 레코딩 서비스의 샘 필립스에게 그들을 추천했다. 1950년대에 터너의 그룹은 클락스데일의 WROX와 아칸소주 헬레나의 KFFA 라디오 방송국에서 라이브 세션을 통해 정기적으로 방송되었다.
킹스 오브 리듬 활동을 시작할 무렵, 터너와 레인은 WROX에서 자주 라이브를 연주했던 블루스 음악가 로버트 나이트호크의 비공식 로드 매니저가 되었다. 두 사람은 라디오 세션에서 드럼과 피아노를 연주했다. 터너는 클락스데일 주변 공연에서 나이트호크를 지원하며 공연 경험을 쌓았다. 그는 엘모어 제임스, 머디 워터스, 리틀 월터와 같은 다른 지역 블루스 아티스트들과 함께 주크 조인트에서 연주했다. 공연은 보통 이른 저녁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약 12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터너는 "휴식 시간이 없었다. 드러머가 오줌을 누러 가야 하면, 그가 돌아올 때까지 내가 드럼을 쳤다... 휴식이 없었다. 우리는 그냥 번갈아 가며 연주했다"고 회상했다.
2.2. "로켓 88"과 초기 녹음

1951년 3월, 터너와 그의 밴드는 멤피스 레코딩 서비스에서 "Rocket 88"이라는 곡을 녹음했다. 터너의 보컬리스트 조니 오닐이 킹 레코드와 솔로 계약을 맺고 떠났기 때문에, 킹스 오브 리듬의 색소폰 연주자인 재키 브렌스턴이 리드 보컬을 맡았고 터너는 피아노를 연주했다. "Rocket 88"은 특히 윌리 키자트의 디스토션 기타 사운드로 유명하다.
필립스는 이 녹음을 시카고의 체스 레코드에 라이선스했다. 체스는 "아이크 터너와 그의 킹스 오브 리듬 피처링 재키 브렌스턴" 대신 "재키 브렌스턴과 그의 델타 캣츠"라는 이름으로 이 곡을 발매했다. 터너는 이러한 오명을 필립스 탓으로 돌렸다. 발매 직후, 이 싱글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터너는 멤피스의 W.C. 핸디 극장에서 밴드와 함께 공연했다.
이 싱글은 1951년 6월 빌보드 R&B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5주 동안 차트 정상에 머물렀다. 이 음반은 약 50만 장이 팔렸다. 터너와 밴드는 음반당 각각 20 USD를 받았고, 브렌스턴은 필립스에게 권리를 910 USD에 팔았다. 필립스는 이 음반의 성공으로 얻은 수익을 활용하여 1952년 2월 선 레코드를 설립했다.
이 곡은 종종 최초의 로큰롤 음반으로 인용되지만, 터너는 나중에 인터뷰에서 "저는 'Rocket 88'이 로큰롤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Rocket 88'은 R&B라고 생각하지만, 'Rocket 88'이 로큰롤이 존재하게 된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평가했다.
"Rocket 88"의 성공은 밴드 내에 긴장과 자존심 충돌을 야기했으며, 결국 브렌스턴이 솔로 경력을 추구하기 위해 떠나면서 밴드는 해체되었다. 자신의 히트 음반이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하지 못해 실망한 터너는 몇 년 동안 킹스 오브 리듬을 해체했다.
2.3. 세션 연주자 및 스카우트 활동
"Rocket 88" 발매 직후, 터너는 아칸소주 웨스트멤피스로 이주하여 여러 지역 밴드와 연주했다. 그 후 그는 선 스튜디오의 샘 필립스를 위한 프리랜서 스카우트, 세션 음악가 및 프로덕션 보조로 일하며 테네시주 멤피스로 통근했다. 그의 미시시피 델타 음악 인맥을 활용하기 위해 비하리 형제의 모던 레코드도 터너를 스카우트로 고용하여 녹음할 만한 가치가 있는 남부 음악가들을 찾아달라고 돈을 지불했다. 터너는 B.B. 킹과 비엘 스트리터스가 멤피스 YMCA에서 모던 레코드를 위해 녹음하도록 주선했다. 터너는 킹의 초기 음반인 "You Know I Love You"와 "3 O'Clock Blues"에서 피아노를 연주했으며, 이 곡들은 킹의 첫 두 곡의 1위 히트곡이 되었다. 조 비하리에 따르면, 터너는 몇 년 전 킹을 자신에게 소개했다고 한다。 그는 "아이크는 그때 16살도 안 되었어요. 그가 녹음한 것들의 더빙본을 우리에게 보내면, 우리가 마음에 들면 아티스트와 계약을 맺었죠. 그렇게 해서 B.B. 킹을 영입했습니다"라고 말했다. 킹 또한 터너가 자신을 비하리 형제에게 소개했다고 주장했다.
작곡가 로열티를 알지 못했던 터너는 새로운 곡들을 썼고, 비하리 형제는 자신들의 이름으로 저작권을 등록했다. 그들은 종종 가명을 사용하여 자신들의 레이블에 소속된 아티스트들이 쓴 곡들의 공동 작곡가 크레딧을 구매하거나 주장했다. 터너는 비하리 형제를 위해 78개의 히트곡을 썼다고 추정했다. 터너가 모던 레코드와 선 레코드에서 발굴한 아티스트로는 바비 블랜드, 하울린' 울프, 로스코 고든, 보이드 길모어, 휴스턴 보인스, 찰리 부커, 리틀 밀턴 등이 있다. 그는 이들과 함께, 그리고 더 프리즈네어스, 드리프틴' 슬림, 벤 버튼, 맷 콕크렐, 데니스 바인더, 써니 블레어, 베이비 페이스 터너와 같은 덜 알려진 아티스트들과 함께 세션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터너는 비하리 형제와 계약했지만, 그는 필립스를 위해 계속 일했으며, 사실상 필립스의 전속 프로듀서였다. 이로 인해 때때로 이해 상충이 발생했다. 1951년, 터너는 필립스를 위해 하울린' 울프의 두 곡 "How Many More Years"와 "Moanin' at Midnight"을 녹음했으며, 필립스는 이 곡들을 체스 레코드에 보냈다. 터너와 하울린' 울프는 필립스나 체스 형제들의 지식 없이 웨스트멤피스의 라디오 방송국 KWAM에서 "Moanin' at Midnight"의 버전을 녹음했다. 그는 그 결과물을 모던 레코드의 비하리 형제에게 보냈고, 그들은 그것을 자회사 레이블인 RPM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터너는 또한 트럼펫 레코드에서 엘모어 제임스를 빼내 모던 레코드에서 녹음하려고 시도했다. 트럼펫 레코드가 이를 알게 되면서 모던 레코드는 음반 발매를 취소해야 했다. 그러나 제임스는 결국 모던 레코드와 계약했고, 터너는 모던 레코드의 자회사 레이블인 플레어 레코드에서 발매된 그의 녹음에 참여했다.
헬레나에 있는 동안, 터너는 1952년 1월 리틀 월터를 모던 레코드에 영입하려고 했지만, 리틀 월터는 미시시피로 가는 중이었다. 1952년, 터너는 웨스트멤피스에서 주니어 파커를 발굴했고, 맷 "기타" 머피와 함께 밴드를 결성했다. 터너는 리틀 주니어 파커와 블루 플레임스 명의로 발매된 파커의 첫 싱글 "You're My Angel" / "Bad Women, Bad Whiskey"를 녹음했다. 그해 여름 터너는 밴드의 새로운 보컬리스트이자 피아니스트인 매리언 루이스 리와 함께 녹음하여 "My Heart Belongs to You" / "Looking for My Baby"를 만들었다. 이 음반들은 RPM에서 보니 앤 아이크 터너 명의로 발매되었고, 그들은 멤피스의 히포드롬에서 함께 공연했다. 터너는 1952년 9월 리와 결혼했다.
터너는 웨스트멤피스에 있는 동안 엘비스 프레슬리를 만났다는 사실을 몰랐는데, 당시 프레슬리는 트럭 운전사였다. 그는 "프레슬리는 그냥 흑인 클럽에 오곤 했던 백인 소년이었어요. 그는 들어와서 피아노 뒤에 서서 제가 연주하는 것을 지켜보곤 했죠. 그가 음악가인 줄은 전혀 몰랐습니다"라고 회상했다. 터너는 몇 년 후 그들이 모두 웨스트게이트 라스베이거스에서 공연할 때 프레슬리가 그에게 다가와서야 그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당시 그의 아내였던 보니도 피아노를 연주했기 때문에, 터너는 독학으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고, 윌리 키자트가 그에게 블루스 기타 기술을 가르쳤다. 그는 1953년에 세션에서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1954년에는 조 비하리의 도움으로 클락스데일에 있는 폐쇄된 그레이하운드 라인 버스 정류장에 임시 녹음 스튜디오를 지었다. 터너는 자신의 킹스 오브 리듬을 세션 음악가로 활용했다. 그들은 비하리의 모던, RPM, 플레어 레이블의 많은 녹음에 참여했다. 이 시기 터너가 피아노와 기타로 반주한 아티스트로는 엘모어 제임스, 조니 에이스, 더 플레어스 등이 있다. 이 무렵 터너는 미시시피주 그린빌에서 빌리 "더 키드" 에머슨을 발굴했다. 그는 에머슨을 선 레코드에서 녹음하도록 데려왔고 1954년에 기타로 반주했다.
