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는 로마 제국의 원로원 의원이자 군인이었으며, 브리타니아 총독을 포함한 여러 제국 공직을 역임했다. 그는 119년 3월부터 4월까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동료로서 보좌 집정관을 지냈다. 역사학자 앤서니 벌리는 네포스의 경력이 브리타니아 총독으로서는 두 가지 중요한 측면에서 이례적이었다고 평가한다. 첫째, 그는 비긴티비라테의 가장 선호도가 낮은 직위인 tresviri capitales라틴어에서 경력을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고위직 후보로 황제의 지지를 받은 유일한 사례로 기록되었다. 둘째, 그는 단 한 번의 고위 프라이토르 직위 임명 후 집정관으로 승진한 세 사례 중 하나였다.
2. 생애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의 생애는 그의 출생부터 말년 활동까지 다양한 공직을 거치며 로마 제국에 기여한 인물로서 평가된다.
2.1. 출생 및 배경
네포스가 어디서 태어나고 자랐는지는 불분명하지만, 그가 하드리아누스 황제 즉위 이전부터 황제의 친우였고, 두 사람 모두 같은 부족인 세르기우스 부족(Sergia)에 속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앤서니 벌리는 그가 스페인 남부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았다. 그는 nomen라틴어인 '플라토리우스'가 바이티카 지역에서 확인된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2.2. 초기 경력
1세기 말, 네포스는 마인츠에 주둔하던 프리미게니아 제22군단의 트리부누스 밀리툼으로 복무했다. 당시 게르마니아 수페리오르 총독의 지휘 아래 있었던 그는 총독의 눈에 띄어 트라야누스 황제의 관심을 받게 되었고, 트라야누스는 그의 원로원 직위 후보자 자격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2.3. 제국 내 공직
네포스는 111년에 프라이토르가 된 것으로 추정되며, 이후 112년에서 113년 사이에 에트루리아 지역의 세 개 도로를 관리하는 curator라틴어를 역임했다. 이어서 트라야누스 황제의 파르티아 원정 기간 동안 아디우트릭스 제1군단의 레가투스(군단장)로 복무했다. 하드리아누스가 황위에 오른 후, 네포스는 트라키아의 총독으로 임명되었고, 119년 봄에는 보좌 집정관을 지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게르마니아 인페리오르의 총독이 되었으며, 121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순행 중 그를 맞이했다.
2.4. 브리타니아 총독
122년, 네포스는 브리타니아로 향하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와 동행했으며, 이때 브리타니아 총독으로 임명되어 하드리아누스 방벽의 건설을 감독했다. 그는 방벽 건설 작업을 돕고, 108년경 떠난 것으로 추정되는 히스파나 제9군단을 대체하기 위해 빅트릭스 제6군단을 유럽 대륙에서 브리타니아로 데려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의 브리타니아 총독 재임 기간은 122년 7월 17일과 124년 9월 15일로 날짜가 명확히 기록된 두 개의 군역 증명서(military diploma)를 통해 확인된다.
2.5. 후기 활동
브리타니아 총독직을 마친 후, 네포스는 더 이상의 공직을 추구하지 않았다. 134년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그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들이 발견되어 그가 로마 인근에 벽돌 공장을 소유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네포스는 어느 시점에 아우구르(점성술사) 직위를 가지고 있었다. 히스토리아 아우구스타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그의 오랜 친구를 싫어하게 된 경위를 두 차례 기록하고 있으나, 앤서니 벌리는 이 사료가 신뢰할 수 없다고 평가하며 이에 대한 해명을 시도했다. 벌리는 161년에 티베르강의 curator라틴어였던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 칼푸르니아누스가 그의 아들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3. 평가 및 사료
앤서니 벌리는 아울루스 플라토리우스 네포스의 경력이 로마 제국 고위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례적이었다고 분석했다. 특히, 그가 비긴티비라테의 가장 낮은 직위인 tresviri capitales라틴어에서 시작하여 황제의 직접적인 지지를 받아 고위직으로 승진한 유일한 사례라는 점과, 단 한 번의 프라이토르 직위 임명 후 곧바로 집정관에 오른 드문 경우라는 점을 강조했다.
네포스의 삶과 경력에 대한 정보는 주로 고대 로마의 기록들을 통해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Historia Augusta라틴어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네포스를 싫어하게 되었다는 내용을 두 차례 언급한다. 그러나 앤서니 벌리를 비롯한 현대 역사학자들은 Historia Augusta라틴어를 신뢰하기 어려운 사료로 간주하며, 특히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기록은 비판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벌리는 이 사료의 주장을 해명하려 시도하는 등, 네포스에 대한 역사적 해석에서 사료의 신뢰성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