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아서 매스틱 하이드(Arthur Mastick Hyde, 1877년 7월 12일 ~ 1947년 10월 17일)는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제35대 미주리주지사와 허버트 후버 대통령 재임 시기 미국 농무장관을 지냈다. 그는 미주리주지사로서 주정부 조직 개편, 공교육 증진, 도로망 확충, 주립 공원 조성 및 자연 보존, 공정한 세금 제도 마련, 여성의 주 공직 참여 허용 등 다양한 정책을 추진하여 행정 효율성과 사회 발전에 기여했다. 농무장관 재임 중에는 대공황이라는 어려운 경제 상황 속에서 농업 정책을 운영하며 농업 부문의 안정화를 위해 노력했다. 하이드의 공직 경력은 그의 고향인 미주리주를 넘어 미국 전역의 농업 정책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그의 진보적인 개혁 시도는 민주적 발전과 사회 정의 실현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2. 생애
2.1. 출생과 학업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1877년 7월 12일 미주리주 프린스턴에서 캐럴라인 에미티 매스틱(Caroline Emity Mastick)과 아이라 B. 하이드(Ira B. Hyde)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 중 여러 명이 정치에 관여했는데, 특히 그의 아버지 아이라 B. 하이드는 미주리주를 대표하는 미국 하원 의원을 지냈다. 그의 동생 로런스 M. 하이드(Laurance M. Hyde)는 훗날 미주리주 대법원의 수석 판사가 되었다.
하이드의 초등 교육은 오하이오주의 오벌린 아카데미(Oberlin Academy)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1899년 미시간 대학교를 졸업하며 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시간 대학교 재학 중에는 델타 업실런(Delta Upsilon)이라는 형제회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이후 그는 아이오와 대학교로 진학하여 1900년에 법학 학위를 완료했다. 아이오와 대학교를 졸업한 후, 하이드는 고향인 프린스턴에서 아버지와 함께 변호사 업무를 시작했다.
2.2. 초기 경력 및 지방 정치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한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1911년 뷰익(Buick) 자동차 대리점을 열어 사업가로서의 경험도 쌓았다. 1904년 10월 19일, 그는 호텐스 클라라 큘러스(Hortense Clara Cullers)와 결혼하여 외동딸 캐럴라인 C. 하이드(Caroline C. Hyde)를 두었다.
1908년, 하이드는 프린스턴 시장으로 선출되어 1912년까지 두 차례의 임기를 수행하며 지방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12년에는 진보당 소속으로 미주리주 지방 검사 선거에 출마했으나 아쉽게도 낙선했다. 1915년, 그는 트렌턴으로 이주하여 변호사 업무와 자동차 대리점 운영을 계속했다. 이후 하이드는 공화당에 입당하여 미주리주 전역을 돌며 모금 캠페인 연설을 하는 등 활발한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3. 미주리주지사
1920년,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미주리주지사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는 1921년 1월 10일에 주지사직에 취임하여 1925년 1월 12일까지 한 차례의 임기를 수행했다.

3.1. 주요 정책 및 성과
하이드 주지사는 취임 첫 달부터 주정부의 광범위한 재조직을 권고하며, 여러 부서에 분산된 책임과 권한을 소수의 핵심 부서로 재편성할 것을 제안했다. 비록 민주당의 주요 인사들로부터 도전을 받았지만, 그의 행정부는 여러 분야에서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그의 주요 정책 및 성과는 다음과 같다.
- 공교육 증진**: 공공 교육 시스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발전시켜 미주리주 주민들의 교육 기회를 확대했다.
- 도로망 확충**: 주 내 도로 건설 및 개선 사업을 추진하여 교통 인프라를 강화하고 지역 간 연결성을 높였다.
- 주립 공원 조성 및 자연 보존**: 주립 공원을 정비하고 신규 조성하여 주민들에게 휴식 공간을 제공했으며, 미주리주의 자연 환경 보존에도 힘썼다.
- 공정한 세금 제도 마련**: 세금 제도를 개혁하여 재정 상황을 개선하고 보다 공정하고 효율적인 세금 부과 시스템을 구축했다.
- 법률 집행 강화**: 법률 집행 기관의 역량을 강화하여 주 내 치안 유지와 질서 확립에 기여했다.
- 여성의 주 공직 참여 허용**: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여성들이 주정부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승인하여, 여성의 사회 참여 확대와 민주적 발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겼다.
이러한 정책들은 미주리주의 행정 효율성을 높이고 주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4. 미국 농무장관
주지사 임기를 마친 후, 하이드는 캔자스시티와 트렌턴에서 다시 변호사 업무를 재개했다. 그러던 중 1929년 3월, 허버트 후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그는 미국 농무장관으로 발탁되었다. 하이드는 1929년 3월 6일부터 1933년 3월 4일까지 농무장관직을 수행했다.

그의 농무장관 재임 기간은 미국 경제에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 농산물 가격이 급격히 하락하고, 1929년 월스트리트 주가 대폭락이 발생했으며, 이로 인해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하이드는 농업 부문의 안정화를 위해 다양한 정책을 모색하고 실행하며 농민들의 어려움을 덜기 위해 노력했다.
5. 후기 활동 및 정치 참여
농무장관직에서 퇴임한 후에도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사회 및 정치 활동을 꾸준히 이어갔다. 그는 감리교회와 공화당과 관련된 활동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
1935년, 그는 감리교 평신도 회의(Conference of Methodist Laymen)를 조직하고 연설자로 나섰다. 또한 전국적으로 공화당 후보들을 위한 유세 연설을 하며 당의 선거 운동에 기여했다. 1940년에는 미주리주 공화당 전당대회의 기조 연설자로 나서며 여전히 당내에서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6. 개인 생활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1904년 10월 19일 호텐스 클라라 큘러스(Hortense Clara Cullers)와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외동딸 캐럴라인 C. 하이드(Caroline C. Hyde)가 있었다. 그의 가족 관계는 비교적 공개된 정보가 적지만, 그의 공직 생활과 병행하여 안정적인 가정을 꾸렸던 것으로 보인다.
7. 사망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1947년 10월 17일, 70세의 나이로 뉴욕에서 사망했다. 그의 사망 원인은 암 수술 후 발생한 합병증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미주리주 트렌턴에 위치한 오드 펠로스 묘지(Odd Fellows Cemetery)에 안장되었다.
8. 평가 및 영향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20세기 초 미국의 격동기에 미주리주의 주지사와 연방 농무장관을 역임하며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그의 공직 경력은 특히 행정 개혁, 공공 교육, 환경 보전 분야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미주리주지사로서 그는 주정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조직 개편을 추진하고, 공교육 시스템을 강화하며, 도로망 확충과 주립 공원 조성을 통해 주의 인프라와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했다. 특히 여성의 주 공직 참여를 허용한 것은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성평등과 민주주의 발전에 대한 그의 진보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농무장관으로서 그는 대공황이라는 전례 없는 경제 위기 속에서 농업 부문을 안정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비록 당시의 경제 상황이 매우 어려웠지만, 그는 농산물 가격 하락과 주가 폭락이라는 복합적인 문제에 직면하여 농민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농업 경제를 지탱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의 정책과 활동은 후버 행정부의 농업 정책 방향을 설정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전반적으로 아서 매스틱 하이드는 행정가로서의 뛰어난 능력과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바탕으로 미주리주와 미국 농업 발전에 기여한 인물로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