2.4. 아이크 & 티나 터너 레뷔
아이크 터너는 티나 터너와의 만남을 통해 음악적 성공의 정점을 찍었으나, 그 관계는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개인사를 동반했다.
2.4.1. 결성 및 성공

1956년, 앤 불록(후에 티나 터너로 개명)은 언니 알린 불록과 함께 이스트세인트루이스의 클럽 맨해튼에서 터너와 킹스 오브 리듬의 공연을 보러 갔다. 알린은 그 클럽의 바텐더였고 터너의 드러머 유진 워싱턴과 데이트하고 있었다. 언니와 워싱턴을 통해 앤 불록은 터너에게 자신의 밴드와 노래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터너는 그녀를 무대로 부르겠다고 했지만,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인터미션 동안, 그녀는 워싱턴에게서 마이크를 받아 B.B. 킹의 "You Know I Love You"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에 감명받은 터너는 그녀를 밴드와 함께 노래하도록 초대했다. 그녀는 1958년 튠 타운 레코드에서 발매된 터너의 곡 "Boxtop"으로 녹음 데뷔를 했다.
1960년 3월, 터너는 자신이 작곡한 "A Fool in Love"의 데모를 그녀가 녹음하도록 허락했다. 그는 이 데모를 아트 래시터를 위한 가이드 트랙으로 사용할 생각이었는데, 래시터는 예정된 테크니소닉 스튜디오 녹음 세션에 참석하지 않았다. 지역 DJ가 이 음반을 뉴욕의 수 레코드에 보내라고 제안했고, 레이블 소유주 저기 머레이는 불록의 보컬이 담긴 트랙을 발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머레이는 이 곡에 대해 2.00 만 USD의 선급금을 제안했고, 터너에게 "그녀를 쇼의 스타로 만들라"고 제안했다. 터너는 그 후 그녀의 이름을 "티나"로 바꾸었는데, 이는 쉬나와 운율이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정글의 여왕 쉬나와 정글 소녀 뇨카에서 영감을 받아 그녀의 무대 페르소나를 만들었다. 그는 "티나 터너"라는 이름을 상표 등록하여 그녀가 떠날 경우 다른 가수가 같은 이름으로 공연할 수 있도록 했다.
싱글 "A Fool In Love"는 1960년 7월에 발매되어 전국적인 히트곡이 되었고, 백만 장이 팔렸다. 이 곡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2위, 빌보드 핫 100에서 27위를 기록했다. 터너는 디 이케츠라는 백 보컬 걸 그룹을 추가했고, 킹스 오브 리듬과 함께 아이크 & 티나 터너 레뷔로 공연하기 시작했다. 이 싱글의 성공에 이어 "I Idolize You", "Poor Fool", "It's Gonna Work Out Fine" 등 일련의 히트곡들이 이어졌고, 이 곡은 그들의 두 번째 백만 장 판매를 기록하고 첫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게 했다.
2.4.2. 주요 히트곡 및 활동
1961년, 터너는 앨버트 킹의 첫 히트 음반인 "Don't Throw Your Love on Me So Strong"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킹 레코드에서 발매된 이 싱글은 빌보드 R&B 차트에서 14위를 기록했다. 그는 또한 이케츠의 히트곡 "I'm Blue (The Gong-Gong Song)"를 작곡하고 프로듀싱했다.
레뷔는 치틀린 서킷에서 엄격하게 공연하며 "모든 R&B 앙상블 중 가장 뜨겁고, 가장 내구성이 강하며, 잠재적으로 가장 폭발적인 그룹 중 하나"라는 명성을 쌓았다. 투어 중에도 항상 음반을 발매할 수 있도록 터너는 스푸트니크, 티나 레코드, 프랜 레코드, 이니스 레코드, 소니 레코드, 소냐 레코드와 같은 여러 레이블을 설립했다. 그는 이케츠, 지미 토마스, 폰텔라 배스, 조지 잭슨, 그리고 다른 아티스트들의 싱글을 자신의 레이블에서 프로듀싱했다. 듀오는 1963년에 터너의 소냐 레이블로 옮겼다. 다음 6년 동안 그들은 워너 레코드/로마 레코드, 모던/켄트 레코드, 첸코, 필레스 레코드, 탠저린 레코드, 폼페이 레코드, 블루 섬 레코드, 미닛 레코드, A&M 레코드에서 녹음했다。 1964년과 1965년 사이에 그들은 "You Can't Miss Nothing That You Never Had", "Tell Her I'm Not Home", "Good Bye, So Long", "Two Is a Couple"로 14개의 톱 40 R&B 히트곡을 기록했다. 이 무렵 지미 헨드릭스가 잠시 밴드에서 백킹 기타를 연주했다.
2.4.3. 국제적 활동
1965년, 필 스펙터는 선셋 스트립의 한 클럽에서 그들의 공연을 보고 그들을 영화 《더 빅 T.N.T. 쇼》에 출연하도록 초대했다. 그들의 공연에 감명받은 스펙터는 로마 레코드의 책임자인 그들의 매니저 밥 크라스노와 협상하여 티나를 프로듀싱하고 로마 레코드와의 계약에서 해지하는 대가로 2.00 만 USD를 제안했다. 티나와 스펙터가 "River Deep - Mountain High"를 녹음한 후, 듀오는 1966년에 스펙터의 필레스 레이블과 계약했다. 이 싱글의 미국 내 실패는 스펙터가 음악 산업에서 물러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 곡은 유럽에서 히트하여 영국 싱글 차트에서 3위, 스페인의 로스 40 프린시팔레스에서 1위를 기록했다.
이 곡이 영국에서 성공한 후, 믹 재거는 그들을 롤링 스톤스의 1966년 롤링 스톤스 영국 투어의 오프닝 공연자로 초대했다. 이러한 노출은 그들을 R&B 외부의 더 넓은 관객에게 소개했다. 곧 그들은 더 큰 공연장을 예약하게 되었고, 1969년에는 라스베이거스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1969년 4월, 터너와 킹스 오브 리듬은 폼페이 레코드에서 앨범 《A Black Man's Soul》을 발매했다. 이 앨범은 터너에게 제12회 그래미상에서 그래미상 최우수 R&B 기악 연주 부문 첫 솔로 그래미상 후보 지명을 안겨주었다. 그해 말, 듀오는 블루스 지향적인 앨범 《Outta Season》과 《The Hunter》를 블루 섬 레코드에서 발매했다. 터너와 블루 섬의 설립자 밥 크라스노는 얼 후커의 1969년 앨범 《Sweet Black Angel》을 공동 프로듀싱했다. 11월, 아이크 & 티나 터너 레뷔는 1969년 롤링 스톤스 미국 투어의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1970년 1월, 그들은 《에드 설리번 쇼》에 출연했고, "Come Together"의 커버 버전을 발매하여 R&B 차트에서 21위를 기록했다.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I Want to Take You Higher" 커버 또한 1970년 차트에서 성공을 거두었다. 슬라이 스톤의 친구였던 터너는 슬라이 앤 더 패밀리 스톤의 앨범 《There's a Riot Goin' On》(1971)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1971년 "Proud Mary"의 발매는 아이크 & 티나 터너의 가장 큰 히트곡이 되었고, 빌보드 핫 100에서 4위, R&B 차트에서 5위를 기록했다. 이 곡은 백만 장 이상 팔렸으며, 제14회 그래미상에서 듀오에게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 (그룹) 그래미상을 안겨주었다.
2.5. 솔로 활동 및 후기 경력
주류에서의 성공은 터너에게 1972년 캘리포니아주 잉글우드에 자신의 녹음 스튜디오인 볼릭 사운드를 열 수 있는 재정적 여유를 제공했다. 터너는 두 개의 16트랙 스튜디오를 지었는데, 하나는 대여용으로, 다른 하나는 개인 녹음용으로 사용했다. 그는 이 스튜디오들을 최첨단 장비로 갖추었다. 이곳에서 녹음한 아티스트로는 폴 매카트니, 조지 해리슨, 듀안 올맨, 리틀 리처드, 게일 맥코믹, 프랭크 자파 등이 있다.
