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초기 생애 및 교육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명망 있는 가문에서 태어나 캘커타와 런던에서 법률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1.1. 출생 및 가족 배경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1921년 1월 31일 벵골 무슬림 자민다르 가문의 일원으로 벵골 관구(현재 방글라데시) 마이멘싱구 탕가일구의 나그바리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압둘 하미드 초두리는 저명한 자민다르이자 훗날 동파키스탄 주의회 의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압둘 하미드 초두리는 영국령 인도 제국으로부터 '칸 바하두르' 칭호를 받았으나, 이후 영국의 잔혹 행위와 제국에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하며 이 칭호를 포기했다. 이러한 가족 배경은 아부 세이드 초두리의 성장과 가치관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1.2. 교육
초두리는 1940년 캘커타의 프레지던시 칼리지를 졸업했다. 1942년에는 캘커타 대학교에서 석사 학위와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그는 런던에서 법률가 과정을 이수하며 법조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졌다.
2. 경력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법률, 교육, 외교, 정치 등 다양한 분야에서 폭넓은 경력을 쌓았다.
2.1. 법률 경력
초두리는 1947년 캘커타 고등법원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다. 인도-파키스탄 분할 독립 이후 다카로 이주하여 1948년 다카 고등법원에서 변호사로 활동했다. 1960년에는 동파키스탄의 법무관으로 임명되었고, 1961년 7월 7일 당시 파키스탄 대통령 아유브 칸에 의해 다카 고등법원의 추가 판사로 승진했으며, 2년 후에는 정식 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60년부터 1961년까지 헌법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고, 1963년부터 1968년까지는 벵골 개발 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2.2. 학술 및 교육 활동
1969년 초두리는 다카 대학교 부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1971년 제네바에 머물던 중 파키스탄군의 동파키스탄 학살에 항의하며 부총장직에서 사임했다.

2.3. 외교 및 독립 운동 참여
다카 대학교 부총장직 사임 후, 초두리는 제네바에서 영국으로 건너가 방글라데시 임시 정부의 특사로 활동했다. 1971년 4월 24일에는 재영 벵골인들에 의해 영국 코번트리에서 임시 정부 산하 조직인 '재영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평의회'가 결성되었고, 그는 이 평의회의 5인 운영 위원회에 선출되었다. 1971년 8월 1일부터 1972년 1월 8일까지는 런던 주재 방글라데시 인민공화국 고등판무관으로 재직하며 방글라데시 독립을 위한 외교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2.4. 방글라데시 대통령
방글라데시 독립 후 초두리는 다카로 돌아와 1972년 1월 12일 방글라데시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3년 4월 10일 다시 대통령으로 재선되었으나, 같은 해 12월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장관급 대외 관계 특사로 임명되었다.
2.5. 대통령직 이후의 활동
1975년 8월 8일, 그는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내각에 항만해운장관으로 합류했다. 라흐만이 암살된 후, 그는 1975년 8월부터 같은 해 11월 7일까지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 대통령 내각에서 외무장관을 역임했다.
초두리는 1978년 유엔의 차별 방지 및 소수자 보호 소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1985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등 국제 인권 분야에서도 활발히 활동했다. 학문적 기여와 사회적 공로를 인정받아 비슈바 바라티 대학교로부터 '데시코탐'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캘커타 대학교에서는 명예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3. 사상 및 인권 활동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법률가로서의 깊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인권 증진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파키스탄군의 학살에 항의하여 다카 대학교 부총장직을 사임하는 등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당시 인권 침해에 대한 명확한 반대 입장을 표명했다.
그의 인권 활동은 특히 유엔 인권위원회에서의 역할에서 두드러진다. 1978년 유엔 차별 방지 및 소수자 보호 소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된 데 이어, 1985년에는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국제 인권 보호 및 증진을 위한 논의와 정책 형성에 기여했다. 이는 그가 단순한 법률가를 넘어 인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옹호하고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4. 사생활
아부 세이드 초두리의 사생활에 대한 공개된 정보는 많지 않다. 그는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으며, 그의 개인적인 삶은 공적인 경력에 가려져 있었다.
5. 사망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1987년 8월 2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6세였다. 그의 유해는 고향인 탕가일구 나그바리 마을에 안장되었다.
6. 평가 및 논란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방글라데시의 독립과 초기 국가 건설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지만, 그의 특정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6.1. 긍정적 평가
초두리는 법률가로서의 뛰어난 역량과 학자로서의 깊은 지식을 바탕으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위한 외교적 노력을 이끌었다. 파키스탄군의 학살에 항의하여 다카 대학교 부총장직을 사임한 행위는 그의 강한 도덕적 신념과 독립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또한, 초대 영국 주재 고등판무관으로서 국제 사회에 방글라데시의 독립 필요성을 알리고 지지를 얻는 데 기여했으며, 유엔 인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국제 인권 증진에 기여한 점은 그의 긍정적인 업적으로 평가된다. 비슈바 바라티 대학교의 '데시코탐' 훈장과 캘커타 대학교의 명예 법학 박사 학위 수여는 그의 학문적, 사회적 공헌에 대한 인정을 보여준다.
6.2. 논란 및 비판
초두리의 경력에서 가장 큰 논란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암살 직후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가 이끄는 새 내각에 외무장관으로 참여한 사실이다. 당시 그는 콘다케르 모스타크 아흐마드 대통령이 "민주주의를 믿으며 국내 민주적 분위기를 회복하려 한다"고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러한 행동은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정권의 전복과 그를 지지했던 민주주의 세력에 대한 배신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이는 방글라데시의 정치적 격변기에 그의 선택이 지닌 복합적인 성격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7. 저서
아부 세이드 초두리는 다음과 같은 저서들을 남겼다.
- Probashe Muktijuddher Dinguli
- Manobadhikar
- Human Rights in the Twentieth Century
- Muslim Family Law in the English Courts