터너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를 통해 두 장의 솔로 앨범 《Blues Roots》(1972)와 《Bad Dreams》(1973)를 발매했다. 1973년, 듀오는 티나가 작곡한 "Nutbush City Limits"를 발매했다. 이 싱글은 빌보드 핫 100에서 22위, R&B 차트에서 11위를 기록했으며 유럽에서는 더 큰 히트를 쳤다. 터너 부부는 유럽에서 "Nutbush City Limits"가 백만 장 이상 팔리면서 최초의 골든 유러피언 레코드 상을 수상했다.
이 기간 동안 터너는 가수 주디 칙스의 데뷔 앨범 《Judy Cheeks》(1973)와 이케츠의 마지막 앨범 《(G)Old & New》(1974)를 프로듀싱했다. 1974년, 아이크와 티나는 앨범 《The Gospel According to Ike & Tina Turner》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그래미상 최우수 소울 가스펠 퍼포먼스 (남성) 부문 후보에 올랐다. 터너는 또한 자신의 싱글 "Father Alone"으로 솔로 후보 지명을 받았다. 1974년과 1975년 사이에 듀오는 싱글 "Sweet Rhode Island Red", "Sexy Ida", "Baby, Get It On"을 발매했다.

아이크 & 티나 터너 레뷔는 1976년에 갑작스럽게 해체되었다. 그해 그들은 월도프 아스토리아 뉴욕에서 헤드라이너로 공연했고, CBS-TV와 텔레비전 계약을 맺었다. 터너는 7월 6일에 서명할 예정이었던 크림 레코드와의 연간 15.00 만 USD 규모의 5년 계약을 위해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를 떠날 계획이었다. 7월 1일, 터너 부부는 댈러스 스태틀러 힐튼에서의 공연장으로 가는 도중 격렬한 다툼을 벌였다. 터너는 나중에 티나가 새로운 계약을 서명하기 전에 자신과 헤어질 이유를 만들기 위해 고의적으로 자신을 자극했다고 주장했다. 티나는 호텔에 도착한 직후 도망쳤고, 1976년 7월 27일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그녀는 나중에 터너가 자주 폭력적이고 학대적이었으며, 때로는 신발 늘리개나 옷걸이와 같은 나무 물건으로 그녀를 때렸다고 묘사했다. 그녀가 떠났던 밤, 그의 구타로 그녀의 얼굴은 멍들고 부어오르고 피를 흘렸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터너 부부의 결별에 대응하여 그들의 마지막 세션 녹음들을 모은 앨범 《Delilah's Power》(1977)와 《Airwaves》(1978)를 발매했다. 이혼이 확정된 지 2년 후, 터너는 앨범 《The Edge》(1980)에서 싱글 "Party Vibes" / "Shame, Shame, Shame"을 발매했으며, 이 곡은 빌보드 댄스 클럽 송 차트에서 27위를 기록했다.
2.6. 협업 및 스튜디오 운영
티나와의 결별 후, 가수 홀리 더 맥스웰은 1977년부터 1985년까지, 그리고 1992년에 8개월 동안 터너와 함께 노래했다. 그녀는 터너와의 긍정적인 작업 관계를 보고했으며, 나중에 그들의 친밀한 우정에 대한 회고록 《Freebase Ain't Free》를 발매했다. 1979년, 터너는 차카 칸이 매니저 겸 남편과 헤어진 후 스튜디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Jet》에 "그는 진정한 영감이자 정서적으로나 다른 면에서도 촉매제였습니다. 우리는 함께 녹음할 계획입니다"라고 말했다. 터너는 코카인 중독과 법적 문제로 인해 성공을 거두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1988년, 터너는 마시 토마스, 보니 존슨, 지넷 바젤 터너를 이케츠로 하여 무대에 복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터너가 마약 관련 유죄 판결로 수감되어 있는 동안, 아이크 & 티나 터너는 199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티나는 그해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에 참석하지 않았고, 필 스펙터가 그들을 대신하여 시상식에서 연설했다. 석방 후, 터너는 언론에 라이브 공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긴장되지만 스튜디오로 돌아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발표된 아이크 & 티나 터너 마스터 20곡을 독립 레이블 에스콰이어 레코드에 팔았다. 1992년, 터너는 세인트루이스의 미시시피 나이츠에서 열린 올리버 세인의 소울 리유니언 콘서트에 특별 게스트로 출연했다.
힙합 그룹 솔트 앤 페파는 이케츠가 1961년에 발매한 터너의 작곡 "I'm Blue (The Gong Gong Song)"를 1993년 싱글 "Shoop"에 샘플링했다. 이 곡은 빌보드 핫 100에서 4위를 기록했으며, 터너는 약 50.00 만 USD의 로열티를 벌었다. 그는 1995년에 가수 빌리 로저스와 듀엣으로 "I'm Blue"를 재녹음했다. 로저스가 프로듀싱한 이 리메이크는 호평을 받았다. 터너는 나중에 릭 제임스와 함께 사운드트랙 앨범 《Chef Aid: 더 사우스 파크 앨범》의 "Love Gravy"에 참여했다.
터너는 1990년대 중반 이케츠를 재결성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그의 아내였던 지넷 바젤 터너, 니나 힐, 미셸 러브(랜디 러브)가 포함되었다. 1970년대 이케츠였던 베라 해밀턴이 리드 싱어였다. 그들은 아이크 터너 레뷔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으며 공연했다. 1997년 8월, 터너는 고향 클락스데일로 돌아와 제10회 선플라워 리버 블루스 & 가스펠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로 공연했다. 터너는 조 루이스 워커가 자신에게 블루스 음악의 뿌리로 돌아가도록 격려했다고 밝혔다. 터너는 워커의 1997년 앨범 《Great Guitars》에서 기타를 연주하고 프로덕션을 도왔으며, 워커는 그에게 6곡에 대해 밤당 5000 USD를 지불했다. 워커는 터너를 샌프란시스코 블루스 페스티벌에서 함께 공연하고 유럽 투어를 하자고 초대했다. 투어에 대한 긍정적인 반응은 터너가 킹스 오브 리듬을 재결성하도록 격려했다. 그들은 2001년 미국을 순회했으며,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에서 쇼케이스 헤드라이너로 공연하여 컨퍼런스의 하이라이트 중 하나로 칭송받았다. 터너의 투어 활동은 그래미상 후보에 오른 앨범 《Here & Now》(2001)의 녹음 및 발매로 이어졌다. 2002년, 몽트뢰 재즈 페스티벌에서의 터너의 공연은 라이브 앨범과 DVD로 발매되었다.
2002년, 터너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PBS 다큐멘터리 시리즈 《더 블루스》를 촬영했으며, 이 시리즈는 2003년 9월에 방영되었다. 그는 이 시리즈의 일부인 다큐멘터리 《The Road to Memphis》와 《Godfathers and Sons》에 출연했다. 터너는 고릴라즈의 앨범 《Demon Days》(2005)에 참여하여 "Every Planet We Reach Is Dead"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그는 2005년 11월 맨체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고릴라즈와 함께 이 곡을 공연했다. 그의 공연은 라이브 콘서트 DVD 《Demon Days: Live at the Manchester Opera House》에 수록되어 있다.
2006년, 터너는 독립 레이블 조호 뮤직을 통해 그의 마지막 앨범 《Risin' With the Blues》를 발매했다. 이 앨범은 긍정적인 비평을 받았으며, 제7회 인디펜던트 뮤직 어워드에서 최우수 블루스 앨범 후보에 올랐다. 터너는 2007년 제49회 그래미상에서 그의 첫 솔로 그래미상 최우수 전통 블루스 앨범을 수상했다.
터너는 2007년 초 고릴라즈의 프로듀서 데인저 마우스와 더 블랙 키스와의 협업 앨범 작업을 시작했다. 더 블랙 키스는 터너에게 데모를 보냈지만, 프로젝트는 일시적으로 보류되었다. 터너가 사망한 후, 이 곡들은 2008년 앨범 《Attack & Release》에 사용되었다. 터너는 이 앨범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피치포크》는 프로덕션에서 그의 영향을 언급했다.
3. 음악 스타일 및 예술성
아이크 터너는 기타와 피아노 연주에서 혁신적인 기술을 선보였으며, 그의 음악적 기여는 로큰롤과 R&B 장르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3.1. 기타 및 피아노 연주

경력 초기에 터너는 1950년대 R&B, 즉 포스트 점프 블루스 스타일로 작업했다. 그의 초기 영향은 아모스 밀번과 루이스 조던뿐만 아니라 행크 윌리엄스 시니어와 멀 트래비스와 같은 컨트리 음악가들도 포함된다. 주로 기타리스트로 알려져 있지만, 터너는 피아노 연주로 경력을 시작했으며 개인적으로 피아노를 자신의 주요 악기로 여겼다. 1951년, 언론인 마이크 맥기는 그를 재즈 피아니스트 팻츠 월러에 비유하며 "아이크 터너는 오랫동안 가장 뜨거운 피아노 연주자"라고 썼다.
터너는 블루스 피아니스트 파인톱 퍼킨스에게 배운 부기우기 피아노를 연주하며 자랐다. 그는 12살 때 학교에서 즉흥 피아노 독주를 강요받았을 때 자신이 프론트맨이 될 운명이 아니라고 결정했다. 그는 그 경험이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이후로는 주목받는 것보다 뒤에서 쇼를 통제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는 자신을 연주자보다는 조직가로 여겼다. 음악가 도널드 페이건은 "그가 재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크의 음악가로서의 기술에는 정말 초자연적인 것이 없었다... 아이크가 뛰어났던 것은 리더십이었다: 개념화, 조직화, 그리고 실행"이라고 언급했다.
터너의 기타 스타일은 트레몰로 암을 많이 사용하여 강렬한 리버브가 스며든 비브라토, 벤딩, 해머 온, 그리고 블루스 프레이징에서 셋잇단음표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터너는 펜더 스트라토캐스터 일렉트릭 기타의 초기 사용자였으며, 1954년 출시된 해에 멤피스의 O.K. 하우크 피아노 상점에서 구입했다. 기타의 트레몰로 암이 미묘한 효과를 내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터너는 이를 사용하여 지미 헨드릭스와 제프 벡과 같은 아티스트들보다 10년 앞서 비명을 지르고 급강하하는 솔로를 연주했다. 《더 스트라토캐스터 크로니클즈》에서 톰 휠러는 터너의 "창의적인 스타일은 아티스트가 스트라토캐스터를 발견하고 그 기능에 적응하여 놀라운 것을 만들어낸 고전적인 예"라고 썼다. 터너 자신은 자신의 트레몰로 기술에 대해 "기타를 비명 지르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이 제가 그 장치를 사용할 때 너무 흥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데이브 루빈은 《프리미어 기타》 잡지에서 "수년간의 피아노 연주와 편곡은 그에게 화성에 대해 상당한 양을 가르쳐주었으며, 그는 분명히 I-IV-V 코드 진행을 다룰 수 있었다. 아이크는 자신이 기타로 하는 것을 '묘기'라고 겸손하게 표현하지만, 착각하지 마라, 그는 자신이 원하는 소리를 정확히 아는 사람의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악기를 공격했다"고 썼다.
터너의 1973년 앨범 《Bad Dreams》를 평론하며 로버트 크리스트가우는 "20년 동안 그림자 속에서 돈을 벌어들인 후, 그는 마침내 자신의 기본적으로 코믹한 베이스 바리톤을 로큰롤에 적용하는 방법을 알아냈다. 스튜디오-사이키델릭 뉴올리언스 리듬 앤 블루스, 더 밴드와 닥터 존의 메아리, 멍청한 것들과 섞인 몇몇 훌륭한 마이너 R&B. 세상에, 지금 그는 티나보다 더 흥미롭다"고 썼다.
3.2. 혁신과 영향력
"리틀 리처드도 아니고, 척도 아니고, 팻츠 도미노도 아니야. 우리는 나중에 나왔어. 이 사람은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었어.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에서 나온 거야: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를 빠른 템포로 연주한 것뿐이야. 아이크 터너가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의 혁신가였어. 우리는 그냥 와서 그걸 집으로 가져왔을 뿐이야." - 리틀 리처드 (1999)
터너는 동시대 음악가들로부터 그의 영향력에 대해 칭찬받았다. 조니 오티스는 "아이크 터너는 미국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R&B의 질감과 풍미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는 펜더 베이스를 그 음악에 어떻게 넣을지 정의했다. 그는 위대한 혁신가였다"고 말했다. B.B. 킹은 터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를 "내가 본 최고의 밴드 리더"라고 묘사했다. 킹은 또한 "사람들이 로큰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아이크를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말했다. 터너는 리틀 리처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리틀 리처드는 터너의 자서전 서문을 썼다. 리틀 리처드는 터너의 "Rocket 88" 피아노 인트로를 듣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Good Golly, Miss Molly"에서 그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프린스 또한 터너가 자신의 첫 번째 음악적 영향이었다고 말했다.
《모조》 잡지의 편집장인 필 알렉산더는 터너를 "현대 로큰롤의 초석"이라고 언급하며, 그의 블루스 스탠더드 편곡이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영국 로커들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아이크가 없었다면 롤링 스톤스와 레드 제플린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참고했던 원천 자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Rocket 88"이 최초의 로큰롤 음반 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방송인 폴 감바치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적으로 [그는] 매우 중요했다. 'Rocket 88'은 최초의 로큰롤 음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두 곡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1949년 팻츠 도미노의 "The Fat Man"이다. 그러나 'Rocket 88'은 'The Fat Man'에는 없었던 몇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울부짖는 색소폰과 왜곡된 일렉트럴 기타. 이 곡은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서 5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아이크 터너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비평가들에게 그는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질 것이지만, 불행히도 일반 대중에게는 항상 잔인한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다."
터너의 자서전 공동 저자인 나이젤 콘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흑인 로큰롤 가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상 백인 관객에게만 연주했다. 아이크와 티나는 혼합된 관객에게 연주했으며, 그는 남부 주에서 의도적으로 관객을 인종차별 없이 통합했고, 인종차별적인 관객에게는 전혀 연주하지 않았다. 그가 큰 밴드와 수행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체인들은 그가 남부 주를 순회하며 벌어들일 돈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호텔들이 인종차별을 없앴다."
터너의 곡들은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샘플링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솔트 앤 페파가 1994년 히트곡 "Shoop"에 "I'm Blu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쥬라식 5는 1997년 "Concrete Schoolyard" 트랙에 《A Black Man's Soul》의 "Getting Nasty"를 사용했다. 메인 소스 또한 1991년 앨범 《Breaking Atoms》의 "Snake Eyes"에 "Getting Nasty"를, 그리고 "Just Hanging Out"에 아이크 & 티나 터너의 "Bold Soul Sister"를 샘플링했다. 《A Black Man's Soul》의 "Funky Mule" 또한 정글 DJ들에게 광범위하게 샘플링되었으며, 드럼 인트로는 매우 인기 있는 브레이크 비트이다. 이 곡은 골디가 1994년 히트곡 "Inner City Life"에, 같은 해 크롬 & 타임이 "The License"에, 그리고 2002년 패러독스가 "Funky Mule" 트랙에 샘플링했다.
2009년, 내슈빌 기반 밴드 미스터 그루브 밴드는 《Rocket 88: Tribute to Ike Turner》라는 헌정 앨범을 녹음했다. 이 앨범의 보컬리스트로는 터너의 마지막 아내인 오드리 매디슨 터너와 전 이케츠 멤버인 보니 브램릿이 참여했다.
4. 개인사
아이크 터너의 개인사는 그의 음악적 성공만큼이나 복잡하고 논란이 많았으며, 다수의 결혼과 관계, 그리고 약물 중독과 법적 문제로 얼룩져 있었다.
4.1. 결혼 및 관계
터너는 14번 결혼했다. 그는 기존 아내와 이혼하기 전에 다른 여성과 중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초기 결혼에 대해 그는 "목사에게 2달러를 주고, (결혼) 서류는 3달러였어요. 그게 다였죠. 그 시절에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은 이혼에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
4.1.1. 초기 결혼
터너는 16세 때 미시시피주 룰빌 출신의 에드나 딘 스튜어트와 처음 결혼했다. 그들은 1948년 4월 10일에 결혼했다. 기록에 따르면 터너는 자신의 나이에 4년을 더했다고 한다. 에드나는 클락스데이에 머물고 싶어 하지 않았기 때문에 터너를 떠나 룰빌로 돌아갔다.
터너의 두 번째 아내 벨마 데이비스(결혼 전 성은 디시먼)는 전 이케츠 멤버 조 암스테드의 언니이다. 터너는 1948년 미시시피주 야주 시티의 캠플린 애비뉴에 있는 코튼 클럽에서 그녀를 만났다. 데이비스는 1949년에 태어난 딸 린다 터너 불록의 아버지가 터너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터너는 자신의 책에서 자신이 생물학적 아버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 부부는 1950년 9월 19일에 결혼했다. 데이비스와 불록은 2010년 터너의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 표지판 제막식에 참석했다.
터너는 그 후 아칸소주 웨스트멤피스에서 로사 리 세인과 결혼했다. 그녀는 정신 질환을 앓아 테네시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터너는 그녀를 퇴원시키려 했지만, 다시는 그녀를 보지 못했다.
터너는 1952년 9월 24일 클락스데일에서 매리언 루이스 리(보니 터너)와 결혼했다. 리는 킹스 오브 리듬의 피아니스트이자 보컬리스트였다. 1952년, 그녀는 메리 수라는 가명으로 모던 레코드에서 싱글 "Everybody's Talking" / "Love Is a Gamble"을 발매했다. 그녀는 터너와 함께 두 곡을 공동 작곡했다. 이 부부는 또한 RPM 레코드와 선 레코드에서 녹음했다. 터너는 "보니는 피아노를 쳤다. 이 여자애를 앞서가는 것은 힘든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항상 나를 능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라고 회상했다. 그들이 공연을 위해 플로리다주 새러소타에 있는 동안, 그녀는 1953년에 다른 남자와 함께 뉴욕으로 도망쳤다. 그들의 이혼은 1955년에 확정되었다.
리 이후, 터너는 아칸소주 헬레나에서 앨리스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터너에 따르면, 그들은 결혼을 완성하지 않았다. 앨리스는 그의 보컬리스트 조니 오닐과 데이트하고 있었지만, 터너는 그녀를 좋아해서 오닐과 "충돌"을 피하기 위해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내가 그녀와 결혼하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앨리스 이후, 터너는 미시시피주 그린빌 출신의 애니 매 윌슨과 결혼했다. 그녀는 피아노를 연주했고 그의 밴드의 비서였다. 윌슨은 일리노이주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경찰관을 만나 터너를 떠났다. 1958년, 터너는 이스트세인트루이스 경찰 위원회에 경찰관 커티스 스미스가 윌슨과의 관계 때문에 악의적으로 자신을 괴롭히고 고막을 터뜨렸다고 주장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에서 터너는 로레인 테일러와 함께 살았다. 그녀의 부모는 세인트루이스에 테일러 소시지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다. 자료들은 종종 테일러를 터너의 아내 중 한 명으로 잘못 언급하지만, 그녀는 그의 동거 여자친구였다. 로레인은 터너와 두 아들 아이크 주니어와 마이클을 낳기 전에 이미 두 자녀를 가지고 있었다.
4.1.2. 티나 터너
"나는 여전히 티나를 예전만큼 사랑한다... 5년 전에 편지를 썼지만 보내지 않았다... 이 편지에서 나는 그녀와 아이들에게 그런 일을 겪게 한 것에 대해 미안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어리석었다. 그녀의 감정에 대해 무심했다. 오늘날 나는 이해한다. 그녀는 학대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곧바로 정상에 올랐다." - 아이크 터너 (2007)
1956년, 터너는 이스트세인트루이스의 클럽 맨해튼에서 앤 불록(후에 티나 터너로 개명)을 만났다. 그들은 친한 친구가 되었고, 그녀는 그의 색소폰 연주자 레이먼드 힐과 데이트하기 시작했다. 불록이 힐의 아이를 임신했을 때, 그들은 터너와 그의 동거 여자친구 로레인 테일러와 함께 살았다. 힐은 발목을 다쳐 1958년 8월 아들 크레이그가 태어나기 전에 불록을 떠났다. 불록의 임신 중, 테일러는 불록이 터너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의심하여 총으로 그녀를 위협한 후 자신을 쏘았다. 그녀의 부상은 치명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터너와 불록은 결국 불륜 관계를 시작했고, 그녀는 1960년 1월에 임신했다.
1960년 10월 아들 로니가 태어난 후, 그들은 1962년 티후아나에서 결혼했다. 터너는 그들이 티후아나에 간 이유가 "섹스 쇼와 창녀들"을 보기 위함이었다고 말했다. 당시 그는 여전히 앨리스 벨과 법적으로 결혼한 상태였다. 그는 탐정 사무소를 고용하여 시카고에서 벨을 찾아냈고, 그들은 1974년에 이혼했다. 터너는 여러 차례 자신이 티나와 공식적으로 결혼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993년 《하워드 스턴 쇼》와 1996년 《프레시 에어》에서 티나의 본명이 앤나 매가 아닌 마사 넬 불록이라고 밝혔다. 티나는 여러 계약서에 자신의 법적 이름으로 마사 넬 터너라고 서명했다.
1976년 7월의 폭력적인 다툼 이후, 티나는 화해할 수 없는 차이를 이유로 이혼 소송을 제기했다. 터너는 그들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적이 없다고 반복했지만, 그들은 사실혼 관계였고 여전히 정식 이혼 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들의 이혼은 1978년 3월 29일에 확정되었다. 최종 이혼 판결에서 티나는 놓친 콘서트 날짜와 미국 국세청의 압류에 대한 책임을 졌다. 티나는 자신이 작곡한 노래의 작곡가 로열티를 유지했지만, 터너는 자신의 곡과 그녀의 곡에 대한 출판 로열티를 받았다. 그녀는 또한 자신의 두 대의 재규어 자동차, 모피, 보석과 함께 자신의 무대 이름을 유지했다. 티나는 볼릭 사운드 녹음 스튜디오, 출판사, 부동산에 대한 자신의 지분을 포기했다.
1986년 자서전 《아이, 티나》에서 티나는 결혼 생활 동안 터너가 학대적이었다고 밝혔다. 그녀는 "나를 가장 불행하게 만든 것은 아이크와의 관계였다. 처음에는 정말 그를 사랑했다. 그가 나에게 해준 일을 보라. 하지만 그는 완전히 예측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터너는 자신이 티나를 당연하게 여겼고 그녀를 "내가 아는 최고의 여자"라고 불렀다고 인정했다. 그의 자서전에서 그는 "물론, 나는 티나를 때렸다. 우리는 싸웠고, 생각 없이 그녀를 바닥에 때려눕힌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때린 적은 없다"고 말했다. 1999년 인터뷰에서 로잔 바는 그에게 《더 로잔 바 쇼》에서 티나에게 공개적으로 사과할 것을 촉구했다. 2007년, 터너는 《Jet》에 티나에게 사과 편지를 썼지만, 결코 보내지 않았다고 말했다. 2018년, 티나는 《더 선데이 타임스》에 "나이 든 사람으로서 그를 용서했지만, 그와 함께 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나와 함께 한 번 더 투어를 요청했지만, 나는 '아니, 절대 안 돼'라고 말했다. 아이크는 용서하고 다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말했다. 필 스펙터는 터너의 장례식에서 티나의 책을 비판하며 영화를 "쓰레기 조각"이라고 불렀다.
4.1.3. 후기 결혼
터너는 1981년 4월 11일 라스베이거스에서 마가렛 앤 토마스와 결혼했다. 그들은 1990년에 이혼했다. 그들은 1960년대 중반 캘리포니아주 베이커스필드의 한 콘서트에서 만났다. 터너에 따르면, 티나는 앤에게 이케츠로 대신하라고 제안했지만, 그녀는 노래를 할 수 없었고 매력적이었다. 결국, 그녀는 그들의 뷰 파크-윈저 힐스 집에 이사했다. 터너는 "나는 티나를 사랑했지만, 앤 토마스를 사랑했다"고 말했다. 그들의 딸 미아는 1969년 1월에 태어났다. 그들은 이혼 후 몇 년 만에 우정을 다시 쌓았고, 앤은 터너가 사망한 날 그의 집에서 의식을 잃은 그를 발견했다.
터너는 1988년 아들 아이크 터너 주니어를 통해 세인트루이스 출신 가수 지넷 바젤 터너를 소개받았다. 그녀는 그의 리드 보컬리스트가 되었고, 그들은 1995년 7월 4일 라스베이거스의 서커스 서커스 라스베이거스에서 비공개 결혼식을 올렸다. 그들은 2000년에 이혼했지만, 나중에 우정을 다시 쌓았다. 지넷에 따르면, 터너는 그녀를 자신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019년, 그녀는 《팜스프링스 라이프》에 영화 《TINA》가 "아이크의 경력을 암살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것은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고 말했다. 그녀는 덧붙여 "아이크는 그 영화와 티나와의 관계에서 [보여진] 모든 부정적인 것들 때문에 어떤 인정도 받지 못한다... 나도 아이크와 함께 여러 일을 겪었지만, 용서하고 놓아줄 때가 있다. 그가 마땅히 받아야 할 분야에서 인정을 받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잘못된 일이다"라고 말했다.
터너는 1993년 상호 친구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출신 가수 오드리 매디슨 터너를 만났다. 그녀는 이케츠로 시작하여 그의 리드 싱어가 되었다. 그들은 2006년 10월 8일 라스베이거스의 어 스페셜 메모리 웨딩 채플에서 결혼했다. 터너는 두 달 후인 12월 22일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혼이 허가된 후 2007년에 화해했다. 2011년, 오드리는 《더 엑스 팩터》의 참가자로 출연했다. 2016년, 그녀는 자신의 회고록 《Love Had Everything to Do with It》을 발매했는데, 이 책은 그의 양극성 장애와 조현병으로 인한 터너와의 격렬한 관계를 자세히 다루고 있다. 그녀는 《볼티모어 아프로-아메리칸》에 "이 책을 쓰기로 결심한 것은 일종의 정화였고, 모든 트라우마를 해소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는 일반 대중이 아이크의 정신적, 감정적 상태에 대해 더 나은 시각과 관점을 갖기를 원했습니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나라는 정신 건강 문제를 가진 사람들을 그들의 상태보다는 행동으로 정의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했다.
4.2. 자녀
터너에게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그는 로레인 테일러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 아이크 터너 주니어(1958년생)와 마이클 터너(1960년생)를 두었다. 티나 터너와의 사이에서는 아들 로널드 "로니" 터너(1960년생 ~ 2022년)를 두었다. 티나의 아들 크레이그 터너(1958년생 ~ 2018년)는 레이먼드 힐과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터너가 입양하여 그의 성을 따랐다. 크레이그는 명백한 자살로 사망했다.
터너는 앤 토마스와의 사이에서 딸 미아 터너(1969년생)를 두었고, 나중에 팻 리처드와의 사이에서 또 다른 딸 트와나 멜비 터너(1959년생)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터너의 두 번째 아내 벨마 데이비스는 터너가 1949년생 딸 린다 터너 불록의 아버지라고 주장했지만, 터너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그 주장을 부인했다. 그는 "당시에는 예쁜 여자라고 생각했던 델마 디시먼을 만났다. 델마는 임신 중이었지만, 내 아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좋아했다"고 썼다.
1988년, 터너는 트와나 멜비라는 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1991년 그녀의 보호 아래 가석방되었다. 그녀의 어머니 팻 리처드는 세인트루이스의 섬너 고등학교에서 티나와 함께 다녔다.
아이크 터너 주니어는 1987년에 앨범 《Hard Labor》를 발매했다. 그는 터너의 2006년 앨범 《Risin' with the Blues》에 참여한 공로로 그래미상을 수상했다. 그는 전 이케츠 멤버 랜디 러브와 함께 스위트 랜디 러브 앤 더 러브 땡 밴드로 투어했다.
로니 터너는 작곡가이자 음악가인 패트릭 모튼과 함께 매뉴팩처드 펑크라는 밴드에서 활동했다. 그는 부모님이 이혼한 후 어머니의 밴드에서 베이스 기타를 연주했으며, 나중에는 아버지의 밴드에서도 연주했다. 그는 2007년 프랑스 가수 아피다 터너와 결혼했다. 아버지의 죽음 후, 그는 《Jet》 잡지에 "저는 아버지를 정말 많이 사랑했습니다... 아버지가 잘못한 것에 대해 5분이나 10분 정도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가 이룬 업적에 대해서는 밤새도록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는 어머니와 함께 성공했고, 어머니와 헤어진 후에도 성공했습니다. 그는 죽기 전에 그래미상을 수상했습니다. 그것은 평생의 업적입니다"라고 말했다. 로니는 2022년 대장암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4.3. 약물 중독 및 법적 문제
30세가 되기 전까지 터너는 마약이나 술을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밴드 멤버 중 어떤 물질이라도 사용하는 사람을 해고하곤 했다. 터너는 라스베이거스의 인터내셔널 호텔에서 함께 일했던 "두 명의 매우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처음 코카인을 접했다. 프로듀서 디앤젤라 프록터는 터너의 《Unsung》 다큐멘터리에서 그 두 유명인이 엘비스 프레슬리와 레드 폭스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코카인을 집으로 가져와 어느 날 밤 피아노에서 곡을 쓰는 동안 시도했다. 터너는 코카인이 수면 욕구를 줄여주어 더 많은 음악을 쓸 수 있게 해주는 점이 좋았다고 말했다. 1970년대 초반까지 그는 코카인에 심하게 중독되어 대량으로 구매하고 친구들과 공유했다. 터너는 나중에 코카인에 1100.00 만 USD를 썼다고 추정했다. 그의 중독은 코중격에 구멍을 냈고, 그는 더 많은 코카인을 사용하여 통증을 완화했다. 그는 결국 프리베이싱 크랙 코카인을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터너의 재정은 혼란스러웠고, 그는 캘리포니아주에 1.28 만 USD의 미납 세금을 빚지고 있었다. 그는 나중에 계정을 정산했다. 그는 압류를 피하기 위해 자신의 스튜디오 볼릭 사운드를 팔려고 했지만, 잠재적 구매자가 방문하기로 예정된 날인 1981년 1월에 스튜디오가 불에 탔다.
1980년대 동안 터너는 마약 및 총기 관련 범죄로 여러 차례 체포되었고, 두 차례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80년, SWAT 팀이 그의 볼릭 사운드 스튜디오를 급습하여 살아있는 수류탄과 7그램의 코카인을 발견했다. 터너는 코카인 소지 혐의로 첫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교도소에서 30일 형을 선고받았고 3년의 보호관찰을 받았다.
- 1981년 4월, 터너는 49세의 신문 배달원을 총으로 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그 남자가 자신의 아내 앤 토마스를 폭행하고 자신의 개를 발로 찼다고 비난했다. 터너는 단지 그를 겁주기 위해 총을 쐈을 뿐이며, 그 남자가 도망치기 위해 울타리를 넘다가 스스로 다쳤다고 말했다. 배심원단은 1982년 터너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 1985년 6월, 터너는 1.60 만 USD 상당의 코카인 판매 공모, 소지 및 통제 물질 판매 또는 사용을 위한 거주지 유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경찰은 그의 노스 할리우드 아파트에서 1000 USD 상당의 록 코카인을 압수했다. 음반 프로듀서 에디 콜먼 주니어와 음악 회사 작가 리처드 리 그리핀도 체포되어 기소되었다. 터너는 5000 USD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1986년, 터너는 코카인 소지, 은닉 휴대 권총 소지 및 교통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
- 1987년 1월, 터너는 위장 경찰관에게 10온스의 코카인을 팔려 한 혐의로 체포되었고, 무죄를 주장했다.
- 1989년 5월, 터너는 웨스트 할리우드에서 마약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는 1990년 1월 코카인 중독 및 코카인 음주 운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다음 달 그는 4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샌루이스오비스포의 캘리포니아 남자 교도소에서 18개월 형을 마친 후 1991년 9월에 가석방되었다. 캘리포니아 남자 교도소의 부소장 래리 카미엔은 터너가 모범 수감자였다고 말했다. 교도소에서 그는 도서관에서 일하는 수탁자가 되었고, 다른 수감자들에게 담배, 사탕, 커피를 팔아 1.30 만 USD를 모았다.
터너는 교도소에서 코카인 의존증을 끊는 데 성공했고 10년 이상 깨끗한 상태를 유지했다. 그는 흑인 역사의 달 동안 고등학교를 방문하여 약물 남용에 반대하는 연설을 했다. 2004년에는 크랙하우스에서 크랙 중독에 빠진 지인을 돕다가 재발했다.
4.4. 건강 문제
2005년, 터너는 폐기종 진단을 받았으며, 산소 탱크를 사용해야 했다고 밝혔다. 그의 딸 미아 터너는 "그는 폐기종 때문에 너무 약해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에 몇 분 들어가 몇 소절 연주하고는 누워야 한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건강이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릴라즈의 앨범 《Demon Days》에 참여했으며 2005년 11월 맨체스터 오페라 하우스에서 그들과 함께 트랙을 공연했다.
2007년 그가 사망한 후, 터너의 부검 및 독성학 보고서에 따르면 사망 당시 그는 세로켈을 복용하고 있었다. 이 약은 일반적으로 양극성 장애, 알츠하이머병, 조현병 치료에 사용된다. 그의 전처 오드리 매디슨 터너는 터너가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었으며 자신이 그의 병을 돕고 있었다고 주장했고, 이는 터너의 개인 비서이자 간병인인 팔리나 라술에 의해 뒷받침되었다. 라술은 터너와 그의 양극성 장애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그 영향력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라술은 "방에 들어가면 그가 전구처럼 변하는 것을 보았고, 켜지고 꺼졌다. 나는 그에게 그것에 대해 물었다. 그는 그것에 대해 노래를 만들었고 우리는 웃기 시작했다"고 말하며, 그래미 수상 앨범 《Risin' with the Blues》의 "Bi Polar"를 언급했다. 터너는 그녀에게 "나는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나는 양극성 장애를 앓아왔지만, 많은 사람들이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터너의 딸 미아 터너는 이 진단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가 과도하게 약물 치료를 받고 있다고 생각했다.
터너는 침례교 신자로 자랐으며, 1994년 유대교로 개종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5. 유산 및 영향력
아이크 터너는 그의 음악적 혁신과 선구적인 역할로 음악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복잡한 삶은 대중문화에서 다양하게 재현되었다.
5.1. 음악계에 미친 영향
"리틀 리처드도 아니고, 척도 아니고, 팻츠 도미노도 아니야. 우리는 나중에 나왔어. 이 사람은 블루스, 리듬 앤 블루스를 연주하고 있었어.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에서 나온 거야: 로큰롤은 리듬 앤 블루스를 빠른 템포로 연주한 것뿐이야. 아이크 터너가 리듬 앤 블루스와 로큰롤의 혁신가였어. 우리는 그냥 와서 그걸 집으로 가져왔을 뿐이야." - 리틀 리처드 (1999)
터너는 동시대 음악가들로부터 그의 영향력에 대해 칭찬받았다. 조니 오티스는 "아이크 터너는 미국 음악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R&B의 질감과 풍미는 그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그는 펜더 베이스를 그 음악에 어떻게 넣을지 정의했다. 그는 위대한 혁신가였다"고 말했다。 B.B. 킹은 터너의 열렬한 팬이었으며, 그를 "내가 본 최고의 밴드 리더"라고 묘사했다. 킹은 또한 "사람들이 로큰롤에 대해 이야기할 때, 나는 아이크를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본다"고 말했다. 터너는 리틀 리처드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리틀 리처드는 터너의 자서전 서문을 썼다. 리틀 리처드는 터너의 "Rocket 88" 피아노 인트로를 듣고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나중에 "Good Golly, Miss Molly"에서 그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프린스 또한 터너가 자신의 첫 번째 음악적 영향이었다고 말했다.
《모조》 잡지의 편집장인 필 알렉산더는 터너를 "현대 로큰롤의 초석"이라고 언급하며, 그의 블루스 스탠더드 편곡이 1960년대 브리티시 인베이전 그룹에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그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영국 로커들에게 계속해서 영향을 미쳤다. 아이크가 없었다면 롤링 스톤스와 레드 제플린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참고했던 원천 자료를 얻지 못했을 것이다."
"Rocket 88"이 최초의 로큰롤 음반 후보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 방송인 폴 감바치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음악적으로 [그는] 매우 중요했다. 'Rocket 88'은 최초의 로큰롤 음반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두 곡 중 하나이며, 다른 하나는 1949년 팻츠 도미노의 "The Fat Man"이다. 그러나 'Rocket 88'은 'The Fat Man'에는 없었던 몇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울부짖는 색소폰과 왜곡된 일렉트럴 기타. 이 곡은 리듬 앤 블루스 차트에서 5주 동안 1위를 차지했으며, 그래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고, 아이크 터너에게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명성을 안겨주었다.... 비평가들에게 그는 위대한 창시자로 알려질 것이지만, 불행히도 일반 대중에게는 항상 잔인한 사람으로 알려질 것이다."
터너의 자서전 공동 저자인 나이젤 콘쏜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미 큰 성공을 거둔 흑인 로큰롤 가수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실상 백인 관객에게만 연주했다. 아이크와 티나는 혼합된 관객에게 연주했으며, 그는 남부 주에서 의도적으로 관객을 인종차별 없이 통합했고, 인종차별적인 관객에게는 전혀 연주하지 않았다. 그가 큰 밴드와 수행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호텔 체인들은 그가 남부 주를 순회하며 벌어들일 돈을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호텔들이 인종차별을 없앴다."
터너의 곡들은 힙합 아티스트들에게 샘플링되었다.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솔트 앤 페파가 1994년 히트곡 "Shoop"에 "I'm Blue"를 사용했다는 점이다. 쥬라식 5는 1997년 "Concrete Schoolyard" 트랙에 《A Black Man's Soul》의 "Getting Nasty"를 사용했다. 메인 소스 또한 1991년 앨범 《Breaking Atoms》의 "Snake Eyes"에 "Getting Nasty"를, 그리고 "Just Hanging Out"에 아이크 & 티나 터너의 "Bold Soul Sister"를 샘플링했다. 《A Black Man's Soul》의 "Funky Mule" 또한 정글 DJ들에게 광범위하게 샘플링되었으며, 드럼 인트로는 매우 인기 있는 브레이크 비트이다. 이 곡은 골디가 1994년 히트곡 "Inner City Life"에, 같은 해 크롬 & 타임이 "The License"에, 그리고 2002년 패러독스가 "Funky Mule" 트랙에 샘플링했다.
2009년, 내슈빌 기반 밴드 미스터 그루브 밴드는 《Rocket 88: Tribute to Ike Turner》라는 헌정 앨범을 녹음했다. 이 앨범의 보컬리스트로는 터너의 마지막 아내인 오드리 매디슨 터너와 전 이케츠 멤버인 보니 브램릿이 참여했다.
5.2. 대중문화에서의 재현
1986년 티나 터너는 자서전 《I, Tina》를 발매했는데, 이 책에서 터너의 변덕스러운 행동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는 1993년 영화 《TINA》의 개봉으로 부정적인 평판을 얻었다. 터너는 영화로 4.50 만 USD를 받았지만, 자신도 모르게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터치스톤 픽처스를 자신의 묘사에 대해 고소할 권리를 포기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그는 로렌스 피시번이 연기했으며, 피시번의 연기는 제66회 아카데미상에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게 했다.
영화 개봉 후, 영화 속 터너의 허구적 인물은 코미디언들에게 포착되어 스케치에서 재사용되었다. 1990년대 스케치 코미디 쇼 《인 리빙 컬러》에서는 데이비드 앨런 그리어가 터너를 패러디했다.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의 위켄드 업데이트에서는 팀 미도스가 페이지보이 가발을 쓰고 그를 연기했다. 《존 보이 앤 빌리》 라디오 쇼에서는 출연진 제프 필러스가 "아이크에게 묻다"라는 코너에서 터너를 정기적으로 흉내 냈다. 이 스케치들은 2008년 코미디 앨범 《Ike at the Mike》에 수록되었다. 2006년 《Vibe》 잡지는 《TINA》의 아이크 터너 캐릭터를 '영화 속 최고의 악당 20인' 목록에서 4위로 선정했다.
영화의 역사적 정확성에 대해 티나는 1997년 래리 킹에게 "더 많은 진실을 담았으면 좋았겠지만, [영화 제작사 소유주인] 디즈니에 따르면, 사람들은 진실을 믿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2018년, 티나는 오프라 윈프리에게 최근에야 영화를 봤지만, "세부 사항을 그렇게 많이 바꿀 줄은 몰랐다"며 끝까지 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필 스펙터는 터너의 장례식에서 추도사를 통해 티나의 책을 비판하고 영화를 "쓰레기 조각"이라고 불렀다.
2015년, TV 원의 《Unsung》은 "아이크 터너 이야기"를 통해 그의 경력과 시련을 기록하며 어느 정도의 명예 회복을 제공했다。 뮤지컬 《티나: 더 티나 터너 뮤지컬》에서는 영국 배우 코브나 홀드브룩-스미스가 터너를 연기했으며, 그는 2019년 로렌스 올리비에상 최우수 뮤지컬 배우를 수상했다.
1999년, 터너는 자서전 《Takin' Back My Name: The Confessions of Ike Turner》를 출판했다. 이 책은 나이젤 콘쏜과 공동 집필했으며 리틀 리처드가 서문을 썼다. 2003년, 존 콜리스는 터너의 삶과 음악적 기여에 대한 책 《Ike Turner: King of Rhythm》을 출판했다.
6. 수상 및 후보 경력
터너는 로큰롤의 선구자로서 그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인정으로 다양한 상을 받았다.
- 2001년: 세인트루이스 명예의 거리 헌액
- 2002년: 미시시피 음악가 명예의 전당 헌액
- 2004년: 멤피스 히어로즈 상
- 2005년: 기타 센터의 록워크 헌액
- 2007년: 모조 어워드 레전드 상
- 2010년: 클락스데일 명예의 거리 헌액
- 2015년: 리듬 앤 블루스 음악 명예의 전당 헌액
- 2015년: 세인트루이스 클래식 록 명예의 전당 헌액 (티나 터너와 함께)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1981 | Ike Turner's Kings Of Rhythm | 재발매 앨범 | 후보 |
2002 | Here and Now | 올해의 컴백 앨범 | 수상 |
2002 | Here and Now | 소울 블루스 앨범 | 후보 |
2002 | 아이크 터너 | 소울 블루스 남성 아티스트 | 후보 |
2002 | 아이크 터너 | 올해의 블루스 엔터테이너 | 후보 |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1991 | "Rocket 88" | 블루스 녹음 클래식 - 싱글 또는 앨범 트랙 | 헌액 |
2005 | 아이크 터너 | 연주자 | 헌액 |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1962 | "It's Gonna Work Out Fine" | 최우수 로큰롤 녹음 | 후보 |
1970 | A Black Man's Soul | 최우수 R&B 기악 연주 | 후보 |
1972 | "Proud Mary" | 최우수 R&B 보컬 퍼포먼스 (그룹) | 수상 |
1975 | "Father Alone" | 최우수 소울 가스펠 퍼포먼스 | 후보 |
1975 | The Gospel According to Ike & Tina | 최우수 소울 가스펠 퍼포먼스 | 후보 |
2002 | Here and Now | 최우수 전통 블루스 앨범 | 후보 |
2007 | Risin' with the Blues | 최우수 전통 블루스 앨범 | 수상 |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1998 | "Rocket 88" (재키 브렌스턴 앤 히즈 델타 캣츠 명의) | 명예의 전당 (싱글) | 헌액 |
1999 | "River Deep - Mountain High" | 명예의 전당 (싱글) | 헌액 |
2003 | "Proud Mary" | 명예의 전당 (싱글) | 헌액 |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2007 | 아이크 터너 - Risin' with the Blues | 블루스 앨범 | 후보 |
연도 | 음반/아티스트 | 부문 | 결과 |
---|---|---|---|
1991 | 아이크 & 티나 터너 | 명예의 전당 - 연주자 | 헌액 |
2018 | "Rocket 88" (재키 브렌스턴 앤 히즈 델타 캣츠 명의) | 명예의 전당 - 싱글 | 헌액 |
2003년, 앨범 《Proud Mary: The Best of Ike & Tina Turner》는 《롤링 스톤》 잡지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앨범 500장' 목록에서 212위(2012년 개정판에서는 214위)를 기록했다.
2004년, 펜더 커스텀 샵은 한정판 아이크 터너 트리뷰트 스트라토캐스터를 제작했다. 이 모델은 소닉 블루 색상의 오리나무 바디에 투명 코팅 아래 금색 잉크로 아이크 터너의 서명이 새겨져 있으며, 1960년대 "C" 형태의 단풍나무 넥과 로즈우드 지판, 21개의 빈티지 프렛을 특징으로 한다. 세 개의 맞춤형 싱글 코일 1960년대 스트라트 픽업이 장착되었다. 100개만 제작되었으며, 소매가는 3399.99 USD였다.
2010년 8월, 터너는 그의 고향 미시시피주 클락스데일에서 사후에 기념되었다. 8월 6일, 클락스데일 관계자들과 음악 팬들은 터너와 그의 음악적 유산을 기리는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 표지판과 클락스데일 명예의 거리 명판을 공개하기 위해 모였다. 이 공개 행사는 클락스데일의 제23회 연례 선플라워 리버 블루스 & 가스펠 페스티벌과 동시에 진행되었으며, 이 축제는 터너에게 헌정되었다.
터너는 자신을 기타리스트보다는 피아니스트로 여겼지만, 《롤링 스톤》 잡지 편집자 데이비드 프릭은 2010년 그의 '위대한 기타리스트 100인' 목록에서 그를 61위로 선정했다.
2015년, 《롤링 스톤》은 아이크 & 티나 터너를 '역사상 가장 위대한 듀오 20팀' 목록에서 2위로 선정했다.
2017년, 미시시피 블루스 트레일은 "Rocket 88"이 영향력 있는 음반임을 기리며 미시시피주 리옹에 표지판을 세웠다. 2018년, "Rocket 88"은 로큰롤 명예의 전당 싱글 부문의 첫 번째 영향력 있는 곡으로 선정되었다.
7. 음반 목록
아이크 터너의 방대한 디스코그래피는 그의 솔로 작업, 킹스 오브 리듬과의 협업, 그리고 아이크 & 티나 터너 듀오 활동을 아우르며, 블루스, R&B, 로큰롤, 펑크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그의 음악적 발자취를 보여준다.
7.1. 스튜디오 앨범
- 1962년: Ike & Tina Turner's Kings of Rhythm Dance, 수 레코드 2003
- 1963년: Rocks The Blues, 크라운 레코드 CLP-5367/CST-367
- 1969년: A Black Man's Soul, 폼페이 레코드 SD-6003
- 1972년: Blues Roots,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레코드 UAS-5576
- 1973년: Bad Dreams,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UA-LA087-F
- 1980년: The Edge (피처링 티나 터너 앤 홈 그로운 펑크), 판타지 레코드 F-9597
- 2001년: Here and Now, 아이콘 IKOCD-8850
- 2006년: Risin' with the Blues, 조호 뮤직 ZM-200611
7.2. 라이브 앨범
- 2002년: The Resurrection: Live Montreux Jazz Festival, 이사벨 IS 640202
- 2006년: Ike Turner & The Kings Of Rhythm: Live In Concert, 찰리 필름스 CHF-F1014LF [DVD/2CD]
7.3. 컴필레이션
- 1976년: Sun: The Roots Of Rock: Volume 3: Delta Rhythm Kings, 찰리 레코드 CR 30103
- 1976년: I'm Tore Up, 레드 라이트닝 RL0016
- 1984년: Hey Hey, 레드 라이트닝 RL-0047 [2LP]
- 1994년: I Like Ike! The Best of Ike Turner, 라이노 레코드 R2-71819
- 2001년: The Sun Sessions, 바레즈 새러밴드 302 066 232 2
- 2004년: His Woman, Her Man: The Ike Turner Diaries- Unreleased Funk/Rock 1970-1973
- 2004년: The Bad Man: Rare & Unreissued Ike Turner Produced Recordings 1962-1965, 나이트 트레인 인터내셔널 NTICD-7139
- 2004년: King Cobra: The Chicago Sessions, 퓨얼 2000 302 061 390 2
- 2006년: The Chronological: Ike Turner 1951-1954, 크로노로지컬 클래식스 블루스 & 리듬 시리즈 5176
- 2008년: Classic Early Sides 1952-1957, JSP 4203 [2CD]
- 2011년: Rocket 88: The Original 1951-1960 R&B and Rock & Roll Sides, 소울 잼 600803
- 2011년: That Kat Sure Could Play! (The Singles 1951 To 1957), 시크릿 레코드 SECBX-025 [4CD]
- 2011년: Jack Rabbit Blues: The Singles of 1958-1960, 시크릿 SECSP-041
- 2012년: Ike Turner Studio Productions: New Orleans and Los Angeles 1963-1965, 에이스 CDCHD-1329
- 2017년: She Made My Blood Run Cold, 서던 루츠 SR-CD-3502
7.4. 사이드맨으로 참여한 녹음
- 하울린' 울프
- 1962년: Wolf Sings the Blues
- 앨버트 킹
- 1962년: The Big Blues
- 얼 후커
- 1969년: Sweet Black Angel
- 고릴라즈
- 2005년: Demon Days
8. 사망
사망하기 몇 주 전, 터너는 은둔 생활을 했다. 2007년 12월 10일, 그는 비서인 팔리나 라술에게 자신이 죽어가고 있으며 크리스마스를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틀 후인 12월 12일, 76세의 나이로 캘리포니아주 샌마르코스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그는 전처 앤 토마스에 의해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라술 또한 집에 있었고 심폐소생술을 실시했다. 터너는 오전 11시 38분에 사망 선고를 받았다.
그의 장례식은 2007년 12월 21일 캘리포니아주 가데나의 시티 오브 리퓨지 교회에서 열렸다. 장례식에서 리틀 리처드, 솔로몬 버크, 필 스펙터 등이 추도사를 했다. 킹스 오브 리듬은 "Rocket 88"과 "Proud Mary"를 연주했다. 터너는 장례식 후 화장되었다.
2008년 1월 16일, 샌디에이고 카운티 검시관 사무실은 터너가 코카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감독 검시관 조사관 폴 파커는 CNN에 "아이크 터너의 사망 원인은 코카인 독성으로, 고혈압성 심혈관 질환과 폐 폐기종과 같은 다른 중요한 질환들이 동반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딸 미아는 검시관의 평가에 놀랐다고 말했으며, 그의 진행된 폐기종이 더 큰 요인이라고 믿었다.
터너는 유효한 유언장 없이 사망했다. 그가 사망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그의 전처 오드리 매디슨 터너는 자신이 수기로 작성된 유언장에서 수혜자로 지명되었다고 주장하는 청원서를 제출했다. 2009년, 판사는 수기 유언장이 무효이며 터너의 자녀들이 법적으로 그의 재산의 직접적인 상속인이라고 판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